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나온 수도세 전기세 요금 석 달치가 무려 1천 파운드 (200만원 남짓)가 넘는다는 거다. 보일러도 거의 안 돌리고, 뜨거운 물도 덜쓰는 계절에 200만원이라니. 한 달에 약 70만원, 이 집에 사는 인원이 7명이니 1인당 물값+전기값이 10만원 정도 되는 것이다. 비율은 대략 반반인데 전기세가 약간 더 나온 정도였다.
영국은 수도와 전기가 민영화되어 있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오늘 알게 된 요금을 그대로 대입해서 한국의 수도+전기 민영화 상황을 상상해보면.
일단 영국 물가가 한국의 두 배라고 계산을 한다. 대충 국민소득은 그 정도 차이나는 것 같고, 사실 교통비를 제외한 생필품 가격은 한국과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비싼 정도인데 그래도 눈 딱 감고 반으로 자르면 4인 가족 한달 수도세+전기세가 20만원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고려할 것이 있는데 한국의 수도, 전기 사용 행태가 영국의 그것과 굉장히 다르다는 거다. 한국에서는, 한마디로 '물쓰듯' 쓴다. 이 집을 예로 들어보면 뜨거운 물은 보일러라든가 그런 세련된 기기를 사용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엄청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진동하는 펌프로 만들어낸다. 주변을 봐도 일반 집들은 그런 곳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얘네는 수압도 일정해서 한국에서처럼 틀면 트는대로 나오는 그런 게 아니다. 그 수압은, 좀 뻥보태면 우물물 길어서 목욕하는 느낌 비슷한데 이 집은 좀 나은 편이다. 예전에 잠깐 살았던 기숙사에서는 거의 씻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이 펌프가 용량 한계가 있어서 뜨거운 물을 일정량 만들어내면 그 다음에는 뻗어버린다. 그래서 뜨거운 물 수요가 많은 날 (엄청 춥다거나 설겆이 하는데 누가 뜨거운 물을 펑펑 썼다거나 하는) 조금 늦게 샤워를 하면 물이 말 그대로 졸졸졸 나오는 걸 볼 수 있다. 대략 난감이다.
대체 어떻게 그러고 사느냐고 황당해할 수도 있겠다. 나도 처음에는 무척 황당하고 화도 많이 났는데 지금은 익숙하다. 내가 사는 집 상황이 특별히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 불평이 나오지도 않는다. 실은 지난 번에 한국에 들어갔을 때 펑펑 쏟아져나오는 뜨거운 물을 보며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세탁도 안 한다. 우리집 식구들은 모두 세탁을 학교에 가서 일회 2파운드 내고 사설 세탁기 돌린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영국집 사는 친구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좀 야속했는데 상황을 알고 나니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설겆이는...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여기 사람들 진짜 설겆이 대충한다. 비누거품이 뚝뚝 떨어지는 그릇을 물받이에 올리는 수준이다 --;;;
한마디로 절대적으로, 정말 한국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물을 적게 쓴다.
전기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일단 조명기구들이 조도가 굉장히 낮고 등은 기본 상태가 꺼두는 거다. 거의 어딜 가든 내가 불을 제일 먼저 켜는 사람 중 하나일 정도이다. 게다가 이들은 밤 12시면 모든 불을 끄고 잠든다. 겨울에는 히팅이 되기는 하는데 한국에서 아파트에서 살던 이라면 동사하겠다고 걱정할 수 있는 수준이다. 나 역시 지난 겨울 이불 안에 두꺼운 코트를 두르고 잤다. 이것도 몇 달 하다보니 익숙해졌다 -_-v 그런데 이렇게 야박하게 히팅을 해주는 것도 우리 주인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영국집들 대부분이 그렇다. 그 외에도 전기기구는 모르긴 몰라도 훨씬 적게 쓸거다. 세탁기도 안 돌리는데 무슨...
