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타나스 나무 그늘(양정로타리에서 수영가는 길)
로타리에 있던 로타리 다방 건물이 어느 건물인지 확신을 못했다.
태풍'종다리'에 비를 맞은 떨어진 나뭇 잎을 하나도 못 봐서 섭섭했지만
환경미화원들의노고에 감사드린다
부산진여자고등학교
옆 펜스 위는 동의의료원(옛날 .동의공고 자리), 오른쪽은 양정고등학교
오늘도 지킴이에게 눈치를 따갑게 받았다.
중앙대로 928번 길 (멀리 보이는 산은 쇠미산) 아파트 공사중
행경산 정상, 부산진여자고등학교 정문 바로 밑
옛 동네는 사라졌다.
이곳이 영혜가 우리 집에 처음 들어 왔다.
양정 2번 출구에서 행경산 쪽 거리(옛날 거리 모습이 보인다.)
양정시장 옆 대로 (거제리 방향)
중앙대로(양정고갯길)
김무조 경성대 명예교수는 "부산 정신의 안팎,즉 양면성을 나누는 땅의 경계가 바로 모너머 고개 "라고 말한다.
모너머 고개 는 부산정신의 날.씨줄,안팎이 교차하는 상징의 터인 셈이다.
부산의 간선로인 중앙로의 중간쯤,부산 부산진구 양정동.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 (전사이 가도난)며 임란 때 순국했던 송상현 공의 동상이 서있는 송공 삼거리 일대가 바로 옛 모너머 고개 이다.
이곳의 최고 높이는 현재 해발 50m.지금도 고개라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90여년 전만 하더라도 아주 높은 고개였다.
향토사학자 최해군씨의 말이다.
"제법 험했던 모너머 고개는 일제가 4차례나 깎아냈지요." 일제는 한.일합방 직후 부산~울산 국도를 만들면서 제일 먼저 그 꼭대기를 깎았고,다음으로 1915년 부산진~동래 전차를 놓으면서 한층 더 깎았다.
이후 1930년 동해남부선을 부설할 때 더욱 파냈다.마지막으로 해방 직전 아스팔트 포장을 할 때 더 깎아내 오늘날과 같은 완만한 고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이전에는 이곳은 지금보다 20여m이상 높아,당시는 가파르고 험한 고개로 숲이 제법 울창했다고 한다.
모너머 고개 는 못넘는 고개라는 뜻이다.이 고개에 도적떼가 들끓어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그래서 말을 타면 날듯이 달려 넘어야 하는 고개라며 일명 비마치 (비마치,말 나는 고개)라고도 했다.또 말고개 의 음을 다듬어 모고개 라고도 했다.
미천한 갯가 사람들이 양반동네인 동래로 갈 수 없다는 뜻에서,혹은 개항~한.일 합방 때 일본인들이 넘어올 수 없다는 뜻에서 모너머 고개 로 불렸다는 얘기도 전한다.
부산사의 험난했던 굴곡은 이 모너머 고개를 중심에 놓고 볼 때 다소간에 뚜렷해진다.
고대~고려시대에는 모너머 고개의 안쪽 동네인 동래 중심의 역사였다.그러다가 고려말~조선시대에 오면 왜구의 노략질이 드세져 모너머 고개의 바깥 동네도 부각된다.
모너머 고개의 안쪽은 향반 계급이 주도하는 행정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고 바깥쪽은 무반 계급이 주도하는 군사의 요충지가 된다.일제시대에는 모너머 고개의 바깥 쪽이 집중적으로 부각된다.
일본인 전관거류지인 남포동 광복동 일대가 일제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부산의 중심지가 됐던 것이다.
모너머 고개에 올라 부산사의 굽이와 부산정신을 한번쯤은 새겨 볼만한 일이다.
그런 관심을 저버리지 않는 표지석도 필요한 일일 터이다.
송상현 동산 앞 산철쭉나무
송상현동상
실개천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할 역사가 있는 푸른 숲
부전역
전포초등학교(신축공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