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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살았던 날은 시 때문이었다
장병환 시인
이충이 선생님께서는 한국문학의 발전과 선진화先進化된 문화사회 구현을 위하여 『시와산문』을 설립하셨습니다. 또한 후진 양성에 힘쓰셔서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셨으며 삼십년 가까이 『시와산문』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선생님의 숭고한 뜻이 이어지길 바라며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선생님께서 올곧이 세워 놓으신 『시와산문』을 위해 오늘, 또한 내일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사) 시와산문 문학회 모든 회원님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광화문에서 강하게 진동振動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문학의 길에서 『시와산문』과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충이 선생님께서도 그동안 함께해 주신 여러분의 정성과 사랑을 기억하고 기뻐하며 기대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가르치시고 보여주셨던 이충이 선생님의 문학적 지식과 일관된 삶이 우리를 올바른 문학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확신하며 우리 모두 함께 새로운 내일을 향한 문을 열었으면 합니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시와산문』은 다가오는 모든 상황을 마주하며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선생님, 빛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하시는 일에 정체성을 두셨던 그동안의 선생님 발자취를 쫓아 내일을 향해 다시 써내려갈 것입니다.
“시를 쓴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러나 지금껏 살았던 날은 시 때문이었다. 이제는 시를 멀리하는 이 보다도 가까이 하는 이를 만나서 따스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선생님의 말씀 기억하며 사단법인 『시와산문 문학회』와 도서출판 『시와산문사』의 꿈을 지켜나가겠습니다.
기어코 고로쇠나무가 옆구리를 터트리고 난 다음
웃자란 보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4월의 빛으로 덮인다
(중략)
가슴 무너지는 것들을 하나씩 제자리에
일으켜 세우면서 어둠이
일어서지 못하는 새벽에 다시 살아
무덤 밖에 걸어 나와 서 있는 그 사람
(중략)
할 일 하는 자들처럼 구두끈을 묶으며
빛나는 4월의 아침으로 간다
― 이충이 「4월의 빛」 일부
선생님, 다시 뵙겠습니다. 누가 물어도 그리운 사람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찾아뵙지 못하고 보내드린 상실감과 애통함이 크지만 그 동안의 가르침과 크고 작은 추억들, 그리고 ‘4월의 빛’으로 선생님을 기억 하겠습니다.
주님의 품안에서 편히 쉬시길 기도드리며, 따뜻한 주님의 손길이 가족들과 『시와산문』을 기억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위로와 평안을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시와 산문』이셨던 선생님께
이현애 시인
산자들의 슬픈 축제에 초대되신 선생님,
삶은 바람 속을 달리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어제 불던 바람 곁을 떠나 또 어느 내일의 바람 속을 거닐고 계시는지요. 삶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고도 하였습니다. 이제 완성의 집에서 유유자적 하시는지요.
시와 바람나고 『시와산문』이라는 책으로 바람 일으키며 오직 시로만 하시던 여러 말씀 아직 식지 않았는데, 저희들 제자들은 아직 시를 알기엔 갈 길이 먼데, 어찌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아직도 간추려지지 않은 글을 들고 엉거주춤 선 채 두리번거리고만 있는데 이 아둔함을 버리고 가시다니요.
이른 봄이면 선암사 노홍매 만나러 어둑신한 남도 길을 달렸노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지요. 아직 마르지 않은 아침 이슬 먹음은 노매를 만나고 오면 그 일년이 청청하셨을 거고요. 곡우 전 선암 차 맛도 이제 기억 속에 담고 떠나시니 여전히 남아 매년 오는 노매는 저 홀로 외롭겠습니다.
병상에 누워 보고야 비로소 고백하는 사모님에게 쓰신 연서는 고해 성사 같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곧 일어서시리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지요. 그래서 조금씩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시와 먼저 결혼하신 무심한 지아비로 사모님과 자녀분들을 외롭게 하셨을 텐데 서운함 없이 사모님께서는 존경을 담아 내조를 하셨습니다. 좋아하는 음식 양손에 싸들고 하루 두 번씩 다니시다가 급한 마음에 버스에서, 길에서 넘어져 입원도 하셨지요. 내가 이만큼 버틸 수 있는 힘은 모두 우리 집사람 덕분이야 자랑하시던 말씀에 아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이 다 담겨 있습니다. 가족들께선 그 추억 안고 부디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선생님께서 이루어놓으신 시와 산문은 그리 많이 염려 마십시오. 이제 광화문 글방은 누가 무엇으로 채워놓아야 할지 암담하나 장병환 이사장님의 인도 아래 모든 제자들이 한마음으로 잘 가꾸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병상에서 홀로 마음 걸러내고 비우느라 사방에 벽을 두른 듯했을 선생님의 외로움에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제 몸과 영혼의 자유를 얻었으리니 좋아하시던 물소리 새소리에 마음 편히 놓으십시오. 저 언덕 넘어 아지랑이 어지러운 들로 산으로 더딘 걸음 말고 다리에 날개돋힌 듯 펼펼 날으시며 못다 풀어놓은 시와 자유 더불어 마음껏 노니십시오. 어쩌다 만나는 좋은 시가 생긴다면 선생님인 줄 알겠습니다.
