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소신의 양향자!'
-야(야)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정치인으로 급부상
-삼성전자 연구직 임원에 오른 여상 출신 악바리
양향자, 1967년 4월 4일 53세.
출생지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20대 총선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지만, 2016년 8.27 전당대회 때 여성 최고위원으로 당선된다.
2018년 6.13 지방선거 때 민주당 광주시장 경선에 도전장을 냈지만 본선에는 통과하지 못했다.
2018년 8월 '국가인재개발원'의 원장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2019년 8월1일 사직하고 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에 합류했다.
삼성그룹에선 인문계 고졸(대전여고) 출신의 삼성생명 임춘자가 임원 승진 첫 테이프를 끊었다.
양향자는 사상 첫 실업계(광주여상) 고졸 출신 임원이었으며, 삼성전자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그것도 부기나 회계와 같은 사무직이 아닌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실 연구직 상무로 발탁됐다.
공고도 아니고 상고 출신이 연구 임원직에까지 오른 사상 첫 케이스이기도 했다.
양향자는 1985년 삼성전자에 입사해서 기흥연구소 반도체 메모리설계실 연구보조원으로 일했다.
당시 그녀는 주산이나 부기, 타자 밖에 할 줄 몰라 커피 타고 책상 닦고 복사와 같은 잡일만 했다.
거기에 더해 반도체 회로를 보고 따라 그리는 단순 사무만 겨우 보조했다.
석사-박사 출신의 고학력 연구원들은 양향자를 '미스 양'으로 부르곤 했다.
당시 부서 임형규 책임연구원이 어느 날 악필로 글을 휘갈겨놓았다.
'야, 누가 이것 좀 정리해 봐라!' 라고 말하고 글을 책상에 놓고 갔다.
양향자에게 시킨 일이 아니라 연구원 중 누군가에게 혼잣말처럼 한 것이다.
그때 양향자는 꼭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글을 읽어보니 반도체 공학의 전문용어 투성이었다.
연구실 선배들에게 물어서 간신히 편지를 해독할 수 있었고, 서식에 맞게 꼼꼼이 정리할 수 있었다.
임형규가 나중에 보고 깜짝 놀라 누가 했는지 묻고는, "미스 양! 물건이네! 잘 했어!"라고 칭찬했다.
입사 후 처음으로 연구실 내 최고 실력자에게 받은 좋은 평가여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실함을 인정받는 것과 연구원으로 이론과 기술을 익히는 건 별개였다.
하얀 가운을 입고 일하는 연구원이 되고 싶었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양향자가 복사해 연구원들의 책상에 올려놓던 서류는 일본어로 된 반도체 기술 논문들이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게 1983년이라 두어 수 위의 일본보다 기술 수준이 뒤졌다.
그래서 석사-박사 출신들도 일본어 논문을 읽고 반도체의 고급 설계기술을 깨우쳐야만 했다.
복사 심부름을 하면서 일어를 잘 하는 연구원들이 적다는 걸 알고, 사내 강의로 일어를 공부했다.
고교 때 주 1시간 씩 일본어를 배웠지만 어려운 반도체 논문을 번역하기에는 태부족이었다.
하지만 인사 부서에서 고졸 사원은 일본어 강의를 받을 수 없다고 퇴자를 맞았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두번 세번 신청해봤지만 '전례가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끈질기게 신청해 결국 일본어 강의를 듣게 됐다.
대졸 이상 수강자들 사이에서 강사마저 "네가 뭘..."이라며 무시를 당하곤 했다.
하지만 3개월 만에 일본어 자격증을 먼저 땄다. 주말에도 기숙사에서 계속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일어를 마스트한 다음 복사 자료 밑에 0.5㎜짜리 볼펜으로 깨알 같이 해석을 달아 나눠줬다.
그후 연구원들은 '미스 양'이 아닌 '양향자 씨'라는 호칭으로 그를 부르게 됐다.
업무에 자신감을 갖게 된 그에게 연구원들이 일어 서적을 들고와 번역을 부탁하는 일이 잦아졌다.
여상 출신의 연구보조원에게는 승진의 희망이 아예 없던 시절이었다.
임형규도 "열심히 해봐라, 꾸준히 실력 쌓으면 부장도 될 거야"라는 막연한 덕담만 건넸을 뿐이었다.
당시 연구보조원이 부장을 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이는 일이었다.
양향자는 '사장도 하고 싶다'고 포부를 키웠지만 언감생심 현실의 벽은 높기만 했다.
연구보조원에게는 책상조차 제공되지 않아 회의실이나 탕비실 티테이블에서 대기하곤 했다.
양향자는 어느 날 부서장인 임형규에게 건의해 책걸상을 타냈다.
일어를 잘 할 수 있게 되자 임형규가 회의에 끼워주기 시작했다.
"앞으로 양향자씨도 회의에 들어와, 잘 몰라도 그냥 들어봐."
