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환의 돈황벽화로 읽는 불교경전
27. 금강경변②-막고굴 제31굴 주존불
“여래의 상조차 여의라” 화두 든 화사(畫師)의 선택은?
“상이 상 아님 보면 곧 여래 보리라”는 ‘금강경’ 핵심 담고자
특정 불타에 귀속 안된 노사나불 법신으로 남벽 주존불 표현
금강경변에 등장한 ‘법계인중상’ 여래는 모든 상의 해체 상징
막고굴 제31굴 남벽 금강경변 주존불.
중국에서 금강경변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는 금강경변은 당대의 화성(畫聖)인 오도자(吳道子)의 작품이다. ‘역대명화기’는 흥당사 정토원 내 오도자가 ‘금강경변’을 그렸다고 전한다. 귀신을 부리는 붓 솜씨로 유명한 그가 상을 떠나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표현하였을지 궁금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남아있지 않다.
흥당사의 연대기를 고려할 때, 오도자가 금강경변을 그린 것은 738년 이후의 일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금강경’이 선종의 소의경전으로 자리잡은 시기이며, 6조 혜능(638~713)에서 7조 신회(670~762)로 이어지는 시기이다. 신회는 ‘금강경’을 “가장 존귀하고, 가장 수승한 제일 경전”이라 꼽고, 모든 부처님의 모태가 되는 경전이라 칭송하며, ‘금강경’의 지송을 적극 권장하였다. 같은 시기 당 현종은 유불선 3교의 균형을 이루고자 각각의 대표 경전을 선정하였는데, 유가에서는 ‘효경’, 도가에서는 ‘도덕경’을 꼽고, 불교에서는 ‘금강경’을 꼽았다. 개원 19년(731)에는 황실에서 직접 ‘어주금강반야바라밀경선연’이라는 주석본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8세기 전반 선종과 황실의 지원을 받은 ‘금강경’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는 단면이다.
돈황석굴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타고 막고굴 제31굴과 같은 금강경변이 출현한 것이다.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8세기 후반 조성된 막고굴 제31굴 남벽의 금강경변은 중앙의 주존불을 중심으로 화면이 3분할 되며, 주존불의 좌우 화면에 ‘금강경’을 표현한 세부 장면들로 채워졌다. 이와 같은 구성에서 중앙의 주존불은 당연히 ‘금강경’의 설주(說主)인 석가모니불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주존불의 형상이 이색적이고 흥미롭다.
주존불은 풍만한 체형을 갖추고, 중앙은 좁고 양 끝은 넓은 수미대좌에 가부좌를 하였다. 착의한 통견의 가사는 양팔과 가부좌한 하체를 따라 대좌 아래로 길게 늘어졌으며, 가사 전체에 갖가지 도상으로 가득하다. 여래의 신체 중앙에는 마치 수미 대좌의 형태와 흡사하게 가운데가 수축한 수미산이 그려져 있고, 수미산 아래로 가부좌한 여래의 두 발이 보인다. 그리고 수미산의 주위는 다시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였는데, 그 내부는 마모가 심하지만 대해(大海)로 채워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수미산의 상단, 즉 여래의 어깨에서 가슴 부위는 나무가 무성한 숲 지대이고, 그 사이 사이로 가옥들이 빼곡하다. 양팔을 따라 늘어진 가사 위로는 갖가지 인물상이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상단의 인물은 존자에게 예를 갖춘 모습이 보이고 하단의 인물은 가축을 거느리고 있다. 중앙에 늘어져 대좌를 덮고 있는 가사 부분에는 험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나체로 표현된 아귀와 뾰족한 구조물이 가득하다.
주지하다시피(24회 참조) 이러한 불상 형식은 ‘화엄경’의 내용을 배경으로 성립한 노사나불 법계인중상이며, 여래의 몸에 6도 중생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왜 노사나불의 법계인중상이 ‘금강경’의 주존불로 그려졌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중국학자 허스저(賀世哲)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31굴 금강경변의 맞은 편 벽면에 그려진 ‘대방편불보은경변’과의 관계이다. ‘보은경’의 ‘효양품’에서는 석가모니불을 노사나불과 동일시하며, “(석가모니의) 몸 가운데서 다섯 갈래[五趣]의 몸을 나타내셨다”고 설하고 있다. 5취란 지옥·아귀·축생·인간·천(天)이므로 금강경변에서 주존불의 몸에 5도 혹은 6도 중생을 그린 것이 부합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정작 보은경변의 주존불은 노사나불 법계인중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수긍하기 어렵다.
반면 허스저가 든 두 번째 이유는 ‘금강경’의 종지와 노사나불의 법신으로서의 성격을 연결한 것으로, 충분한 설득력을 갖췄다. ‘화엄경’에 의하면 석가모니불의 선정 속에서 노사나불이 현현하며, 이때의 여래는 석가모니불과 다르지 않지만 동시에 법신으로서 어느 특정한 불타에 귀속되지 않는다. 이 점은 모든 ‘상(相)’, 심지어 불타라는 상조차도 여의라는 ‘금강경’의 종지와 부합한다는 것이다.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서 세존이 물었다. “수보리야, 몸이라는 상(相)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답했다.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그 까닭은 여래께서 몸의 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몸의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온갖 상은 모두가 허망하니, 상이 상 아님을 보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31굴의 금강경변을 그린 화사(畫師)가 이 경문을 읽었다면, 틀림없이 깊은 고심에 빠졌을 것이다. 온갖 칠보로 장엄되고, 빛으로 가득한 화려한 여래의 모습이 아닌 모든 상이 부정된 거기에 자리한 여래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화사가 찾아낸 해답은 노사나불의 법계인중상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법계인중상은 ‘화엄경’을 배경으로 한 인중상과 다른 시선을 유발한다. ‘화엄경’ 속의 인중상이 삼라만상에 두루한 법성의 편재를 부각한다면, ‘금강경’의 인중상에서 여래의 실체는 육도 중생으로 대표되는 모든 상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융이 아닌 해체에 가깝다.
노사나불을 주존으로 하는 금강경변은 이후 다시는 그려지지 않았다. 정형화되어 가는 경변의 형식 속에서 법계인중상의 번잡한 모습은 존귀한 여래를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31굴의 금강경변 만큼 ‘금강경’의 교의에 대해 깊이 사유할 공간을 제공하는 경변 또한 없을 것이다.
마침 ‘상월결사 인도순례’의 여정이 매일 금강경 독송으로 회향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그 옛날 부처님께서 1250의 제자들과 행렬을 이루며 발우를 들고 맨발로 걸으시던 그 길을, 오늘의 제자들이 ‘금강경’의 말씀을 마음에 그리며 따라 걸으리라. 시간은 다르지만 길은 여전히 같은 곳으로 열려있다.
[1670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