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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이 12살이 되었다. 집안에서는 이병철을 서당에서 배우는 것을 중단시키고 신식학교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도록 결정했다.
1920년대는 비교적 큰 면사무소 단위로 일본식 신식학교 즉, 초등학교 과정의 학교가 생겨나기 시작한 시기이다. 한문 공부를 중단하고 신식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이병철은 어디로 진학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한문공부 중단하고 초등학교 진학 결심
시집간 누나집서 6개월간 학교 다녀
1학기 마치고 서울 외가댁 근처로 전학
매형 허순구, 진주 최초 백화점 세워
대구 삼성상회 설립·국악 발전 기여도
당시 이병철의 집이 있는 정곡면에는 학교가 설립되지 않았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의령읍내에는 1910년 개교된 의령초등공립보통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정곡 집에서 학교까지는 왕복 50리길로, 걸어서 통학하는 것은 매우 먼거리이다. 조금 더 멀리 보면 진주 시내에 몇 개의 학교가 있었지만 초등학교 입학하는 아이가 부모의 보살핌도 필요한 나이인데 친척이나 형제가 없는 곳에서 학교에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곳은 시집간 누나 집 근처에 있는 진주의 지수보통학교였다. 이병철의 형제자매는 위로 형과 누나 두명, 모두 2남 2녀이다. 둘째 누나 이분시가 지수면 출신 허순구와 결혼하여 지수에 살고 있었다. 이병철은 시집간 누나 집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하고 13살이 되던 해인 1922년 3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을 했다. 지금의 초등학교는 8살에 입학을 하고 13살이면 6학년 졸업반 나이가 된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20~1930년대는 학교 교육정책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이다. 초등학교 1학년에 15살 입학생이 있는가 하면, 농사를 짓다가 20살이 될 때 신식학문을 배우러 온 경우도 있다. 심지어 삼촌과 조카가 같은 학년으로 공부한 사례도 많이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당시에는 조혼풍습이 남아있어 LG그룹의 구인회 회장과 효성그룹 조홍제 회장은 결혼을 하고 초등학교 과정에 다닌 집안의 가장이자 동시에 초등학생이었다.
이병철이 지수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생활한 매형 허순구 고택. 왼쪽엔 이병철과 지수초에서 함께 공부했던 구인회의 고택이 보인다./경남신문 DB/
서당에 다니던 이병철의 두발은 유교 집안의 전통 그대로 댕기머리였다. 신식학교에 입학조건의 하나가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이었다. 이병철 역시 서당에 갈 때마다 어머니가 손수 땋아 주셨던 긴 머리를 지수에 있는 이발소에 가서 잘라버렸다. 의령 중교리보다 큰 마을인 진주 지수면과 지수보통학교의 생활을 매우 만족하게 보냈다. 그 소회를 이병철은 “공자는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다고 했고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했다”고 하였다.
이병철은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이용하여 고향 중교리에 머물던 중 서울에서 내려온 재종형을 만났다. 재종형으로부터 서울 이야기를 들은 이병철은 서울로 가서 공부하기로 결심을 하고 서울 가회동 외가댁에서 멀지 않은 수송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이병철의 지수초등학교 인연은 1922년 3월 3학년 편입부터 9월까지 약 6개월 정도 재학한 것이 전부이다. 이 시기 초등학교는 4년제이다. 이병철이 전학을 가지 않고 계속 다녔다면 지수면 출신 구인회 LG그룹 회장과 함께 1924년 4월 지수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 된다.
지수초 전경. 1921년 개교 당시에는 1층 단층이었으나 6·25전쟁으로 파괴되어 그 후 신축했다./연암재단/
그리고 1923년에는 이병철이 태어난 의령 정곡면 집 앞에도 정곡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됐다. 이병철이 1년만 늦게 소학교에 진학해 1923년에 개교한 정곡공립보통학교에 입학을 하였다면 이병철의 사업철학과 사람과의 인연은 어떻게 흘렀을까? 만약 이병철이 서울로 전학을 가지 않고 정곡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가서 학교를 다녔다면 이병철의 세상을 보는 시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연은 이렇게 순간적이거나 운명적으로 만들어지고 비껴가는 것 같다.
# 이병철과 부인 박두을에 대한 구전
인연과 운명과 관련, 이병철과 부인 박두을 여사에 관한 구전이 각각 한가지씩 있다. 이병철이 서당에서 한자를 배우던 시기에 부친을 만나러 온 유명한 관상가가 이병철이 노는 모습을 보고 “이 아이는 학문과는 거리가 먼 것 같소. 학문 외 다른 분야에서 크게 이름을 떨칠 것이니 이 아이가 하는 대로 지켜보시오”라고 했다.
이병철은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경북 달성군에 살고 있는 박두을(1907~2000) 여사와 결혼했다. 박팽년 후손들의 집성촌인 달성군 하빈면에 한옥마을과 박두을 여사 고택부지가 있다. 이곳 고택 부지에는 “구전에 의하면 유년 시절 여사의 관상을 본 한 스님이 왕비가 아니면 거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 라고 한 안내 표지판이 있다.
