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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묵상글 (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 기껏 사랑하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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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19 04:28
- 기껏 사랑하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오늘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랄까 단계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복음에선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라고 달리 말씀하십니다.
둘을 합치면 완전한 사람이란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고,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부족을 하나하나 메꿔가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십계명의 대인 계명 준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대인 십계명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 외에 나머지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처럼 다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이것도 이웃 사랑이긴 하지만 소극적이고 그래서 부족하지요.
그래서 대인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부자에게 더 적극적인 사랑을 주문하십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이 말씀만 가지고는 팔아서 다 주라는 것인지 일부만 주어도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폐나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이웃 특히 가난한 이웃에게 보탬이 되는 적극적인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완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직 아닙니다.
이것을 다 했어도 마지막 한 가지 곧 주님을 따르는 것,
이걸 하지 않으면 작은 것 하나 놓친 것 정도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불완전입니다
사실 앞의 모든 것 곧 대인 십계명의 준수, 자기 소유물의 포기, 이웃을 위한 자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하고,
그래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곧 주님 따름, 이것을 위한 것이니
아무리 앞의 것들을 모두 다 했어도 이것을 하지 않으면 다 헛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잘못은 가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않은 것이고,
가장 잘못한 것은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것은 다 천국 가기 위한 것이고
천국 가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단한 사랑을 했지만 인간적인 세상 사랑에 그치는 사랑,
그래서 기껏 사랑하고도 천국에 가지 못하는 사랑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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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동네 산책을 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비둘기, 까치 등의 새를 쉽게 볼 수 있는데, 사람이 바로 옆을 지나가도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둘기, 까치가 애완동물처럼 키우는 것도 아닌데, 야생동물이라 할 수 있는 이 새들은 도망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새들도 사람들이 자기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섬에 들어가기 위해 배를 탔는데 기러기가 계속 배를 쫓아옵니다. 사람들은 갑판에 모여 기러기를 향해 새우깡을 던져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우깡에 맛을 들인 기러기는 다른 먹잇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또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노력 없이 편한 방법으로 먹이를 구하는 그 모습이 걱정되었습니다. 실제로 먹이 주는 사람이 없어져서 자생능력이 없어진 기러기들이 죽는다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나 지인에게 계속 도움만 받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두 번이야 도울 수 있겠지만, 계속된 도움 요청이 있다면 서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계속 도와주어야 하느냐며 화를 낼 수 있고, 또 반대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도움 요청을 외면할 수 있느냐면서 화를 내면서 상대에 대한 상처의 골이 커지기만 할 것입니다.
도움에만 의존하면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무조건 우리의 도움을 다 들어주신다고 믿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성장을 위해 당신 손길을 거두시기도 합니다. 진짜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밖에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다시 묻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재산을 포기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그가 슬퍼하며 주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계명을 모두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열심히 살고 있던 젊은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예수님께 자랑하듯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본인의 결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젊은이가 예수님을 곧바로 따를 수 있도록 재산을 모두 없앨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알아서 모든 것을 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야 그가 진정으로 성장하면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결단에 대해서 묵상했으면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떤 결단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알아서 해달라면서 자신이 선택하고 해야 할 것을 주님께 미루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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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어떠한 일도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알의 과일, 한 송의 꽃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무의 열매조차 금방 맺히지 않는데 하물며 인생의 열매를 노력도 안 하고 조급하게 기다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에픽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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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 오늘의 말씀(8/19일) : 올리베또 연합회 창설자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대축일 : 요한 15, 9-17
“더 큰 사랑을 위하여”(Maiorem caritatem), 이는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시성 교황교서[사도좌 편지]의 제목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오늘 <복음> 중에 나오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씀입니다.
“더 큰 사랑”이란, 진정 어떤 사랑인지, 성인의 삶이 어때했는지를 교종 베네딕도 16세께서 성인의 시성식 때 하신 <강론>에서 잘 말해줍니다.
다음은 시성식 때 하신 교종의 강론 말씀 중의 일부입니다.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안에서, 기도와 노동을 통하여 사랑의 열매가 열렸습니다. 그의 존재는 성찬례와 같았고, 그의 삶은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로 이끄신 하느님 관상에 완전히 바쳐진 삶이었습니다. ~그는 1348년 큰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수도승임에도 불구하고, 병에 전념된 그의 수도승들을 돌보기 위해(시에나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머물기 위해) 몬떼 올리베또의 고독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전염병의 희생물이 되어, 사랑의 확실한 순교자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인의 이 모범으로부터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으로, 최고의 희생으로 준비된 사랑으로, 그리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삶으로, 우리의 신앙이 인도되도록 우리에게 초대장이 도착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표현이 있습니다. 곧 ‘기도와 노동’,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 ‘하느님 관상에 바쳐진 삶’, ‘사랑의 순교자’,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 ‘희생으로 준비된 사랑’,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음을 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조화는 결코 이론적인 숙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애덕적인 삶의 실존적인 실행’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봅니다. 또한 이러한 애덕의 삶은 무엇보다도 ‘기도와 더불어 실현된 삶’임을 봅니다.
