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11]아름다운 의사(46)-꽃받침한의원 원장
TV 애시청 프로 중에 휴먼다큐 <인간극장>이 으뜸이다. 이번 주엔 전남 영광 재래시장 근처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해영씨의 이상한 진료실>편이다. 50대 중반의 해영씨는 직장을 사직하고 뒤늦게 의대에 편입, 의사가 된 미혼의 상남자. 위암 수술을 받으며 “인생”을 새롭게 보게 돼, ‘새로운 결심’(병원 개업 仁術 펼치기)을 실천한, 흔치 않은 사례이다.
그 프로를 보면서, 지난 월요일 오후 처음 방문한, 경기도 하남에서 한의원을 개업한 ‘50년 친구’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오늘은 내 친구의 이야기이다. 나는 지금껏 이렇게 學究熱에 불타는 친구를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 명문 사립대(?) 영문학과를 3년 같이 다녔다(나는 77년 지방대에서 그 대학에 편입했다). 80년 졸업 후 1년인가 행정대학원을 다니다 군에 입대, 제대 후 명문 S대 언어대학원에 진학하고자, 제2외국어가 필수여서 프랑스어를 1년간 배웠다.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이번에는 모교 중문학과 박사과정에 도전했다. 그때마다 나는 감탄과 존경의 눈으로 그를 보곤 했다.
중문학박사가 되어 교수가 되었다. 滿洲語를 전공했다던가. 방학만 되면 중국의 奧地에서 살았다. 참 신기한 일이고 희한한 친구이다. 그런데 또 교수를 하면서 ‘윤선생교실’의 대학원과정을 2년, 그야말로 치열하게 다녔다. 엄청 빡세어 힘든 코스라고 들었는데, 해내고 말았다. 왜? 그런 고행을 하느냐고 묻자, 퇴직 후 꿈이 허준의 동의보감을 영어로 번역하는 거라고 했다. 복층으로 된 그의 집을 방문하고 깜짝 놀랐다. 중국어 藏書만 족히 1만권이 넘었을 것이다. 아예 開架式 서재였다. 한국어로 된 책이 한 권도 없는 걸 보고, 너무한다 싶어 <한국한시전집> 양장본 5권을 다음날 소포로 보낸 적도 했다. 내 주변에 거의 유일한 ‘공부선수’이고 ‘공부박사’이다. 1년에 한번 정도 볼까말까 하는데, 조상 중에 누군가 공부못해 죽은 귀신이 있나보다 농을 했다.
정년이 가까워오자, 이번에는 한의대에 편입하여 대입 진학 뺨치게 ‘죽어라고’ 공부를 했다한다. 家長의 의무도 보류한 채 전주에 원룸을 얻어 미친 듯이 공부한 탓에 영양실조까지 걸렸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한의사 자격 국가고시가 도무지 자신이 없다는 엄살도 폈다. 57년생. 정년을 한 후 세계 여행에 나섰다. 어느 땐 북유럽(노르웨이, 핀란드 등) 사진을 보내오기도 하고, 남미와 아프리카도 다녀왔단다. 그럴 때마다 ‘진짜 사람답게 사네’라고 부러워했다. 심지어 그 나이에 빅토리아폭포 위에서 번지점프를 탔다고 하는데, 나같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이다.
지난해 6월말, 한의원을 개업했다고 전화를 했다. 그때쯤 그 친구와 어떤 일(?)로 틈이 벌어져 서먹할 때여서 심드렁하게 ‘축하한다’며 끊었다. 어떤 일이 무엇인지 짚고 가자. 나의 두 아들 결혼식때에도 거액(?)의 축의금을 냈건만, 정작 자기 두 딸의 결혼식은 알리지 않아 사람을 성질나게 했다. 친구의 개똥철학이니까 그것도 좋다고 했는데, 정작 제 어머니 별세소식조차 알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대학시절부터 그 어머니를 여러 번 뵈었고, 그의 형제자매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그 친구를 보고 싶었겠는가. 축하화분조차 보내지말라고 했다. 한마디로 정이 떨어져도 오만 정이 떨어지는 친구, 그러나 ‘반세기 친구’가 아니던가. 아무리 그래도 개업을 했으니 한번은 가봐야 했다.
이러구러 세월이 흘러 설명절인 설이 가까워온 지난 월요일(24일) 눈 내리는 오후, 다른 친구에게 축하인사를 가자고 했다. 아담한 4층 건물 1층에서 그가 반겼다. 원장석 뒤 책꽂이엔 평생 처음 보는 한의학 서적들이 가득했다. 세상에 모든 아픈 사람들이 그의 눈에는 ‘꽃송이’처럼 보인다고 했다. 하여, 자신은 그 꽃송이들을 날마다 받쳐주는 ‘꽃받침’이라고 했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수많은 한의원 이름중 ‘꽃받침 한의원’은 유일무일할 듯하다.
4층 자택에서 1층 병원으로 내려오는 다람쥐쳇바퀴 생활이 7개월이 됐다며 웃는다. 아아-, 나에게는 이런 희한뻑적지근한 친구가 있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 긴 세월 공부한 보람이 열매를 맺었으니 좋은 일이고 맘껏 축하해줄 일이다. 또한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은퇴 후 ‘제2의 삶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가 아닌가. 원장으로 병원을 경영해보니, 대학사회, 특히 교수사회가 엄청 초라해 보이고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수입이 짱짱해서일까? 그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보람을 느낀다는 것같았다. 익숙해지면 간호사 없이 혼자서 경영할 생각이라고 한다. 그 생각도 참 유별나다. 역시 개똥철학 한의사답다.
지금도 원장실 창문 밖 야산에 사브작 사브작(싸목싸목) 내려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한의서를 들추며‘도침刀針’(일반 침이 ‘點’인 반면에 도침은 ‘線’이며 효능이 일반침보다 몇 배 더 좋다고 한다)을 꽂고 있을 친구를 생각한다. 한때 너의 개똥철학에 화가 많이 났었지만, 너의 길과 너의 생각은 나의 길과 나의 생각과 많이 다를 터이므로(그것이 민주주의이므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고 중얼거린다. 친구야, 이 세상 모든 꽃송이들이 그 잎을 활짝 피우며 웃을 수 있도록 너의 仁術을 마음껏 펼치시라. 7개월만이지만 뒤늦게 축하한다. 축하를 넘어 敬意를 표한다. 꽃받침 한의원, 파이팅!
부기: 너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이 작은 ‘歲畵소품’액자이지만, 그 뜻이 짧고 깊음을 알리라. ‘蛇行川’은 뱀모양처럼 구불구불 흘러가는 강물을 말한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머뭇거림도 없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바다(목표/목적지)에 이른다. 2025년 뱀띠 해를 맞아 구부구불 더디지만 여유롭고 안정적으로 흐르는 물길처럼 뱀의 초형肖形을 마음을 담아 새겨진 전각예술가 친구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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