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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未來의 安息處
一 松 韓 吉 洙
이 세상에는 영원불멸이라는 生物은 없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산천초목 등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천년만년 영구불변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죽거나 변형되거나 살아지는 것이 진리이다. 그 중에서도 사람의 죽음이란 것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주민등록을 옮기는 절차로서 家宅에서 거주하다가 무덤으로 이전하여 永眠하면서 安息하게 되는 과정을 이름이다. 다시 말 하자면 오늘까지는 연기가 나는 동네에서 기거를 했다면 내일에는 문지방을 넘어서 연기 없는 마을로 이사하여 편안히 잠들면서 쉬게 되는데 이곳이 인생의 종착역이 되는 것이다.
오늘은 이 미래의 안식처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도 큰 뜻이 있을 것 같아서 이를 펼쳐보려고 pen을 들었다.
필자의 할아버지는 남원시 보절면 사무소 옆의 야산인 [楊柳落地]라는 길지에 잠들고 계셨고 할머니는 임실군 운암면 섬진강변의 [雲中半月]인지 [蓮花浮水]라는 터에서 안식을 하고 계셨다. 그런데 지금은 옛날의 농경사회에서 벗어나서 산업사회로 변질되다 보니 멀리 떨어져 계시는 이 산소를 돌 볼 사람이 없어서 자칫 잘못하면 산소가 失傳 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원래는 이 묘소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위토답이라는 경작지는 특별조치법이 발효되자 자기이름으로 명의변경을 해 놓고는 산소는 돌보지 않기에 묘소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커졌다. 더구나 할머니 산소는 운암 댐을 더 높이는 공사를 실시하였기에 수위가 높아져서 갑자기 할머니 산소 일대가 섬 이 되는 바람에 산소에 가려면 배를 타고 건너가야 할 오지가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先慈(작고하신 어머니)께서 손수 시골에 사는 아우(在洙)를 앞세워 시 부모 묘를 파묘하여 그 유골을 차에 싣고 무조건 장남인 필자의 집으로 올라오셨다. 그 당시 서울에 살던 우리 3형제는 부모님을 위시한 가족의 안식처로 점지하려고 지금의 포천시 관인면 냉정리에 임야를 마련했는데 그 자리에 우선 조부모를 모셔야 한다고 밀어붙이시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1995년 10월 19일 맨 윗자리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택을 마련했다. 조부모께서는 슬하에 3형제분을 두시었는데 선친은 둘째로서 큰 집이 임실군 오수면에 있기에 어머니가 시부모를 모셔야 할 위치는 아니었지만 큰 집의 자녀들이 어려서 선영을 보살필 형편이 아니었기에 자칫하면 보살피는 자가 없는 무연고묘가 될 가능성이 높은 형편이어서 선자께서 큰 용단을 내리신 것이었다.
냉정리 이곳은 지장산에서 내려온 지맥이 한탄강으로 인하여 더는 내려가지 못하고 주춤하고 있는 곳으로 앞에는 바라만 보아도 배가 부른 기름 진 철원평야가 널려있고 그 건너편에는 명성산의 일맥이 솟아 있어 안산이 되는 아늑한 곳이었다. 그래서 대대로 이어 내려가는 미래의 안식처로 이곳에 장만했었다. 그러나 맨 위를 조부모의 안식처로 정하고 그 바로 밑에 선친의 묘소를 마련하다 보니 대대로 이어 나갈 터전이 마땅치 아니했다. 왜냐 하면 밑에 고총이 2기가 상하로 있는데 상석이 있고 묘가 큼지막한 걸로 보아 옛날의 양반 댁이나 부잣집의 무덤인 듯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관리를 하지 아니하여 봉분위에서 큰 나무가 자라고 있어 보기가 흉하였다. 그 묘소가 아무리 고총이라고 하되 옛 선인의 안식처를 함부로 손 댈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우리는 박 씨 성을 가진 분으로부터 이 산을 매입했는데 어중이떠중이 타 성씨들의 묘가 우리 산소 밑으로 즐비하게 있어 어디에 발을 붙 힐 수가 없도록 만원이었다. 窮則通이라. 그래서 할 수 없이 2004년 4월에 납골 묘로 전환하여 돌의 조직이 치밀하다고 소문난 황등산 화강석으로 42기를 마련했다. 그러고 보니 미래의 안식처에 숨통이 틔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생각지도 아니한 덤이 생겼다. 그것은 봄에는 4월에 가을에는 추석 전 9월에 우리 형제 7남매와 그 아들 딸 그리고 손자 손녀 등 25명 정도의 후손들이 모이는 契機가 마련되었다. 봄에는 성묘와 잡초 제거하는 행사를 갖고 가을에는 벌초 후에 성묘하는 모임이 있어 집안 간에 우애를 다지고 친목을 도모하며 종사와 집안이야기를 나누고 인근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도 함께 하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형제자매 그리고 조카와 손자까지 집안 식구 모두가 모이는 기회가 년 2회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조상님의 음덕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고 보면 이곳은 선조들의 안식처일 뿐 아니라 바로 직계 어른들의 안식처로서 결국에는 끊임없는 후손들의 모임장소로 변모되어 갈 것이라고 장담한다.