제자들의 「나의 말」과 「비밀 언어」를 가장 잘 이해해 주시던 분, 우리 시의 고향이셨음을, 시안에 살며 시와 마주 할 때마다 그곳에 계심을 기뻐하겠습니다. 이별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스승이시며 친구이시며 연인이셨던 선생님, 영원히 사랑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빛을 파종하시고
김영자 시인
바람은 울음을 안고 있었습니다. 소리를 품어 몸살을 앓던 바람은 따스한 말을 나누고 싶었나 봅니다. 밤이 깊어지자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더 깊어질 때까지 내리던 비는 혼자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슬픔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별이었습니다. 목숨처럼 시를 사랑하셨던 선생님께서 가시던 날 밤비는 그렇게 내렸습니다. 어쩌다 노래방에 잠간 들렸을 때 열정적으로 즐겨 부르시던 ‘봄비’는 아니었지만 6월의 여름비가 봄비처럼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아름다운 그곳에서 빛을 파종하고 계십니까? 해방 절 아침 이 땅에 파종하시던 빛, 시의 씨앗을 뿌리고 계십니까? 선생님 떠나시던 날 촉촉하게 내린 비에 각박해지고 있는 이 땅이 좀 더 젖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러진 허리를 싸매고 매일 매일 녹슨 철조망을 점검해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더니 이젠 평안의 손길로 광화문 꽃밭에 시의 씨앗을 뿌리시고 계십니까? 명멸하는 별똥별이 더 낮은 땅에 씨를 뿌리는 날, 그 빛을 한아름 모아 선명한 자유를 누리고 계십니까?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시던 「시와산문」에 별을 뿌리고 계십니까? 평생 갈망하시던 그 깨끗한 손으로 한 포기 한 포기 심으시던 시의 포기에서 희망을 보십니까?
이제 무게를 내려놓으십시오. ‘달의 무게’뿐이 아니라 모든 것의 무게를 다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심으신 시의 포기들이 푸르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빛을 보내주십시오. 누군가는 선생님을 시의 파수꾼이라고, 누군가는 시에 목숨을 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직 온 몸으로 시를 사랑하셨고 시와 함께 하신 삶을 사셨기에 남은 자들은 존경을 보냅니다. 남기신 「빛의 파종」을 다시 읽고 싶습니다. 더 낮은 땅에 씨를 뿌리시던 그 마음을 느끼고 싶습니다.
노동의 어깻죽지를 태우며
숨 몰아쉬는 여름
조국은 부러진 허릴 싸매고
날마다 녹슨 철조망을 점검한다
(중략)
명멸하는 별똥별도 이 세상
어딘가에 빛을 뿌린다
그렇다 여름날 햇살처럼 선명한 자유
더 낮은 땅에 씨를 뿌리는 빛
우리가 심은 벼 포기도 한낮에 새끼를 친다
― 「빛의 파종 / 이충이」 부문
우리는 오래도록 함께 해오던 ‘목요 까페’를 기억합니다. 셋째 목요일이 되면 이제 천국에서 목요 까페를 열고 시산가족들을 기다리실 것만 같습니다. 점점 약해지는 시력을 무릅쓰고 두툼한 자료를 준비하시던 모습이 그리울 것입니다. 좀 더 나누고 싶어 국내외 시인들을 조명하며 작품 한 편 한 편 나누던 그 귀한 시간은 이제 돌아오지 않겠지요.
