♣복음말씀의 향기♣ No3823
4월10일[부활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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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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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eEJr2urEpw
[서울대교구 이준 바오로(창4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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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하느님의 품에 쉽게 안기려면>
형제들과 함께 몇 군데 밭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문제는 열심히 씨는 뿌리는데 여간해서 싹이 안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삽, 쇠스랑, 곡괭이 등을 동원해서 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열심히 이랑을 만들고 있는데, 지나가시던 ‘전문 농사꾼’들마다 걸음을 멈추고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저희들을 바라보십니다.
인삼밭 주인 아저씨께서는 트랙터로 하면 금방일 텐데, 왜 그렇게 ‘쌩고생들’ 하냐고 야단을 치십니다.
아예 저희 밭 옆에 쭈그리고 앉으신 할아버지 한 분께서는 도대체 어디서 온 젊은이들이냐며 집요하게 물어보십니다.
뭐라고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기도 뭣하고, 이야기해봐야 이해하지도 못하실 것 같아서 뭐라고 설명해드려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사실 저는 교도관이고요, 이 양반들은 외근 나온 재소자들입니다. 이 양반들 고생들 좀 해야 되서 일부러 기계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갑자기 표정이 바뀌신 분들께서 그제야 아무 소리 않으시고 당신들 밭으로 가시더군요. 그러면서 당신들끼리 하시는 말씀.
“얼굴들은 그렇게 안 생겼는데...”
참으로 순박하신 분들이더군요. 제 말을 정말 믿어버리시더군요.
저희들 행색이며, 말투며, 돌아가는 분위기를 봤을 때, 즉시 답이 나올 텐데, 워낙 착하게 사시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제가 워낙 타고난 ‘뻥쟁이’라서 그런지 제 말을 그대로 믿으시더군요.
정말 죄송했습니다. 내일 밭에 갈 때는 막걸리라도 몇 병 사들고 가서 사과를 드려야겠습니다.
오늘 소개되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 이하의 내용은 유명한 구절입니다.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교리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교리, 엄청 복잡해보이지만 사실 위 진술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간단합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멸망하지 않는 방법, 구원을 얻기 위한 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비결은 절대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저 그를(하느님께서 보내신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믿으면 됩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없습니다.
복잡한 것 좋아하고, 거창한 것, 그럴 듯한 것 좋아하던 유다인들에게 있어 ‘너무 쉽다는 것’이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메시아, 구세주 예수님께서 바로 자기들 눈앞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도 간절히 염원했던 구원이 바로 코앞인데, 그리도 애타게 기다려왔던 영원한 생명의 문이 바로 눈앞인데, 그리고 구원되기는 너무도 쉬웠는데, 너무 쉽다는 것 때문에 결국 믿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 또 다른 형태의 불신이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세상이 하도 흉흉하다 보니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호의를 베풀어도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접근합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워낙 자비로우신 분이기에 구원에 이르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우리는 구원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영생의 대열에 이미 참여했습니다. 다만 우리의 구원은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것입니다.
이 은혜로운 사실을 사심 없이 믿어야하는데, 이걸 죽어도 믿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신앙생활이 늘 지지부진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은혜도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자비에 대한 인식도 그저 그렇습니다. 비만 증세가 있는 70Kg짜리 아이를 품에 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품에 쉽게 안기려면 작아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주에 오르려면 역시 가벼워져야 합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제공하시는 영생의 샘물을 마시려면 순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순함이 요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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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예수님 부활의 참 증인이 된 사도들의 삶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도들 스스로가 보기에도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온몸과 마음으로 예수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이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들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 대대적인 삶의 전환점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에게 전에는 그리도 중요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속적인 야망, 힘과 권력, 서열과 위치, 학문과 율법...그 모든 것들이 부차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남게 되었습니다. 남아있는 인생에 주어진 과제는 그분께서 죽으셨다가 영광스럽게 부활하셨고, 우리 가운데 늘 살아 숨쉬고 계심을 세상에 선포하는 일임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 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적대자들의 협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순간에도 찬미의 영가를 부릅니다.