한편 미래의 안식처에서 쉬고 있는 선영들은 말이 없이 고요한데 그 후손들이 자기는 물론 자손대대로 욕구 충족이나 가문의 번영을 위하여 권모술수나 속임 수 등 여러 형태의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이 명당 찾기의 역사이다. 그래서 조상의 안식처가 명당이냐 명혈이냐를 놓고 부지런히 날뛰고 다녔던 것이 지난날 우리 선인들의 현실이었다.
대원위 대감 즉 대원군 이하응은 60년 세도를 누린 안동 김 씨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난봉꾼으로 이름을 날리고 다녔다. 어느 날 우연히 당대의 풍수가 정만인을 만나 자기의 앞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어 보았다. 그러자 정만인은 차령산맥 중에서도 명당이 많은 가야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덕산 땅에 만대를 거쳐 영화를 누릴 곳과 2대에 걸쳐 皇帝가 나올 자리가 있는데 부친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대원군은 그곳에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묘를 쓸 명당에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유택을 모셔야 할 자리에는 석탑이 있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하응은 충청관찰사를 움직여서 주지에게 거금을 주고 1840년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을 부순 뒤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대원군은 천하의 명당으로 묘를 이장한 덕분에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성공했으니 이가 고종이다. 이 어리석은 군주로 인하여 우리조선은 멸망의 길로 들어 섰는데도 명당의 덕인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고종과 순종이 황제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왕을 꼭두각시로 앉히고 꿈에 그리던 권력을 한손에 쥐고 개혁을 주도했으나 열강들의 통상 압력이 거세게 몰아치던 때인데도 소경처럼 눈을 감고 쇄국정책을 고집하다가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렸다. 빗장을 꼭꼭 걸어 잠그는 짓에 약이 오른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시신을 가지고 대원군과 거래를 트려고 야밤에 도굴을 실시한 사건으로 세상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장만인 지사는 앞일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나 보다. 이 묘를 쓸 때에 조선 강회를 들어부어 단단하게 조성하라는 말을 전하였기에 이 말을 듣고 조성한 묘인지라 독일 상인이 밤새도록 팠으나 조선강회가 바위처럼 단단해서 도굴을 못하고 날이 밝았기에 마을사람들에게 들켜서 도굴은 미수에 그치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다음은 金長生 金集 등 대학자를 배출한 광산 김 씨의 선대 안식처를 찾아가 보자.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터 잡고 있는 조선 초기의 문신 김극뉴金克忸 선생의 묘는 조선의 8대 명당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명혈 중의 하나라고 한다.많은 풍수가들은 光山 金 氏는 조선조에서 사계沙溪 金長生과 그의 아들 金集이 禮學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海東18賢에 추앙되어 한 가문에서 2명이나 文廟에 배향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뿐 아니라 광산 김 씨는 정승 5명 大提學 7명 왕비 1명(숙종비 인경왕후)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신현관을 배출하였기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家門이 되었다. 특히 사계선생의 자손이라면 사위 얼굴도 보지 않고 딸을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성을 떨친 것이 결코 이 묘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이 묘는 말 명당으로 조선의 8대 명당에서도 가장 앞자리에 이름을 올릴 만큼 이름난 명당이기 때문에 그 發福에 의하여 광산김씨의 영광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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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래의 안식처 . 수필 잘 읽었습니다.
저도 미래의 안식처에 대해서 미리 준비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