성인께서는 <편지 1>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덕들의 어머니는 애덕(사랑)이며,
동시에 이 애덕(사랑)을 발견하고 지키는 것은 기도입니다.”
성인께서는 ‘모든 덕들이 사랑에 달려 있다.’고 하십니다. 모든 덕들이 사랑에서 태어나며, 그 ‘사랑을 발견하고 지키는 것이 바로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기도하셨으며, 당신에게 있어서 ‘기도’와 ‘삶’은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차고 넘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는 <편지 39>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애덕(사랑)은 늘 봉사에 봉사를 더하는 모습으로 자기를 들어냅니다.”
이는 사랑은 결국 형제들에 대한 ‘봉사’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곧 형제에 대한 봉사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죽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지금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지금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 보면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인께서는 실재로 페스트로 죽어가는 형제들에게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의 봉사’였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순교’였습니다. 진정, 그분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말씀을 온 몸으로 사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참으로 ‘애덕의 부추김으로 고무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편지 8>에서 이렇게 말한다.
“애덕의 부추김으로 고무된 사람은, (곧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성경>의 증언을 따르는 사람은) ‘소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 천상공동체의 지극히 거룩한 사랑을 통해서 모든 선한 것들을 얻습니다. 이 사랑에 의해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만들어졌고, 이 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아름다운 방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만일 당신이 땅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땅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늘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이 아름다운 방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사랑으로만이 우리는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오로지 사랑으로만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되고,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이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그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 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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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강론>
오늘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해 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은 <루카복음>(10,25)에서는 율법학자가 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그는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혹시 우리도 그렇게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 어떤 공로를 쌓고 그 공로의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여기지는 않는지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마태 19,17)
생명을 얻는 길이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곧 ‘주님께 속한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길은 ‘행위’를 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되는 데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러한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이 말씀은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자신이 가진 재산을 팔라”,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 그리고 “당신께로 오라”,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네 가지 행동의 실행으로 알아듣기 쉽습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더 깊은 차원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네 가지를 통한 ‘행동의 전환’을 말씀하고 계신다기보다,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존재의 전환’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곧 이 문장의 핵심은 뒤 구절에 있습니다. 뒤 구절은 당신께로 와서 당신을 따르는 존재, 곧 ‘당신께 속한 사람’, ‘당신의 소유’가 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 구절은 그러한 존재가 되는 전제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자청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쥐락펴락하는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기의 재물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고, 재물을 따랐던 것입니다. 곧 자신이라는 우상, 재물이라는 우상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존재적 전환을 요청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그 부자 청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를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태 19,22)
오늘 우리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청년처럼 머뭇거리고 주저하다가 슬퍼하고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무슨 위대한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소유, 주님께 속한 존재가 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주님! 주님께서는 저의 허울을 벗기십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이기심의 옷을 벗기십니다.
이제는 이기심과 자애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나누게 하소서.
나아가, 낮은 이를 섬기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던 당신을 위하여 하고, 당신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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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를 옭아매는 것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돈 때문에 형제 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싸우는 사람들의 추한 모습을!
주목할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로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공로로 구원을 얻지 않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으로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재물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을 지니면 지닐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다 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먼저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옭아매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만을 갈망하여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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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에서 감동을 주는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2009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퍼져나갈 때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처럼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사스에 걸리면 사망률이 높았습니다. 딸이 사스에 감염되어서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딸은 아이를 가진 산모였습니다. 산모의 남편은 딸과 함께 임진 중에 있는 아이도 하늘나라로 보내자고 했습니다. 엄마도 사위의 의견에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의료진은 산모가 2달만 버텨주면 아이는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산모는 그렇게 2달을 버텨 주었고, 드디어 아이는 태어났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산모는 모든 힘을 바친 후에 하느님께 갔습니다. 의료진과 아이와 산모를 위해서 기도했던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산모의 남편과 산모의 부모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어느덧 중3이 되었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닙니다. 생사불이(生死不二)입니다.
