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군사개혁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국가의 방위를 용병이나 다른 나라의 원병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마키아벨리의 ‘전술론’ 중에서) 중세 이탈리아의 부유한 도시들은 스위스의 용병을 돈으로 사서 자기 나라의 방어를 맡겼다. 이들 용병들은 프랑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전멸되고 말았다. 이 전쟁을 분석한 마키아벨리는 자기 나라를 지키는 국민군의 필요를 역설했다. 15세기 이탈리아는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교황령(로마) 등의 다섯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군소국으로 분할돼 있었다. 이들 도시 간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이탈리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갔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6만50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공략했다. 그는 저항을 받지 않고 이탈리아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나폴리를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던 스페인은 프랑스에 대항해 병력을 일으켰다. 1503년 10월 프랑스는 스페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나폴리로 진격했다. 가을비가 극성스럽게 내리자, 프랑스군은 산을 넘기보다는 해변을 따라 진군했다. 이에 대항하는 스페인의 곤살로 데 코르도바 장군은 전속력으로 산을 넘어 프랑스군보다 먼저 가릴리아노 강을 건넜다. 11월 초 가릴리아노 강 하구에서 프랑스와 스페인군은 대치했다. 이탈리아는 가을부터 겨울 동안에 기압골이 자주 통과하면서 많은 비가 내린다. 나폴리만 해도 10월부터 1월까지 연평균 강수량의 절반이 훨씬 넘는 평균 520㎜의 비가 내린다. 평균기온은 8~12도로 서울지방의 10월 기온과 비슷하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어 실제로 느끼는 체감온도는 이보다 훨씬 낮다. 또한 흙의 성질이 독특해 이 무렵이면 거의 모든 강이 뻘 천지가 돼 버린다. 뻘은 군대의 기동력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 11월 초 프랑스군은 물이 불은 가릴리아노 강을 건너기 위해 부교를 설치해 공격했다. 그러나 강 주위가 뻘로 변해 장점인 기병대의 기동력을 살리지 못했다. 게다가 스페인의 화승총부대의 위력에 밀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 한두 번의 접전이 있은 후 날씨가 점점 더 나빠지자 전투는 약 6주 동안 교착상태에 빠졌다. 프랑스군은 스페인군에 비해 2배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수한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곤살로는 천연적인 방어진인 뻘에서 한 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뻘 안에서 비에 젖고 추위에 무기력해진 병사들을 매일 직접 찾아 격려하며 사기를 높였다. 병사들과 추위와 어려움을 함께하는 스페인의 곤살로 장군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스군 총사령관 망튀 후작은 자기만 편한 곳에서 잘 먹으며 지냈다. 게다가 아예 지휘권을 살루초 후작에게 맡기고 후방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스페인의 곤살로 장군은 첩보를 통해 프랑스군의 사기 저하를 보고받자 기습공격을 하기로 결정한다. 강을 건널 부교를 새벽에 설치할 무렵 기습을 감춰주는 이슬비가 내렸다. 곤살로는 12월 29일 새벽, 강폭이 좁고 뻘이 가장 적은 곳으로 주력부대를 집중해 강을 건넜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기습해 들어간 스페인의 경장기병에 의해 무장조차 하지 않은 프랑스 보병은 저항도 못하고 전멸하고 말았다. 프랑스의 살루초 후작은 일부 병력을 소집해 반격을 가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스페인군은 도망치는 프랑스 주력부대를 16㎞나 추격해 포르미아 협곡에서 괴멸시키고 대승리를 거뒀다. 곤살로는 병사들의 사기를 극대화시키고 날씨를 승리의 요소로 활용했으며, 화승총부대를 전술체계에 성공적으로 접목했다. 승리할 수밖에 없는 리더십을 가진 장군이 곤살로였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 ※ 편집=윤성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