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24
4월11일[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부활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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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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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lbEP--CWqc
[서울대교구 황중호 베드로(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방송주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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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골고타 언덕에서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참된 승리라고 볼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스런 유치원생들과 지구 살리기 운동에 헌신해오신 수녀님을 모시고 생태 환경에 대한 소중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구 살리기가 얼마나 중요한 테마인지에 대해서 이론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않았던 지난 삶을 깊이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씀 중에 제 가슴을 크게 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자라나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현재 지구는 생태 용량이 초과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후손들이 쓸 용량을 앞당겨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이 세상을 인간이 쓰기에 좋은 세상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각한 환경 위기 앞에서 가장 큰 피해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동식물들입니다.”
“지구는 우리 인간의 끝도 없는 욕망을 실현시키는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과도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담대한 생활 양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를 아껴야 합니다.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명확합니다. 에너지 재생, 자원의 순환, 미니멀리즘의 삶!”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복음 3장 35~36절)
공생활 기간 동안 계속된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다보면 예수님 역시 몹시도 지구를 사랑하셨으며, 친환경적인 삶, 미니멀리즘의 삶을 살아가셨다는 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지상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 하늘의 새들처럼 자유롭게 살라는 당부, 전도 여행길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여벌옷도 지니지 말라는 지침 등등.
부활하신 예수님의 노선 역시 공생활 기간 동안 지속된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 앞에 발현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휘황찬란한 복장을 한 황제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던 소박하고 청빈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부활 기간 내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화두 하나가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궁극적인 승리를 확증하고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승리는 세상의 승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인한 승리였습니다. 영광스런 부활을 통한 예수님의 승리와 관련해서 늘 유념해야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패배요 부활은 승리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참된 승리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언제나 십자가 상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삶은 시종일관 승리의 삶이었습니다.
부활을 통한 영광스런 승리의 삶은 결정적인 순간 골고타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목숨까지 내건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영광스런 부활을 확증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셨고, 우리의 영생을 위해 부활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안에서 또 다시 죽고, 부활하고, 승리하는 삶을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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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GKU9brVC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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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싸움에 중립은 없다>
스케일이 어마어마한 책 ‘삼체’(Three-Body)의 앞부분 줄거리입니다. 이야기는 심각한 사회적,ㅈ정치적 격변기였던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1976) 중에 시작됩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이 자본주의적 잔존 세력을 숙청하여 중국 공산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사회 정치적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수백만 명의 박해, 중국 교육 시스템의 혼란, 심각한 경제적, 문화적 피해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격변을 가져왔습니다.
이때 예 원지에(Ye Wenjie)는 천재 물리학 교수인 아버지가 반동분자로 처형되는 것을 봅니다. 미국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가르쳤다는 이유입니다. 아버지를 신고한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반동분자의 딸로서 수용소에서 지내던 그녀는 또한 마음을 주던 유일한 남자 과학자에게까지 배신당합니다. 최고의 과학자로서 우주에 신호를 보내는 일을 담당하게 된 원지에는 자신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발전한 문명을 지닌 평화주의자 계인으로부터 이상한 메시지를 수신하게 됩니다.
신호를 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치가 발각되고 자신들의 문명이 그들을 파괴하러 갈 것인데, 자신들이 도착하면 문명의 차원이 다른 자신들의 종족이 지구를 식민지로 만들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에 환멸은 느끼던 예 원지예는 잘됐다 싶어 그들에게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태양이 세 개인 행성에 사는 그들이 메시지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세 태양이 합쳐질 때 문명이 파괴되고 마는데 태양이 하나뿐인 지구는 그들이 원하는 가장 완전한 행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구까지 오는 데는 400년이 걸립니다. 그동안 지구가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 원지에와 그녀를 추종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지구의 문명이 더는 발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작전을 수행합니다. 지구는 그들의 작전에 말려들어 과학 혼돈의 늪에 빠지게 되고 매우 발전이 매우 느려지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외계인들이 도착하게 될 무렵 그들을 무력화시킬 인물이 나타납니다. 바로 평화를 위해 지구인들이 냉동인간으로 그때 깨어나게 만든 루오 지(Luo Ji)입니다. 루오 지는 트리솔라리안들이 자기들을 공격하면 그들의 좌표를 온 우주에 다시 날려 보낼 것이고 그러면 그들보다 더 높은 차원의 존재들이 와서 또 그들을 몰살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으로 트리솔라리안들과 거래하고 그들을 물러나게 합니다.