매년 함께 떠나던 봄, 가을 문학기행을 기억합니다. 곳곳을 여행하며 그 지방 문인들과 교류하며 작품 이야기를 하고 정을 쌓아가던 소중한 여행을 기억합니다. 좋은 작품을 쓰고 있지만 발표지면을 얻지 못하는 문인들에게 지면을 주고자 하셨던 『시와산문』 발간의 초심을, 그 따스한 마음을 함께 기억합니다.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병상에서 곧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계셨습니다. 이제 회복하면 ‘진짜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함께 ‘진짜 시’를 쓰자고 환하게 웃으시며 손을 내밀어 꼭 잡으시더니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많은 시인들이 왜 시를 쓰고 있는지 아직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유명해지려는 생각으로 시를 쓰지 말라 당부 하시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넘어지고 넘어지는 우리들의 생애
다 벗어버리고, 양파처럼
양파처럼 껍질을 벗고 나서도
당당할 수 있다면,
누구든 살아서 갈 수 있는 나라
무릎을 바로 세우고
새벽길을 나서서 알몸으로
알몸으로 태어난 당신의 나라에 가야하리
- 「누구든 다 살아서 갈 수 있는 나라 / 이충이」 부문
갈등과 고립의 시대가 더 가까이 오더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 시를 나눌 것입니다. 광화문에서. 모두 알몸으로 태어 난 그곳에서도.
살아 있는 죽음
강상기 시인
이충이형!
오랜 투명 끝에 그 목숨 줄을 놓아버리고 이승을 뜨신 지도 이제는 옛날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올 때는 무슨 일로 인지는 모르지만 없던 데서 왔습니다. 그래서 인지 갈 때도 없던 데로 돌아갑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날마다 무수한 별이 죽고 무수한 별이 새로 태어나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태양이 빛을 내며 연료를 소모하고 있는데 어느 날은 태양도 갑자기 죽어 버릴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인들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껏 백년 내외를 살다가 죽는 게 인간인데 종교, 예술, 정치, 경제, 법률 등 온갖 것을 추구하면서 사회규범에 속박되어 살지만 그 끝은 참으로 허망합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알면서도 한 죽음이 슬픈 것은, 슬퍼하는 자의 죽음도 그렇게 끝난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움의 다른 표현을 그렇게 할 뿐입니다.
이충이형!
형도 살아있을 때 이미 죽음이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문학의 길을 걷는다고, 시인의 길을 걷는다고 했지만 그 걸음은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 끝은, 한줌 재가 되어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형이 살아 요양원에 계실 때도 문병 한 번 못했습니다. 코로나19가 가로막았다고 변명하고 싶군요. 세상인심이 또한 그렇다는 것은 익히 아실 테니까.
거의 모두의 삶은 그렇게 외롭게 끝납니다. 그렇거늘 구태여 산자가 슬퍼만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형이 고인이 된 박태진, 문학전집을 만들어 그를 기렸듯이 이충이형이 남긴 유업을 후배문인들이 잘 살려내어 후진들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가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형은 베트남 참전도 해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광화문에서 약도매상을 해서 힘든 문인들을 많이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형이 시단에 등단하고, 문단의 여러 잡사를 챙기고, 문학잡지를 간행하여 많은 후진을 양성했습니다. 또한 문학상을 제정하여 후진들에게 문학에 정진하도록 동기부여를 했습니다. 열악한 재정난을 타개하느라고 백방으로 힘을 모은 것을 주변의 지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애틋한 정성으로 살아오셨기에 여한은 없을 줄로 압니다. 형은 살아있는 죽음입니다.
이충이형!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잡지를 간행하여 좋은 세상을 꿈꾸었듯이 그곳에서도 지옥을 해방시켜 지옥인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업을 계속하시면서 영생하기를 빕니다. 삼가 두 손 모아 간구합니다.
이충이 시인 회고回顧
정일남 시인
2019년 8월 말에 이충이 시인이 입원한 부천의 요양병원을 방문했었다. 침대에서 눈을 감고 자고 있는 듯했다. 간병인은 없었다. 나는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를 지났을까.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보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몇 마디 건넸다. 식사는 잘하고 잠은 잘 자는지를 물었다. 이충이 시인은 식욕도 없고 잠도 잘 못 잔다고 했다. 그리고는 서로 대화가 없이 시간을 보냈고 나는 침대에 눕도록 했다. 내가 오래 있으며 대화를 하는 게 도리어 부담을 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음료수라도 한통 들고 갔어야 하는데 그냥 가서 봉투 하나를 건네며 어서 재활치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자리를 뜨려는데 손을 내밀었다. 그때의 악수가 마지막이었다.