음악인 노영심씨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노영심씨는 2009년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선종하신 후에 추모 음악회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처음 나온 기획안은 예술의 전당에서 음악회를 개최하는 안이었다고 합니다. 비용은 5,000만 원 정도였다고 합니다. 노영심씨는 김수환 추기경님을 추모하는 음악회를 좀 더 의미 있게 하고 싶었고, 전국 교도소를 순회하면서 음악회를 개최하는 안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한 번의 음악회도 좋지만 김수환 추기경님의 추모 음악회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준비 위원회도 그 안을 받아들여서 전국 교도소를 순회하면서 음악회를 하였고, 서울에 와서 사형제 폐지 음악회로 마무리 했다고 합니다. 노영심씨를 잘 모르지만, 노영심씨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도소와 세상도 둘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밭에서 같이 자라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악불이(善惡不二)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미래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과거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의 차원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존재의 차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바로 지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지금 감동이 없다면, 지금 기쁨이 없다면, 지금 감사가 없다면 영원한 생명은 허상(虛像)일 뿐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옷’이라는 이야기를 남겨주었습니다. “그대의 옷은 그대의 아름다움은 많이 가리면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가리지 못하는 것. 그대는 옷으로 개인의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갑옷이 되고 사슬이 됨을 깨닫게 되리라. 그대가 옷을 좀 덜 입고 살을 좀 더 내놓아 태양과 바람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생명의 숨결은 태양 속에 있고, 생명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으므로. 잊지 말라. 부끄러움은 순수하지 못한 이의 눈을 가리는 방패일 뿐. 순수하지 못한 것이 거기 더는 있지 않을 때, 부끄러움은 오히려 마음의 족쇄, 마음의 얼룩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잊지 말라. 대지는 그대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람은 그대의 머리카락과 장난치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됩니다. 간음해서는 안 됩니다.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젊은이는 규율과 율법이라는 옷을 잘 입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예수님께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체면, 가식, 율법이라는 옷까지 벗으라고 하십니다. 욕심, 시기, 질투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자아를 보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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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실천과 또 다른 실천.오늘 복음 나눔의 제목을 정하라면 저는 위와 같이 정하겠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젊은이는 호기롭게 주님께 묻습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어지는 젊은이의 대답에서 그의 질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한 일을 지금까지 꾸준히 해왔음을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그는 어쩌면 주님께 이런 대답을 듣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너는 이미 하늘나라에 닿아 있다.”라는 말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사실 그가 지금까지 지켜왔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와 무엇인가는 나눌 필요 없이 그저 자신을 위해 자신이 희생과 인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것은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그 젊은이에게 요구한 것은 바로 내 것을 나누는 모습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가 지켜온 실천과 주님이 말씀하신 나눔의 실천은 분명 다릅니다. 나눔 없는 인내와 극기도 필요하지만, 누군가와 나누는 사랑의 실천도 필요하다고 주님께서는 그 젊은이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지켜온 그리고 이런 신앙의 길을 살아온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나눔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그 나눔은 교회를 통해 그리고 선함을 통해 세상의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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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지 못하는 우리.
한 형제님과 상담했습니다.
벌써 십여 년이 지난 일이라고 합니다.
오해와 다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주먹이 오갔습니다.
그날이 상처는 아직도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가가려 해도 갈 수 없고 또 끌려 해도 꺼지지 않는 불길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무엇 때문에 미움과 분노가 시작됐는지 그 시작은 잊혀졌고 그저 미움과 분노의 감정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참으로 슬픈 지난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이런 시작이 기억나지 않는 미움과 분노가 남아 있다면 그만 놓아주세요. 상대는 이미 다 잊고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요.
그만 놓아주세요.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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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이신 주 예수님
“나를 따라라”
어제 주일 강론에서 저는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빵, 예수님을 선택할 때, 예수님께 선택될 때 참행복임을 역설했습니다. 참행복에 예수님을 대체할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생명의 빵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참행복이요 모든 행복이 뒤따를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요약하여 흥겹게 노래로 고백한, 모두가 좋아하는 어제의 화답송 후렴 시편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시편34,9)
오늘 복음도 어제의 연속선상에 있는 듯 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이 질문은 옛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의 내적 갈망을 대변한 어떤 부자의 물음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저는 이 물음에 속으로 웃었습니다. 바로 생명의 빵이자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이런 질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접근이 참 치밀합니다. 어떤 부자의 문제가 무엇인지 꿰뚫어 통찰했음이 분명합니다.
우선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했을 때 어떤 젊은이는 당당히 고백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신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목마름은 여전할 뿐입니다. 다음 오고가는 대화가 오늘 복음의 중심입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바로 사막의 성 안토니오를 결정적으로 회심케한 예수님의 말씀이요, 모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많은 재물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합니다. 과연 이 결정적 시험에 통과할자 몇이나 될런지요. 외적으로 계명을 잘 지킨 삶이었지만 삶의 중심에는 주님이 아닌 재물이 자리잡고 있었던 부자 젊은이였습니다.
요약하면 재물에 소유되어 갈 길을 잃은,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은 젊은이였습니다. 이보다 더 큰 영적 재난, 불행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초대받은 젊은이인데 안타깝게도 그 결정적 구원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계명을 잘 지켜서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몰랐던 젊은 부자였습니다. 더 이상 내적성장은 좌절되었고 영원히 영적 목마름을 지닌채 살아가게 된 젊은이입니다. 바로 젊은 부자의 예화를 통해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과연 날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삶에 충실한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라’ 명령하십니다.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젊은 부자는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자 청년처럼 누구에게나 똑같은 포기를 명령하지 않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날마다 평생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여기서 다시 인용하는, 늘 나눠도 늘 새로운 제 자작 좌우명 고백 기도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이 길 하나뿐이겠습니다. 재물을 소유하되 재물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이, 주님의 제자가 되어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버림과 따름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과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수님은 물론 참된 제자의 예표가 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생애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을 나타내는 상징이 됩니다.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아내의 죽음을 상징으로 삼습니다. 두 말씀이 그대로 하나로 이어집니다.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이어지는 모든 말씀이 주님의 처사에 동요하지 말고 주님의 제자답게 묵묵히, 담담히 받아들이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상징하는바 우상들을 섬기며 많이도 탈선했 죄를 지었던 이스라엘의 불행입니다.
