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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스님 시봉일기 4권 보현행자, 두 가지 큰 가르침 - 한탑(金慶萬)|문사수법회 회주| 광덕스님 시봉일기
이 시대의 횃불, 광덕 큰스님
한탑(金慶萬)|문사수법회 회주
10. 보현행자
여기서 큰스님의 드러나지 않는 일화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광법회가 창립되기 전의 일인데 제가 큰스님께 “원각회에 오셔서 설법을 좀 해 주십시오.”하고 청을 했어요. 그랬더니 큰스님께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응낙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내가 원각회에 가서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하시면서 말입니다. 저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어요. 법회 날이 되어서 큰스님께서 원각회로 오셨습니다. 법문을 하시는데 제일 먼저 하는 말씀이 내가 법문을 하기 전에 여기 김 회장님께 공개적으로 두 가지 일을 사죄할 게 있다고 하세요. 저는 더더욱 어리둥절했지요.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는 당신이 대각회 회장을 하시고 제가 총무를 할 때, 사전에 한마디 의논이나 이야기도 없이 자신의 건강 때문에 남해로 갔는데, 그때 그 일을 하나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대각회를 잘 발전시켜 오늘의 원각회로 크게 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덧붙여 원각회는 우리 조계종에서 가장 큰 단체가 되었는데 지난날을 생각하면 김회장님께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용성조사 문도들의 뜻으로 재단법인 대각회를 새로 만들었을 때, 사전에 김 회장님과 명칭에 대해 의논했어야 하는데 미리 의논하지 못했던 것을 사과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시면서 자신이 소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회장님은 아무런 말씀도 않으시고 오래된 대각회를 원각회로 선뜻 이름을 바꾸어 주어 당신의 입장과 체면을 세워 주었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원각회 회원들이 있는 가운데 김회장님께 사과하고 싶었다는 것이었어요.
제가 지금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구나 할 수 있는 흔한 일도 아니지요. 여러 대중들 앞에서‘나 잘못했다’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 당시만 해도 우리 재가불자들은 스님들이 하시는 일에 대해 뭐라고 요구하거나 토를 달 수 있는 때가 아니었거든요. 그냥 아무 말 없이 넘어가면 끝나는 일이었어요. 저는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속으로 감탄했습니다. 이거 참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과연 훌륭하신 분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 순간 큰스님의 인품이 뛰어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지요.
11. 두 가지 큰 가르침
여러분들께서 불광수행을 통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큰스님의 사상운동은 우리들에게나 한국 불교도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하반야바라밀 법문과 구국구세 법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물론 구국구세 법문도 마하반야바라밀 법문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우리가 듣기에는 구국구세 법문으로 따로 들릴 정도로 독특합니다. 그 법문은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세계 평화입니다. 큰스님의 이 두 가지 법문은 다른 스님들한테는 일절 들어볼 수 없는 것이지요. 그 당시 다른 스님들을 만나면 거의가‘이뭣고’라는 말밖에 안 나옵니다. 천편일률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그렇게 이구동성인지 몰라요.
아무튼 나라에 대한 은혜나 세계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 큰스님처럼 고구정녕하게 하시는 분을 못 봤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스님들을 만나보셨는지 몰라도 저는 줄곧 관심을 갖고 찾아보았어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우리 큰스님은 그 점에 있어서 매우 투철하신 분이었어요. 큰스님 당신께서 한글로 번역하신 금강경이나 보현행원품 등, 여러 역․저서를 살펴보면 거기에 발원문이 있는데, 그 속에 구국구세의 뜻이 반드시 담겨 있습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평화통일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말로부터 세계 평화에 이르기까지 죽 이어져서 한 타래로 나옵니다. 제가 과문한 탓인지 다른 사람들의 책이나 발원문에서는 그런 대문을 아직 본 적이 없어요.
