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프랑스는 혁명과 제2제국 시대이다.
산업화로 도시가 나타나고, 도시의 빈민가 노동자들이 나타난다.
문학에서는 노동자의 생활을 비판적으로 그린 소설과(빅토르 위고)
대중을 구성하는 하류층을 독자로 하는 소설(뒤마 등)이 나온다.
1. 빅토르 위고(1802-1885)
당시의 의고전파(보수 노년층)와 대립하여 낭만주의(진보 청년층) 운동에 참가하여 낭만파의 지도자가 되어갔다. 1830년 2월에는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의 초연에 즈음하여 낭만파와 고전파 간에 문학사상 유명한 '에르나니 싸움' 이 일어났다. 이 공연은 낭만주의는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했다.(에르나니 전쟁) 이 싸움의 승리 후에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를 압도하여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을 점유했다,
위고는 더욱 왕성한 활동으로 ‘노트르담의 꼽추’를 위시하여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1843년 이후 10여년 간 위고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 활동에 전념하였다.
1848년 2월 혁명을 비롯한 주위 정세에 자극을 받아 위고는 인도주의적 경향을 더 한층 굳혔다. 1851년에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발하여 국외로 추방을 당했다. 소설 《레 미제라블(1862), 등 위고가 집필한 대부분의 걸작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
1870년 보불 전쟁에 의한 나폴레옹 3세의 몰락하자 위고는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왔다.
위고는 그의 대표작인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개인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 살인까지 저지르는 프롤로 주교를 그린 바 있다. 가톨릭 교회는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미제라블》등의 걸작들을 금서로 지정해 신도들이 읽지 못하게 하였다. 가톨릭과 화해하지 못한 위고는 교회의 기도마저 거부했다. 1885년 5월 22일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국장의 예를 받았고,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장례식에 100만 인파가 모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위고의 희곡에는 강인한 극행위(劇行爲)가 결여되어 있으며 극의 본질인 갈등보다는 줄거리나 대사의 서사성이나 서정성에 역점을 두는 결점이 있다. 당시 관객의 취미는 낭만주의 극의 전개가 느릿느릿하고, 소란함에 싫증을 느껴 고전적인 간결함을 구하고 있었다.
위고는 민중예술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묻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민중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으나, 문학 학자들은 한 번도 위고를 풀로베르보다 위에 둔 일이 없었다.
1) 파리의 노틀담
빅토르 위고가 1831년에 쓴 소설로, 년대는 1482년, 장소는 파리의 노틀담 대ᅟᅥᆼ당이 배경이다. 이야기의 흐름은 이스케랄다라는 집시의 여인과 성당의 종지기인 곱추 콰지모도, 부주교 프롤로 신부, 그리고 거리의 치안대장 뷔페르의 사랑 이야기로 얽어져 있다., 이야기는 사랑, 폭력, 증오, 위선이 뒤엉켜서 진행한다. 이야기 배경으로, 중세의 파리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은 프톨르 부주교를 위선의 인물로 표현함으로 카콜릭 교단의 심기를 건드려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일반 독자는 콰지모드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영화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2) 레미제라블
위고가 1862년에 쓴 소설로, 레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장발잔으로 번역하였다.
줄거리는
굶주리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살이를 한 장 발장이 전과자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는다. 자신이 훔친 은식기에 은촛대까지 선물로 준 미리엘 주교에게 감명받아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마들렌'이라는 새 이름으로 시장이 되어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며 살던 중 매춘부 판틴을 만난다. 팡틴은 죽으면서 자신의 딸 코제트를 장 발장에게 부탁한다.
온갖 고생고생 하면서도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코제트도 잘 키워 좋은 신랑을 구해준다(마리우스). 프랑스 6월 봉기에서 마리우스가 죽을 뻔한 것을 장 발장이 하수구를 통해 마리우스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으나, 마리우스는 그 은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다.
마리우스가 코제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장 발장을 찾았을 때 장 발장은 이미 코제트를 보지 못하는 슬픔에 죽어가고 있었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코제트와의 재회를 크게 기뻐하며 만족스럽게 삶을 마감한다.
*이 소설은 전형적으로 대중의 취향에 맞추어서 썼다. 장발잔이 시장이 되고, 돈을 벌고 ---,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야기가 길어진 것도 당시에 원고료를 원고지 매수로 주었으므로, 역사 이야기라든지, 등등 소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많이 삽입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레미제라블의 등장 인물을 보면, 그리스도를 닮은 죄수 장발잔, 성자같은 미리엘 주교, 선량한 매춘부 팡틴, 팡틴의 불쌍한 딸, 그러나 절세미녀인 코제트, 이상적인 인간형, 낭만적으로 충만한 젊은이 마리우스, 지옥에서 온 듯, 극악무도한 베르나디에 부부, 영웅적이면서도 꾀돌이인 꼬마인 가브로슈, 집요한 형사 자베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전통적으로 친근감을 주거나, 용서할 수 없는 악인이다. 독자를 끌어들이는 장치를 아주 잘 하고 있다.
1862년에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악평을 했다. 그러나 소설은 찍어내기 바쁘게 팔렸다. 그 해에 해적판이 21종이 쏟아졌고, 지금까지 꾸준히 베스트셀러이고, 지금도 고전으로 선택된다.
지금까지 레미제라블의 판매부수를 뛰어넘는 작가는 쥘 베른(80일 간의 세계일주의 작가) 뿐이라고 한다.
2. 알렉상드르 뒤마(1802-1870)
때로는 대중 소설가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작품들의 대부분이 프랑스 역사를 바탕으로 하여, 교묘한 줄거리와 풍부한 공상으로 엮어져 있다. 대표 작품으로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이 있다.