생각하면 이충이 선생과의 맺은 연이 30여 년을 이어왔다. 서대문 쪽으로 가는 오른쪽 인도를 얼마 가다 보면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골목을 얼마 들어가서 계단을 오르면 컴컴한 사무실을 형광등이 밝히고 있었다. 거기가 『시와산문』의 사무실이었다. 이 허름한 사무실에 책상 하나를 놓고 혼자서 문예지를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조선문학>을 내는 박진환 시인도 만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1993년 8월 6일에 『시와산문』이 발간되었다.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한 호도 거르지 않고 오늘에 이른 것은 이충이 시인의 집념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세상의 좋은 일을 다 마다하고 오직 『시와산문』을 위해 일생을 바친 것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으랴. 문예지는 대중오락 잡지와는 다르다. 한번 읽고 버리는 잡지가 아니다. 『시와산문』이 27년의 금자탑을 이뤘다. 한국의 문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시와산문』의 특징을 말한다면 첫째 문단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 문인들의 작품을 싣는 것을 배제해 왔다는 점이다. 좋은 작품을 쓰면서도 문단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작품을 발표해 왔다. 이런 제도를 실시해 온 것이 다른 문예지가 하지 않는 특색이라고 보았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묻혀있는 작가를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해 온 것이다. 이런 편집에 나는 신뢰가 갔던 것이다. 둘째는 신인 등용의 제도를 말할 수 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시와산문』은 애초에 신인을 등용할 때 1회 추천과 2회 추천이란 제도를 실시했다. 이 제도는 <현대문학>이 실시해 왔는데 이런 제도를 도입한 것을 나는 좋게 보았다. 문단에 등단하는 신인을 1회 추천을 한 후에 시간을 두고 그 신인의 다음 작품을 검토한 후에 2회 추천을 하는 제도였다. 신인으로 등단하는 자가 일생을 걸고 작품 활동을 할 사람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런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다른 문예지가 하지 않았던 제도를 실시하는 것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런 제도는 이충이 시인만의 착안에서 울어난 것이었다. 지금의 젊은 문인들은 잘 모르지만 이런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기서 밝혀둔다.
이충이 시인과 같이 했던 문학여행을 잊을 수 없다. 1박 2일의 일정이었다. 미니버스를 타고 문인 일행에 함께 했다. 산골 비포장 험한 길을 거쳐 간 곳이 처음 가보는 괴산이었다. 하루를 묵고 향한 곳이 그 유명하다는 화양구곡華陽九谷이었다. 가을빛이 완연했다. 제 1곡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당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까지 장장 4,3킬로미터의 거리를 일행들은 함께 즐겼다. 여기서 조선시대의 유학자 송시열 선생의 유적지를 방문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암 송시열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일생 동안 주자학을 연구했다. 전쟁과 반란으로 무너진 사회질서를 회복하는데 힘쓴 인물이다. 송시열 선생의 유적지는 사적 제 4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양구곡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고 했다. 이것이 이충이 시인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문학기행이다. 이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이충이 시인은 시보다도 많은 시의 해설을 남겼다. 오랫동안 한국문인협회 발행의 <월간문학>에 월평을 썼으며 독자의 호평을 받았다. 또한 많은 시인의 시집해설도 썼다. 이충이 시인이 남긴 시와 인생에 대한 중요한 어록語錄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시인은 상상력과 환상으로 언어를 만들어간다.”
“짧은 인생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시를 미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더 좋은 인간관계나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계기가 된다.”
“시는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는 끝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그 무엇이다.”
“우리가 만드는 시는 그 시를 만들기 전에 뇌에서 무의식적으로 결정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말이다.”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이고 신성하면서도 세속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결국 시는 진실을 볼 수 있게 하는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원래 대중이 이해하지 못한 언어로 시를 쓴다. 대중은 알지 못한 메시지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은 시 속에 구현된 시인의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이 낯섦의 언어는 대중의 소통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시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갖고 있다. 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내면의 표현이다.”
“시는 상상력을 덧붙여서 환상의 조각들을 축조하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삶으로부터 힘겹게 내몰릴 때 지친 내면을 슬며시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어록에서 이충이 시인의 시학詩學과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되새겨볼 어록들이다.
우리 곁에 ‘빛’으로 남고
최규창 시인
이충이형의 부음소식을 듣고, 「먼저 가는 자 빛으로 남고」란 시가 떠올랐다.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해서 25년 전에 미리 남긴 시인듯해 슬픔으로 다가 왔다. “먼저 가는 자/빛으로 남고/우린 또/무얼 기다리든가”란 구절과 함께 지난날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들에게 빛으로 남기 위해 서둘러 가셨다고 생각해 보지만, 어쩌자고 우리를 남겨 두고 먼저 가셨는지에 대한 원망이 아직도 슬픔으로 남아 있는 오늘이다.
1986년 가을에 광화문에서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을 주셨다. 이 시집의 표제 시로 수록한 것은, 먼저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한 준비였다고 이제야 깨닫는다. 충이형과의 관계는 이 시 한편에 담긴 치열한 시 정신에 깊은 교제의 관계로 발전되었다. ‘좋은 시’를 쓰는 시인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생각해 보니, 형은 우리 곁에 빛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서둘러 가셨다고 위로의 마음을 지녀 보기도 한다.