“나 이제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의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 너희가 두고 떠나 온 너희 아들딸들도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참된 제자의 예표가 되는, 부단히 주님께 돌아와 주님을 따르라는 회개의 예표가 되는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따르는 회개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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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나라 가까이>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 19,21)
나에게서
너에게로
다가가는
그만큼
하느님나라에
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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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마태 19,16)
영원한 생명을 얻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그리고 보십시오. 한 남자가 예수님께 와서 ‘좋으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젊은이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온 사악한 위선자라고 합니다. 저는 이 사람이 욕심많고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주저 없이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가 이런 사람임을 보여 주셨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이 사람을 위선자라고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확실치 않은 것을, 특히나 누구를 탓하는 일에, 함부로 단정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짓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가 이 사람이 위선자라는 의심을 거두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마르코는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르 10,17)고 하고 또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마르 10,21)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분명히 보여 주듯이 돈의 폭정은 위력이 대단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덕을 실천하고 있을지라도 탐욕이 그 모든 것을 헛 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케닉(Kenik)과 베스터만(Weslermann) 같은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소위 일차원적인 구원관을 비판한다. 그러한 구원관은 성서가 말하는 찬양과 복의 주제를 무시하고 오로지 구출로서의 구원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이것은 “성서의 자료들을 심각하게 왜곡시킨다”고 베스터만은 말한다. 그것은 구원 사건을 영화(靈化)하고 사적인 사건으로 만들어 버린다. “성서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면, 하느님이 인류를 두 가지 방법, 곧 구출과 복으로 다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성서의 자료를을 심각하게 왜곡함으로 인해 … 서구 신학은 성서의 메시지에서 벗어나 잘못된 해석을 수없이 범하고 말았다.” 창조 중심 영성에 충실한 엑카르트는 성서적인 영성의 축복 전통을 무시하지 않는다. 창조신학 전통에서 볼 때, 창조계 자체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복이다. “태고사(창세 1-11장)에서 복은 창조 사건의 문맥에서 발견되며,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미친다”라고 베스터만은 말한다.(222)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루카 5,1-11
고기잡이 기적 -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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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19,21)
늘 살아오면서 직면하는 의문이지만, 정말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내게 무엇이 부족하기에 아직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토록 주님께서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사랑으로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심을 느끼고 살아가는데도, 그리고 수도원에서 늘 주어진 모든 일과표를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데도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내적 텅 빔과 공허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 제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의 의문,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19,20)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되리라.”(19,21)라는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점 더 명확하게 알아듣기 위해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6,20~21) 라는 말씀을 전제하고 들으면 더 좋겠지요. 그런데 이 구절은 통상적으로 특별 성소에 대한 전형적인 초대로 이해되어왔지만, 이는 지나치게 협의로 이해한 측면이 강하다고 봅니다. 이 내용은 바로 모든 인간의 실존이며 보편적인 삶의 문제이기에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요건입니다.
오늘 복음의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인상은 그의 질문에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의 질문은 지극히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9,16)라고 묻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곧 그의 관심은 존재의 측면보다 활동과 소유의 관점에서 묻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마치 자신의 행위나 소유로 취득하고 획득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지극히 교만하고 당당한 태도를 제쳐두고 대견하게 여기시며 그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19,17)하고 그의 질문에 동일한 눈높이에서 답변하십니다. 답변의 근저에는 선이란 무슨 일이나 활동이 아니고 어떤 분 곧 존재라고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의 잘못된 관점을 선한 마음에서 수정해 주십니다. 곧 요점은 선한 일이 아니라 선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그릇된 관점은 단지 부자 청년만이 아니라 우리 의식 또한 별반 차이가 없으리라 봅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영원한 생명, 구원을 취득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은총을 누릴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가끔은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분명 젊은이가 한 질문은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으로 고쳐 답변하신 의도를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고 내리시는 선물이지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계명을 지켜라, 고 언급하시는데 그 계명이란 모든 사람(=유다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십계명의 일부에다 이웃사랑을 덧붙여서 말씀하십니다. 이에 그 젊은이는 명쾌하게 그런 계명들을 다 지켜왔노라고 응답하면서 이에 대화를 끝내지 않고, 그럼에도 제게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는 곧 그 젊은이의 내면 깊이 내재해 있는 보다 더 초월적인 그 무엇을 향한 갈망에서 기인한 물음이라고 예수님도 이해하시고 받아들이시려는 듯싶습니다. 물론 그 질문의 밑바닥에는 완벽하고 완전해지고 싶은 욕심이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 젊은이의 열정과 젊음의 표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대화의 결과 예수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라는 회피할 수 없는 최종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그 젊은이에게 던집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 젊은이의 호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성서는 슬픈 결말을 보여줍니다. 소유욕에 대한 집착이 과하긴 하지만, 그 젊은이가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내적 갈망이 본의 아니게 자신이 가진 재산 때문에 슬퍼하며 떠났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가장 장점이며 디딤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실 가장 큰 장애물이자 걸림돌이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었을까요. 아, 이게 인생이구나 싶네요. 그토록 추구하던 것을 목전에 두고서 돌아서야 하는 그 처지라니.