사도들은 더 이상 겁장이가 아닙니다. 스승님을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지 않습니다. 살아도 주님의 것, 죽어도 주님의 것이기에,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기고 당당하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비결은 무엇일까요? 사도들의 내면은 부활하신 주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들 안에 굳건히 현존해계심을 확신하니, 그 어떤 폭력이나 죽음의 위협도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에게도 가장 필요한 노력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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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DQQId__l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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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실해야 구원자다>
1912년 4월 14일, 세계 최대의 해난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1만 6천 톤의 거대한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22노트의 속력으로 북대서양을 항해 중 빙산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 배에는 구명대가 승객수의 반밖에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자는 무려 1,517명이나 되었습니다.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인 죠 하퍼 씨는 시카고의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바다 위에 떠서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를 전하는 비장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물 위에 떠 있으려고 안간힘을 다 쓰면서 그는 같은 형편인 한 젊은이에게로 헤엄쳐 갔습니다.
“젊은이, 구원받았는가?”
“아니요!”
파도가 두 사람을 떼어놓았습니다. 수 분 후에 다시 그들이 조금 가까워졌습니다. 하퍼씨가 좀 큰 소리로 또 물었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였나?”
“아직 못 했습니다.”
이때 큰 파도가 하퍼 씨를 삼켜버렸습니다. 그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구원받았나?” 하는 음성은 파도 소리에 실려 계속 젊은이의 귓전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에, 그 젊은이는 뉴욕의 한 교회에서 신앙 체험담을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죤 하퍼씨가 구원한 마지막 사람입니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순간에도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마지막 에너지를 사용한 존 하퍼 씨는 무엇이 그렇게 절실했던 것일까요? 그에게는 자신과 이웃의 구원이 마지막 숨보다 더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런 절실함이 없다면 구원은 의미를 잃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잠깐이나마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께 무언가라도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오히려 내가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을 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성체조배를 열심히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라죽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점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심장을 쥐어짜는 불안함이 자주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안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성체조배를 한 시간 정도 하고 나면 그 불안함이 잠깐은 사라졌습니다. 불안할 이유가 없는데 불안하니 더 불안해졌습니다. 몇 달, 몇 년을 그런 상태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차리라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제 심장이 예수님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제가 가장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절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두 달 이상을 성체를 영하거나 기도를 하지 못하는데도 이전과 차이가 없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아직은 완전하게 구원자가 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구원자는 생명을 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절벽에서 나뭇가지 하나 잡고 있다면 생명을 잃지 않기 위해 끝까지 그 나무를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절실하지 않다면 그분은 아직 나의 구원자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원죄의 영향으로 태어나 구원에서 제외된 상태였습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란 뜻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일어나는데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밝은 빛으로 그 빛이 절실한 오징어들이 올라와 잡히듯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들만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그분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아직 나에게 구원자가 아닙니다.
‘겨울왕국 2’에서 안나가 동굴에 갇혀서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올라프가 동굴을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를 가리켜도 큰 의욕이 없습니다. 그냥 동굴에 주저앉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 발씩 그 빛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동굴을 빠져나옵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그런 빛이어야 합니다. 내가 한 발짝 걸을 힘만 남아있다면 그 방향이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무엇이 밟히는지도 모르는 캄캄한 굴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한 달을 굶은 사람이 음식을 바라는 것처럼, 사막에서 며칠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이 오아시스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물속에서 숨을 못 쉰 사람이 찾는 공기처럼, 그렇게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면 비로소 그분의 이름을 믿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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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악을 저지르는 자’와 ‘진리를 실천하는 자’: 육체를 살리려는 자와 영혼을 살리려는 자>
오늘 복음에도 역시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이 대화의 핵심은 ‘성령으로 새로 남’입니다. 새로 나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이 구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악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은 빛으로 나아옵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악을 저지르는 자’와 ‘진리를 실천하는 자’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누가 악을 저지르는 자이고, 누가 진리를 실천하는 자일까요? 결국, 진리를 실천하는 자는 빛에 머물게 되고 악을 실천하는 자는 어둠 속에 머물게 됩니다.
