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곡된 유대인의 전통
막 7:9-13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막 7:9-13 / 그러나 사실은 너희 자신의 전통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짓밟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10) 모세는 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고, ㄷ) `어미와 아비를 우습게 여기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ㄴ. 출 20:12(참조, 신 5:16. ㄷ. 70인역 출 21:17) 11) 그런데 너희는 부모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진정으로 부모에게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하게 하고 있지 않느냐? 12-13) 이것이 바로 너희들 인간이 만든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냐? 이는 단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그밖에도 너희는 그와 비슷한 일을 많이 저지르고 있다.'
본문은 정결 논쟁의 3부분 중에서 두 번째 부분입니다. 논쟁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인 생명 존중과 사랑이 담긴 계명이 형식이 되어 죽어버린 것을 탄식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진 위선과 형식주의를 질타하고, 비판하십니다.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9, 13)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레 19:18; 신 6:5; 막 12:28-34). 하나님의 계명은 이 두 가지 핵심 가치를 잘 추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세부지침입니다. 그러나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일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인간의 교훈이 덧붙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장로들의 유전이 아무리 그럴싸해도 하나님이 계명이 먼저입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나중입니다. 그런데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장로들의 유전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립니다. 율법의 정신과 내용은 사라지고, 종교적인 형식만 남았습니다. 사람을 살리려고 하나님이 제정하신 계명이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신앙 왜곡 현상을 고발하십니다.
고르반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10-12) 예수님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인간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설명하십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린 제물, 헌물’을 뜻합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려 하나님을 높이려는 좋은 뜻으로 시작된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예수님이 활동하실 때 이 단어는 하나의 맹세어가 되어있었습니다. 어떤 물건에 대하여 고르반이라고 맹세만 하면 그 물건은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주기 싫을 때는 고르반이라고 맹세만 하면 됐습니다. 부모 자녀의 관계에서 고르반 관습은 부모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명과 부모 부양의 의무를 합법적으로 면제해주는 수단이 되고 있었습니다(출 20:12; 신 5:16; 출 21:17; 레 20:9). 고르반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적용 :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하는 일이 사실은 내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아닙니까?
성경이 아닌 임의로 만든 교리와 형식적인 규례를 만들어서 지키도록 하는 이단의 교회에 적지 않은 이들이 현혹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참 진리인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산다면 잘못된 교리에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늘 먹으며 사는 것이 이단으로부터 보호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 설 교 >
부모공경과 고르반
이상규 목사
정채봉님이 지은 "멀리 가는 향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어떤 집에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손자인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간혹 다투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년이 들을세라, 할머니가 들을 세라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토닥거렸습니다. 그러나 차츰 날이 감에 따라 부부싸움 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소년도 듣게 되고, 할머니도 듣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담을 넘어가게도 되었습니다.
"당신 어머닌 비위생적이어서 함께 못살겠어요."
"오늘 신경정신과에 다녀왔어요. 내 병명이 무엇인지 아세요?"
"당신 어머니가 남한테 망신 사는 일만 저지르니 내가 노이로제에 걸릴 수 밖에요."
날이 가면서 소년의 어머니는 할머니를 보면 고개를 돌렸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소년의 아버지도 할머니 방 앞을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어느 날 또 죽는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시퍼렇게 되어서 외쳤습니다.
"나를 택하든지, 당신에 어머니를 택하든지, 둘 중 하나를 말해요!"
마침내 소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합의를 하였습니다. 할머니가 묵을 방을 하나 얻어서 내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낙엽이 우수수 지는 날, 온 식구가 달려들어서 할머니의 이삿짐을 꾸렸습니다. 아버지는 담배를 피워 물고 상자를 묶었고, 어머니는 고무장갑을 끼고 거들었습니다. 소년은 종이와 연필을 꺼내 와서 적기 시작하였습니다.
헌 옷장 1, 전기장판 1, 담요 1, 밥통 1...........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너, 왜 그런 것을 쓰니?"
소년이 대답하였습니다. "다음에 어머니를 내 보낼 때 내가 챙겨드릴 품목이에요."
