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해성 감독 설경구 주연의 영화 역도산을 보았다. 한참 멀찍이 떨어져서, 망원경 렌즈를 통해서 한 사내의 파란만장한 흥망성쇠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듯한, 관찰자(감독)의 주관을 최대한 개입시키지 않으면서 편년체식으로 기록한 한편의 인물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다. 이 영화는 영웅만들기도 없고 과장도 없으며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관객에게 요구하지도 않는다.
식민지배를 받는 암울한 나라에서 태어난 야심만만한 한 사내. 성공에 대한 놀라운 집념을 품고 있는 이 사내는 자신의 큰 꿈(그 꿈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역도산 그는 과연 알았을까.)을 성취하기 위해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식민지배를 하는 본국인 큰 세상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는 쓰모에 입문하여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쓰모 선수 최고의 지위인 요코즈나에는 절대 올라갈 수 없음을 깨닫고 크게 낙담한다. 그리고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프로레슬링을 접하게 되고 자신의 인생을 프로레슬링에 걸기로 한다. 그는 일본에 건너오면서 품었던 쓰모에 대한 집념을 프로레슬링으로 바꾸고 프로레슬링을 제대로 배우고자 굳은 각오로 프로레슬링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는 각고의 노력끝에 미국에서 프로레슬러로 대 성공하고 일본으로 돌아온다. 그는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이라는 생소한 스포츠를 인기종목으로 정착시켜가면서 일본인들의 온갖 멸시와 견제를 뚫고, 비범한 두뇌 타고난 집념 피땀어린 노력으로 마침내 일본의 주류사회에 우뚝 선다. 패전후 심리적 공황에 빠져있던 일본인들의 보상심리를 절묘하게 파고들었고 그것을 흥행으로 연결시키면서 엄청난 부와 국민적 영웅이라는 명예를 일궈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대부분의 것을 이루었고 갖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갖게되었다. 그는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성공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켜켜이 누적된 일본 사회와 세상에 대한 불신, 끊임없이 자신을 주시한다고 느끼는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공포감. 자신외에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정서 불안. 그런 공포와 불안을 떨쳐버리려는 듯 타인에게는 언제나 불손하고 기고만장한 생활을 계속하다 우연히 술집에서 마주친 야꾸자 하급 조직원을 술김에 마구 폭행하다 그 야쿠자가 휘두른 칼에 찔려 허망하게도 삶을 마무리한다. 그의 나이 설흔여덟살.
영화 역도산은 감독 송해성의 작품이 아니라 배우 설경구의 작품이다. 픽션을 보태지 않아도 소재 자체가 영화화 하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는 역도산은 어떻게 보면 감독의 개입여지가 무척 적은 작품일수 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송해성 감독은 관객의 심미안을 과신하는 것인지 절제의 미덕을 신봉하는 것인지 많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색깔을 죽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황석영은 최근 자신의 이름으로 삼국지를 펴내면서 “원전의 뜻을 있는 그대로 살리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말했다. 기존의 삼국지처럼 작가의 주관적 해석을 될 수 있으면 안하고 원전의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는데 비중을 두겠다는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드는 생각은 그런 것(번역에 가까운 것)은 창작 소설가인 당신의 몫이 아니라 중국어를 전공하는 학자들의 몫이라는 것이었다. 소재(역도산)나 원전(삼국지)에 가깝게만 연출하고 쓴다면 감독이나 필자의 역할은 미미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파이란의 송해성이라는 브랜드 때문에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감독의 색깔이 너무 옅은데 대한 아쉬움이 많을 작품이지 싶다..
한편 단언컨대 설경구는 이 영화를 통해 최민식 송강호 안성기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의 특급배우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동안 특급배우로는 2%정도 부족해 보였던 그는 이 영화에서 ‘특급배우‘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5개월여 만에 몸무게를 25kg을 늘였으면서도 그의 몸은 잘 다듬어진 근육덩어리이다. 그는 카메라 트릭이 전혀 없다는 레슬링 액션신에서 진짜 프로레슬러들의 테크닉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기술들을 완벽하게 구사한다. 그는 콤플렉스와 모사 야망과 탐욕이 머리와 가슴에서 쉬지 않고 충돌하는 다중인격체였을 역도산의 표정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설경구가 지어내는, 비열해보이면서 잔인해 보이고 거만해 보이면서도 두려움을 숨기고 있는 그런 복합적인 표정은 바로 살아 생전의 역도산의 실제 표정이었을 것으로 믿게끔까지 한다.
역도산의 뒤를 봐주면서 역도산에게 온갖 후원을 아끼지 않는 후원자로 나오는 칸노역의 일본배우 후지 타츠야는 깊이있고 원숙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는 감정을 분출하지 않으면서 충분히 자신의 감정을 느끼게 하며 극도로 절제하는 연기를 하면서 절제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연기의 최고 미덕인, 배역과 배우가 한 사람인 듯 한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역도산은 100억원이 훌쩍넘는, 우리나라 영화계에서는 보기드문 거액이 투자된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한다. 그러나 영화 초반부, 일본을 폭격하기 위해 등장하는 미국의 폭격기 등장 장면은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게 누구라도 알 정도로 조잡하며 역도산이 미국에서 프로레슬러로 대성하는 과정은 역도산 관련기사가 실린 미국 신문들을 나열하는 진부하고 유치한 방식으로 대체된다. 영화 내용의 몰입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과정들이 무성의하게 생략해 버린 것은 적지않은 흠결이다.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 가슴에, 오로지 "내가 잘먹고 잘살면 이루는, 언제나 마음껏 웃으면서 살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는 것이 성공"이라는 천민 자본주의의 원형질적 성공신화 하나만을 품고 질풍노도처럼 살다간 한 사나이의 생애를 그린 영화 역도산. 내가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자리에 앉아있었던 이유는 역도산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찾아다녔던 그리고 마침내 성취했던 그리고 결국은 그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그 성공이라는 것의 실체는 과연 무었이었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의 냉혈한 촉수가 공기처럼 세상 모든 곳에 퍼져있는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그 성공신화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 같은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의 기준에 부합할 가능성이 별로 없어보이는 나의 초라한 모습이 딱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첫댓글 좋은 감상기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전문 평론가의 수준을 능가하고 있네요. 깊고 넓은 식견에 그저 탐복 ...
설경구가 한달에 10Kg을 늘렸다는것외엔 별 관심사가 없어서 안봤는데.. 상섭님의 다양한 관심사에 놀랄.. 물방울 소리..^^*
모처럼 좋은 영화 후기를 읽은 느낌 ! 역시 상섭 !!!
영화 역도산 돈않들이고 다보았네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