전문용어 투성이인데다 전자공학 기본 지식이 아예 없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조차 없었다.
그래도 꾸준히 참석했다. 팀 회의 참석과 일본어 서적 번역을 하면서 관련 지식이 자연스럽게 쌓여갔다.
그제사 양향자에게도 반도체 설계의 간단한 업무까지 주어지게 됐다.
당시 일화가 있다.
1988년 반도체 선진국인 일본의 권위자인 하마다 시게타카 박사가 방한했다.
하마다로부터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노하우를 전수받기로 되어 있어서였다.
그때 회사는 양향자에게 일주일 동안 하마다 박사의 통역과 가이드를 맡겼다.
불과 22세, 통역할 실력은 못 됐다. 하지만 '할 수 있겠냐'는 상사의 제안에 양향자는 용기를 냈다.
"제가 모시고 다녔어야 하는데, 그분들이 나를 모신 거 같다..."(양향자의 회고)
통역은 서툴렀지만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에 감명을 받은 하마다는 양향자를 마음에 들어했다.
하마다는 귀국길 공항에서 그에게 "너무 따뜻한 일주일이었다. 내 집으로 초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귀국한 지 2주도 안 돼 하마다는 실제로 양향자를 일본의 자택으로 초청했다.
두 사람은 그후 30년 가깝게 수천 장의 편지와 연하장, 카드를 주고 받으며 절친이 됐다.
양향자가 2016년 4.13 총선 때 낙선하고 일주일 뒤 인사차 하마다의 자택을 다시 방문했다.
“실망하지 마라. 정치권에 가면 중요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텐데, 이것을 사용하라.”
그렇게 따듯하게 격려한 하마다는 고급 커피 그릇 세트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 세트는 하마다가 30년 전 방한했을 때 삼성 창업자 고 이병철이 그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양향자는 1990년 삼성전자 직원인 부산 출신의 최용배와 결혼에 골인한다.
당시 고졸 여사원은 결혼하면 퇴사가 관례였다. 여상 출신 동기 30명 중 한 명도 남김없이 퇴사했다.
그래도 일을 계속 한 양향자는 딸을 낳기 전엔 출산 전날까지도 일을 계속 했다.
일이 고된 나머지 시댁에 아기를 맡기고 오는 무궁화호 열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
그 전에는 맡길 곳을 찾지 못 해 면회실에 아이를 맡기고 출근한 적도 있었다.
고위 임원 비서의 퇴사로 상고 출신에다 일어 자격증이 있는 그녀를 그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키워준 은인이라고 해야 할 임형규가 "니는 저 자리에 안 맞는다"고 못 가게 했다.
연구원으로 커야 할 사람이 비서로 가면 경력 관리가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성실하고 책임감도 강한 그녀를 개발연구팀에 끌어준 것이 부서장 임형규였다.
그는 나중에 삼성종합기술원장 및 삼성전자 신사업팀 사장을 거쳐 SKT 부회장까지 역임한 바 있다.
거제 출신으로 고교 선배인 그와 나도 몇 차례 술밥을 한 일이 있지만 그때 양향자 얘긴 못 들었다.
양향자는 전문대졸 사원 직급 승진에는 쉽게 성공했지만 대졸 승진심사에선 번번이 떨어졌다.
필기 시험은 붙었지만 면접 시험에서 실수나 잘못이 없는데도 고배를 마셨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퇴사하고 집안 일에나 힘써야..."라는 가부장적 기업 문화가 횡행하던 때니.
면접관들이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승진 시험에서 누락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꾀를 냈다. 면접관에게 할 얘기를 녹음해 몇 번씩 반복하며 들었다.
그리고 잘못된 관행에 대해 면접관에게 직접 얘기하는 용기를 보여줬다.
"오늘 여러분께 면접을 보러 온 게 아닙니다. 만약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닌다고 해
서 이렇게 승진 시험에서 누락시키는 회사라면 제가 회사를 떠나겠습니다. 전 이런
회사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대차게 쏘아붙인 뒤 면접장을 나와버렸다.
그후 승진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나중에 회사 내 엘리베이터에서 면접관이었던 임원들과 마주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양향자를 쳐다보며 "무서운 여자야!"라고 농반진반 인사말을 건넸다.
1991년까지 임형규와 부서원들은 CCD 반도체 소자 국산화를 위해 3년간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그 부서의 말단 연구원 5명 중에 그녀의 이름도 당당하게 올랐다.
양향자는 1993년 1월 SRAM 설계팀 책임연구원으로 승진했다.
삼성전자는 내 사원 교육을 위해 사내 대학을 1990년 설립했다.
양향자도 이듬해 사내 대학에 원서를 냈으나 반려되자 다음 해 또 원서를 내는 끈질김을 보였다.
그러자 '여상 출신이 공학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다시 퇴짜 맞았다.
3번째 원서를 내자 '심사대상이 아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벽은 높았다.