여러분! 고려시대에는 "고려장"(高麗葬)이 있었고 현대에는 "현대장"(現代葬)이 있답니다. 정채봉님이 쓴 이야기는 현실과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왕림에 사시는 집사님께서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계십니다. 아직도 정신은 멀쩡하여 제가 심방을 가면 말은 못해도 잘 알아보십니다. 간병인들이 귀찮기 때문에 팔을 침상에 묶어 놓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저귀를 죄다 찢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찾아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그래도 부담감 때문에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슬픈 현실입니다. 지난 8일 어버이날을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하셨습니까? 오늘은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부모 공경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부모 공경(10절)
바울 사도는 에소서 6: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부모를 섬겨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 '주 안에서'라는 말은 "네가 주님 안에 있다면", "네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네 삶이 예수를 믿고 달라졌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네가 이러하다면 너는 더욱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골 3:20 /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에베소서의 말씀은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에서는 표현이 약간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삶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 안에 있다면 부모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시키는 일이 나쁜 일이라도 순종해야 합니까?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라는 말은 부모에 대한 순종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2. 인간으로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옳으니라"는 표현이 신약성경에만 183번나옵니다. 이 말은 주로 절대적 가치를 강조할 때 쓰여집니다. 즉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당위의 일을 강조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중세 신학에서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들의 행위를 가리켜서 "이것은 '자연적인 정의'다. 자연에 따르는 정의로운 일이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강조해왔습니다.
3.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네가 잘 되고" 여기에서 '잘 되고'라는 말은 폭넓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는 대부분 물질적인 축복을 의미하였습니다. 축복을 말할 때 구약은 주로 물질적인 축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축복의 개념은 달라집니다. 특히 에베소서에서는 신령한 복, 영적인 축복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는 네가 잘 되고'라는 말은 무엇이든지 잘 풀릴 것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잘 되고 우리의 질적인 삶에 축복이 임하는 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또한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말씀은 계산적으로 오래 산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삶을 더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가운데 축복의 약속이 들어 있는 첫 번째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4. 자녀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절의 자녀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4절의 부모에게 주는 메시지와 직결됩니다. 한때는 자녀였던 사람들이 얼마 후에 부모가 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나의 부모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바로 내 자녀들의 삶을 태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정채봉 선생님의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을 시사해줍니다.
영어에 "봄으로써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본을 보이느냐? 우리가 우리의 부모를 어떻게 대하느냐? 이것이 우리 자녀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 짓는 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분명 모세의 율법을 다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① 예수님께서도 순종하셨습니다.
눅 2:51 /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는 말은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여 받드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의 권위 앞에 순종하셨습니다.
②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15:4 /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③ 어머니에게 최고의 존칭어를 사용하셨다.
요 19:26 /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여자여'라는 말은 하대하는 말이 아닙니다. 높고 귀한 지체의 사람을 행하여 사용되어진 단어입니다. 고대 문헌들을 보면 왕후에게 사용되던 존칭이 바로 '여자여'라는 단어였습니다.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가 유명한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한 첫마디가 '여인(구나이-gunai)이시여'였습니다.
④ 어머니의 구체적인 필요를 공급하셨습니다.
요 19:27 /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자기의 어머니의 노후를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므로 어머니의 필요를 공급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을 철저히 지키신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자녀된 우리들에게 약속 있는 첫 계명을 지킬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고르반의 사람들(11-12절)
장로들의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의무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할 의무가 없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부모 공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로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이용했습니다. 또 '고르반'은 일종의 맹세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가진 물건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부모를 위시한 모든 타인으로부터 제한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 '고르반' 맹세는 비록 모세의 또 다른 계명(부모 공경 등)을 파기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맹세'는 실제로 성전에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강제 규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맹세자는 '고르반'된 물건을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아예 헌납치 않는 수도 있음)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해도 무방했던 것입니다.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불효자들의 기만적인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구실을 한 것입니다. 한편 후대 랍비들은 이러한 규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미쉬나'(Mishnah)에 고르반을 빌미로 부모 공양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아직 그 조항이 제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는 부모 공경보다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더 중하게 여겨 고르반의 폐단을 계속 고집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토록 철저하게 율법에 따라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실천하셨건만 그때 당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하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오히려 그 반대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부모에게 생활비를 드려야 하는데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불순종이고 불공경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마음의 동기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부모들의 경제적 필요에 대해 책임을 다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자기 가족을 돌보아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딤전 5:8 /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자기 가족 가운데 가장 가까운 가족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부모님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키포인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부모를 등한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 공경은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르반이 무엇입니까?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부모에게 드릴 수 없다는 의도로 악의적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아무리 많이 헌신하고 또한 많은 헌금을 드렸다 할지라도 부모 공경의 의무가 면제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몫과 부모를 섬기는 몫은 각각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혹시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부모 공경을 등한히 하였던 고르반의 사람들은 아닙니까?
