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외 3편) / 장석남
언덕 / 장석남
언덕
파란 눈썹과 같은 언덕
나는 언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무엇이든 그 언덕을 넘어서 왔거든
나는 언덕을 넘어오는 한 사람으로부터 나였으니까
그 한 사람을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지
그리하여 한번도 부르지 못하고
나는 그 언덕의 노래였으면 했지
주인이 없거든 노래는 갇히지 않지
그 언덕과 같지 노을 속에서
멀리 사랑이 보이지 붉게 타는 노을
사랑이 보이는 그 긴 언덕을 나는 사랑하지
나는 그 언덕을 넘어서 가지
누구든 언덕을 넘어서 갔거든
하늘 보며 작아지며 넘어갔거든
나는 보이지 않지 그대로
언덕이거나
적막이거나
나는 언덕을 넘어오는 한 사람으로부터만
나였으니까
내가 사랑한 거짓말 / 장석남
나는 살아왔다 나는 살았다
살고 있고 얼마간 더 살 것이다
거짓말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거짓말
나는 어느 날 사타구니가 뭉개졌고 해골바가지가 깨졌고
어깨가 쪼개졌고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누군가에게 구조되었다
거짓말, 사실적인……
그러나 내가 사랑한 거짓말
나는 그렇게 내가 사랑한 거짓말로
자서전을 꾸민다
나는 하나의 정원
한창 보라색 거짓말이 피어 있고
곧 피어날 붉은 거짓말이 봉오리를 맺고 있다
거짓말을 옮기고 물을 준다
새와 구름이 거짓말을 더듬어 오가고
저녁이 하늘에 수수만년 빛을 모아 노래한다
어느 날 거짓말을 들추고 들어가면
나는 끝이다
거짓말
내가 사랑한 거짓말
거짓이 빛나는 치장을 하고 거리를 누빈다
법의 자서전 / 장석남
나는 법이에요
음흉하죠
하나 늘 미소한 미소를 띠죠
여러개예요 미소도
가면이죠
때로는 담벼락에 붙어 어렵게 살 때도 있었지만
귀나 코에 걸려 있을 때 편하죠
나는 모질고 가혹해요
잔머리 좋은 종들이 있거든요
설쳐댈 때가 많지만 만류하진 않아요
그짓 하려고 어린 시절 고생 좀 한 것들이거든요
나는 만인 앞에 평등해요 헤헤
음흉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죠
원칙이 있지만 아주 가끔만 필요하죠
이득과 기득을 좋아해요 지킬 만한 가치죠
그에 위배되면 원칙을 꼭 알리죠
나는 물처럼 맑고 평등하다고 말하죠
유죄도 무죄도 다 나의 밥이죠
너무 바빠요 너무 불러대니 쉴 틈이 없죠
나는 법이에요
양심 같은 건 우습죠 이득 앞에서
그깟것 금방들 버려요 시류에 어긋난 소리죠
아 이만하기도 참 다행이죠
한때는 참 어려운 시절도 있었죠
너무 많은 살생을 해야 했으니
황혼이 오네요
저게 제일 싫어요
속속들이 황혼이 오네요
저 지축 속에 숨은 당당한 발소리
나는 귀를 막아요
잘 못 듣는 귀지만 다시 막지요
마술 극장 3 / 장석남
—장미 정원
장미 정원에 공연이 한창이다
대본 따위는 없다
장미가 관통해온 길을
저 마술 극장의 대본가들은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왕인 이해득실 전하가 쫓겨난 것은 오래전 일이다
마술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빛깔과 향기가 지나면
적막의 비바람, 눈보라가 주인공이다
그의 발성은 힘차고 음률은 비감하다
모두 수긍의 눈물을 흘리며
공연을 관람한다
꽃에 눈물을 뿌리면
찬란한 이야기가 꽃잎과 함께 떨어진다
정원은 공연 중에도 늘 고요하다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 202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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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 1965년 인천 출생.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젖은 눈』『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뺨에 서쪽을 빛내다』『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내가 사랑한 거짓말』, 산문집 『물의 정거장』『물 긷는 소리』『시의 정거장』『사랑하는 것은 모두 멀리 있다』 등.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출처: 푸른 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