‘삼체’는 SF 소설이지만, 사실 우리 삶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누군가를 위해 일합니다. 원지에는 자신도 지구인이지만, 지구인들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를 파괴해 줄 대상을 찾고 그들의 뜻에 순종하여 그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지구인들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을 지연시킵니다.
반면 루오 지는 지구인들 편에 서서 어떻게 하면 그들을 저지시킬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기술로는 도저히 되지 않기에 깨달음을 통해 이 일을 이뤄냅니다. 정글 숲속에 병아리 한 마리가 있지만,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누군가 자기를 잡아먹게 되면 다른 누군가가 또 그놈을 잡아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게 만들면 된다는 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구원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원지에와 같은 일당인데,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면 안 되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들어주는 이들의 뜻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 자기들이 은혜를 받는 이들에게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한량없는 은혜인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적들은 또한 악의 세력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들을 고마워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의 말을 하고 그들의 뜻을 따라줍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에게 은혜를 받고 있고 은총과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 은혜를 주는
이의 말을 하고 뜻을 따라줍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빛과 어둠, 두 곳에서 옵니다. 지구를 침공하러 오는 이들이 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고, 또 지구를 지키려는 이들에게도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은 중립일까요?
그 사람은 지구 파멸의 문제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외계인과 그 일당의
편입니다. 어머니를 거부하면 중립일까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머니를 거부하면 그냥 악에 머물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은총을 원하느냐에 따라 내가 따라주는 뜻이 결정됩니다. 은총과 뜻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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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한민국에서는 ‘제22 대 국회의원’선거가 있습니다. 지역구 254석과 비례대표 46석을 뽑는 선거입니다. 저도 재외국인 투표 등록을 하였고, 지난 3월 31일에 투표를 하였습니다.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3가지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구도’입니다. 여당은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지지를 호소합니다. 야당은 민생과 경제, 국방과 외교의 현안들에 대해서 잘못된 것들이 있으니 견제와 심판을 할 수 있도록 지지를 호소합니다. 때로는 이 구도에 안보와 이념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른바 ‘북한변수’라고 합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으면 여당의 구도가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으면 정권을 심판하자는 야당의 구도가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두 번째는 ‘정책’입니다. 대통령은 ‘민생토론’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규제를 완화하고, 개발을 약속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예산이 소요되기도 합니다. 정부는 민생토론이라고 하였고, 야당은 대통령의 선거개입이라고 하였습니다. 후보들은 지역의 현안들을 해결 할 수 있는 정책을 발표합니다. 현실성이 있고, 창의적인 정책을 가진 후보들이 선택을 받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인물’입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공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참신한 인물을 후보로 내세웁니다. 시스템에 의해서 능력 있고, 인품이 있고, 헌신할 수 있는 후보를 공천하는 정당의 후보가 당선될 확률이 높습니다. 무엇보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투표가 국가와 주민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국회의원을 선출할 것입니다.
사제는 ‘선출’되는 직무가 아닙니다. 사제는 ‘성사’를 통해서 임명되는 직무입니다. 교회는 사제에게 3가지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사명을 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사명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제사직’입니다. 사제는 성사를 통해서 악의 세력을 물리칩니다. 미사를 통해서 사제와 교우들은 예수님의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죄를 사함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충실하게 살게 됩니다. 교회의 전례와 성사에 충실한 이들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것은 ‘봉사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과 봉사’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낮은 자제로 봉사에 충실한 사제와 교우들이 있는 성당은 친교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예언직’입니다. 예언직은 앞날을 미리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직은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 찬미받으소서, 모든 형제들’과 같은 문헌을 통해서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뿐인 지구를 보호하는 것,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것,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는 것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드러내는 예언직입니다.