큰스님께서는 회장인 저에게도 나라에 대한 애국심과 세계 평화를 줄곧 이야기하셨어요. 제가 한때는 돈을 좀 번 적이 있었어요. 그 때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김 회장님이 돈 벌면 그 돈으로 세계 평화운동 하자, 우리 둘이서 불법으로 세계 평화운동에 헌신하자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평화통일 이루는 것과 세계 평화운동에 대한 염원이 큰스님의 마음속에 항상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구국구세를 크게 보면 남북 평화통일과 세계 평화운동인데 그것은 마하반야바라밀과 직접 통하는 거지요.
큰스님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우리들에게 마하반야바라밀 신앙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사실 큰스님이 아니더라도 마하반야바라밀 신앙은 우리나라에 당연히 보급되었어야 하고 이미 널리 퍼져 있어야 할 아주 중요한 불교의 핵심입니다. 그런데도 큰스님께서 본격적으로 마하반야바라밀 운동을 펼칠 때까지는 거의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한국의 불자들이 마하반야바라밀 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냈던 것이지요. 그런 점은 스님들이나 신도들,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저도 처음 큰스님으로부터 마하반야바라밀, 바라밀 신앙이라는 말씀을 듣고 바라밀 신앙은 단지 육바라밀 신앙 아닙니까? 하고 대답했을 정도였어요. 여러분도 육바라밀 잘 아시지요.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정진, 지혜 말입니다. 저는 겨우 바라밀에 대해 상식 정도의 이해 수준이었어요. 그때 큰스님께서 우리 김 회장님이 아직 마하반야바라밀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셨군요 하셨어요. 큰스님은 바라밀행도 중요하지만 바라밀행보다는 바라밀 신앙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큰스님의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까 아, 글쎄 그 말씀이 맞아요.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큰스님의 사상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법문이 한량없이 많지요. 8만 4천 법문이라고 하여 중생의 근기 따라 설하셨기에 다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모든 법문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즉 우리나라 해인사에 모셔진 팔만대장경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바로 일곱 글자,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구원을 이야기하니까 불교도 당연히 구원을 얘기합니다만 불교의 구원은 다른 종교처럼 여기 있다가 저기 어디 먼 곳으로 간다거나 강제로 이주라도 시켜서 구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불교의 구언은 무엇입니까? 예, 이미 있는 그 자리에서 벌써 구원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알려 주는 것, 그것 밖에 다른 것은 없어요. 이 엄연한 사실 밖에 따로 부처님 가르침은 없습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부처님 당시 법문에도 나오고 그 후에 많은 조사들이 인용했던 내용입니다만, 부처님 당시 연야달따라는 미남자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미남자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하는데 걱정이 되는 것이었어요. ‘아이구 내 얼굴이 이렇게 잘 생겼는데 남들이 탐내어 내가 잠들었을 때 몰래 머리를 베어 가면 어떻게 할까!’하고 말입니다. 그런 걱정을 하고 지내다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까, 아 거울 속에 있어야 할 저기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울고불고 야단이 났습니다. 염려했던 대로 자기의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탐내는 사람이 많더니만 드디어 지난밤 곤히 잠든 사이에 누군가가 자기 머리를 베어갔다는 것이지요. “아, 내 머리를 잃어버렸다. 내 머리를 찾아야 되겠다” 하며 동네가 떠나가라고 소리쳐 울고불고 야단을 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보니까 우습기 그지 없어요. 머리를 달고 다니면서 머리가 없다고 소리를 지르니 말입니다. “야, 이 사람아 자네 머리가 어디 없어졌어. 그대로 붙어 있는데 와 그래. 자네 말이야 잘 생각해봐, 머리가 없어졌다면 눈은 어디에 붙어 있는 거야? 그리고 머리가 없어졌다고 아우성치는 그 주둥이는 또 어디 붙어 있느냐 말이야?” 이렇게 깨우쳐 주어도 연야달따는 알아듣지 못하고 마냥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아니, 뭐라고? 머리가 안 없어지긴 왜 안 없어져. 내 두 눈으로 없어진 것을 똑똑하게 보았는데도 안 없어졌단 말이야.”하면서, 자꾸만 우기는 거예요. 그리고는 계속 온 동네를 울고불고 돌아다니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와 잃어버린 자기 얼굴이 그립다며 하던 버릇대로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어요. 아, 글쎄 이번에는 머리가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거울 속에 분명히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나타났거든요.
