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종이 변화한다는 생각 자체는 다윈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개념을 제시했을 당시만 해도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종의 기원> 3판 부터는 아예 첫 머리에 종의 변화 가능성을 주장했던 33명의 학자들을 열거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다윈이 새롭게 성취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 진화의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주요 메커니즘으로서 자연선택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그는 이 선택과정을 통해 개체들 간의 차등적인 생존과 번식이 일어나며 그로 인해 생명이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생명이 마치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듯 진화한다는 사실을 밝혀준 데 있다. 우리는 이를 <생명의 나무>라 부른다. 자연선택이론도 그렇지만 생명의 나무 이론도 전통적인 생명관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완벽한 신이 자연계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온갖 생명체를 촘촘히 심어놓았으며 각자의 자리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이를 "자연의 사슬 중 어디든, 그것이 열 번째든 1만번째든, 하나라도 끊어지면 전체가 무너지리라"고 읇조렸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된 <존재의 대사슬>개념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원숭이는 영원히 원숭이로 남아있고 그 위의 인간은 영원히 인간일 뿐이며 이 서열은 불변한다. 하지만 200년 전에 라마르크가 이 생각을 살짝 비틀었다. 다윈이 태어난 1809년에 출간한 <동물철학>에서 그는 단순히 생명체가 여러 세대를 거치게 되면 점점 더 복잡한 개체로 진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각 개체들 사이는 빈틈없이 연속적이어서 종은 명확히 구분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렇다 보니 종의 진화를 말했던 라마르크에게도 인간은 자연계의 맨 위를 차지하는 존재였다. 단지 <존재의 대사슬>이라기 보다는 <존재의 에스컬레이터>라고나 할까. 즉 거기서는 현재 도물원에 살고 있는 침팬지들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우리와 같은 인간종으로 변한다. 마치 2층에서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은 침팬지가 인간으로 변해 3층에 도착하는 것처럼... 다윈은 존재의 대사슬이든 에스컬레이터든 존재를 일렬로 줄세우려는 모든 전통에 종지부를 찍었다. 생명의 나무 이론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지렁이나 난초와 마찬가지로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수백억 개의 가지 중 하나일 뿐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동물원의 침팬지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코 인간종으로 진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고, 현 시점에 최고로 잘 적응한 종이 호모사피엔스라고 했던 오만함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생명의 나무에서 가지 끝에 있는 모든 종들은 어쩄거나 자신의 서식지에서 잘 적응해 살고 있는 성공한 종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화려한 종들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 계속해서 올라가면 결국에는 하나의 공통된 조상을 만난다. 다윈의 말 그대로 "이 얼마나 장엄한 세계관인가!" <종의 기원>에서도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도발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단지 "내 이론은 인간의 기원에 대해 새로운 함의를 준다"는 정도로 얼버무리고 12년이 지난 후에야 인간의 진화를 본격적으로 다룬 두 권의 책, <인간의 유래>와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을 잇달아 세상에 내놓았다. 이와 관련하여 <종의 기원>을 읽자마자 "이런 바보같으니! 이 쉬운 것을 나는 왜 여태 생각해내지 못했을까?"라며 탄식했던 토마스 헉슬리의 행보가 흥미롭다. 그는 <인간의 유래>가 출간되기 8년 전에 이미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라는 책에서 긴팔원숭이, 오랑우탄, 침팬지, 고릴라, 그리고 인간의 골격이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해부학적 관점에서 보여주었다. 앞에 나서기를 꺼렸던 다윈과는 달리 그는 공개적인 토론을 즐겼던 탁월한 논객으로서 다윈을 대신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대논쟁을 벌였다. 오죽하면 별명이 <다윈의 불독>이었겠는가? 그 중에서 특히 해부학자 리처드 오웬과의 뇌 비교 논쟁(인간의 뇌와 고릴라의 뇌를 비교)과 옥스퍼드의 주교 사무엘 윌버포스와의 인간 조상 논쟁이 유명하다. 1860년 6월 30일 영국과학진흥협회 연례모임에서 윌버포스와 헉슬리가 한 자리에 섰다. 월버포스는 연설 도중 헉슬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이 원숭이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조상은 할아버지 쪽에서 왔습니까, 아니면 할머니쪽입니다?" 곳곳에서 웃임이 터지자 헉슬리는 당당하게 "중요한 과학토론을 단지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려는 그런 인간보다는 차라리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삼겠습니다"라고 되받아쳤다. 원숭이와 인간이 최근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사촌지간이라는 생각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분명 거북살스러운 것이었다. 다윈의 은사이기도 했던 캠브리지대학의 지질학자 아담 세즈윅은 그것을 <솜씨 좋게 요리한 한 접시의 계급 유물론>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인류가 동물 세계의 자손이라는 다윈의 이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세상에, 인간이 원숭이의 자손이라니! 사실이 아니길, 하지만 사실이라면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1869년 4월 한 학술지에 알프레드 러셀 윌리스는 "인간의 도덕적 특성과 고도의 지적 능력, 그리고 인간의 뇌만큼은 자연선택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요지의 논문을 제출한다. 다윈은 그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과 나의 자식을 완전히 살해하는 일은 없길 바라오" 자연선택 이론을 공동 창시한 월리스마저도 주춤했으니, 인간에 대한 다윈의 생각이 얼마나 급진적이었음은 분명하다.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진화론을 <가설 이상의 것>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만큼은 진화론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유보했다. 또한 최근 미국 개신교 중심의 <지적 설계 운동>도 위로부터의 창조를 고수하고 있다. ----------------------------------------------------------------------------- 오늘날 우리의 기준으로 보아도 찰스 다윈의 < 종의 기원 > 은 '대박 상품'이었다. 초판 1,250부는 발간되자마자 동나 한 달여 만에 2쇄 3,000부를 찍었고, 10여년 간 해외에까지 꾸준히 팔렸다. 그만큼 진화론은 학계를 넘어 대중의 관심사이자 사회적 논쟁거리였다. 그 논쟁의 바탕에는 과학자라는 직업이 비로소 신학으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이 깔려있다. 종교적으로 핍박받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일화는 종교와 과학의 대립을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 18세기까지도 과학자는 곧 종교인이자 철학자였다. 독립된 직업으로서의 과학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학 연구란 성직자들이 신의 뜻을 밝히는 수단이거나 부유층의 고상한 취미였다. 다윈 이전에 생물종의 계통을 분류하거나 진화를 주장했던 이들에게는 이토록 복잡한 생명체가 만들어진 것 자체가 신의 존재를 방증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인간만이 고등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자연철학자가 아닌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이 처음 생겼다. 토마스 헉슬리는 지질학 천문학 생물학 등 전문 분야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규합하고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 앞장선 인물로 꼽힌다. 그는 자연선택이라는 진화 메커니즘은 신봉하지 않았지만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신학에 타격을 주고 과학에 씌워진 종교의 굴레를 벗기는 데에 효과적이라고 믿었기에 '다윈의 불독'을 자처했다. 19세기 과학자 사회는 급격히 팽창하고 학술지가 만들어지는 등 조직화되었다. 과학이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진화론 논쟁은 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