오늘 성서말씀은 신앙인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실의 삶에서 손해 볼 때도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신앙인은 사람에게 순종하기 보다는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우리는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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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31-38: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위에서 오신 분이시다. 아드님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니셨으며 아버지의 광채요 모습이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드님을 공경해야 한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 5,23)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32절) 그분은 보고 들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성적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었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품에서 완전한 상태로 나오셨기 때문에 당신 안에 이미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참되고 거짓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따르려 하지 않는다.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그분을 닮아간다. 그러기에 위에서 오신 분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는 진리가 하느님께 가깝고 소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34절) 아드님이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우리도 말을 하려고 할 때, 말하려는 개념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의 말이 되어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말씀을 품으셨고, 아드님을 낳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낳으셨으며 아드님을 통하여 시간을 창조하셨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아버지의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하신다. 이 아드님은 성령을 온전히 지니고 계시며, 친히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는 그분께 성령을 주십사고 청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35절) 여기서 ‘모든 것’이란 아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당신과 같은 존재이시므로 또 다른 당신을 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유일한 말씀이시자 지혜이신 그분은 본성적으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영원으로부터 가지고 계시다. 단지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6절)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착한 생활과 행동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36절)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는 것은 치유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분을 믿고 따른다면 하느님의 분노가 떠나고 생명이 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8) 하셨다. 이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잘 따라 그분을 닮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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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니코데모와의 대화는 오늘 복음으로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신지를 궁금해하던 그에게 최종적 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이시고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시며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적 신원을 가지고 계시기에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고 선언됩니다. 이 우위성은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권력과 힘을 가지셨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과 친밀하고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 뒤의 내용들이 예수님과 아버지의 친밀함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시고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심으로써 온전한 일체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니코데모가 확인하고 싶었던 예수님의 신원인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복음의 마지막에,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가 사실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음이 선포된다는 점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 이 관계의 목적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길게 이어졌던 니코데모와의 대화의 결론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한다.”
모든 기교와 술수, 불안과 과장을 그만두게 하는 것은 참된 사랑과 그에 대한 확신입니다. 사랑이 참됨을 확인할 때 우리는 모든 의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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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1-36)
1) 이 말씀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복음서 저자의 설명(증언)입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하늘에서 오시는 분”)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34절)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는 말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35절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증언입니다.>
“땅에서 난 사람”이라는 말은, 자연 상태의 인간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라는 말은, 신앙과 상관없는 ‘인간의 지식이나 학문이나 예술 같은 업적들’은 모두 땅에 속한 것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허무하게 사라질 먼지 같은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입니다.(34절) 이 말은, 베드로 사도의 다음 신앙고백에 연결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이 말은, “주님의 말씀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성전 경비병들의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라는 말도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다.”라는 간접적인 증언입니다.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 있는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루카 4,32)라는 말도, ‘예수님 말씀의 힘’에 대한 증언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힘이 들어 있는 말씀이다.” 라는 증언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 힘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힘이기도 합니다.(마르 1,27) 마귀들의 힘은 ‘죽음의 힘’인데, 그 ‘죽음의 힘’은 예수님 말씀의 ‘생명의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합니다.>
3)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증언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에 연결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복음서를 쓴 목적’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31) <이 말은, 36절의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는 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를 쓴 목적’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믿고 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현세적인 복이나 얻자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인생살이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비는 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있는,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도 하느님 나라까지 잘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4) 36절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어서 생명을 얻으라는 권고입니다.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은, “실천하는 믿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거나,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생명을 보지 못한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입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바로 ‘지금’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상태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지금 무슨 벌을 받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으면서 은총과 사랑과 자비를 받지 못하는 것은, 벌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은총과 사랑과 자비를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쪽에서 받기를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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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고원일 안드레아 신부님]
