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간척사업은 일제강점기부터 계획했지만
넓은 간척 면적에다 유난히 간만의 차가 심하여
토목기술상으로 대단히 험난한
공사였으며 번번이 포기해야 했던 일이다. 정주영은
이 대사업을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고 1982년 B지구,
1983년 A지구 방조제 연결공사에 착수했다.
문제는 A지구였다. 9.8㎞나 되는 물막이 제방공사는
양쪽으로부터 둑을 쌓아감에 따라 물이 흐르는 양 둑
사이의 간격이 약 270m 정도 남았을 때 최대의
난관에 부딪혔다. 유속이 초속 8m가 넘는 밀물 때
엄청난 압력을 가진 물살의 위력은 가공스러웠다.
자동차 만한 바위도 들어가는 순간 쓸려 내려갈 정도로
무서운 속도의 급류였다. 바위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엮어 만든 20t 가까이 되는 바윗덩이도 순식간에 나무
토막처럼 물살에 쓸려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쌓은 둑도 점점 물살에
쓸려 나가기 시작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토목공학 지식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수십 년 경력의 일류 토목기사들도 속수무책 갈팡질팡했다.
고철 유조선을 물막이용으로 끌어오다
그때 정주영의 상상력이 번뜩였다.
그는 해체하여 고철로 만들려고 수입해 울산 앞바다에
대어 놓은, 길이가 332m나 되는 22만6000t급 대형
유조선을 생각해 냈다.
그는 그것을 끌어다가 물이 흐르는 양 둑 사이에 대고
유조선에 바닷물을 가득 채워 가라앉혔다.
제아무리 센 물살도 그 육중한 배를 밀어내지 못하고
멈추었다. 그 사이 무난히 둑을 연결하여 물막이
제방을 완성했다.
그런 다음 유조선의 바닷물을 퍼내 배를 띄워
다시 울산으로 돌려보냈다.
이로써 공사기간 단축은 물론 공사비를 290억원이나
절약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정주영은 여의도의 약 33배에 달하는
1억5537만㎡(4700만평)의 국토를 새로 만들어서
나라의 지도 모양을 바꾸어 놓았다.
이 놀라운 ‘정주영 공법’은 ‘뉴스위크’와 ‘타임’ 등
세계 유명 언론에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소개되었으며,
영국 런던 템스강 하류 방조제 공사를 맡았던 회사에서는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서산간척지는 제염작업을 거쳐 1987년 처음으로
벼를 심었고, 지금은 연간 50만섬 이상의 식량을 얻는
‘보고(寶庫)’가 되었다.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