예수님은 그 젊은이의 선한 의도를 꿰뚫어 보셨기에 그에게 다소 충격적이고 역설적인 제안을 하셨던 것이라 봅니다. 그것은 그 젊은이가 보다 완전한 존재를 꿈꾸고 있다고 보았기에 지금껏 몸에 밴 관습이나 타성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의식과 행동양식을 보여 달라고 초대했지만, 그는 결국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슬퍼하며 떠나갔던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갈망하던 완전한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까닭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어쩜 머리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온 존재로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겪어야 하는 진실은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애착 곧 나와 나의 소유물 그리고 나의 꿈과 이상, 내가 살아온 세상과 관계에 억눌리고, 묶이고, 사로잡혀서 그런 모든 것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끊어버리지 않고서는 추구할 수 없는 삶이라, 는 것입니다. 어쩌면 단지 그 젊은이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겪어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 우리의 내적 현실이며 상태입니다. 신앙생활 혹 제자의 삶은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상상이 아닌 체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젊은이는 우리 내면을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인가 봅니다. 교황님께서 수도자들과 만남에서 강조하신 면도 가난의 삶을 살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아 그 부자인 젊은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궁금하네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1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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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영적으로 가난한 이가 되어야만 /
박윤식 [big-llight] 240818 21:22 ㅣNo.175161
믿는 이에게 신앙은 하느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면서 우리에게 외적으로 가르침이다. 마음에 들어찬 재물은 신앙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걸 가로막는다. 그러기에 영적으로 가난한 이가되려면 힘 빼는 훈련을 해야 한다. 돈 있는 이는 돈 힘을 빼야만 한다. 권력, 젊음, 지식의 힘도 때로는 드러내지 않게 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 자리에 하느님을 모셔야 하기에.
따라서 우리 삶에서 그리 쉽지 않은 가난에 대해 예수님 가르침을 묵상해 보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이가 되려면, 가서 너의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 있는 그 보물 차지하게 될 게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를 듣고는 슬퍼하면서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젊은이가 예수님께 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계명을 꼭 지키라신다. 자신만만한 느낌을 줄 정도로 젊은이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이웃에 대한 계명을 지켜 왔단다. 라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 완전한 이라 하였기에 빠짐없이 다 지켰다나. 하지만 그분께서는 “가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는 나를 따라라.”라고 명하셨다. 그 젊은이는 슬퍼하면서 거기를 떠났다.
이 젊은이의 한계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그들을 자기 이웃의 범주에 넣지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 너무 부유해 그는 예수님 가르침을 따를 수가 없었다. 사람보다 재물을 더, 그들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일 게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따르라신다. 바로 이 말씀이 우리도 낭패스럽게 한다. 지금 우리를 붙잡는 건 재물이다.
재물에서 완전한 이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은총의 도움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완전함의 은총은 물질에서 자유로워질 때에 주어지기에. 그러기에 예수님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신다. 물질에 기대는 마음을 정리하라는 게다.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준엄하다. 우리에게는 재물의 축적이 삶의 목적으로 생명보다 소중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많은 재물을 가진 이들은 율법들은 충실히 지키지만, 나눔의 새로움을 향하여 확실하게 뛰어들 용기를 갖지 못한다나. 참된 보물을 차지하려고 가진 것을 멀리하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의 비밀일 게다. 여기에 재물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가로막는 온갖 애착을 상징할 수도. 그래서 부자는 망설이다가 결국은 믿음의 길을 포기한다. 우리도 가끔 재물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삶의 중요 부분이지만, 믿음보다 재물을 우선할 수는 없다. 예수님이 이에 대해 경계를 하시는 것도 여기에 있다. 그 힘이 어떤 힘보다도 강하다고 여기는 게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재산을 나누어 준 뒤에 오라신다. 재물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는 거다.
그러나 바꿀 수가 없다. 예수님과 함께 재물의 위력도 소유하고 싶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을 확실히 따를 수 없이 각자의 길을 가는 주된 이유이다. 그분께서 젊은이에게 요구한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여 빈털터리가 되라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게다. 우리도 어쩌면 그 젊은이처럼 그분의 그 요구를 질문 받고 있을 게다. 중요한 것은 ‘포기할 거야, 말거냐?’가 아니라 ‘버린다면, 꼭 얻게 될 거다.’일 게다. 지금도 그분께서는 우리에게도 이 결단을 준엄하게 촉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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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복음이 잘 이해되지 않아 앞뒤로 다시 보았습니다.