연야달따가 처음에는 거울을 잘못 본 것이었어요. 즉 거울 뒤쪽을 본 것이에요. 그러니 얼굴이 있나요. 거울 뒤쪽을 보고는 자기 얼굴이 없어졌다고 아우성치는 사람에게 어떻게 머리를 찾아 줍니까. 다른 머리를 또 하나 붙여 줍니까. 그래서 두상가상(頭上加上)이라는 말이 나왔죠. 우리 불교 집안에서 쓰는 말인데 머리 위에다 머리 하나 더 붙여 준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식으로 나는 중생, 너도 중생, 중생이요, 중생이요 하면서 우기며 살고 있죠. 그 중생, 중생이라고 우기는 것이 마치 연야달따가 머리 없어졌다고 울며불며 다니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아니라고 하겠지요. 연다달따가 우기고 있는 것과 똑같아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스스로 중생입니다. 사주 보고 관상 보고 요행수 바라며 사는 것은 바로 중생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나 같아요. 저는 신도들에게 그런 것 보지 말라고 해요. 그러면 신도들은 당장 이렇게 항의조로 말합니다. “아이고, 스님들이야 먹을 것 걱정합니까? 입을 것 걱정합니까? 그렇지만 우리네는 세상을 살려면 답답한 것이 너무나 많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여기 저기 물어봐야지요.”
저도 그 말에 지지 않고 소리 지릅니다. 참, 물어보기 뭘 물어봐요. 무조건 물어보지 말라는 데도 그래요. 그렇다면 물어보러 갈 때 보살님의 마음자세는 대관절 어떻습니까? 보살님 마음에서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생각을 핀셋으로 콕 집어낸다면 무엇이겠어요. 나는 중생이요 하는 생각 아닐까요. 나는 중생이요, 나는 중생이요 하는 생각을 강화시키는 것이 사주팔자 보는 것이고 얼굴 내밀고 관상보는 것이지요. 벌써 집에서 사주팔자 보러 가야겠다고 한 생각 일으켰을 때, 나는 중생이요 하고 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그런 것 보고 아무리 달콤한 말을 들었다고 해도 평생 중생 노릇밖에 못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불교에서는 사주팔자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법사가 이야기했는데도 나는 중생이요 한다면 이렇게 좋은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니 부처님의 말씀인들 어디다 쓰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고 해놓고 누가 와서 “세상에 너같이 못난 놈이 어디 있어?”하고 욕하고 발로 차면 화가 벌컥 나서 같이 욕을 하고 발길질을 하며 달려들지요. 그때 옆에 법우가 “아이고 이 사람아, 그래도 우리는 바라밀 공부한 사람이 아니겠나, 참아야지” 한다면 바로 참아집니까? 곁에 있던 법우의 말을 듣고 “그렇지”하고 자기 마음을 항복 받으면 스스로 중생이라고 우기지 않는 것이지만 만약에 “아니 나도 사람인데 이런 모욕을 어떻게 참아, 도저히 참지 못해”하면서 ‘너 죽고 나 죽기’로 덤빈다면 이 사람은 스스로의 마음을 항복 받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과 같다는 뜻이지요. 위에서 말한 예화의 주인공과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4 위법망구, 송암지원, 도피안사 |
첫댓글 연야달따의 예화로 부처님임을 알고 머리 두개 달린 중생이 아님을 쉽게 말씀하십니다. 만나는 모든 이에게 부처님으로 모시는 일!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 부처님 입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아이코 오늘 글은 반성이 저절로 되는 글입니다. 스스로 중생임을 외치고 다녔다 봅니다. 바라밀행 보다 바라밀 신앙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 새깁니다.
대행큰스님법문에서도 믿는 도리밖에는 없다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