# 달성군 하빈마을과 박준규 국회의장
9선의 국회의원과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최초로 국회의장을 세 번이나 한 박준규(1925~2014)가 달성군 하빈면 출신이다. 이곳은 박팽년 후손이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 한옥마을이 예사롭지 않다. 마을 입구부터 밝은 기운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필자의 글재주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표현할 방법이 달리 없으니 독자 여러분이 직접 가서 보고 판단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이병철의 부인 박두을은 박준규의 당고모이다. 당시 박준규의 아버지는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이병철이 대구에서 사업을 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 어머니 박두을 여사가 “의령으로 시집을 와서 보니 네 아버지(이병철) 살림이 너무 작다”고 하였다. 이병철 집안도 의령의 천석꾼인데, 이 살림을 보고 작다고 하였으니 달성군 하빈면 박씨 집안의 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 허순구와 진주 경제사
이병철의 누나 이분시와 결혼한 매형 허순구(1903~1978)는 1922년 3월부터 그해 9월까지 지수초등학교 3학년인 처남 이병철을 데리고 함께 생활했다. 허순구는 일반 대중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걸어온 길을 보면 실로 엄청나다. 허순구는 한국의 국악계는 물론 대구, 진주의 경제사를 비롯, 삼성의 기업사, 한국 경제사에 빠트릴 수 없는 기록을 가진 분이다. 1927년 진주에 백화점의 효시인 문성당백화점을 운영했다. 그 후 대구로 가서 처남 이병철과 함께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대구 삼성상회 설립을 주도했다. 대구 풍국주정공업을 운영했고 부산 삼성물산공사,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삼성그룹의 기업설립에 많은 역할을 했다. 제일제당 설립 발기인으로 10%의 인수주권을 가질 정도로 재력 있는 사업가였다. 인생 후반부는 대구에서 국악 관련 풍류방을 운영하면서, 국악인들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 소장한 국악 악기와 악보 유품을 국립국악원에 기증한 풍류가이자 문화선각자로 한국의 국악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세 아들 중 차남 허병천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대학 재학 시 옆자리에 앉아 함께 공부한 친구이다.
서봉 허순구가 편찬한 국악보./이병천/
허순구가 국립국악원에 기증한 경주 최부자가 사용한 거문고./국립국악원/
<이병철의 한마디>?경험은 돈으로 구입할 수 없다. 실패한 경험도 중요하다. 왜 실패를 하였는지 반드시 분석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실패한 경험도 언젠가 소중한 경험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병철은 지수보통학교에서 3학년 1학기를 공부한 후 더 넓은 세상에서 배우고자 1922년 9월 서울 수송공립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이 시기 고향 의령 정곡면에는 정부 교육령에 따라 1923년 4월 개교를 위한 정곡보통공립학교 신축공사가 한창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6개월의 기간 차이로 인해 이병철과 정곡보통학교와의 인연은 맺어지지 않았다.
수송보통학교는 서울 가회동에 있는데 이곳과 가까운 곳에 외가가 있어 이병철이 학교에 다니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서 밝히기를 “서울에서 학교성적 중 산술성적은 학급에서 상위점수를 받았고 그 외 다른 과목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학급 석차도 50명 중 35등에서 오르내렸다”고 한다. 4학년이 되자 이병철은 보통학교에서 배울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보통학교 과정을 단기간에 마칠 수 있는 중동중학교 속성과에 가서 공부할 결심을 하고 1925년 4월 중동중학교 속성과에 편입했다. 중동중학교 속성과는 1년 만에 보통학교 5, 6학년 과정을 공부하는 곳이다. 여기를 수료해야만 중학부에 입학이 가능했다.
속성과를 마친 이병철은 이듬해 1926년 4월 중동중학교 본과(5년제)에 입학을 했다. 중동중학교 과정도 이병철에게 큰 기대를 주지 못하였는지 4학년까지 재학한 후 중퇴를 했다. 한편 이병철은 중동중 재학 때 선친의 뜻에 따라 17세 때 결혼을 했다. 당시에는 조혼의 풍습이 남아있던 시기이고 특히 유교 집안은 대부분 조혼을 거부하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중동중 재학 중 방학이 되자 고향에 내려온 이병철은 아버지에게 유학을 가겠다는 결심을 전했다. 아버지는 “어떤 일이든 성급히 뛰어들지 말거라. 일을 무리하게 처리하려 해서는 안된다. 무슨 일이든 결국 옳은 이치대로 돌아가는 법이다.” 사필귀정을 인용한 훈시를 강조하면서 일본 유학을 허락한다.