<세상은 목표의 성취보다 나눔의 실천을 통하여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만날 때 일반적으로 출신이나 삶의 배경에 대한 물음을 던집니다. 그래서 삶의 배경이 괜찮은 사람들은 좀 당당하게 보이고, 출신이나 배경이 약한 사람들은 그런 것을 물어 보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출신이나 배경을 중요시 하다보면 진정 소중한 것을 놓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객관적인 평가의 기준이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이런 기준을 통하여 사람을 평가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바탕에서 볼 때 우리의 신앙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을 믿는다는 것은 출신이나 배경으로 볼 때 첫인상으로는 100점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행적을 듣고 보고 알게 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한없는 사랑에 감사하며 그분과의 만남을 기뻐하고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여주신 그 모습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은 마음들이 아니라서 예수님과의 만남과 가르침에 대한 해석을 자신들이 유리하게 판단하고 행동 해 버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은 하나인데 그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보니 좋은 분과 만남을 통하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여건들이, 인간의 욕심이 개입되어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세상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들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질주의 중심의 세상은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데로 살아가면 바보가 되고 낙오자가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일들이 잘 될 때는 굳이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자신의 뜻과 다른 경우에는 자신의 뜻을 포기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포기하려 합니다. 세상 삶의 목표가 욕심이라면 하느님의 삶은 나눔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란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삶을 자꾸 연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다”, “돈을 좀 많이 벌어놓고 난 다음에 생각하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사회적으로 안정될 때 그렇게 살아가자”
이런 식의 표현으로 정말 살아야 하는 삶을 연기하지만, 추구하는 목표에 대한 욕망은 한계가 없어서 우리는 그 때라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점점 더 속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후회합니다. 너무 앞만 보고 살다보니 놓친 것이 너무 많다. 후회해도 소용없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이런 후회를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인 것은 이런 후회의 소리를 들으면 그 다음부터 사람들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항상 그렇게 반복적으로 후회할 짓들을 하며 살아갑니다. 산을 오를 때 너무 정상에 집착을 하면 주위에 아름다운 자연의 변화는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너무 자신의 목표에만 집착을 하다보면 자신의 욕구나 권력의 성취는 있을지 몰라도 진정 함께 하여야 할 가족이나 이웃에 대한 따뜻함은 놓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삶을 아름답게 살기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며, 당신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목표가 나의 욕심과 권력에 중심을 두고 살아간다면 그 속에는 사랑과 나눔이란 단어는 없는 것이며 그 욕심과 권력은 우리 스스로를 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귈 때도 좋은 친구를 사궈야 한다는 말을 하고 출신을 따지고 환경을 따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또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의 성공인지를 당신 스스로 보여주신 스승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들의 잘못된 욕망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오신 주님을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추구하는 목표보다 더 중요한 나눔을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오랜만에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전화 한 통화도 좋을 것이며, 아직까지 용서하지 못해서 서먹한 친구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도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목표의 성취보다 나눔의 실천을 통하여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미루어 왔던 아름다운 일을 지금 시작해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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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정민수 헨리코 신부님]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가끔 신부님들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제 직무 가운데 강론과 고해성사만 없으면 사제생활도 할 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고해성사는 그저 듣기만 하면 되지만 강론은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신자들이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한 주일에 한 번쯤이라면 열심히 준비해 강론하겠지만 매일매일 묵상하고 강론을 준비해 강론대에 서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몇 년쯤 하다 보면 똑같은 복음 말씀을 가지고 강론을 해야 하는데 밑천 다 떨어지고 나면 할말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가끔은 강론을 준비하지 못하고 강론대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성령께 기도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강론 준비 못했습니다. 성령을 보내시어 저의 입에 하느님의 말씀을 담아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강론을 하면 신기하게도 강론을 준비하고 했을 때보다도 훨씬 깊이있는 강론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늘 준비 없이 성령께만 의지할 수 없는 노릇이라 정신차리고 시간을 내어 준비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부차적인 일에 매달려 본업인 예언 직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준비 없이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누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주님, 오늘 제 강론을 통하여 저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며 듣는 모든 이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게 하시어 부활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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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신앙의 보증>