고양이 ‘준팔이’는 버려진 고양이 보호소에서 석 달 넘게 먹지도 않고 밖으로 나오지도 않습니다. 억지로 음식을 넣어도 토하고 뱉어냅니다. 몸무게는 발견될 당시의 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주인에게 버려졌다는 마음의 병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살려는 의지가 없어서 자발적 거식증에 걸린 것입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먹는 것보다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이때 준팔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뮤지컬 배우 배다해 씨입니다. “고양이가 밥을 안 먹을 정도면 자기가 죽겠다는 마음을 거의 먹은 상태랑 다름없거든요. 한 명은 널 버렸을지 몰라도 널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다해 씨는 준팔이를 처음 만났을 때 생각보다 더 말라있는 준팔이를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날수록 준팔이는 자신의 몸을 맡기기도 하고 손을 내밀기도 합니다. 몸이 약해서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지만 다해 씨가 와 있을 때는 편안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렇게 지낸 1주일 뒤 준팔이는 스스로 다해 씨를 향해 먼저 다가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먹이는 거부합니다.
목소리를 통해 보지 못할 때도 준팔이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렇게 두 주일이 지나자 준팔이는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삼 개월 만에 처음으로 먹이를 먹게 됩니다. 더 감사한 것은 준팔이가 다른 고양이 친구들과 사람들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처: ‘주인 잃고 단식 중인 고양이, 준팔이’, 유튜브 채널, ‘SBS STORY’]
고양이 보호소에는 버려진 고양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다해 씨의 관심을 끈 것은 준팔이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배다해 씨가 줄 수 있는 것을 찾는 고양이는 준팔이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고양이들은 준팔이의 음식까지 뺏어 먹습니다. 그러나 준팔이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사랑이 아니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긴 것입니다. 사랑을 찾으니 사랑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것이 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영혼도 살려고 하고 육체도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영혼은 사랑을 먹어야만 살고 육체는 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만약 영혼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준팔이처럼 육체를 살리는 데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혹은 육체를 살리려고 하는 자는 하느님 사랑에 관심이 없습니다. 영혼은 하늘에서 온 것이고 육체는 땅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복합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안에는 이미 어떤 긴장이 깃들어 있으며,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 일종의 싸움이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실상 죄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며, 죄의 결과 중의 하나이자, 동시에 죄를 확증하는 것이다. 이 싸움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영적 투쟁의 일부분이다.”(2516)
육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육체의 욕망이 생존 이상으로 높아지면 영혼의 생존에 신경 쓸 에너지까지 빼앗깁니다. 따라서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육의 생존에 치중하는 사람과 영혼의 생존에 치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영혼의 생존을 위해 사랑이 아니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고 그것과 상관없이 육체의 생존에만 치중하는 사람은 어둠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기고 영혼이 바라는 사랑을 찾는 사람이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심판에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행복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영원히 살고 행복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인 행복과 육체적인 생존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사랑이 갑니다. 사람은 40일 밥은 굶어도 사랑은 단 3일 굶어도 죽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이란 영화에서 사형수 윤수는 자신을 사랑해 준 유일한 유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는 게 지옥 같았는데…. 내…. 살고 싶어졌습니다.”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을 보고 올라오는 물고기는 오징어밖에 없습니다. 생존도 중요하지만 빛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빛이 아니면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없어야 합니다. 육체를 살리느라 사랑을 찾는 것을 잊지 맙시다. 심지어 고양이도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우리가 먹을 것, 누릴 것, 세상 것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며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판은 사랑을 바라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사람이 십자가 사랑으로 나아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보다 큰 사랑이 없고 이것보다 큰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악이란 육체의 행복에만 치중하며 영혼은 돌보지 않는 삶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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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사제는 미사 중에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말을 몇 번 합니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미사의 시작을 삼위일체인 하느님과 함께한다고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복음을 봉독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봉독하는 이 시간에 주님께 우리와 함께 계심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전례에서 사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성체와 성혈로 변하는 그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강복을 주기 전에 사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미사를 마치고 파견되는 그 시간에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데 열정이 없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데 두려움이 있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데 세상의 일들에 빠져 있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데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 교회는 두 가지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창조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상반되는 이론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생명과 지구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태초에 시작된 우주와 이 우주의 끝이 어떻게 될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오직 창조론만이 태초에 시작된 우주와 이 우주의 끝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운동의 시작이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과관계의 시작이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우연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이며, 하느님은 가장 완전한 것의 기준이며, 하느님은 모든 목적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 모든 창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가슴 아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전쟁과 폭력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파괴하는 것을 용서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병이 치유되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구원에 이르는 표징일 뿐입니다. 구원은 이제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 준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은 회개의 길입니다. 그 길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 ‘부활’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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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물리학자가 바라보는 미술’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유클리드는 기하학 원론에서 몇 가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점’은 여분이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 여분이 없기에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원자’의 개념입니다.