충이형과의 우정은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의 첫 만남은 《월간문학》 출신 모임인 「미래시」의 시낭송회였다. 그 모임에 충이형은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처음 참석할 때이다. 이날 첫 만남이었지만 그 이후부터 고향의 선후배로 오랜 지기처럼 가까워졌다.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되었으며, ‘충이형’이라고 불렀고 충이형은 ‘규창아’로 발전한 것이다.
여러 가지 일중에서도 『시와산문』을 창간할 때이다. 충이형의 요청으로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게 됐다. 그러나 사재를 털어 발행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앞으로 계속 발행해야 할 잡지이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재정적인 어려움에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려움에 동참한다는 생각으로 광고를 섭외해 드린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문학행사에 참석하면 친형제처럼 함께 지내기도 했다. 특히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행사인 2003년 중국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 가진 「한·중 세미나」 등 빠짐없이 참석해 격려해 주기도 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 협회의 상임이사로 모든 행사를 주관해 왔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참석해 주신 것이다.
또한 필자가 근무한 기독교신문에 절기 때마다 황금찬선생님 다음으로 충이형의 절기시를 가장 많이 게재했다. 성탄절과 부활절, 광복절 등 절기시를 청탁하면, 편집자의 청탁의도를 적중시킬 정도로 형상화시켰기 때문이다. 행사시라면 웅변조의 신앙고백으로 일관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충이형은 감각적인 이미지와 은유적인 작법으로 기독교시의 문학성을 높은 수준으로 승화시켜 주었다. 그래서 행사시도 이미지로 형상화할 만큼 한국시가 성숙하고, 진화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1996년 새해 첫날밤에 “시 30편을 보내라”고 전화를 주셨다. 기존의 시집과는 달리 새롭게 시집을 만들겠다고 했다. 대부분 시집 한 권에 60편의 시가 수록되어야 시집으로써의 두께를 지닐 수 있는데, 30편으로 시집을 만들겠다는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출판비도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전혀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3개월 만에 ‘한국 대표 시인선’ 첫 번째로 《강물》이 출판된 것이다. 그 당시에도 자비출판이 성행했던 시기이다. 출판비의 부담도 없이 시집을 출판해 주는 것은, 지금까지 형과의 깊은 우정의 결과로 생각해 오고 있다.
형은 당뇨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들를 때마다 병원 뒤의 우리 집으로 오셨다. 80년대 광화문에서 약국을 경영할 때에 만나는 지인들에게 음료수 한 병이라도 주셨던 것처럼 빈손으로 오시지 않았다. 수석을 전해 주시기도 하고, 병풍도 가지고 오셨다. 동생인 내가 소장해야 가치가 있다고 두고 간 것이다. 이러한 것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무언가를 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불러도 대답 없는 충이형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것은, 찬란한 빛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다정한 목소리와 마음, 그리고 해박한 지식과 치열한 시정신에 의한 ‘좋은 시’들이 빛으로 남아 일깨워 주고 있다.
그 자리 빈자리
허형만 시인
이충이 형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참 가슴 먹먹했다. 충이 형의 《월간문학》 등단작 「」의 첫 행 “간곡하신 당신의 소식/풍편에만 듣다가”처럼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소식만 듣고 있다가 정작 가시고 나니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스러운 마음이 먼저 앞섰다.
80년대 중반, 세종문화회관 건너편 약국에서 처음 만난 충이 형은 목포에서 상경한 나를 참으로 따뜻하게 대우해주셨다. 형의 고향이 목포임을 그날 알았다. 우리는 유달산과 삼학도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이야기로 오랜 지우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목포로 내려가는 나에게 영양제와 몇 가지 약도 챙겨주셨다.
그 후로도 당시 목포대학교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자주 상경할 수가 없었으나 《월간문학》 출신 시인들의 모임인 ‘미래시동인회’의 행사에는 가능한 한 참석하면서 충이 형과 만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충이 형은 성춘복 선생님과 조병화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충이 형은 <도서출판 모모>를 운영하면서 미래시 동인들의 등단 시를 모은 시집을 출간했다. 55명의 등단작과 자신의 시론을 함께 수록함으로써 당시 등단을 준비하는 시인 지망생들에게 굉장한 호응을 받았다. “시는 나의 구원이며 나의 길”이라고 힘주어 말하던 충이 형을 그리워하며 여기 등단작 「」을 감상하는 것으로 천국에서의 평화와 안식을 기도드린다.
간곡하신 당신의 소식
풍편에만 듣다가
어제 오후엔
어렵게 어렵게
엽서를 얻었습니다.