십계명뿐만 아니라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라는 계명까지 지켰는데 무엇이 아직 불완전하였을까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 그 계명들을 모두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그는 왜 따라나서지 못하였을까요?
예수님을 따라오라는 말씀이 어려웠을 수도 있겠지만, 복음서에서는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2)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어려웠던 것은 그 재물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에게, 많은 재물을 가진 채 평생 자선을 베풀며 살라고 하였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지금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흔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그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재물이 많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었다면 겪지 않았을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가진 것이 많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선한 일을 해서 하늘 나라를 얻으려고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것 없이 어린이처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재물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가졌다 하여도, 그것 때문에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19,21) 가지고 있는 것을 하늘 나라를 위하여 모두 내놓고, 빈 몸으로 길을 나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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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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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묻습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들은
십계명과 신명기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했던 계명들, 즉 율법 조항이
십계명 말고도 613개나 있었기에
그 사람은 어느 조항을 지켜야 하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있게
자신이 그런 것들을 다 지켜 왔다고 말합니다.
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런 부분은 전부 다 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유다 신학에 따라 모든 것을 했는데도
왜 아직 구원을 얻지 못했는지
구원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지
반문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단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즉 하느님과 함께할 때
하느님께 의지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재산이 많았습니다.
즉 이 사람은 자신의 재산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 재산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입니다.
계명과 율법 조항을 다 지켜 왔다는 것으로
이 사람이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온전한 구원으로
온전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자체가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이기에
'나의 노력만으로'라는 것과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은 떠나갑니다.
나의 노력으로 맺은 결실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얼마나 고생하며 이룬 것인데
그것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볼 수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은
그 열매가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공동 작업이 아니라
내가 이룬 것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안타까운 것은
그것으로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도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기에
그것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모르는 단 한 가지는
계명의 어떤 조항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생각일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구원은 어떤 것인지
신앙 안에서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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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재물과 관련해서 때로는 용기도 필요하고, 때로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재물과 관련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고민해야 할 질문 한 가지가 있습니다.
과연 재물이 주님 나라 입국과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재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고민입니다.
오늘 복음이 풍기는 뉘앙스는 재물이 천국과 영생으로 가는 길에 큰 장애물이 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 대한 보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재물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듯한 저희 수도자들에게도 이 부분은 참으로 큰 고민거리입니다.
적극적인 홍보 활동과 목숨을 건 후원 회원 확보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그를 바탕으로 엄청난 규모의 수도원과 시설을 건립하고, 본인들도 모르게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낼 럭셔리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물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규모가 확장되면 될수록 청빈과는 거리가 먼 생활로 전락하고 맙니다.
벌써 그 공동체는 천국이나 영생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탁발과 섭리에 의존하기에, 내일 먹을 양식도 확보되지 않고,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면, 거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청빈을 사는 데 있어서도 조화와 균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관건은 재물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 부자들을 미워하거나 경멸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직하게 일해서 모은 재물은 주님이 주신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 재물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관대하게 나눌 때, 그러한 재물은 축복이요 선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계하시는 부는 부정한 방법으로 남을 짓누르고 축적한 천박한 부, 절대 나누지 않는 이기적인 부입니다.
그저 한도 끝도 없이 모으기만 모았지, 죽어도 나누지 않은 재물을 주님께서 슬퍼하실 부끄러운 부입니다.
가끔 형편에 맞지 않게 과도한 기부나 헌금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즉시 따로 모시고 가서 차근차근 설명해드립니다.
바야흐로 백세 시대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자식들, 절대 확실한 보험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건강과 노후를 위해 지혜로운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 퍼주고 나중에 쫄쫄 굶다가 무료 급식소 신세 지면, 누구 책임입니까?
재물과 관련된 오늘 주님 말씀, 때로는 지혜가 필요하고 때로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재물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재물이 주님보다 상위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수도자들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이 재물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하루하루 우리네 남은 인생이 재물보다 더 중요한 자산입니다.
이 소중한 자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잘 계획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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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 나라와 부자 젊은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절) 돈 많은 젊은이가 예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청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19절) 젊은이는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 외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에게 더 큰 계명이 주어진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그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율법을 따르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여기서 판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즉, 악을 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이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인 부를 나누어 받아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움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영적인 선물은 풍성히 받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그는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다고 했지만,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던지 아직은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젊은이의 비극은 그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이웃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 재물에 더 아까워하고 마음이 집착되어 있다. 당연히 예수께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인가 둘 중의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결국 재물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오늘 복음의 젊은이처럼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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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율법과 진리의 차이점: 도움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
오늘 복음에서 돈이 많은 젊은이는 어떻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될지를 묻습니다.
그는 사실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 압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주소를 잘못 찾아왔다는 식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여기서 예수님은 선한 일에 관련된 분은 아버지 한 분뿐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데, 생명을 유지하려면 계명을 지키라 하십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입니다.