2,500년 전에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원자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습니다. ‘선’은 점들이 모여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분이 없는 것들이 모여서 선을 이룬다는 것은 일견 모순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정의를 내리는 데 선은 점이 이동하면서 생긴다고 합니다.
점이 이동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동에는 수평이동과 수직이동이 있다고 합니다. 수평이동에는 별 무리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동물은 수평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직이동은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중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수평이동과 수직이동이 균형을 이루고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45도 기울어지면 된다고 합니다. 한자의 사람인(人)은 수평이동과 수직이동이 균형을 이룬 상태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두 서로 기대고, 의지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인생은 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 선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힘을 가진 대사제와 사두가이파에 의해서 부당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사도들은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을 봅니다.
정의롭지 못한 힘은, 부당한 힘은 자신들의 허물과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이 늘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억누르고, 진실을 외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말해 줍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고,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그 힘들은 지금 모두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무력하게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박해와 멸시를 받았던 사도들은 2000년 교회의 역사와 함께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참된 진리를 밝혀주는 ‘빛’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권능과 힘을 가지셨지만 오직 그 힘과 권능을 사랑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사용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힘을 가졌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재물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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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16-21: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줄곧 그분의 마음을 상해 드렸는데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들을 위해 그분은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귀중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이 헐벗고 나그네 되었을 때도 우리는 못 본 체했고, 무엇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 오신다. 첫 번째 오심은 이미 지났고 지금 계속되고 있으며, 두 번째는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이 첫 번째 오심은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오심은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두 번째 오시기 전까지는 심판하시는 대신에 용서를 베푸시며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8절)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심판받을 필요가 없고, 믿지 않는 자들은 불신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판은 이미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판받을 사람들은 하느님께 충실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즉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유혹에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고, 기도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은 이러하다. 그들은 어둠을 떠나 빛으로 달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다. 빛이 자신에게 오는데도 빛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시각장애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자신이 눈이 먼 것을 빛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원이나 멸망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21절)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선행이다. 선은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선은 당연히 드러나며 그것을 기뻐한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나아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빛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선행하고, 단식하고 베풂으로써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올바른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다. 여기서 올바른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감사드리며 기쁘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며, 빛의 자녀로 영광의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즉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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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이 집약되어 있는데, 첫 번째로 강조된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구원’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빛’입니다. 그 구원은 빛이요 생명이신 분을 통하여 그 빛 안에서 걷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빛이신 분을 세상에 보내셨음이 명백해집니다. 빛으로 나아가는 삶은 독서에 나오는 사도들의 일화로도 제시됩니다. ‘어두운 밤’에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들은 천사들의 인도로 어둠에서 나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서 다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어두운 밤과 이른 아침, 감옥과 성전이 각기 대비되면서,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은 극심한 어둠과 억압 속에서도 빛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주변이 온통 어둠에 잠겨 있을 때 작은 빛이 그 공간에 들어오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 빛을 향하고 빛 주변으로 모이게 됩니다. ‘빛’은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어둠 속에 있던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체험이고 저마다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구현되는 개별적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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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6-21)
1) 의인과 악인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다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데, 믿고 회개하면서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의인이 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면서 자기 욕망대로 사는 사람은 악인이 됩니다. 따라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멸망은 각자 스스로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의인이라고 해도 타락하면 구원받지 못할 악인이 될 것이고, 반대로 지금 악인이라고 해도 회개하면 구원받는 의인이 될 것입니다.
