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력(共業力)-우리 모두가 지은 공통 된 업이 우리가 사는 환경
이 지구와 우주를 만든다
지금 기존 불교에서는 우주만물이 우주본체인 공(空)에서 나왔다고 해요.
그러나 우리 영산불교에서는‘아니다!’그럽니다.
거기에다가 뭐 하나가 통째로 빠졌다고 그럽니다.
또 현대 물리학에서는 이 우주가 4가지 힘, 4가지 힘이지요?
강력 양력 전자기력 등 4가지 힘이지요.
그것에 의해서 이 우주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계바늘처럼 기계처럼
이 수많은 천체가 정교하게 돌아간다고 그래요. 4가지 힘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렇지 말하지 않아요.
공(空) 공성(空性) 본체의 힘, 본체의 힘에서 공(空)이 나왔고
이 공(空)의 힘으로 유지상속해 간다고 그러지요.
그런데 영산불교에서는 거기에다가 ‘너! 빠졌다. 큰 것이 빠졌다.’뭐지요?
인간의 주인공이 있어요. 본체가 있는 거예요.
현상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본체,
형이상적 실체인 주인공(主人空)이 있다 그 말이어요.
주인공, 본체가 있는 거예요.
나의 본체가 있어서, 진짜 나(我)가 있어서 고통을 의식하고 행복을 원하고
업을 짓고 그러다가 보니까 윤회를 합니다. 그것이 윤회의 주체예요.
인간 본체, 윤회의 주체, 업을 짓는 업의 주체, 창조의 주체, 마음의 주체,
업과 과보의 주체, 과보를 받는 주체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것을 몰랐어요.
기존불교에서는 이것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해서 이것까지 없다고 봐버린 것이 기존불교예요.
그런데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아니다! 아니다!’
현상세계에서 볼 때에는 이 몸뚱이를 양파껍질처럼 아무리 벗기고 벗기고
해봐도 안 보여요. 고정된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은 사실이어요.
그러나 형이상적인 존재로서 존재하는 주인공은 있어요.
그것까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어요.
부처님께서 무아(無我)라고 한 것은 중생들이 거짓 나를 진짜 나로 보는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렇지만 윤회의 주체이자 업의 주체,
창조의 주체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어요. 그거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가령 가을이 되면 봄에 심은 고구마 감자 등을 수확하잖아요.
가을에 고구마를 수확합니다. 다 먹고 씨종자 할 것은 어쩌지요?
보관해 놓지요? 보관해 놓습니다. 그 씨종자가 봄이 되면 싹이 틉니다.
그러면 잘라서 심어놓으면 잎줄기가 나오고 꽃이 나오고 결실하잖아요.
계절에 춘하추동이 있듯이 사람은 생노병사 하잖아요.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잖아요. 우주도 그래요. 천체(天體)도 그래요.
그것을 성(成)이라고 그래요. ‘이룬다’고 해요.
우주는 성 ‧ 주 ‧ 괴 ‧ 공(成住壞空)이라고 그래요. 성주괴공하는 거예요.
괴겁 공겁으로 들어가면 다 없어지는 거예요. 다 파괴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니까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거예요.
그래서 공겁이 되어버리면 완전히 없어지잖아요. 없어질 때가 있는 거예요.
저 해와 달도 없어질 때가 있는 거예요. 이 지구도 없어지고요.
이 우주, 항하사수와 같은 천체들이 다 없어질 날이 있는 거예요.
괴 ‧ 공겁으로 들어가면 그래요. 이 우주도 순환주기가 있어요.
몇 백억 년을 있다가 또 성주괴공을 반복하는데 무한히 반복해요.
아무것도 없어져버렸다가 그 없어진 데에서 또 이렇게 빅뱅하여
다시 시작하고 수십억 백억 년에 걸쳐서 진화해서 우리 인간이 살 수 있는
지구도 생기고, 저 천체들이 생기고 그런다고요.
그런데 그런 우주만물 인간을 만들어내는 큰 동력이 있어요.
그것이 없으면 안 되어요. 그것을 업(業)이라고 하는 거예요.
중생들이 짓는 공통된 업이라고 해서 ‘공업력(共業力)’이라고 합니다.
공업력, 힘 력(力)자. 공업력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있어야 내가 지은 과거 업으로 해서 다음 생에 나(我)라는 것이 나온다
그거예요. 그 업이 없으면 안 되어요.
우리 모두가 지은 공통된 업이 우리가 사는 환경 이 지구 우주를
만든다니까요. 이 인간과 우주만물을 창조하는 동력,
이것을 공업력이라고 합니다.
출처:2014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