雪寒의 긴 밤을
아우들에게 읽히기 위해
몇 백 몇 천 통을 내리 베끼다가
으레 지당하신 예수형님
당신의 말씀 되씹다가
글씨 솜씨까지 되새겨 보다가
끊는 획 하나에 이르도록
뜻의 저쪽까지 치달아 다니다가
늦여름 장마 그친 진흙탕 위
지렁이 있으라 하셔
깃처럼 꽂았다가 가라앉게 하신
그 자리
빈자리
(이하 생략)
짧은 삶, 긴 생
― 이충이 선생님 영전에
최준 시인
선생님,
1984년에 선생님을 처음 뵈었으니 서른일곱 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강원도에서 상경한 세상 물정 모르는 스물한 살 학생이었고, 선생님은 광화문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계셨지요. 같은 문예지 출신으로 인연이 된 문단 막내였던 저에게 선생님은 언제나 다함없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로 낯선 서울 생활을 어려움 없이 견뎌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책에서보다 선생님과 나눈 대화들에서 더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온통 객기였던 저의 억지들을 어찌 그리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들어주셨던가요? 돌이켜보면 죄송하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거의 매주 선생님을 찾아뵈면 “우리 준이 왔냐?” 하시면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선생님과 동인활동을 함께 하던 그 시절이 제일 행복했습니다. 같은 지면에서 선생님을 만나고 이런 저런 지방 행사에도 동행하면서 여러 선생님들을 알게 된 기쁨도 컸습니다. 그 후로 저는 그때처럼 즐거운 모임을 다시 갖지 못했습니다.
굴곡 없고 곡절 없는 삶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선생님은 저의 문학과 인생에서 소중한 한 분의 스승이셨습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적에 국어교과서에서 작품으로 대했던, 제게는 하늘같았던 여러 어른들을 소개해 주셨지요. 그분들은 존재만으로도 진정한 생의 가치를 보여주는 분들이셨습니다.
사모님 말씀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주셨던 분이셔서 그랬을까요? 사모님은 뵐 적마다 제 손을 잡고 건강을 묻고는 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뒤따라 나오셔서 약국 맞은편에 있던 제과점에서 빵을 한 아름씩 사서 안겨주셨습니다. 사모님의 빵은 저의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선생님과 사모님께 일일이 늘어놓을 수 없을 만큼 받기만 했으면서도 갚을 기회를 미루어 왔던 지난 세월이 큰 후회와 죄스러움으로 남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영원히 세상에 머물러 계실 줄로만 알았습니다.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만 곧 건강을 되찾으셔서 선생님의 자리로 돌아오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마른하늘 날벼락인가요? 사모님이 보내신 긴 문자메시지를 받아 읽은 저는 머릿속이 텅 비었습니다. 수많은 생각들이 눈앞을 스쳤습니다. 슬픔과 절망과 안타까움과 후회가 방 창문 너머의 초록 여름을 다 지웠습니다. 사모님의 메시지 구절구절들이 슬픔이 아니라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생시처럼 환하게 웃고 계신 선생님의 영정 앞에 엎드려 용서와 영면을 빌면서도 그랬습니다. 예전처럼 선생님이 변함없이 저를 지켜주시겠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절망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시던 사모님은 다소 기운을 차리신 모습이었습니다. 예쁜 교복을 입은 소녀들로만 각인되어 있는 선생님의 두 따님 보리 양과 보라 양도 어느덧 중년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끝까지 배웅하지는 못했습니다. 잠든 줄도 모른 채 잠들었다가 새벽에 일어나 춘천으로 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문학을 가르쳐 주셨던 또 한 분의 스승께도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숙취를 다스리지 못한 채 전철에 흔들리며 ‘이렇게 한 세대가 가는 건가?’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먼저 가셨지만 선생님의 자취는 지워지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일생 지켜 오셨던 문학은 물론이지만 선생님 곁에서 삶을 함께한 이들의 가슴 속에 선생님은 영원히 살아 계실 테니까요. 미처 정리하시지 못한 일들은 이제 오롯이 그분들의 몫이겠지요. 언젠가는 선생님을 다시 뵐 테니 생전에 못 다 하신 말씀 그때 많이 들려주세요. 전생의 다사다난들 잠시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고 계시길 손 모아 빕니다.
작별 인사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뵐 날을 기다리며 제게 남겨진 생을 열심히 살겠습니다.
생시에 그랬던 것처럼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빛으로 남으신 이충이 선생님
조경옥 시인
빛으로 남으신 선생님,
광화문에서 언제까지나 그 특유의 미소로 반겨주실 줄 알았는데…
광화문도 이제는 저에게 상실의 공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주 뵐 수 없어도 이따금 찾아뵙는 저를 언제나 고향 까마귀 왔다며 살갑게 반기셨지요. 그 모습을 다시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시인은 진실해야 한다며 글보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하셨죠.