뒤마의 할아버지는 포병으로 아이티에서 근무하였다. 그곳에서 아프리카계 케러비언 혼혈인이었던 마리 케세테 뒤마와 결혼하였다. 고향 빌레르 코트레로 돌아와 뒤마의 아버지인 도마 알렉상드르 뒤마를 낳았다. 도마 알렉상드르 뒤마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뒤마가 4세 때 죽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뒤마는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하자 뒤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유명해졌다. 그의 집안은 여전히 가난했지만 아버지의 명망으로 인해 귀족들과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1822년 부르봉 왕정복고가 일어난 후 뒤마는 파리로 가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루이 필리프의 루아얄 궁전 사무실에 취직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자 잡지에 극본을 기고하여, 대중적인 명성을 얻는다 1830년 그의 고용주였던 루이 필리프가 시민왕으로 즉위한 후 뒤마는 《찰스 10세》를 출간하였다.
1830년대 중반 프랑스는 산업화를 겪으며 빠르게 변화하는 중이었다. 이에 따라 작가들의 경향 역시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부류와 왕정 복고를 지지하는 부류가 폭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출판에 대한 검열이 사라진 것도 문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뒤마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뒤마는 시대 변화에 민감한 작가였다. 뒤마는 당시 빠르게 성장하던 언론 매체인 신문에 연재 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하였다. 인기를 얻자 많은 책을 출간했다.
뒤마는 많은 작품을 출판하였고 그로 인한 수입도 컸다. 그러나, 그는 호화스런 생활과 여성 편력에 들인 비용때문에 종종 빚더미에 몰려 파산을 하곤 하였다. 시민왕 루이 필리프가 반란에 의해 폐위되고 루이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뒤마는 함께 몰락하였다. 1851년 벨기에 브뤼셀로 추방당한 뒤마는 러시아로 탈출하였다. 1861년 3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 왕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뒤마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신문 《인디펜덴테》의 발간을 주도하며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3년을 이탈리아에서 보낸 뒤마는 1864년 파리로 돌아왔다.
혼혈인이라는 정체성은 뒤마의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뒤마는 1843년 발표한 그의 소설 《조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아버지는 물라토였고 내 조부는 깜둥이였소. 내 증조부는 원숭이였지. 알겠소, 선생? 우리 가족은 당신네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였소.”
그의 작품으로 삼총사. 몬테크리스트 백작, 철가면, 마고 여왕 등등 수없이 많다.
1) 삼총사
1844년 3월부터 7월까지 신문애 연재되었다. 총사가 되기 위해 파리로 온 가스코뉴 출신의 하급 귀족 달타냥이 총사 아토스, 아라미스, 포르토스를 만나 벌이는 모험을 그리고 있다.
17세기 프랑스와 영국을 배경으로,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13세 외에도 왕비 안 도트리슈, 리슐리외 추기경, 버킹엄 공작, 슈브뢰즈 공작 부인(프랑스어판)등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은 구성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다르타냥을 주인공으로 하는 다르타냥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후속작으로 1845년에 발표된 《20년 후》, 1848년에 발표된 《브라질론 자작》(철가면)이 있다.
세 명의 총사라는 뜻이고 여기서 총사는 총(머스켓)으로 무장한 왕실 호위병을 뜻한다. 하지만 등장인물 중 총사들도 대부분은 칼을 잡고 싸우며 작품 속에는 머스킷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이 소설을 삼총사로 번역한 이후 한국어 번역에서도 이를 따라서 같은 제목으로 쓰이게 되었다. 현재 삼총사는 단짝으로 지내는 세 친구를 의미하는 관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줄거리는 우리가 알고 있으므로 생략합니다.)
2) 몬테크리스트 백작
뒤마가 1846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 줄거리)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의 젊은 선원 에드몽 당테스. 이제 겨우 열아홉살이지만, 선주 모렐 씨에게 인정받아 모렐 상회의 주력선 파라옹 호의 선장으로 취임하게 되고, 아름다운 약혼녀 메르세데스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약혼식장에서 "역적" 나폴레옹에게 협력한 혐의로 체포돼 14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분노와 울화로 점철된 11년 간의 샤토 디프 감옥 수감생활을 마친 당테스는 이송된 이프 성(城)의 차가운 돌바닥에서 운명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이자 르네상스 시대의 거물 스파다 백작의 상속인인 파리아를 만나게 된 것. 당테스는 파리아 신부를 만난 이후 3년 동안 철학, 정치, 역사, 화학, 외국어 등 다양한 학문을 배우며 지식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던 중 스파다 백작이 암살되기 전 숨겨놓은 재산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고, 병으로 죽은 파리아 신부의 시신과 자신을 바꿔치기하여 탈옥하는데 성공한다.
수 차례의 시도끝에 보물을 온전히 손에 넣는데 성공한 당테스, 막대한 재화로 몽테크리스토 섬의 소유권을 차지한 후 전부터 구상(상상)해온 밀무역 기지를 조성해 수수께끼의 인물 "선원 신드밧드(암굴왕暗窟王)"로 명성을 쌓게 되고, 이탈리아에서 백작 작위까지 얻게 된다.
은인에게는 보답을, 원수에게는 파멸을! 당테스의 흥미진진한 복수가 이루어지면서 독자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복수의 세세한 내용은 생략)
***==> 이 시기의 영국은 빅토리아 초, 중기 시대로
영국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에서 다룹니다.
(찰스 디킨스, 조지 엘리엇, 브론테 자매 등)
P44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