1997년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국가가 빚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아서 국제통화기금에 돈을 빌리고 강제적으로 경제개혁을 해야만 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고 여러 은행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이 와중에 사업을 한 것도 아니고 빚을 진 것도 아닌데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이들이 있었습니다. 보증을 서 주었다가 함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것입니다. 그 중에는 가족 간에 친지간에 빚보증으로 더 큰 상처를 가진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맡기거나 보증을 서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그 사람을 상대하면서 얻은 여러 가치들을 종합할 때 생깁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보증을 서게 되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믿음도 이와 같은 방식을 거치게 마련입니다. 신앙과 믿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생겨납니다. 그러니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이라는 절묘한 조화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부르실 때 대자연과 우리 이웃들을 증인으로 쓰십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을 당신의 증인으로 쓰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 사용하시는 방법이 시련과 고통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응답할 때입니다. 이미 하느님은 당신의 것을 다 내놓았고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응답할 우리의 자세만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우리의 믿음으로 보증을 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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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빠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다 예수님께 맡기셨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3,35~36)
혹시 여러분 가운데 제 어머니를 아는 분이나 만났던 분이 계시나요? 누군가 혹시 제 어머니를 아는 분이 계시겠지만, 저만큼 또는 저보다 더 잘 아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아빠 하느님을 아시는 분은 그러기에 아빠 하느님에게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만큼 혹 예수님보다 더 잘 아시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아빠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에게서 들으신 것을 증언하십니다.”(3,32) 그런데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고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3,31) 알고 말하겠지만, 위에서 오시고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것을 알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빠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3,33) 믿습니다. 왜냐하면 아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은 진리이신 아빠 하느님, 곧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기”(3,34)에 그리고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3,34) 더 나아가서 “아빠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다 예수님의 손에 내주셨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3,35~36) 믿는 사람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단순한 관념 이상이며, 오히려 사랑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 예수님과의 살아 있는 만남이며 관계입니다. 즉 복음의 기쁜 소식은 공고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며, 그 인격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을 통해서 아빠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이런 인격적이고 사랑의 관계에서 참된 믿음의 표현인 순종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오늘 복음을 부활의 시선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으며,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활동이 이를 입증해 줍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고 깨닫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해답이며, 이 믿음은 위에서 오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증언을 믿고 순종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생하신 까닭은 아빠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고,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아빠 하느님의 구원 경륜은 완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체험한 사도들은 방해와 박해 속에서도 대담하게 이를 선포하자 최고 의회와 대사제는 위기를 감지하고 이렇게 당부합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사5,28) 하고 겁박하고 중단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5,29) 하고 증언합니다. 덧붙여서 사도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과 대사제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30.31)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아 부활하신 그분을 믿어 수많은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3,36참조) 하지만 예수님의 증언도 믿지 않았던 최고 의회 의원들과 대사제는 사도들의 증언 또한 믿지 않았으며, 순종하지 않았기에 생명을 보지 못하였습니다.(3,36참조) 이처럼 사도들은 복음의 증인으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순종으로 고백하고 이로써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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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혜로운 현자가 길을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혔습니다. 부딪힌 그 사람은 불같이 화를 내며 현자의 뺨을 가차 없이 때렸습니다. 그리고 큰 싸움을 벌일 험악한 기세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현자는 실랑이가 벌어지자 곧바로 마음을 가라앉혀 싸움을 피했습니다. 때린 사람도 자신이 너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현자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현자는 사과를 받아들였을까요? 저는 사과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 달리 현자는 사과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맞은 기억이 없소.”
현자는 맞은 기억이 없기에 사과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이로써 나쁜 기분을 안고 가는 것도 거부한 것입니다.
상대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은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공격에 일일이 대응하는 데 드는 힘이 얼마나 많이 듭니까? 오히려 당장 패배를 인정하는 편이 훨씬 더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대응하는 것이 정당해 보이지만, 대응한다고 해서 상대가 항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은 절대 손해 보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손해를 줄여주고 함께 사는 힘을 마련해 줍니다. 큰 이득을 얻을 때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패배인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이 가능했고,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이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절대’라는 말에 걸려 넘어져서 커다란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모든 권한 주셨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유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집중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시선을 외면하고 대신 주님께 집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모욕당하고, 세상 안에서 단죄받는다고 해도 억울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들고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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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땅 우리 님>
요한 3,31-36 (하늘에서 오시는 분)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하늘 땅 우리 님>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하늘에서
땅으로
우리 님
오시니
하늘은
땅의 하늘이요
땅에서
하늘로
우리 님
맞으니
땅은