이병철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이병철의 학교 이력은 조금 특이하다. 지수보통학교, 수송보통학교, 중동중학교, 와세다 대학 등 학교를 4곳이나 다녔지만 모두 전학이나 중퇴, 수료라 졸업장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외가가 있던 가회동서 수송보통학교 통학
1925년 중동중 속성과 편입 후 본과 입학
1930년 日 와세다대학 정경과 들어갔지만
각기병 걸려 2학년 중퇴… 다시 고향으로
20대 중반이었던 1934년 사업 투신 결심
1923년 의령 이병철의 생가 인근에 설립한 정곡보통학교의 1928년 졸업사진 풍경이다. 보통학교 학생들이 모자를 쓰고 한복 두루마기 복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인 교사인 듯 제복차림에 긴 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의령 정곡초등학교/
# 일본 유학, 그리고 귀국
1930년 4월, 이병철은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경과(정치·경제)에 입학을 했다.
자서전에는 지수보통학교, 중학교 등 학교를 전전하면서 착실하게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뒤늦게 일본에서 대학교 생활과 공부에 몰두했다. 책도 많이 읽고 난생 처음 진지하게 책과 사귀고 사색에 잠겼던 시기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던 이병철은 뜻하지 않게 각기병에 걸렸다.
휴학하고 여러 가지 치료를 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결국 일본에서 치료도, 유학 생활도 단념하고 1931년 9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와세다 대학 2학년 중퇴이자 이병철에게는 마지막 학교생활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병철은 중교리의 맑은 산세와 편안한 가정에서의 생활로 병도 치유되고 건강도 회복했다. 1934년 10월 이병철은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자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었다. 관공서 관리가 될 것인가,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고민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본인 스스로 성격에 가장 알맞다고 판단한 ‘사업’에 그의 인생을 투신하자고 결심을 한다.
“아버님 사업을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보통학교 학생용 산술(산수)교과서
해방 이후 미군정기 교과서
건국 이후 경상남도에서 발간한 교과서
이병철이 보통학교 3학년 때 배운 것으로 보여지는 산수 교과서로 일본어로 되어 있다. 시대별 교과서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김영구 수학교과서연구소/
# 이병철과 중동학교 인연
중동학교는 1906년 4월 관립 한성한어학교로 출발해 1919년 사립중동학교로 개칭했다. 지금 중동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이병철은 1994년 6월 본인이 다녔던 중동중학교와 중동고등학교를 인수했다.
11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동고등학교는 삼성그룹의 지원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명문 사학으로 성장했다. 졸업생으로는 안호상, 윤치영, 양주동, 이희승을 비롯하여 소설가 김지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 탤런트 정동환, 이병헌, 정치인 김무성, 문국현, 오세훈 현 서울시장 등 역사가 긴 만큼 졸업생의 구성도 다양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가려면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부관연락선을 타야만 했다. 수십만명을 실어 나른 만큼 사연도 많다. 이러한 사연을 바탕으로 작가 이병주는 ‘관부연락선’을 출판했다. /부산역사문화대전/
# 부관(관부)연락선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로 시작하는 ‘사의찬미’ 노래를 불렀던 윤심덕이 현해탄(대한해협)에서 투신자살했다. 당시 타고 있던 배가 관부연락선이다.
1920~1930년대 일본 동경을 가는 유일한 방법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가서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산과 시모노세키간 왕복하는 배를 부관(관부)연락선이라 한다. 1905년 9월 25일 첫 취항했다. ‘부관(釜關)’이라는 이름은 부산의 앞글자(釜, 부)와 시모노세키(下關, 하관)의 뒷글자를 딴 것이다.
1929년 10월, 이병철은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지금이야 부산에서 비행기로 시모노세키까지 1시간 만에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지만 당시에는 11시간이나 소요됐다. 당시 한일병합 후 일본에 가는 조선사람은 1920년대 후반 15만명 정도였다. 이병철처럼 유학을 가거나 돈을 벌기 위해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1936년에는 약 70만명이 부관연락선으로 일본에 갔다.
1968년 4월부터 약 2년간 중앙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중앙에 일제 강점기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운항하던 연락선을 주제로 한 장편 소설이 작가 이병주가 쓴 ‘관부연락선’이다.
# 이병철의 중동학교 수학선생 이상익
이병철은 1925년 4월 중동학교 속성과, 1926년 4월 중동중학교 본과에 입학을 했다. 이병철은 학교성적 중 산술(산수)과목은 학급에서 상위점수를 받았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중동학교 재학 시기에 이병철에게 수학을 가르친 교사가 ‘근세산술(산수)’을 집필한 이상익 선생이다. 이상익은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이상설의 동생이다.
1907년 6월 15일,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과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세분의 특사를 보냈다. 그중 한 분이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이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지만 교육자, 수학자이기도 하다. 이상설 선생은 근대 수학을 정리한 ‘수리’와 ‘산술신서’를 저술했다. 이상설 선생의 증손은 “이병철이 학창시절 수학과 과학을 잘하였다는 이야기를 집안 어른으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이병철의 수학적, 과학적 사고에 기반하여 미래를 바라보는 지혜로움이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고 언급한 이야기도 있다.
<이병철의 한마디>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느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