“의인이 자기 의로움을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는 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자기의 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그것들 때문에 살 것이다.”(에제 33,18-19) <그러니 지금 잘하고 있다면,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반대로, 지금 죄 속에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2) 21절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여라.” 라는 권고입니다. ‘빛’은 ‘구원의 빛’이신 예수님을 뜻하고, ‘진리’는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뜻합니다. “빛으로 나아간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원하고, 그것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삶은, 심판 때에 그 삶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심판 때에 구원 선고를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3) 20절의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거부하고, 악을 저지르면서 사는 자들은 심판 때에 멸망을 선고받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입니다. 여기서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뜻으로는 “빛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즉 “구원받지 못한다.”입니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는 “자기의 악한 삶을 심판 때에 감추려고 하겠지만 모두 드러날 것이다.”, 즉 “각자 자기가 살았던 그대로 심판받게 될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에서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 3,8) 인간들은 죄를 짓고 나서 그 죄를 감추려고 하지만, 감출 수 있는 죄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피해서 숨으려고 해도, 숨을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4) “빛으로 나아간다.”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여기서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라는 말씀은 원래는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활동 시간이 길지 않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데,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 자신의 지상에서의 인생이 길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회개도, 예수님을 믿는 것도,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모두 지상에서 살아 있을 때에 할 수 있는 일이고, 죽은 다음에 저세상에 가면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라는 말씀은, “죄 속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가 멸망을 향해서 가는지 모른다.” 라는 뜻인데, 실제 모습을 보면, 정말로 모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멸망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만일에 조금이라도 심판을 의식한다면, 그 조금의 의식이 회개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지만, 죄 속에서 살면서 죄의식도 없는 자들은 심판, 처벌, 멸망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것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고,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너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습니다.(창세 3,9)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나를(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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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전례력에 따른 오늘의 말씀들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숙제를 제시합니다.
독서에서 보면 감옥에 갇힌 사도들이 하느님의 천사를 만납니다. 탈옥의 기적 속에서 천사는 사도들에게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온 백성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날이 밝자 사도들은 성전에 들어가 생명의 말씀을 전하지만 다시 붙잡힙니다. 사도들은 또 다른 기적 같은 탈출을 기대하였을지 모르나, 박해의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셨던 예수님처럼 생명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어둠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하나 선을 행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을 진리의 빛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빛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빛 속에서 참되게 살아간다는 것은 믿음으로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선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빛에 더 가까워지고, 우리의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드러내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악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하나뿐인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의 빛을 비추시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선을 행하여 어둠의 조각조차도 빛으로 물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빛 속에서 살면서도 어둠과 싸워야 하기에 그리스도인은 늘 경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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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임과 “먼저 하신 사랑”, 곧 “거저 베풀어진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나라 한반도, 우리의 강과 산과 바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리의 공동체, 이 모두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참으로 신비로운 선물입니다. 그런데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체제의 자기중심의 이기주의를 같은 것들 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 곧 ‘먼저 베풀어지고’, ‘거저 베풀어진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이며, “세상”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곧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를 심판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막상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이처럼,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 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이미’ 심판 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피앗’의 응답이 구원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오늘 하루 하느님 사랑에 ‘피앗’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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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 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양손을 못에 내어주고 가슴을 열어
창을 받아들이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사랑으로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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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가지만,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3,21.20)