막 7:13 /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유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 때 약속하신 복이 임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하는 길
부모님의 희생은 가시고기의 사랑과 같습니다. 가시고기는 암놈이 알을 낳고 어디론가 가버리면 수놈이 알에서 새끼가 부화할 때까지 알 주위에서 지켜 주다가 결국에는 새끼들을 위하여 죽게 되고 새끼고기들의 먹이가 된다고 합니다.
■ 이런 눈물의 가시고기 사랑으로 16년 자폐아들을 바로 세워 수영 선수로 길러낸 훌륭한 부모가 있습니다. 자폐증 아들 진호(17·수원북중3)를 지켜온 김기복(44·의사) 유현경(42)씨 부부의 열여섯해 삶은 ‘고통-눈물-절망-희망’으로 점철됐다. 아들이 자폐아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하필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는가”라며 자살까지 생각했던 김씨는 이젠 ‘삶의 의미를 일깨워준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인다. 이들 부부는 2년 전인 2001년 5월 자폐증으로 고생해온 진호가 전국 규모 장애인 대회에서 처음 우승했던 감격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진호를 이처럼 당당한 인격체로 키우기 위한 김씨 부부의 헌신적인 ‘자폐증 치료기’는 16년 전인 1988년 시작된다. 당시 두 살이던 진호가 한 가지 행동에 지나치게 몰입한다 싶어 서울대병원을 찾은 결과 발달장애 2급인 자폐증 판정을 받았다. 김씨는 “막 재롱을 부리기 시작한 아들이 자폐증 환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땐 너무나 막막해 자살을 생각하고 11층 아파트 베란다에 섰던 적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털어놓았다. 6개월간의 죽음보다 더욱 힘든 방황 끝에 김씨는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그로부터 가시고기 아빠의 16년 희생은 시작됐다. 김씨는 “의사인 자신조차 치료할 수 없는 병명 앞에 좌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회상했다. 이런 아이를 장애아 수영선수로 길러내었다는 것은 부모의 희생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수영 실력이 부쩍 향상된 진호는 1학년 때인 2001년 5월 전국장애인체전 자유형 50m와 100m에서 우승을 한데 이어 2002년 4월에는 일반 학생들까지 참가한 경기도지사대회 중등부 자유형 100m에서 2위에 입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7월 장애인 수영부문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돼 부산 아시아 태평양 장애인 경기대회 자유형 50m와 1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아버지의 말에 “다음달 충남 천안종합운동장 등에서 열리는 제23회 전국장애인체전에서 꼭 1등을 할 것”이라는 진호의 화답이 김씨 부부에겐 더없이 소중한 ‘5월의 선물’이다.
부모님의 사랑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 자녀들이 부모님을 어떻게 공경해야 하겠습니까?
❶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십시오. ❷ 부모의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❸ 부모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 탈무드에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경외하던 랍비 요시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요시아가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시아야! 너는 하늘나라에 가면 '레네스'라는 푸주간 주인 곁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푸줏간 주인을 제일 멸시하였습니다. 요시아는 꿈에서 깨어나서도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메시지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레네스'라는 사람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한 시골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요시아가 직접 찾아가 "왜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제가 노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노모님이 병석에 누워 계셔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시아는 그 순가 하나님께서 왜 그 꿈을 보여주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부모를 귀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 두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고르반의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그 어떤 이유도 부모 공경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함으로 축복 받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르반
손상률 목사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고르반’입니다. 원래 고르반이라는 히브리말의 뜻은 예물이나 헌물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에 사용되었습니다(레 2:1, 5). 그러나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이 말이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빙자하여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로 잘못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곧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려 버렸다고 하여 불효의 핑계를 삼을 때 이 말을 썼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신앙의 근본은 저버리고 외식에 치우쳐 고르반적인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1. 하나님께 대한 고르반입니다.
‘고르반’이 본래의 신앙적인 뜻에서 이탈하여 불신앙적인 용어로 전락해 버릴 때 이 말이 범죄의 수단으로 쓰여지는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핑계도 성립될 수 없지만 인간의 어리석음은 그런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맙니다.
1. 최초 범죄의 형식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범죄를 하게 된 것은 외부로부터 들어온 마귀와 결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으로 행복한 삶을 지킬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1에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하였습니다. 이때 여자가 즉시 뱀의 질문에 반응하면서 의사가 통하게 되었습니다. 뱀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자의 눈에 그 열매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 그것을 따 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창 3:5-6).