진실한 삶의 토대 위에 시를 써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더 소중한 것은 잊지 않는다는 간절함이라는 선생님의 말씀도 기억납니다.
선생님의 자리에 벌써부터 그리움이 차오릅니다.
앞서신 선생님을 따라 저희도 언젠가는 같은 길에 들어서겠지요.
잊지 않는 간절함을 깊이 간직한다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새로운 세상에서 꼭 다시 만날 것입니다.
녹음 속으로 떠나신 선생님,
많은 이의 가슴에 빛으로 남으실 선생님,
선생님의 그 빛은 언제나 저희들 가슴에서 푸르게 살아있을 것입니다.
감사했습니다.
편히 가셔요.
현충원을 돌아 나오며
박종숙 시인
사철, 좋아하시던 하늘과 나무, 구름을 내다보실 수 있겠구나...
조용한 창가 이층으로 이사 가신 선생님을 뵈옵고 정문을 향해 돌아 나올 때 잠시 비문들을 읽어 보았다.
짧은 비문들이었지만 강렬하게 다가왔다.
영면을 취하신 선생님의 비문에 한 마디씩 써넣으라 한다면 나는 무슨 말을 써넣고 싶을까.
정겹던 옥탑방 시절, 대성리에 차를 세우고 전철을 갈아타며 먼 길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전화로만 듣던 음성과 함께 전철역으로 첫 마중을 나와 주신 선생님과 함께 한 16년 세월.
그날, 단풍에 쓸려 다니던 광화문 첫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 둥둥 떠다니고 가로수들이 거꾸로 날아다녔다.
당시 문단에서 잘 나가고 있던 여류시인들과 합류하여 시작하던 첫 수업, 얼마나 쫄았는지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성실, 인내, 끈기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의 기본기질이라며 무한 격려를 해주셨다.
무엇보다 인성을 강조하시던 선생님, 그래서인지 누구라도 우리 『시와산문』에 들어오면 우리들의 순수한 문화에 금방 동화된다고 한다.
“어디 가서 시인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아라, 내 평생 시를 접하고 살아도 나도 아직 시가 뭔지 모르겠다.” 이렇게 겸손하신 스승님을 모시고 살다보니 어디서든 시를 접하면 두 손 공손히 모으는 버릇이 생겼다.
감정의 구름 속에 붕 떠서 살던 시절, 그 감정을 ‘손은 몸 밖에 나온 뇌’라며 머리가 아닌 손끝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 글은 아름다운 말로 쓰는 게 아니라 아름답게 써야 한다며 당신의 평생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던,
‘이젠 밤을 지새워가며 글을 써도 보아줄 스승님이 안 계시는구나’
늘 반질반질한 가죽가방을 단정히 메고 다니셨는데 그 안에 뭘 가지고 다니셨을까. 지난 가을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려는데 비가 내렸다. 늘 지갑이 얇은 선생님이셨지만 모두들 글에 물이 올랐다고 칭찬하시며 우산을 하나씩 사주셨다.
선생님 모시고 수업하던 그 시절 너무도 행복했었다. 우린 소풍가는 마음으로 그 시간을 기다렸다. 가끔 선생님을 모시고 근처 공원에 가곤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잘한 일이다.
사모님께서 생전에 선생님이 참으로 좋아하셨다며 팥죽을 올려드렸다. 진즉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린 선생님이 삼계탕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다. 지나놓고 보니 응석만 부릴 줄 알았지 참으로 무심한 제자였구나 싶다.
왜 이리 가슴이 먹먹한지,,, 한동안 적막한 숲 속을 거닐어 보았다.
정문을 빠져나오기 전, 비문의 한 구석에 이렇게 써 넣어 두었다.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선생님 생전처럼 우리들 손에 당신의 손을, 더욱 뜨거워진 손을 포개어 주십시오.
이충이 선생님!
표순복 시인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버리시다니요?
뭐 그리 급하셔서 그리 서둘러 가신단 말씀입니까?
지방에 있단 핑계로 뵙지 못해 죄송한 마음만 있었습니다.
작년 추석 무렵 파킨슨병으로 입원해 계신다는 소식 뒤늦게 알았고,
코로나 19라는 감염병 때문에 면회도 자유롭지 않아, 선생님께서는
심리적 불안과 위축으로 병세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만 힘겹게 듣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저와의 인연은 30여 년 전, 시작되었습니다.
고향의 까마득한 후배를 위해 먼 거리 직접 손 편지로 지도해 주셨습니다.