예전 텔레비전 프로그램 ‘알쓸신잡 3’에 출연했던 젊은 물리학자 김상욱은 「떨림과 울림」이라는 책에서, 『우주는 98%가 어두움에 있고, 2%만이 빛의 공간에 있다.』라고 하더군요. 지구라는 행성은 바로 2%의 빛의 공간에 존재하고 있으며, 인류는 바로 이 놀라운 행성에 살고 있는 행복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2%의 빛의 공간에 살고 있는 인류 가운데 도대체 몇 % 사람이 어둠 속이 아닌 빛 가운데 살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고 계신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의식하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생활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파견하셨고, 이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주님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지 심판하시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3,16~17참조) 사실 심판하신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외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은 그 사람 본인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어떤 누구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으로 부르시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은 그 사람은 진리보다 거짓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자신이 그리고 자신이 살아 온 삶 자체가 단죄하고 심판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자신이 한 일로 스스로 자책하고 자학하며 단죄하며 심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끊임없이 위장하고 포장하며, 은폐하고, 은익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어둠은 빛으로 그 어둠의 실상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아니면 심판자로 알고 느끼느냐에 따라 우리는 빛으로 혹은 어둠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가지만,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3,21.20)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신 다음,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8,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바로 이어서 나온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8,12)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녀는 어둠에서 빛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이미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용서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이미 세상의 심판이 아닌 하느님의 구원을 받고 거짓된 삶을 떨쳐 버리고 참삶을 향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어둠이 아닌 빛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입니다.”(3,19) 사물을 뚜렷이 보려면 빛이 필요하듯이, 예수님의 빛은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 짓게 합니다. 참과 거짓은 이론적으론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실제적으로는 빛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역설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 바로 저 자신이더군요. 이를 의식하기에 때론 시들어진 꽃처럼 어깨가 처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빛과 어둠은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3,21)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기심이 마음을 어둡게 한 사두가이파와 함께 대사제는 빛이 없는 어두움의 공간인 ‘감옥’에 사도들을 감금하였습니다.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오게 되고, 천사는 “가거라. 성전에서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여라.”(사5,20) 하고 명합니다. 천사의 가르침에 따라 감옥에서 풀려 난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어두운 공간인 감옥에서 나와 빛의 공간인 성전에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모습에서 오늘 복음 말씀을 실제로 입증해 보입니다. 이로써 사두가이파와 대사제는 진리와 빛이 아닌 거짓과 어둠의 자식들이 되어 갔지만, 이에 반해 사도들은 진리를 실천하며 빛의 사람들이 되어 갑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진리를 실천함으로써 빛으로 나아갔으며, 자신들이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3,21)을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 빛으로 진리의 빛을 보고 그 진리를 살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저희는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빛의 자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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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얼마 전, ‘인내’의 한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인내(忍耐), 우선 ‘인(忍)’은 참을 인을 씁니다. 칼 도(刀) 자에 점 하나가 붙어 있는 칼날 인(刃)이 심장을 뜻하는 심(心) 위에 붙어 있습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낸다는 의미입니다. 즉, 심장을 찍히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참아낸다는 말입니다.
이제 인내(忍耐)의 ‘내(耐)’입니다. 이는 견딜 내(耐) 자로, 길게 늘어진 턱수염을 뜻하는 이(而)와 동작을 나타내는 촌(寸)이 합쳐진 글자로, 수염을 뜯기는 벌을 받더라도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언젠가 성당 꼬마 아이가 내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손을 댑니다. 그리고 한가락만 길게 나와 있는 턱수염 하나를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던지 눈물이 다 났습니다. 수염이 뜯기는 고통이 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심장을 찍히는 고통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견뎌 내는 것이 ‘인내’라고 말합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견디어 낸 만큼 달콤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루소의 말이 생각납니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분명히 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라는 열매는 매우 답니다. 그래서 거부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문제는 그 단 열매를 그냥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쓴 십자가를 짊어져야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열쇠는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는 단 열매만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외면하고서는 절대로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너무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 활동하는 것도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하십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조금만 소홀하면 욕만 많이 먹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 보십시오. 피땀을 흘리시며 또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의 십자가도 짊어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아주 단 열매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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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빛의 사람>
요한 3,16-21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빛의 사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1)
누구나
빛의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어둠의 사람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빛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어둠을 빛으로
여기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가도 여전히
어둠의 사람입니다
오롯이
빛을 빛으로
품는 사람이라야
빛으로
나아가서 마침내
빛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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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슴에 품어야 할 말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신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죄와 멸망 안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며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는 하느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유일한 방법, 길을 제시하셨는데 그를 따르지 않으면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은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 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주시어’ 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하느님이나 예수님께서 하기 전에 자신이 합니다.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집니다. 따라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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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은 선물이자 선택이다>
-주님을 선택하라, 주님을 사랑하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 34,6)
오늘 옛 어른 다산 정약용의 어록부터 나누고 싶습니다.
