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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연대 동덕님들께 뒤늦은 감사인사 드립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환원하시는 길에 함께 해 주신 동덕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두 차례나 저녁 9시 기도식을 각각 집례 해 주신 이윤영동덕님, 임우남 동덕님. 멀리서 장례식장 천도용품들을 싣고 왔다가 그냥 가져 가셔야 했던 정덕재동덕님. 노구(?)를 이끌고 오셔서 파안대소로 분위기를 산뜻하게 만들어 주신 이우원동덕님. 몸과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을 가슴에 담습니다. 새깁니다. 모십니다.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조문 오신 방명록 명부도 이제 훑어보려고 합니다. 흔히 장례 끝나고 조문 오신 한 분 한 분께 문자라도 보내는 법인데 전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잘 환원(천도) 해 드리느냐에 생각이 모아졌고, 어머니 성령출세 길을 잘 안내 해 보는 것이 조의를 표해 주시고 어머니의 환원(천도, 귀천, 귀의)을 기원하시는 분들에 대한 가장 큰 답례라 여겼습니다.
삼우제를 끝내고 어머니 위패와 영정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49일 기도를 하면서 매일 매일 해당되는 <티벳 사자의 서>를 읽어드립니다. 영정 사진 옆에 있는 것이 제가 출력 한 해당 경전입니다. 죽은 자들이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경전입니다. 이 경전에 대한 저의 신뢰와 다른 경전의 사후세계 설명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 하고자 합니다. 제 안에서 통합되어 있습니다. 의암성사의 <성령출세설>과의 위상도 나름대로 정리 해 봤습니다.
<티벳 사자의 서>원문에는 어색한 글귀가 있어 제 처지에 맞게 고쳐서 재 작성했습니다. 예를 들어 "오. 고귀한 집안의 자손이여"를 저는 "아. 어머니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라고 말입니다. "그대"도 "어머니"로 고쳤습니다.
저는 청수 대신 매일 아침저녁, 깊은 향기 가득 담아 보이차를 올리고 있습니다. 어머니 성령출세의 길목 밝히는 등불 되라고 정성 모읍니다.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우고 촛불을 붙입니다. 밥 공양 하다가 차 공양으로 합니다. <지유명차>의 좋은 차를 구했고 찻잔도 좀 큼직한 것으로 샀습니다. 몸과 영을 가볍게 하는 차가 좋다는 말을 듣고서입니다.
우리 고대의 가르침에 의하면 돌아가신 날로부터 20일까지와 49일까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윤중선생님이 일러 주신 말씀에 따르면 사후 20일까지는 상주나 지인의 정성에 많이 의지하여 <바르도의 길>을 가신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성령출세의 구체적인 행로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은 공을 들이는 사람들의 공덕에 의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다고 하는데 19일째 되는 날부터는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초에니 바르도>의 단계를 지나서 환생의 길을 찾는 단계인 <시드라 바르도>의 과정이 시작되는지라 20일 째부터는 스스로의 능력과 지혜로 그 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49일째 비로소 최후 심판의 자리에 든다고 하며 그 때를 저는 성령출세일로 이해 해 봅니다. '천도'하는 날이라 하기도 하는데 천도제는 아무나 해서는 효험이 없고 공덕이 높은 스님이나 도인이 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49일 째 되는 날 저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신 13일째인 내일부터 20일 되는 날까지는 화악산수도원에 들어가서 집중 기도를 하려합니다. 내일 오후, 수운회관 토론회에 참석도 하려 합니다.
한 령이 어떤 미련도 안 남기도 다음 세상으로 잘 가시는 성령출세의 완성은 가까이는 가족과 친인척, 멀리는 인류의 행복에도 연관 되어 있다고 여기므로 이렇게 하고자 합니다. 작은 생물 하나도 억울함이 쌓이고 분노가 생기면 그것은 만물만생의 안녕을 해친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집중 기도는 아들이 간곡히 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연히 말년 휴가를 나온 아들이 할머니 병문안을 왔다가 임종 때까지 할머니를 지켰습니다. 뒤에 소개 하겠지만 어머니 임종 뒤의 제 점괘와도 아들의 권유는 상당히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 장례가 끝나는 날 저는 두 곳으로 부터 의미 있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담담하게 잠시 뒤로 미룰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매우 편안한 임종을 맞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와 제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한 얼굴로 가셨습니다. 전날 밤을 꼬박 새운 제가 오후에 네 시간 가량 어머니 침상 아래서 골아 떨어졌는데 제가 깨어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곁에서 할머니를 돌보고 있던 아들 새들군이 늦은 저녁을 먹자며 밖에 김밥을 사러 나갔는데 어머니는 또 기다려주셨습니다. 할머니 곁을 지키던 새들 군이 내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자 밖에 나가서 김밥을 사 가지고 들어오고 우리 부자가 먹을 준비를 할 때 어머니는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 김밥은 나중에 장례식장 가면서 밤참으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전날과 그날 오전에는 손자와 손자며느리 아들 딸 모두 와서 병문 했고 그 과정에 어머니가 내내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뜨셔서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장례식장으로 모시기 전에 새들이 엄마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어떤 실무도 놔두고 어머니 곁에서 기도하였습니다. 흔히 운명을 하면 부산하게 장례절차와 주변 연락과 병실 정리 등 정신이 없는데 우리는 그렇게 안 하고 어머니 곁에서 장례지도사가 올 때 가지 꿇어 앉아 기도했습니다.