사규상 7년 이상 근속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이라고 명시되어 있긴 했다.
그걸 근거로 따지자 담당 고위 임원이 '전례가 없어 곤란하다'면서 심정은 알겠다고 위로했다.
당찬 그녀는 '전례가 없으면 자신이 선례를 만들겠다'고 우겨서 기어코 입학했다.
들어갈 때는 꼴찌였지만 회사 멘토 선배의 아랫집으로 거처까지 옮겨 틈틈이 과외를 받았다.
그 결과 1995년 몇 번째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2007년 DRAM설계팀 수석연구원으로 승진, 2008년 성균관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도 땄다.
2011년 플래시설계팀 수석연구원 및 부장으로, 2014년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실 상무로 승진했다.
여상 출신, 양향자의 고졸 신화는 땀흘려 배우고, 불합리한 관행에 도전한 용기의 결실이었다.
학벌의, 여성의, 출신의 유리천장들을 깨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쳐 노력한 결과였다.
양향자는 그러나 현실의 벽이 높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정치를 하게 됐다는 거다.
"청년들에게 '나처럼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오늘 열심히 살면 정당한
대가와 성공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스펙은 결론이 아니라 자부
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직장맘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독해지거나 하나를
포기하라'는 것 말고는 없었다. 출산이 출세를 막고, 육아가 경력 단절로 바로 이어지
는 구조를 바꿀 책임이 정치에게 있다."
양향자는 20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광주시장 도전에도 좌절했다.
그러나 광주 서 을에 재수를 해서 6선의 거물 천정배를 무려 75.8%라는 압도적인 득표차로 누르고 당선했다.
그런 경력의 양향자가 19일 대선 패배에 책임져야 할 이재명·송영길 출마와 검수완박의 강행을 비판했다.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복당 철회’ 입장을 밝히는 소신의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내가 돌아가려는 민주당은 지금의 민주당이 아니다. 돌아갈 당은 이제 없다.”
양향자는 작년 7월 보좌진의 성추문 문제가 불거져 민주당을 탈당한 뒤 12월
복당을 신청했다.
양향자의 페북에 올린 복당 거부의 변을 담은 입장문.
“6년여 전 문재인 대통령 손을 잡고 들어온 민주당은 민주적이고 혁신적이었지만,
지금은 민주도 혁신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군대 같다...대선 패배한 당대표
이자 ‘586 용퇴’를 외쳤던 586세대 맏형이 사퇴한지 20일 만에 서울시장 선거에 출
마해도 반대하지 않고, 패배한 대선 후보가 한 달만에 정계에 복귀해 연고도 없는 지
역에 출마하는 이런 기이한 모습에 박수를 친다...지방선거 완패를 막으려면 지금이
라도 송영길·이재명은 사퇴해야 맞는다.”
검수완박 강행과 무책임한 출마 행태를 비판하는 소신을 보인 것이다.
양향자는 강성 지지층인 개딸명파에 끌려다니는 듯한 행태도 비판했다.
“극단적·교조적 지지층은 민주당 외연 확장을 막는 독이다. 지금 ‘개딸’에 환호하는
민주당 모습은 슈퍼챗(유튜브 후원금)에 춤추는 유튜버들 같다...처럼회와 같은 극
단적·교조적 인식을 주는 세력도 외연 확대의 걸림돌이다. 괴물과 싸우다 자신도 괴
물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돌아보기 바란다."
양향자는 “민주당은 국민이 보기에 국민의힘보다 더 정의롭지도 않다”며 “송영길과 이재명, 처럼회의 민주당이 아닌 국민의 민주당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양 의원은 지난 4월 민주당이 검수완박 법안을 강행하는 중 관련 법을 다루는 법사위에 사보임했다.
민주당이 법안 처리 과정에서 그의 무소속 신분을 활용하기 위해 법사위로 불러들이는 꼼수를 쓴 거다.
그러나 양향자는 법안 처리에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내면서 민주당과 대립각을 세우는 강단을 보였다.
당시 “복당 약속도 받았지만, 정치를 안 하는 한이 있어도 양심에 따라 반대하기로 한 것”이라고 했다.
불굴의 정치인 양향자는 빛을 볼 날이 있을 거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야권 양향자, 여권 윤희숙 같은 소신형 여성 정치인에게 희망을 건다.
6.1 지방선거 후 참패에 따른 인책론이 분출할 거야의 분열이 눈에 보인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정치교체 순간이 닥쳐오는 예감이 피부에 와닿는다.
단디합시다!
첫댓글 이야 ~,
- 뜻밖에 = 不屈의 意志 ,
- "양향자 = 國會議員"님,
- 其 間,
- <불같이 살아 오신 삶의 '軌跡'을 읽고>,
☞ 이時間 以後 부텀 : "단디 = <팬>이 되기로 다짐하지 말입니다 !,
☞ '홧팅 !,
- '양향자' 國會議員님 聲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