“많은 현자들이 이렇게 통찰했다. ‘가장 오래 간직된 부는 어려운 누군가를 위해 내놓은 기부였다.”
“재산을 숨겨두는 방법으로 남에게 베푸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여유당전서.
어제 열심한 개신교 신자이면서 가톨릭교회로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자주 피정오는 자매가 제 강론을 선물받고 보낸 짧은 답신의 말마디입니다.
“아멘. 메멘토 모리, 코람데오,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카르페 디엠, ‘지금을 살라’는 말은 알겠는데 코람데오는 생전 처음보든 라틴어 말마디였습니다. 검색해보니 개신교에서는 잘 쓰이는 유명한 말마디가 코람데오(Coram Deo), ‘하느님 앞에서’였습니다. 이 좋은 말마디를 몰랐다니 순간 부끄러웠습니다. 늘 하느님 앞에서 품위있고 고결한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여기에 한말마디를 더해야 완벽하겠습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즉 운명애입니다. 엊그제 강론을 쓴후 저절로 나온 고백에 만족했습니다. “주님은 내 운명이자 사랑이듯 강론 역시 내 운명이자 사랑이다.” 그렇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 예수님은 내 운명이자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사랑은 아모르 파티, 운명애요, 꼭 기억해야 할 말마디는 다음 순서의 넷이 되겠습니다.
“코람데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오늘 강론 제목은 “구원은 선물이자 선택이다-주님을 선택하라, 주님을 사랑하라-”입니다. 마침 카톡을 열어보니 어제 어느 신부님께 보낸 메시지에 대한 답신이었습니다.
“절망은 없다, 힘내세요! 사랑하는 신부님!”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오늘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운명이자 사랑인 봄날같은 내 인생입니다. 새벽 집무실에 들어 옛 자작 시집을 펼치는 순간 23년전 “선물”이란 시에 반갑고 기뻤습니다. 언젠가 한 번 인용했지만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꽃처럼 환한 웃음보다 더 좋은 선물 있을까
삶은 선물이다
꽃같은 삶이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순식간 사라져가는 꽃들
바로 선물 인생 아니던가
얼마나 그 많고 좋은 선물들 놓쳐 버리고 살았는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대로 꽃인 인생인 거다
어제의 꽃폈다 지면 오늘의 꽃폈다 지고...
평생을 그렇게 날마다 죽을 때까지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거다
끊임없이 폈다 지면서 떠나는 삶이다
잘 떠날 때 아름답지 않은가
길이길이 향기로 남는다
그리스도의 향기, 존재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2001.4.23.
온갖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 선물로 가득한 축제같은 부활시기 4월입니다. 또 오늘 4월10일은 나라의 명운(命運)이 달린 총선거날입니다. 잘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고 할 수 있는 무혈 혁명은 선거혁명 하나뿐입니다. 분별의 요령은 당이든 사람이든 그의 살아온 과거 역사를 면밀히 잘 들여다 보면 답은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어느 당이, 어느 인물이 진정 나라를, 국민을 사랑하고, 정의롭고 지혜롭게 활약하며, 섬기는 마음으로 민생을 챙겨 왔는지 잘 들여다 본후 선택하는 것입니다. 축제와 같은 선거 결과가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의 눈만 열리면 온통 주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선물중의 선물, 최고의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대로 증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새삼 구원의 믿음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구원도 심판의 멸망도 선택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선택 여부에 따라 자초하는 심판입니다. 심판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였다.”
무지의 악을, 무지의 어둠을 사랑하여 선택하는 무지에 눈먼 사람들이 문제인 겁니다. 그리하여 악을 선택하여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여 선택,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삶은 구원의 선물이자 선택입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어둠이 아닌 빛을, 거짓이 아닌 진리를, 불행이 아닌 행복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전쟁이 아닌 평화를, 미움이 아닌 사랑을, 허무가 아닌 충만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파스카의 예수님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구원의 답은 파스카의 예수님 선택 하나뿐입니다.
