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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세상과 다른 성도의 삶
마가복음 9:30-37
예수님의 3년간 공생애가운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이 인류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변화산 사건을 계기로 갈릴리중심으로 사역하시던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결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변화산 사건 다음에 나오는 내용으로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화산 사건과의 연관성을 잘 살펴야 합니다.
1. 변화산 사건이 있은 후 주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가르치시는 일에 더욱 집중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갈릴리 사역의 대부분은 대중들을 상대로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고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대중들보다는 제자들에게 더 집중하게 됩니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주님은 두 가지 사실에 집중합니다.
①하나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31절을 보면,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지금까지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주님의 모습에 익숙했을 것입니다.
그 모습에 얼마나 만족하고 즐거워하고 큰 기대를 가졌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핵심적인 사역을 가르치고 준비시켜야 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후에 자신의 복음을 증거 할 사람이 바로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②두 번째 가르치신 내용은 낮아짐과 섬김의 삶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변화산에서 내려와 갈릴리의 가버나움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제자들 가운데 논쟁이 벌어집니다.
논쟁의 주제는 ‘누가 크냐?’ 하는 것입니다.
논쟁이 벌어진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오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이런 능력을 갖고 계시다면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물리치시고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실 것이다.
그러면 제자 된 우리가 장관이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지 않겠나.
이런 기대가운데 누가 크냐? 는 논쟁이 자연스럽게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던 제자들에게 논쟁을 더욱 촉발시키는 일이 있었는데요,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따로 데리시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밑에 남아있던 9명의 제자들은 ‘선생님이 저들만 좋아하시는 것 아닌가?’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고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다른 제자들이라고 그 3명에게 꿀릴 것이 없었습니다.
마태는 제자 중에 제일 공부를 많이 했던 사람이고, 빌립은 당시 국제 통용어인 헬라어를 제일 잘 하는 박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신임을 받아 회계로 쓰임 받고 있었고 안드레는 제일 먼저 부름 받은 제자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른 제자들도 뒤질 수 없는, 다 한 몫 하는 사람이요, 당연히 크다고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내 세울 만한 조건들이 있었는데 3명만 데리고 가시니까 ‘누가 크냐?’ 는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낮아짐과 섬김의 삶을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35절)
또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안으시고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37절)
여기서 어린 아이는 가장 작은 자, 미천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을 영접하는 것은 낮아지고 겸손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로 섬기기 위해 올라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 생각을 깨트려야 했습니다. 낮아지고 겸손한 삶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주님이 완성하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이런 주님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높아지려고 하고 대접을 받으려고 합니다.
십자가로 대표되는 섬김과 낮아짐의 삶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두 분이 장로임직을 함께 받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분이 더 많은 표를 받고 나이가 더 드신 분이 두 번째로 선출되었습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표를 더 많이 받은 분을 앞세울 수밖에 없어서 주보에 장로님 이름을 쓸 때도 먼저 썼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으신 분이 내가 더 나이가 많은데 왜 뒤에 두느냐고 반발을 합니다.
젊은 분은 내가 표를 더 받았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 고 항의합니다.
그래서 결국 일 년마다 돌아가며 순서를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한심한 이야기입니까?
주님은 낮아져서 섬기고 대접을 받기 보다는 대접하라고 하셨는데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 같고 그것이 성공한 것 같고 축복받은 것 같이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은 주님의 교훈이 아니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도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낮아지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①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며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을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절)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는 대로, 믿는 대로 하나님의 본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실 때도 가장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셔서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사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셨습니다.
얼마든지 대접을 받으실 수 있었지만 오히려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낮추시고 섬기셨습니다.
스캇 펫이라는 신경정신과 의사가 수많은 종교를 연구하던 중에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이유는 각양 종교들이 주장하는 신들 중에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신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연구한 결과, 자신을 따르고 추종하는 사람들을 섬긴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사실은 이런 섬김의 삶을 사셨던 주님을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시고 겸손히 사람들을 섬기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당연히 주님이 가르치시고 친히 몸으로 보여주신 삶을 살아가고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이 보여주신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 그것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 주님이 가르치시고 걸어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②이런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김제 금산교회의 이야기를 한 두 번은 들으셨을 것입니다.
금산교회가 장로를 세우기 위해 투표를 하게 될 때,
대부분 금산지역에서 부농이며 마방을 운영하고 존경받는 조덕삼 영수가 될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의외로 그 집에서 마부 일을 하는 이자익 영수가 됩니다.
모두가 투표결과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더 큰 관심은 이 사태를 과연 조덕삼 영수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데 쏠렸습니다.
조덕삼 씨가 반발하면 교회는 큰 어려움에 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덕삼 영수는 정말 겸손하고 섬기는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 열의가 대단한 분입니다.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금산교회는 이 일로 더욱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고 주변에 칭찬이 자자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나오게 됩니다.
물론 다음 선거에서 조덕삼씨도 장로가 되고 교회를 신축하기도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주님은 이방인들의 집권자들이 사람을 마음대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을 언급하시면서,“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너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낮아지고 섬기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서로 큰 자가 되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고 대접만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사회가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섬기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교만하고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③이런 섬김의 삶을 살아갈 때 큰 자로 인정하시고 상을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보면 정말 누가 큰 자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막강한 힘을 갖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큰소리치며 교만한 대통령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후세에 어떤 평가와 대접을 받습니까?
안타깝게도 그의 이름 석 자 뒤에 대통령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역대 대통령 중에 그래도 인정받는 사람은 낮은 자세로 섬김의 리더십으로 국민을 섬기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항상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인간을 판단하시고 인정하시고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아무리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도 하나님께 인정을 못 받으면 말짱 꽝입니다.
하나님이 죄 없다 하셔야 진정 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 살았다 하셔야 진짜 잘 산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자다 인정하셔야 진정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그것이 축복된 삶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큰 자로 인정하시겠습니까?
교만한 자입니까? 아닙니다. 겸손한 자입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섬기는 자입니다.
높아지려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낮아지려는 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큰 자가 되지 말라는 말은 아닌 줄 압니다.
주님의 말씀은 어떠한 존재가 되던 어떠한 위치에 이르든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성공한 CEO가 될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좋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저는 정말 우리 자녀, 손들이 그렇게 잘 되기를 바라고 축원합니다.
그렇게 잘 되었을 때 그 위치에서 섬김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고, 밑에 있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돌봐주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차를 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주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는 집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집에 초대하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당신이 어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남에게 무엇을 베푸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얼마나 좋은 동네에 사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이웃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 때문에 교만하지 마시고 그것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하지 마시고 그것으로 많이 섬기기를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많이 주신 것은 많이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소유에서가 아니라 섬김에서 나오는 줄 믿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교인은 더 많아졌고, 물량적으로 더 풍족해졌고, 힘도 더 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의 작은 자들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이 명하신 섬김의 길을 벗어났습니다. 교회가 귀족화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삶을 본받아 세상 속의 작은 자들 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낮은 자세로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대접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요, 성도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2024.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