그러자 그는 구약의 율법을 다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제 ‘완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냥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복음은 더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아리송하기 그지없는 내용이지만, 사실 ‘율법’과 ‘진리’의 차이점을 알면 쉽게 이해가 되는 복음입니다.
요한은 율법과 진리, 그리고 은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7)
이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4)
구원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예수님께 이끄실까요?
바로 율법을 통해서입니다.
율법은 창조자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실천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 옵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말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을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찾으라고 하란으로 보냈습니다.
레베카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라 처음 보는 사람이 물을 달라고 하자 그 하인과 낙타에게 물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자 하인은 그녀에게 장신구를 달아줍니다.
하인이 율법이라고 한다면 장신구는 은총입니다. 그러나 이 은총은 이사악에게 다가갈 힘을 주는 것뿐이지 그것 자체로 구원은 아닙니다.
구원은 이사악과 혼인하여 가지게 되는 아브라함의 유산입니다.
레베카가 이사악에게 다가오자 이사악은 그녀를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 사라의 처소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사라는 이사악이 어머니를 잃은 아픔을 달래주었으므로 레베카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레베카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우리는 레베카와 같습니다.
창조자, 적어도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키려 할 때 하늘에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할 도움을 주십니다.
저에게는 이 도움의 은총이 ‘하.사.시.’였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갈 수 있었고 성체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악에게 어머니를 잃은 아픔은 무엇과 같을까요? 왜 당신께 오는 이들을 그 자리에 채워 당신 자신을 위로하려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아픔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조물들이 배고픈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부자 청년에게 전달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그리스도를 위로하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는 계명입니다.
분명 이웃을 돕는 것은 구약의 계명일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필요를 위해 요구하시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분 안에 머물게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에게 붙어있어라!”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위로해드리기 위해 성체조배를 하였습니다.
이 성체조배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는 저에겐 진리가 된 것입니다.
또한 사제서품 때 성구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도 저에겐 그리스도께 붙어있게 만드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로하는 계명이고 내가 그리스도 품 안에 머물게 만듭니다.
율법도 도움의 은총이 필요했다면, 진리는 생명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만약 제가 그리스도께 붙어있기 위해 따라야 하는 진리에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감동이 없었다면 그 계명에 그렇게 목숨을 걸고 붙어있으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부자 청년처럼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 안에 머물려면 은총도 필요하여 성사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부자 청년에게 부족했던 것은 생명의 은총,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아직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언젠간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오도 오늘 부자 청년처럼 부모의 죽음으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늘 복음을 듣고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생명의 은총인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생명까지 바치셨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없다면 진리는 자신 안에서 실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로 힘을 얻는 진리가 있어서 그것을 실천하여 그리스도께 머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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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먼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16-22).”
1) 여기서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그의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입니다.
그는 지상에서는 많은 재물을 소유하면서 살기를 원하고,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둘 다 누릴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그 생명만 추구해야 합니다.
재물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허무한 것들에 마음을 두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슬퍼한 것은, 둘 다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즉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슬펐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는 자기 자신이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슬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떠나갔다.’는 말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냥 가버렸다는 뜻은 아니고,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었다는 뜻입니다.
2)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들이 재물에 대한 애착심도 큰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긴 한데, 가진 재물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별로 다르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진 것이 없어서 오히려 더 재물에 대해 집착하고, 더 많이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부유한가, 가난한가?”를 묻기 전에 먼저,
즉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 없는가?” 라고 묻기 전에 먼저,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라고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재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그런데 이 말씀은, “재물을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나쁜 것이지 재물이 나쁜 것은 아니다.”는 아닙니다.
악한 일의 원인은 악한 마음이지만, 재물 자체에도 사람을 지배하는 악한 마성(魔性)이 숨어 있고, 그래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끊어버리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3)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입니다.
<재물을 모두 버린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소유’나 ‘청빈’을 강조한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무소유나 청빈을 실천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빈손’이나 ‘빈 몸’이 아니라, ‘믿음’과 ‘따름’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유다도 다른 사도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과 ‘빈 몸’으로 따랐을 것입니다.
유다가 언제부터 마음이 돌아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그는 겉으로 보기에만 ‘빈손’과 ‘빈 몸’이었을 뿐이고, 마음속에는 탐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요한 12,6).
그 탐욕은 그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4) 이야기의 첫 부분에 있는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라는 말씀은, “나를 ‘사람’으로만 생각하면서 어찌하여 나에게 ‘하느님의 선’과 ‘영원한 생명’을 묻느냐?” 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당신을 믿는 일이 먼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도 십계명은 잘 지켰습니다.