삶은 빛과 어둠의, 진리와 거짓의 싸움이요 이것이 영적전쟁의 요체입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을, 거짓이 진리를 이길수는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 내용이 이를 입증합니다. 어둠의 세력을 대변하는 대사제와 모든 동조자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 그리고 빛의 세력을 대변하는 사도들과의 대결이요, 사도들을 인도하는 자는 주님의 천사입니다.
사도들이야말로 빛이신 주님을 사랑하여 선택한 분들이 아닙니까? 세상 그 누구, 그 무엇도 진리이자 빛이신 주님을 이길 수도, 가둘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도들의 승리는 불문가지(不問可知)요, 다음 사도들의 승리를 예견하는, 또 승리의 결과를 알리는 말마디입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사도들을 직접 진두지휘(陣頭指揮)하는 주님의 천사입니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하는 소식이 흡사 사도들의 승전보(勝戰譜)처럼 들립니다. 구원은 선물이자 선택입니다. 주님을 선택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주님을 선택하고 사랑함으로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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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눈 밖에 나지 않고 눈앞에 있는>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요즘 악은 작은 하느님 체험, 작은 기적을 가끔 체험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도 제가 체험하는 작은 하느님 체험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죄를 통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그런데 제가 죄를 진심 통회하고 회개해서 하는 하느님 체험이 아닙니다. 저의 요즘 문제는 통회를 잘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죄를 통해서 작은 하느님 체험을 하니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저의 하느님 체험은 뻔뻔함이기도 하고 영적 건강함이기도 합니다. 전에는 죄를 짓고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을 피해 어둠 속으로 숨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죄를 지을수록 더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더 하느님 앞에 있어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비록 죄를 지었어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말아야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겁니다.
저는 언제나 하느님의 눈앞에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갈수록 간절합니다. 저는 하느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습니다.
늘 하느님 눈앞에 있지 못하더라도 언제나 하느님 눈앞에 있고 싶습니다.
‘늘’이 아니라 ‘언제나’? 물론 늘 하느님 앞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완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니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성할 때나 병들 때나 언제나 죄를 지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언제나, 벌을 받을 때나 복을 때나 언제나 하느님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고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눈앞에 있으려고 하고,
죄지을 때 오히려 더 하느님 눈앞에 있으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합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도 풍성하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하고 이해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은총을 만나야 합니다.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은총을 많이 느끼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언제나 그러니까 죄를 지었어도 하느님 눈 밖에 나지 않고 하느님 눈앞에 있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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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육화와 십자가 사랑!>
오늘 복음(요한 3,16-21)은 어제 복음에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니코데모와의 대화의 결론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것'(육화)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며, '육화는 십자가 사랑과 함께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완성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고 말씀하신 것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며,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믿고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죄 중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 곧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곧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표지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십자가 사랑을 굳게 믿고 하느님의 사랑에로 나아갑시다! 어둠을 이기시는 생명의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그 구체적인 표지로 오늘도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의 사람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봅시다! 그러기 위해서 '복음 말씀'을 늘 가까이 합시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사도 5,20)
"주님, 세상을 떠난 박정규(요셉) 형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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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W2vfIyuz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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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 21)
진리는
살아있다.
진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진리에 속한
진리의
사람들이다.
생생한
진리의
말씀이
우리 삶에
울려퍼진다.
진리는
아는 것보다
시작하는
실천에 있다.
진리는
아름답고
강하다.
눈을 뜨게
하고 닫힌
마음을
열어준다.
아프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울고
웃는 것이
참된 진리이다.
이와같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진리의 참된
본질이다.
하느님의
뜻은
진리의
실천이다.
우리와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일하는
진리의 삶이다.
모두를
살리는
진리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진리의 실천이다.
진리의
빛안에
살고있는
우리들
삶이다.
진리를 먹고
자라나는
우리들
시간이다.
사랑의 실천이
진리이며
참된 빛이다.
사랑으로
나가야 할
부활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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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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