2. 언약 당사자의 책임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창 2:16-17).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대표요, 또한 오고 오는 인류의 시조가 되는 아담에게 주시는 명령이요, 언약입니다. 범죄의 과정이나형식을 볼 때 마귀가 뱀을 이용하여 여자에게 접근하였고 또 여자는 자기 남편에게 권해서 먹게 하였을지라도 그 전에 하나님과 아담과 사이에 성립된 계약이 우선됩니다. 따라서 그 모든 책임은 계약 당사자인 아담에게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후손에게 낙원에서의 복된 삶을 전제로 언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3. 핑계와 책임회피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범죄하였다는 것을 바로 알았습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하고 추궁하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하고 하나님과 여자의 핑계를 하였습니다. 여자도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하고 뱀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 핑계를 한다고 자기들의 책임이 면해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하는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이유와 핑계를 대려고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비겁한 일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죄에 대한 책임은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사람에게 대한 고르반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도리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될 본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눅10;27). 말로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본분을 못다 하면서 고르반이라는 말로 핑계를 하는 것입니다.
1. 이웃 사랑에 대한 본분
요한1서 4:21에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모세의 계명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다 지켰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라고 하였습니다(마 23:24). 그것은 그들이 율법에 따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철저히 드리면서 그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렸다는 것으로 증거를 삼았습니다(마23:23).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될 신의와 사랑을 저버리는 것은 율법의 더 중요한 것을 져버리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책임을 못다 하면서 고르반으로 핑계를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됩니다.
2. 이기심의 발동
아담의 첫아들 가인은 동생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자기와 자기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신 데 분노를 품고 그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고 물었을 때 그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나님께 반문하였습니다(창 4:4-9). 가인은 형제를 사랑해야 될 본분을 저버렸을 뿐 아니라 자기의 손으로 동생을 쳐 죽이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도 거기 대한 잘못이나 책임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모른다고 시침을 떼었습니다. 여기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는 말은 자기의 책임을 피하는 고르반적인 태도입니다.
3. 공정하지 못한 척도(尺度)
잠언 16:11에 “공평한 저울과 접시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저울이나 자(尺)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때와 자기에게 적용할 때 방법이 다릅니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진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 진 사람을 옥에 가두는 것처럼(마 18:23-35) 자기가 받을 은혜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자기가 베풀어야 되는 책임은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 성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은 모르는 척하고도 박넝쿨이 마르는 것을 보고는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룻밤에 났다가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끼면서 니느웨의 수많은 사람이 죽도록 버려두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물었습니다(욘 4:6-11).
3. 자신에게 대한 고르반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거나 자기의 사명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어떤 구실을 만들어 자기를 합리화시킵니다. 이와 같은 고르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무엇에나 자기가 편리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1. 자기를 상실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과 주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를 어리석고 부패한 자라고 하였습니다(시 14:1). 사도 바울은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고 하였습니다(롬 1:28). 이들은 그 생각이 허망해져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실상은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롬 1:21-23).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겉과 속이 다르면서 고르반의 삶에 길들여진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생활을 하는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2. 선과 악의 기준이 흐린 사람입니다.
율법의 척도에 따라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좋고 나쁜 것과 옳고 그른 것에 대하여 정확한 분별을 하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매사를 하나님 앞에서 바라보고 그의 선하신 뜻에 따라서 생각하기 때문에 사려 깊은 판단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율법을 좇아 부모를 잘 섬겨야 되지만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다 드려버렸다는 구실로 자기의 불효를 호도하는 사람은 거짓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고르반 스타일의 신앙에 젖어지게 되면 우선은 그게 편리하고 좋은 것 같으나 얼마 못가서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장자권의 명분보다 팥죽 한 그릇이 더 좋은 줄 알고 쉽게 내주었던 에서는 뒤늦게 후회하며 통곡했으나 돌이킬 기회가 없었습니다(히 12:16-17).
3. 사랑이 결여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을 빙자하여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나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앉아 음식을 잡수시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내세우며 손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부정하다고 죄악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근본인 사랑은 배제한 채 조문이나 형식으로 사람을 얽어매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도, 세상에서 멸시받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하는 것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것도 억지로 하는 의무가 아니라 순수한 사랑과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위여야 합니다. 사랑이 동인(動因)이 되면 ‘고르반’이 작용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롬 13:8).