하늘의 땅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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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홀만 헌트의 ‘세상의 빛’ 성화는 문 두드리는 예수님을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은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는 말씀에 기초하여 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런데 문을 보면 문고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문 바깥쪽에서는 열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면서 문을 두드릴 때 결정적으로 내가 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빛 이신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내 마음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시고 나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문을 열고 열지 않는 것은 자유 의지로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한없는 은총을 주시려고 해도 내가 협력하지 않으면 선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다가와 문을 두드렸을 때, 성모님께서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고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성모님은 “여인 가운데서 가장 복되신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 마음의 문도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마음껏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집회서에 보면,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16-15-1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신중한 처신이 요구됩니다. 죽음도, 생명도 지금 여기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생명이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미래의 생명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 모든 것 위에 있으면서 그분이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어도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위에서 오신 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고 오신 분, 아버지의 사랑받는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하느님의 말씀과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믿음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을 읽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영생을 기뻐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혼자만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모시는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면 할수록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하늘의 삶을 갈망하고, 지금으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자신의 영혼 사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보다 멸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14)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으로 초대받았지만, 결코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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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예닮의 여정-
“주님을 믿어라, 주님을 사랑하라”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그 찬미가 항상 있으리라.”(시편 34,1)
어떻게 살 것인가? 강론때 자주 인용했던 물음입니다. 답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사람은 절대 혼자서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라 닮아갈 때 비로소 참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물음만 있고 답이 없어 도저히 사람이 될 길이 난망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파스카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유일한 통로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36년동안 성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봤던 게 아마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일 것입니다. ‘하늘과 산’은 제가 참 많이 인용했던 자작 애송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하늘과 산은 파스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하늘과 산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에 날로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 관계를 상징합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과연 날로 계속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관계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오늘 요한복음 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에 관한 묵상 내용이 우리의 신원 이해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바로 위에서 오시는 분이,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 모든 것 위에 계시는 분이 우리의 평생 주님이자 스승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반면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한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이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과 깊어가는 우정 일치의 여정이, 날로 위에서 오시는 하늘이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날마다 참여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사람이라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을 살아도 욕망따라 살다보면 자기를 잃고 괴물도 야수도 악마도 될 수 있고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이다”라는 말마디는 제 지론이기도 합니다. 역시 오늘 다산 어른의 말씀입니다.
“삶에서 무엇을 추구했느냐에 따라 죽음의 무게도 달라진다. 태산과 같은 죽음이 있고, 깃털과 같은 죽음도 있다.”
하느님을 추구했느냐 세상 것들을 추구했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을 위해 죽고 열사(烈士)는 명예를 위해 죽는다”
어제 읽는 어느 초대 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거룩한 몸은 영적이며 빛이라, 당연히 위로 향합니다. 세상의 몸은 무겁고, 언제나 아래로 처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영적인 것들을 붙든다면, 그것들은 여러분을 위로 데려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 것들을 붙든다면, 그것들은 여러분을 아래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래서 자나 깨나 위에서 오시는, 하늘에서 오시는 파스카 예수님과의 우정을 깊이 하자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도 고무적이요 힘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위에서 오시는, 하늘에서 오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파스카의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땅 위에 살지만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 관계로 이미 땅 위에서 하늘나라의 삶을 사는 이들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사도들이요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보십시오. 예루살렘 최고회의에서 대사제가 심문할 때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주님을 증언하는 사도들은 땅에서 살지만 천상에 사는 신원임을 드러냅니다. 땅 위에서 이미 천상의 하늘나라를 체험하며 살기에 사도들의 샘솟는 용기에 확신에 찬 힘찬 증언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이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사도들의 핵심 선포내용이요 짧은 요약의 설교입니다. 예수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친교관계에 있는 사도들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가능한 자발적 사랑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는 사랑의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폴란드의 수호성인인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성인은 1030년에 태어나 1079년에 순교하셨으니 49년 생애를 사셨습니다. 저는 성인들을 기리는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반드시 성인들의 생몰연대를 들여다보며 제 나이와 비교해 보며 분발의 계기로 삼곤합니다. 저는 성인보다 무려 26년을 더 살고 있네요. 스타니슬라오는 ‘국가와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후에 주교가 된 스타니슬라오는 잘못됨이 있으면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두려움 없이 책망하고, 신자들이 종교적 생활에 열심히 하도록 했으며, 먼저 솔선수범해 좋은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성인은 열심히 기도하며 재를 지키고 엄한 고행을 하고 자선사업에 힘쓰며 성스러운 생활을 보냈으므로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의 덕에 감복해 감히 그의 말에 거역하는 이가 없었다 합니다. 주교는 뛰어난 언변으로 왕과 농민들의 죄악, 특히 역사상 폭군으로 유명한 블레슬라우 2세 왕의 부도덕한 행동과 불의한 전쟁을 꾸짖었고, 왕은 스스로 사과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다시 과거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합니다.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반역죄로 사형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공개적인 반대를 계속했고 마침내 왕을 파문합니다. 이에 1079년 5월8일 스타니슬라오 주교가 성 미카엘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때 왕은 부하 병사들과 잠입하여 창검을 휘두르며 주교를 직접 살해합니다. 백성들은 주교의 용감한 순교의 태도를 보고 성인으로 공경하고 왕을 부당한 자로 낙인찍어 폐위시키고 국외로 추방합니다.
