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아니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서정시라 해도 손색이 없다는'그대를 보내며(送人, 送友人, )
이 시는 일찍이 대동강 부벽루에 걸려있었는데 이를 본 중국
사신들중 어느 한사람 칭찬하지 않은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고려의 문인 이인로 (李仁老)는 그가 펴낸 파한집(破閑集)에
이 시를 수록하고
극찬 하였으며, 또한 조선 초기 서거정(徐居正)의 시선집 동문선(東文選)에도 이 시가
게재 되어있다고
합니다.
조선의 대문장가 서포 김만중(金萬重) 역시 그의
문집인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이 시를 唐나라
자연파 시인 왕유(王維)의 작품에 견주어 해동의 위성삼첩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이라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 했다고 합니다.
"위성삼첩"이란 왕유가 지은 시로 일명 "위성지곡"이라고도 하는데
친구 원이를 안성으로 보내면서 위성까지 전송하면서지은시 라고 전해집니다.
그 작품을 감상해 봅니다.
" 渭城朝雨 輕塵(위성조우읍경진) -- 위성 아침에 오는 비가 길의 먼지를 적시니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류색신) -- 객사는 푸릇푸릇
버들잎 새롭구나 勸君更盡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 -- 여보게 이 사람아 다시 한 잔 드시게나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 인제 양관 나서면
어느 친구 있으랴"
정시상의 그대를 보내며의 시는
우리들의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기억도
있습니다만........
그는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 부근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출생년도
미상이나 심부식과 거의 동년배?),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노(盧)씨 슬하에서 성장합니다. 어려서 부터 워낙 文才가 뛰어나 이미
5세때에 무리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모습이 강물에 비치는 것을 보고는 '何人將白筆 乙字寫江波(누가 흰 붓을 가지고 강물 파도위에 乙 자를 썼을까)' 란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자라면서 시 뿐만 아니라 글씨, 그림(詩書畵)에도 능했으며, 역학(易學), 불교, 노장(老莊)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계에도 입문하게 되는데, 인종(仁宗, 고려 17대)의
외조부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권신 척준경의 국정 농단을 탄핵하여 유배시킴으로서 권력의 상층부로 부상하게 됩니다. 음양비술을 믿어며 묘청 백수한
등과 三聖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정치쇄신과 서경 천도를 주장하면서, 개경 잔류를 주장하는 김부식 등 보수 기득권 세력과 번번히 충돌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김부식의 시한편을 올립니다.
한시는 생략하고 번역문만 기재합니다.(전편 에 올린바 있습니다.)
속세의 나그네 못오는 곳에
나홀로 올라오니 상쾌하구나
산모습 가을이라 다시금 좋고
강경치 밤에 보니 분명하여라
흰새는 하늘높이 날아 가는데
외롭게 돗대하나 어디를 가오
뜬세상 생각하며 어이없는데
반평생 공명그려 헤매 돌았소."
말년에 松都 감로사에서 혜소라는 스님과 교유하며 쓴
시(甘露寺次惠素韻)로 완숙한 연륜이 느껴지는 뛰어난 시입니다.
김부식은 신라 무열왕의 후손으로, 어린 나이에 역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4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합니다. 그의 부친이 송나라의 소동파(본명 蘇軾) 처럼 대문장가가 되라고 軾 자를 넣어 이름을 지어
주고 그 아우의 이름도 소동파의 동생인 소철(蘇轍, 唐宋 8대가)에서 따와 부철(富轍)이란 이름을 지었다니다. 그는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여
대문장가가 되고, 더욱이 소동파도 이루지 못한 권신(權臣)이 되어 죽을 때까지, 아니 자식(金敦中) 대까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지요.
김부식과 정지상의 알력
김부식은 유학을
숭상하고 모화(慕華)사상이 깊은 보수파이고, 정지상은 오히려 노장사상에 경도되고 고토수복을 주장하는 개혁파로 사사건건 부딪치게 됩니다. 더욱이
두사람은 일찍이 文名이 높아 詩에 대한 경쟁심도 남달랐다 합니다. 관직을 비롯한 거의 모든 면에서 앞선다고 자부하는 김부식도 詩에서 만은
정지상에게 따를 수가 없었답니다. 한번은 정지상이 쓴 琳宮梵語罷 天色浮瑠璃(절간에 독경 소리 끝나니, 하늘빛
유리처럼 맑아지누나)을 보고 탐이 나서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으나 정지상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합니다.
김부식이 이에 앙심을 품었고 결국에는 정지상을 정적으로 몰아 피살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지상, 묘청의 난으로 엮여 피살
우유부단했던 인종(仁宗)이 개혁과 서경천도를 받아들이는
듯하다가, 김부식 등이 주장하는 개경 잔류에 다시 기울게 됩니다. 이에 절망한 묘청 등이 난을 일으키되고 정지상이 묘청과 같은 생각을 품었다
하여, 개경에 머무르고 있던 정지상을 김부식 일파가 왕의 재가도 없이 살해하게되는데 이는 다분히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자행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 뒤 사람들 사이에 억울하게 죽은 정지상을 동정하는 야화가 널리 퍼졌다는데 이를 보아도 정지상의 죽음은 억울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규보의 설화소설에도 등장
고려 최고의 문장가로 무신정권 시절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백운소설'에는 당시 저잣거리에서 회자되던 다소 황당한 두 정적 간의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화창한 봄날 김부식이
문득 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버들빛 천가닥 푸르고, 복사꽃 만송이 붉도다)' 라는 시구를 떠올리고 흐믓해 하면서
잠간 잠이들었는데 꿈에 죽은 정지상이 나타나서 "시란 천가닥이니 만송이니
라고 쓰는게 아니다" 하고는 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버들빛 가지마다 푸르고, 복사꽃 송이송이 붉게 피었네)이라
고쳐주었다고 합니다. (전편에도 올린시입니다.)
김부식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황당합니다. 그가 어느 절엔가 갔다가 해우소에
들렀는데, 정지상의 귀신이 김부식의 불알을 꽉 잡고는 묻길,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왜 얼굴이 붉으냐?" 하니, 김부식 왈 "건너편 산 언덕
단풍이 얼굴에 비쳐서 붉도다." 정지상이 이어서 불알을 당기면서, "이게 무슨 가죽 주머니냐?"라고하니 정지상왈 "그것은 네아비 불알이니라"
그러자 정지상이 다시한번 힘주어 잡아당기니 마침내 김부식이 변소에서 죽었다는 황당한 이야기 입니다. 이는 아마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이규보가 재미난 소설로 탈바꿈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김부식은 대문장가며 큰 정치가였지만
대시인 정지상을 정적으로 제거했고. 그리고 三國史記를
저술하면서 지나친 사대주의적인 입장을 서술한 흠이있습니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은 무신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 무신의 난을 촉발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미루어 보아
첫댓글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