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강론>(2023. 9. 1. 금)(마태 25,1-13)
복음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1-4).”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0-13).”
‘어리석은 처녀들’이라는 말을,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여기서 ‘불쌍한’은, 뜻으로는 ‘어리석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데, 그것을 받기를 희망하지도 않고, 받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현세의 복을 받기만을 바라는 사람, 최고로 좋은 것은
안 받겠다고 하고, 안 좋은 것을 달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이미 신앙을
받아들여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어리석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는 신앙인으로 보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껍데기만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쭉정이’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ㄹ-12).”
알곡과 쭉정이는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릅니다.
<쭉정이처럼 살고 있는 신앙인은,
사실상 신앙인이 아닌 사람과 같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신랑이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 있느냐? 없느냐? 신랑을 맞이하느냐? 아니냐?”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 입장에서는 “우리는 억울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잘 기다리고 있었다. 신랑이 너무 늦게
온 것이 문제다. 우리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놀러갔기
때문이 아니라 기름을 사러 갔기 때문이다. 기름을 사러
간 것은 신랑을 위한 일이다. 우리의 심정과 사정은 몰라주고
왜 이렇게 무자비하고 냉정한가?”
<“나도 처음에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다. 그랬는데 먹고사는
일에 바쁘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라는 변명과 비슷합니다.>
이 상황이 실제 상황이라면, 어리석은 처녀들의 심정을 헤아려서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혼인잔치라면 좀 늦게 왔더라도
못 들어오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는 비유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맨 끝에 있는 말씀,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비유의 세부 사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과 재림과 심판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고, 아주 늦게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 날이 바로 오늘일 수도 있고,
백 년 뒤나 천 년 뒤에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제가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니
나중에 오십시오.” 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
“제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저도 모르니까 준비가 되어 있는
지금 바로 오십시오.” 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습니다.
종말과 재림으로만 생각하면 좀 막연할 수도 있는데,
개인의 임종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자기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생을 마감할지 모릅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릅니다.
잘 알고 있는 지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흔히 들으면서도, 인생은 허무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그치고, 그것이 ‘나의 일’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남의 일’로만 생각하면서 그냥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그 모든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나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 6,27)”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삶과 죽음을 포함해서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한 권한을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것과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신앙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출처]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