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아굴라와 브리스가 원문보기 글쓴이: 아굴라
아무 것도 걸치지 말라
엄상익 변호사
천구백 팔십년대초 성남법원에 판사업무를 배우러 갔었다. 당시는 판사 밑에서 도제식으로 실무를 배우는 과정이 있었다. 나 같은 경우를 ‘시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내가 판사실로 들어갔을 때였다. 그 방에는 두 명의 판사가 벽을 등지고 커다란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배석 판사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판사의 권위를 보이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좌배석 판사는 나를 보더니 놀란 듯 벌떡 일어나 경례라도 할 듯한 자세를 취하며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었다. 나를 본 좌배석 판사가 말했다. “제가 방위병으로 근무할 때 대위님 아니신가요? 그때 심부름도 하고 했었는데 이거 참 관계가 묘하게 됐네요.”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직업 장교로 있으면서 뒤늦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는 일찍 고시에 합격하고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했었다. 지위가 묘하게 바뀌었다. 그는 모른 체 하고 나를 외면할 수도 있었다. 나는 그의 솔직하고 순박한 모습이 좋았다. “그래도 지금은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인사 받으시죠”
내가 고개를 숙이자 그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옆에 있던 우배석 판사가 못마땅한 표정을 하며 말했다. “아무리 과거에 그랬더라도 판사가 체면이 있지 그게 무슨 모습입니까? 이건 아니죠.”
좌배석 판사는 그 말을 듣고 머쓱한 얼굴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잠시후 그는 옆에 있는 윗 서열인 우배석 판사가 듣지 않는 틈을 이용해서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계시는 동안 복잡하게 할 필요없이 우리 그냥 친구같이 격의없이 지내면 어떨까요?”
그는 마음이 활짝 열린 사람이었다. 우리는 친해졌다. 한번은 점심을 먹고 한가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에게 성남의 변두리 극장을 가자고 제의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속칭 ‘땡땡이’를 잘 치는 게 나의 악습이기도 했다. “부장님이 뭐 하는지 먼저 내가 정찰을 하고 올 께요. 판사가 업무 도중에 극장 갔다가 걸리면 혼나니까.”
그가 방을 나가 앞에 있는 부장판사실의 열린 문틈으로 안을 살펴보고 돌아와 말했다. “부장님 자는데 갑시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성남 변두리 삼류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불량청소년들이 와서 어둠컴컴한 속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바닥에는 콜라병 구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법원 앞 빵집에서 곰보빵과 사이다를 시켜 먹으면서 얘기하던 중 그 판사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택시 기사를 해서 우리 형제들을 키웠어요. 내가 판사가 돼서 아버지를 모신다고 해도 아들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지금도 택시를 몰아요. 그래서 내가 매일 아침 법원에 출근 전에 아버지 택시를 닦는데 내가 세차에는 도사가 됐다니까요. 그 다음으로 잘하는 건 판결문쓰기죠.”
우리는 판사실에서 낄낄대며 잘 놀았다. 옆에 있는 우배석 판사는 권위를 지키느라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지방의 명문고등학교에서 천재 소리를 듣던 귀공자타입의 인물이었다. 두 판사의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한번은 우배석 판사가 내게 말했다. “어떻게 아래 직급인 시보가 판사인 나보다 더 좋은 차를 타요?”
그는 계급이 낮으면 차도 자기보다 나쁜 것을 타고 다녀야 한다는 의식 같았다. 나는 당시 포니를 타고 다녔다. 그는 나의 직업장교 경력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계급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나이도 나와 같았다. 그래도 선한 얼굴을 보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엄격해 보이는 부장판사도 구내식당에서 된장 백반을 시켜 같이 먹을 때 상대해 보면 그 내면이 차지는 않은 것 같았다.
부장판사가 어느 날 저녁 배석판사 두 명과 나까지 해서 같이 밥먹으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법원 인근의 식당 방으로 들어갔다. 부장판사는 밥을 기다릴 동안 고스톱을 한판 하자고 하면서 방석을 끌어당겨 화투패를 돌리기 시작했다. 운 좋게 나는 초반에 오광을 팔게 됐다. 광값을 받아야 하는데 부장판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광값 주시죠.” “가리”
안주겠다는 고스톱판의 은어였다. “시보라도 광값은 받아야 겠어. 줘요”
부장판사는 끝까지 돈을 안내놨다. 그러면서 그동안 목에 힘을 주고 잘난 척 했더니 등이 아팠다고 농담했다. 그래서 힘을 빼려고 밥 먹는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삼십년쯤 흐른 어느 날이었다. 나는 사법시험 면접시험관이 되어 있었다. 내 옆에는 법원에서 시보를 할 때 우배석 판사를 하던 사람이 같은 시험관이 되어 있었다. 그가 면접시험 도중 내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판검사가 될 사람들은 부모부터 시작해서 평생 대접만 받는 사람들이예요. 이런 순간 몰아치고 버릇을 고쳐주지 않으면 안되요. 내가 무뚝뚝하게 하면서 쥐잡듯 몰아 칠 테니 같이 그렇게 건방집시다.”
그의 속내를 삼십년 만에 알았다. 그는 속이 따뜻하고 총명한 사람이었다. 나의 지도판사들은 모두 최고의 품질들이었다. 세상은 인간에게 옷을 걸치게 한다. 권력의 옷, 부자의 옷, 명예의 옷을 입히고 가면을 쓰게 한다.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그 옷이 자기인 줄 착각하기도 하고 가면 뒤에서 가면과 하나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 시절 좌배석 판사처럼 아무것도 걸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도 봤다. 나는 삶이 그를 어떻게 만들더라도 단지 그 자신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좋다.
[출처] 아무 것도 걸치지 말라|작성자 엄상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