성경의 권위를 세우신 예수님
박상훈 목사
예수님이 게네사렛 땅에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을 엿보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과 또한 서기관 중 몇 사람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하여, 예수님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장로들의 전통에는 위배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에 의하면,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잘 씻어야 했습니다.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온 몸을 씻고 나서야, 비로소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음식을 먹기 전에는 음식을 담을 잔과 주발과 놋그릇도 씻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장로들의 전통은 음식을 먹기 전에 씻는 일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위생상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에 따르면, 씻지 아니한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사람이 부정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씻지 아니한 손, 곧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개적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범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으로 그들의 공격을 물리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을 내세우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오직 성경만이 절대적인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경의 권위를 분명하게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믿고,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문제점을 지적하신 예수님입니다(9절).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5절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이 지키는 전통을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너희 전통”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표현하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너희 전통”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들이 지키는 전통은 사람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과는 달리, 장로들의 전통 곧 그들의 전통은 결코 절대적인 권위나 구속력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모든 책임이 장로들, 곧 그들의 조상들에게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 탓이 아닙니다. 조상 적부터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핑계를 대지 못하도록, 예수님은 아예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신 것입니다.
아무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핑계가 되어서, 그것이 구실이 되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쉽게 거역했습니다.
본시 장로들의 전통은 성경을 보호하는 울타리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울타리가 빽빽하게 들어섰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울타리 역할을 하는 그들의 전통에 가리어서, 그 안에 있는 성경이 제대로 보이지를 않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들의 전통을 모아놓은 것을 미쉬나(Mishnah, “반복”)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미쉬나를 좀더 자세하게 풀이한 것을 게마라(Gemara, “보완”)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곧 미쉬나와 게마라를 합친 것이 이른바 탈무드(Talmud, “배움)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봅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잘 씻어야 한다.” 이것은 미쉬나입니다. 이런 규정이 성경에는 전연 나오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로들의 전통, 곧 그들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손을 잘 씻는가? 적어도 달걀 한 개 반 분량의 물이 필요합니다. 그 물을 손바닥에 받아서 손을 비비면서 씻어야 합니다. 단 그 물이 손목 아래로 내려가면 안 됩니다. 손을 씻은 물은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게마라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을 전부 모아서, 그것들을 항목별로 나누어 체계화한 것이 바로 탈무드입니다. 우리 나라 시중에 나와있는 탈무드는 재미있는 내용만 간추린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히브리어로 된 탈무드는 20여권이 넘습니다. 그만큼 내용이 방대합니다.
아무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보다도 더 권위 있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구속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통을 어기면, 성경을 어긴 것보다 벌이 더 크다고 주장했습니다.
마11:28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마23:4 말씀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성경에도 없는 무거운 짐들, 곧 그들의 전통을 묶어서 사람들의 어깨에 지웠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본시 장로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키고 보호하는 울타리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전통을 지키려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렸습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전통을 성경보다도 더 상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만든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 곧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치명적인 문제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바라보려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말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초점이 잘못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시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의 초점은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기를 바랍니다.
2. 구체적으로 예를 드신 예수님입니다(10~12절).
오늘 본문에서 먼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렸습니다. 곧 이어서 예수님은 이와 관련된 하나의 구체적인 예를 드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는 십계명 가운데 제 5계명으로서, 모세가 출20:12에 기록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예수님은 이를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13절에서 예수님은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기록했든지, 이사야가 기록했든지, 또는 다른 사람이 기록했든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15:4 말씀을 보면, “모세는”이라는 말씀 대신에 “하나님이 이르셨으되”라는 말씀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뜻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의 권위를 확고하게 세우셨습니다.
신12:32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지키고 행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여기에 무슨 변명이나 핑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경에 있는 또 다른 말씀을 추가로 인용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출21:17 말씀입니다.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이렇듯 예수님에게는 언제나 성경만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가 받아야 할 벌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만무했습니다.