한마디로 전기든 물이든 한국보다 훨씬 적게 쓰는데 이렇게 나온다는 거다. 기계적으로 계산했을 때 우리처럼 살면 한국 4인 가족이 한 달에 20만원을 수도세 전기세로 낼 수 있다는 거다. 하하하...;;;
이 시점에서 또 하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이런 살인적인 공공요금에도 불구하고 왜 영국 (그외 다수 유럽국가들)에서 폭동이 안 일어나느냐. 아니, 꽤나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느냐. 내 생각에는 두 가지이다. 사실 너무 뻔해서 생각까지도 필요없는 것 같긴 하지만. 하나는 충분한 임금(최저기대임금)+실업 급여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의료+연금 시스템이 사회적으로 최저생활을 일정 수준으로 받쳐주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의 NHS가 세계적으로 '완전'무료라는 보기 드문 시스템인데 이게 없어지면 서민들이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을 거다. 역으로 NHS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수도나 전기, 철도 지하철등 사회 공공재들을 대거 민영화할 수 있었다는 얘기도 된다. 게다가 치과 치료비용이나 기타 서비스 비용의 수준으로 미뤄볼 때 NHS 무너지고 의료 민영화되면 영국 의료비용은 미국 뺨치는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연금은 집주인 얘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적기는 한데 (내 연금 안내서를 기준으로 볼 때 울 집주인은 40년 일했으니 원래 월급-기준 시점은 모르겠고-의 60% 정도를 받는다) 그래도 한국에서처럼 사회복지사가 날라주는 밥 한 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노인들은 없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당연히 의미가 있다. 사실 우리 집주인이 자기는 "poor"하다고 하면서 그 온갖 요금청구서들을 보여줬고 나 역시 울 집주인이 팔자 좋은 노인네라는 생각은 접긴 했다. 그래도 여전히 한국 기준으로 보면 아~주 팔자 좋은 양반이다.
실업 급여는 내가 알기로 계속, 주욱 나온다. 일 안 하고도 살 수는 있다. 이것저것 조건이 붙기는 하는데 (상담이라든가 재교육 같은) 기본적으로는 일할 처지가 안 되거나 일할 '의사'가 있다면 굶어죽을 일은 없다는 정도의 컨셉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실업 급여는 사회적 최저임금을 높여준다. 어느 수준까지 높이냐면, 여기 사람들 말로는 런던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일을 해도 1만 8천 파운드는 벌 수 있다고, 그걸로 제 한몸은 부지할 수 있다고 할 정도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법적 최저 임금이 7파운드 정도 되니까 매일 8시간씩 한달 꼬박 일한다고 하면 그 정도 될 것이다. 게다가 임금이 어느 수준을 못 넘으면 세금을 확 주니까 (돈을 오히려 붙여준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건 확인 안 해봐서 모르겠다)
구직 상담 같은 것이 굉장히 실질적으로 활용되고 Job center에 가면 실/제/로 일자리를 소개받을 수 있다. (영국의 그 일자리들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물론 좋은 일자리는 아니고 식당 웨이터나 점원 같은 catering 종류가 많다고 하는데, 중요한 건 이걸로도 빠듯하나마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다는 거다. 한국처럼 '알바' 개념이 아니다.
교육은, 무상 공교육이라든가 사교육비가 안 든다던가 하는 요소도 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건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회 안전망과 최하의 일자리에 대한 기대값이 훨씬 높다는 점 때문에 고등 교육으로 유인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점이다. 요새는 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학 진학률은 셋 중 하나 정도이다. 아참, 미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제일 비싼 수준이라는 이곳 대학의 학비는 영국인 EU국가 출신의 경우 3천 파운드 정도, 일년에 600만원이다. GNP 대비로 한국의 등록금이 얼마나 미친 수준인지 알만하다.
정리하자면, 영국처럼 공공재가 줄줄이 민영화돼서 (철도는 다시 국유화됐다 바보들) 공공요금이 터무니없이 비싼 나라에서도 이것을 감당하게 해줄 무언가가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여러가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폭동 안 일어나고 사람들 자살 안 하고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최소한의' 안전 장치라도 없이 민영화하면 볼리비아처럼 사람들 시위하다가 죽고 대통령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 나만 뻔한가.
나는 사회적 공공재는 사유화하면 안 된다고 믿으며 무엇을 공공재로 볼 것인가에서도 범위를 넓게 잡는 편에 속할 것 같다. 그런데 백번 양보해서 민영화를 한다고 해도 그 사회를 지옥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높은 실업률은 근로인구의 삼분지 일을 잡아먹는 눈물나게 영세한 자영업 분야 (치킨집 분식점)에서 간신히 잡고 있고 비정규직이 60%가 넘으며 구조조정이 상시화되어 있고 연금은 용돈이고 그나마도 카드값 갚는데 쓰라고 던져주고 대학 진학율은 85%인데 그나마 졸업해도 decent job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이고 살아남으려면 천문학적인 사교육비와 등록금은 기본인데 그것은 그저 출발선에 서기 위한 입장료일 따름이고...뭐 이런 동네에서 공공재 특히 의료를 민영화한다... 사실 IMF 이후로 폭발 직전의 위태위태한 한국 서민들의 살림살이를 그나마 간신히 지탱해준 것이 바로 이 공공요금과 의료였지 않은가.
시위를 그토록 백안시하던 시민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나마 얇게 깔린 살얼음이나마 부서져버리면 죽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