헝가리로 도망갔던 블레슬라우 2세는 아마도 헝가리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참회하며 남은 일생을 보냈던 듯합니다. 1253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시성된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폴란드 국민의 상징이자 수호성인이 됩니다. 순교하기까지 예언직에 충실했던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역시 예수님의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과 깊은 친교로 땅에서 살았지만 예수님처럼 하늘에 속한 하늘나라를 사셨던 분임이 분명합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 중, 날로 깊어가는 예수님과 우정에 더불어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 하시고, 넋이 꺾인 이들을 구원하신다.”(시편34,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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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초월 싸움>
오늘 베드로 사도는 자기들이 명령한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시도자들에게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묵상하면서 저는 이렇게도 묵상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순종치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이 말은 베드로 사도가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 교만한 사람이 아니고 사람에게도 순종하는 겸손한 사람인데 다만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대통령이 옛날에 자기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말이 멋있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아마 대통령이 된 것도 이것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난 뒤의 그를 보면 아무에게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고, 모두가 자기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 훌륭한 사람은 순종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진정 훌륭한 사람은 가장 낮은 사람에게도 순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순종에 관해 얘기하면 자기는 갓 들어온 수련자에게도 순종할 채비가 되어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사람에게 불순종할 경우는 딱 한 가지 경우입니다. 하느님 뜻과 다를 경우입니다.
우리가 받들어야 할 분은 가장 높으신 분, 하늘에서 오시고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우리 신앙인이란 이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도 이 세상에 섬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땅에서 난 사람들과 달리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 세상을 초월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나 정치 무관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나 정치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함입니다.
일찍 자는 저는 어제 개표 결과를 보지 않고 잤고, 지금 저는 선거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지만 확인치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 문제에 너무 매몰되지 않으려고 일종의 초월 싸움을 하는 겁니다.
세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그러니까 세속화되지 않으면서 복음화하기 위해서만 세상에 내려가기 위함입니다.
세상에 관한 관심과 무관심 가운데서 초월 싸움을 하면서, 주님과 사도들처럼 그리고 프란치스코와 성인들처럼 진정 복음을 들고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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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3,35)
<불순종!>
오늘 복음(요한 3,31-36)은 '하늘에서 오시는 분에 대한 말씀'입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시는 분,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그들이 바로 유다인들입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구약에 머물러 있고, 신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 자체이시고 율법의 본질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사도5,29-30)
유다인들은 이렇게 담대하게 외치는 베드로와 사도들을 또한 거부했습니다. 그들을 예수님처럼 죽였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지 않은지? 나의 생각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나의 말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나의 행위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들 삶의 자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인 이슈나 사건 앞에서,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따라가고 있는 이들은, 진리와 공정과 정의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폴란드 순교자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국왕의 불의와 폭정 앞에서 진리와 공정과 정의를 외치다가 순교하신 분입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있던 성당에서 끌려나가 살해되셨습니다.
우리도 스타니슬라오 순교 성인을 본받아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진리와 공정과 정의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참사제, 참수도자, 참신자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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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UtzuXzok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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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 36)
생명이 있어
아름답고
믿음이 있어
순명합니다.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믿음이
마음을 움직이고
생명을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
가고자 하시는
길은
믿음의 길이며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의 진리는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인격으로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십니다.
믿음도 인격이며
영원한 생명도
실천하는
인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세상을 이끄시고
진실하신 사랑으로
십자가의 수난을
이겨내십니다.
마음을 일으켜서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체험하게
합니다.
믿음은 변화이며
시련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의 힘을
믿는 힘이며
하느님께
순명하는
참된 삶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참된 삶입니다.
참된 삶은
영원한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께
순명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영원한 생명을
드러냅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하느님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살과 피가
되시는
믿음의
주님께서는
이미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이
되셨습니다.
열려있는 삶
열려있는
믿음입니다.
우리 또한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살아가는 믿음이
영원한 생명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으로
온전히
이루어내신
영원한 생명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우리의
인격이며
분리될 수 없는
인격과 생명입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생명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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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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