신앙과 종교가 아예 없는 사람들도 착하게 살고
불우이웃 돕기도 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는 곧 예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만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립니다.>
물론 예수님을 몰라서, 또는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못 믿은 경우에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면서도 믿기를 거부한 경우에는,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그 자신이 거부해서, 그 생명을 못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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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한 부유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을 통해 그가 두 가지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하나는 참된 ‘선’이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즉 그분 뜻에 맞는 것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선을 충실히 실천해야 그분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지요. 그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무엇이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아주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그의 문제만은 아니었지요.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자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으로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그런 믿음에 따라 율법을 철저히 지켜온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이들처럼 “~하지마라”라는 금령을 어기지 않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긍정명령까지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적극적인 사람이었지요.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그의 성향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충실히 실천하여 다른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수준에 머무르는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겁니다.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구원에서 가장 중요하며 궁극적인 조건마저 채운다면, 자신이 육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완성’에 이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갔고 율법의 수준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뜻을 더 완전히 따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느냐고 채근하듯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채움’이 아니라 ‘비움’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게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고, 그런 사람이 되는 길은 자기를 채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우는 거라고, 사랑과 자비의 실천으로 가진 것을 나누고 자신을 비워 그 안에 하느님께서 사시도록 해야 그분의 능력과 은총에 힘 입어 영원한 생명이라는 참된 복을 누리게 되는 거라고 알려 주십니다.
하지만 그 청년은 그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그에게 그 말씀대로 할 의지와 용기가 있었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라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기뻐하며 그곳을 떠났겠지요. 그러니 슬퍼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가 드러난 셈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답이 뭔지 알면서도 그대로 따르지 않아 하늘나라의 보물들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길을 알려주시고 동행하시며 힘을 주시지만, 본인이 그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 부자 청년이 주님 말씀을 따르기를 거부한 것은 그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는 요구가 그저 ‘자선을 베풀라’는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그 재산이 자기 ‘전부’였기에 그것을 포기하라는 말은 곧 자기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말로 들렸던 겁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재산에 자기 목숨을 건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것이 비단 그 청년만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정도가 다르고 집착하는 항목이 다를 뿐, 우리는 각자 자기가 귀중히 여기는 그 무엇에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가진 재물을 나누어주라고 하신 것은 단지 그 재물에 집착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그분께서 바라시는 뜻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따르라는 요구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목숨을 걸다가 종말의 날 세상과 함께 멸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께 내 전부를 걸어 그분께서 베푸시는 큰 은총과 복을 영원토록 누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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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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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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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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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
<2024.8.19> 아침을 여는 묵상 (렘 51:11~19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
❚ 육신의 눈으로 다 볼 수 없는 세계가 있듯이 인간의 이해 능력을 뛰어넘는 영적 세계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이 인생에 진정한 대장 되심을 인정하는 삶입니다(11~12절).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대적의 공격을 방어할 준비를 갖추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메대 왕들의 마음을 움직이셨으며, 바벨론을 멸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11절). 바벨론을 멸망시킬 나라로 ‘메대’를 언급함으로써 이 예언의 진실성을 더 해주고 있으며, 당시에 메대가 바사보다 강력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향해 깃발을 세우고 튼튼히 지키며 파수꾼과 복명으로 잘 경계하라고 명합니다(12절). 즉, 공격을 대비하고 경계하라는 명령은 모든 방어 수단을 다 동원해 보라는 조롱입니다. 바벨론이 아무리 방비하고 경계한다 할지라도 대적의 공격을 이겨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만이 만유의 통치자가 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울러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순복하고 그분의 말씀 앞에 언제나 겸허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을 위협하는 그 어떤 세력보다 크고, 강하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할 때 우리 마음에는 참된 평안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시는 만군의 여호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우리의 힘과 의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기도와 간구로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진정한 대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인생에 진정한 근원 되심을 인정하는 삶입니다(13~14절).
“많은 물 가에 살면서 재물이 많은 자여...” 유브라데 강을 끼고 있는 바벨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향해 “...네 재물의 한계...”를 말씀하시면서 ‘재물의 한계’를 선언하십니다. 즉, 바벨론의 ‘끝’을 의미하며 바벨론이 더 이상 약탈을 행할 수 없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13절). 나아가 바벨론을 공격하는 대적들은 메뚜기 떼와 같이 함성을 지르며 바벨론의 온 땅에 가득하게 밀려올 것이라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셨습니다(14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며 능력으로 세상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눈에 보이는 풍요 그리고 세상의 권력과 힘을 의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안을 열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을 살며 겪는 어려움들과 믿는 자로서 가지게 되는 고통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 풍요를 의지하지 말고 우리 인생에 진정한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이 인생에 진정한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삶입니다(15~19절).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능력으로 땅을 지으셨고, 지혜로 세계를 세우시며 지식으로 하늘을 펼치셨습니다(15절). 이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우상들과 확연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그 우상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우상은 비웃음거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신으로 섬기는 것은 참된 지식의 부족을 드러내는 어리석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16~18절). ‘야곱의 분깃’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19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유인 야곱은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무로부터 이 세상을 권능으로 창조하셨고 지금도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들만의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상은 실제가 아니며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우상과 함께 멸망당 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에 진정한 주인 되심을 인정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만을 진정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분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인정하므로 영적 승리의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51:11~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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