물론 구약성경과는 달리 신약성경에는 그와 같이 혹독한 벌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함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며,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부모가 나이 들어 일할 수 없을 때, 자녀는 물질로 부모를 봉양해야 합니다. 부모 공경에는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 계명을 어길 경우에 중한 벌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너희는 이르되.” 이는 10절에서 시작하는 말씀, 곧 “모세는”하는 말씀과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과, 이 계명을 어길 경우에 받게 될 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경과는 다르게 행하며, 또한 성경과는 다르게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지키는 잘못된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곧 이어 예수님은 그들의 그릇된 전통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이 지키던 전통 가운데, 일명 “고르반”(Corban)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로 고르반은 “예물”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를 해석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졌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그가 가진 재물을 고르반, 곧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기로 서원을 했습니다. 민30:2 말씀처럼, 하나님께 한 서약은 반드시 이행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미 고르반을 하기로 하나님께 약속한 재물은 다른 용도로는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부모가 나이 들어,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와서 그에게 물질적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때 그는 그의 부모에게 이와 같이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것은 이미 고르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30장을 읽어보면, 이것은 핑계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자녀가 서원을 했더라도, 그 부모가 허락하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자녀는 자기가 한 서원을 이행하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서원은 고칠 수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비록 고르반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자기의 재물을 계속해서 소유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따금 성전에 올라가서 “이것은 고르반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조금씩 하나님께 바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물론 그 나머지는 자기가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고르반이라는 전통을 만들어낸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이 고르반 제도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사람들로부터 못된 자식이라는 질책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전통이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일단 무엇이라도 고르반이 되면, 그들은 그것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도록 아예 금해버렸습니다.
이유는 뻔합니다. 하나님이 부모보다 더 크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부모를 섬기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따지고 들면, 이것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려고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하나의 핑계요 구실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고르반이라는 전통을 만들어, “네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심지어는 그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네 부모를 공경하면 안 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렸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 본문 앞 6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선지자 이사야가 그들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잘 예언했습니다.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한다고는 했지만, 그들의 경배는 하나님이 열납하지 아니하시는 헛된 경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확신하면서, 성경 말씀을 붙들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 예배가 될 것입니다.
3. 결론을 내리신 예수님입니다(13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조상들로부터 잘못된 전통을 이어 받아서 그대로 준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그 그릇된 전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여 주면서, 남들도 그 어그러진 전통을 그대로 지켜 행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8절 말씀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습니다. 또한 9절 말씀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렸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13절 말씀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점점 더 그 도가 심해졌습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것은 제 5계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그들은 이같은 일을 많이 행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일을 빈번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이미 마가복음 2장에도 그러한 예가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들은 시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손으로 밀 이삭을 잘라서, 그것을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신23:25을 보면,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타인의 곡식밭에 들어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딸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날에 대해서는 아무런 예외 규정이 없습니다. 비록 안식일이더라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다른 이의 곡식밭에 들어가서 손으로 그 이삭을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행동이 성경에는 전연 위배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제자들의 행동이 자신들의 전통에 어긋났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출34:21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거두는 일, 곧 추수하는 일을 쉬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전통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에는 타작하는 일도, 키질하는 일도 금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 때 제자들의 행동은 여러 가지로 안식일을 범한 것이었습니다. 밀 이삭을 자른 것은 추수에 해당했습니다. 그것을 손으로 비빈 것은 타작에 해당했습니다. 지푸라기들을 버린 것은 키질에 해당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성경에 위배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전통에 제자들이 어긋난 행위를 했다고 심통을 부렸던 것입니다.
이렇듯 그들은 성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신들의 전통을 엄청나게 많이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전통이 성경과는 상충이 되는데도, 그들은 그들의 전통이 전부인 줄 알고서 오로지 그들의 전통만을 고집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세우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렸습니다. 결국 그들의 종교, 곧 유대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종교요, 성경의 권위를 짓밟는 종교였습니다.
결론은 자명합니다. 유대교는 거짓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교를 정죄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를 대신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그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교회로 하여금 성경의 권위를 확고하게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빌3:5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도 본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장로들의 전통에 사로잡혀, 그 전통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열심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빌3:8 말씀을 보면, 그는 과거의 자랑거리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그가 이전에 힘써 지키려했던 장로들의 전통도 들어있었습니다.
그 뒤로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오직 성경만을 힘써 전하며 가르치기를 고집했습니다. 그는 성경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바울도 성경의 권위를 확고하게 세웠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래 된 교회일수록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의 역사를 자랑하지 맙시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자랑합시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셔서, 친히 역사하심을 자랑합시다.
또한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하더라도, 전통이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전통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이며 영원불변합니다. 그러므로 전통을 내세우지 말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도록 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다가 멸망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믿읍시다. 성경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게 여깁시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복을 내리십니다.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늘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으며, 예수님 안에서 복되게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