전북대 장례식장으로 가서 가족들이 속속 도착하는 새벽녘까지도 역시 그렇게 했습니다. 임종 후 사흘 동안은 <치카이 바르도>의 상태에 머물면서 어머니가 당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계속 기도하고 해당되는 경을 읽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잘 넘게 하는 염원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병실에서부터 <성령출세설>을 여러 부 인쇄 해 두고 읽어드렸는데 장례식장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장례식장은 평소 마음 먹은 대로 어머니를 추모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사진을 주제별로 벽에 붙이고 어머니 약력이랄 것도 없는 약력을 써 붙이고 저녁 7시 추모제를 두 차례. 저녁 9시 천도교식 <청수봉전 기도식>을 두 차례 했습니다. 이미 장성한 조카들의 손과 발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장조카는 55세 입니다.
가족 중에 기독교인이 있어 목사님과 상의하여 추모 예배도 봤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음식재료를 유기농재료로 할 예정이었는데 잘 되지 못했습니다. 원래 장수의료원에서 6일 동안 영양제를 맞으며 입원 해 있을 때는 곁에 있는 장수장례식장에 모시게 될듯하여 미리 상담을 잘 해 두었습니다.
일회용품 전혀 쓰지 않는 대신, 주방에서 일하는 분을 두 배로 늘였고(그릇을 회수하여 닦아야 하니까), 장수친환경영농조합에서 일체의 식재료를 가져 와 쓰기로 했고, 특히 제가 가입 되어 있는 <한겨레 상조협동조합>과도 그렇게 의견을 나눴습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 장수장례식장 측과 협상이 잘 되어 너무 기뻤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머니가 임종하신 때는 장수장례식장이 꽉 차서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바로 전날 상담 할 때는 텅 비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주에 있는 전북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오게 되면서 새로 상담을 시작했는데 그게 전혀 불가능한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래서 상조협동조합과 전북대장례식장측과 같이 의논하여 일회용품을 쓰되, 분해가 되는 친환경 일회용품으로 하고 음식이 남지 않게 하는 등 실무적인 상담을 했습니다.
어머니를 추모하는 여러 진행에서 천도교 한울연대와 서울 **교회, 동학혁명기념관장 이윤영동덕님. 그리고 나의 오랜 벗 김재형선생과 김경미선생, 이종혁군의 노력과 정성이 컸습니다. <부모를 모시는 사람들> 회원들입니다. 이건열님과 백은주님은 상주보다 더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김재형선생은 특히 장례절차가 모두 끝날 때까지 여러 실무진행을 도맡아 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점괘를 잡아 주었는데 매우 귀한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제 점괘는 역경의 64괘 중 <수택절> 괘입니다.
장례식장에서의 두 번째 추모식 때 있었던 일화가 기억납니다. 내 오랜 벗이자 경남민예총 대표를 했던 김유철님이 한 말입니다. 유명한 사람들이나 정치인들만 추모제를 하는 줄 알았는데 시골 할머니도 추모제를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런 말씀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에 오면 막상 고인이 누군지 어떤 분인지 어떻게 사셨던 분인지 전혀 모른 채 지나가기 쉬운데 약력까지 써 붙이고 사진 전 하듯이 고인의 생전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여 주니 고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고.
아마 어머니도 좋아 하셨을 겁니다. 약력이랍시고 써 붙인 어머니 약력은 언제 태어나고 몇 남매 두셨고 친정이 어디고 언제부터 치매를 앓으셨고...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만 써 붙이고 나니 보기 좋았습니다. 벼슬자리 하나 한 적 없으나 한 사람이 살아 온 족적은 경중을 따질 수 없이 존귀하고 소중하지 않을까 합니다.
장례식장 입구에 날짜별 시간대를 적어서 추모예배, 기도식, 추모제 등을 공지해서 함께 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잘 된 셈입니다.
이제 늦었지만 문상 해 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한 분 한 분께 깊은 인사를 드립니다. 죽음을 통해 우리는 삶의 진면목이 뭔가 하고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어머니의 하늘 길 여행에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신 분들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49일 되는 때에 자리 한 번 마련 해 볼까 합니다. 목암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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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생 크셨습니다.
고생하시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