긴 시간 채찍과 격려로 시의 끈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좋은 텍스트와 양서, 글쓰기의 기초가 되는 자료 제게는 많은 도움이 됐었습니다.
2012년 “특별하지 않은 날의 주절거림” 첫 시집을 낼 때,
선생님께서는 어쭙잖은 제 시에 좋은 해설을 얹어 주셨습니다.
금년 가을에 두 번째 시집을 준비중인데, 이제 보여드릴 수 없으니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기만 합니다.
쓸수록 어려운 것이 글이며, 그 중 시가 제일 어려워 시로 등단을
먼저 해야
산문도 수월히 쓸 수 있다고 촉구해 주시던 말씀, 생각납니다.
수많은 문예지 중 꽤 높은 수준으로 문단에서 인정받는 『시와산문』
30년 역사를 훌륭히 세우신 선생님! 정말 애쓰셨고 존경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지난한 삶, 힘겨웠던 여정들, 훌훌 날려 보내시고
편안히 영면에 드시옵소서!
천개의 햇살과 나비가 되어 다시 오시라
강치두 시인
먼저 가는 자 빛으로 남는다고 읊으시더니 이 산천과 정든 제자들을 남겨두고, 가슴시린 아쉬움을 그리운 빛으로 남겨두고 정녕 떠나셨습니까.
이충이 선생님,
지난해 요양병원에서의 만남이 서로 마지막인 줄 모르고 못다 한 말, 못다 전한 말 중 몇 자 올립니다. 그동안 선생님의 제자여서 행복했고 늘 저희들과 함께 해주셔서 살만한 세상이었습니다. 이 말씀 전해드리지 못한 탄식과 후회가 강물로 흐르고 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제자들을 배려해 퇴근 후로 강의 일정을 잡아주시고 늦은 시간까지 열정을 쏟아주셨지요. 그런데 함께한 시간들이 그리 많았음에도 선생님의 병환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알아차리지 못했던 우둔함을 두고두고 책망했던 시간도 이제는 지나가고 있습니다만 선생님의 시처럼 떴다가 사라지는 별빛으로 생각하기엔 너무나 안타까운 투병기간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강의시간에 하신 말씀 중에 늘 저를 따라다녔던 말씀이 있습니다. ‘어디 가서 내가 시인이라는 말 하지 말라. 남이 나를 시인으로 불러주는 것이다.’며 시인이 지녀야 할 소양을 강조하셨고 예술가가 지녀야 할 고결한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이 말씀 때문에 아주 잠시 부풀어 올랐던 제 자신을 누르게 되었고 뒤를 돌아보는 버릇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명성이란 온갖 오해의 총체이다. 진정한 명성은 작품을 싸고도는 것이지 이름을 싸고도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라이더 마리아 릴케의 역설을 그때야 이해하게 되었고 선생님의 말씀을 늘 되뇌면서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뒤를 보면 보이는 것은 없고 앞을 보면 아득하기만 한 이때에 훌쩍 떠나시어 이제 누구와 함께 고민하고 문학을 논해야 할지 그저 막막하고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스승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방향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불빛은 더 빛나고 밝다는 위대한 명제 앞에 이제야 무릎을 꿇습니다.
이충이 선생님,
선생님의 강의가 끝난 후 광화문역에서 반대방향으로 떠나는 열차를 기다렸다가 전송해 드리면서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면 큰소리로 웃으시면서 열차에 오르셨고 오늘이 지나면 다시 못 볼 사람들처럼 열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 흔들며 긴 이별식(?)을 치르곤 하였는데 되돌아보니 그때가 가장 소중했던 순간들이었음을 오늘에야 깨닫습니다. 외롭고 고단한 출판의 길, 시인의 길을 묵묵히 가시면서도 늘 유머를 날리셨고 무엇보다 시단 인구의 폭증으로 발표지면이 부족했던 27년 전 『도서출판 시와산문사』를 설립하여 단 한 번의 결호 없이 척박한 출판시장의 현실을 견디며 『계간 시와산문』을 지켜내신 일은 참으로 우러를 위업이셨고 귀감으로 남습니다. 거의 일생을 외길을 걸어오시며 몸져누우실 때까지 제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깨우치도록 무던히도 애쓰셨던 선생님, 세계적 역병으로 면회마저 거부되는 바람에 홀로 병마와 싸우며 두려웠을 마음 한 자락도 나누어 드리지 못한 죄스러움과 미안함마저 거주어 달라는 청을 올리게 됨을 용서하십시오.
존경하는 이충이 선생님,
이제 그토록 천착하셨던 문학의 무거운 짐, 『시와산문』의 무거운 짐 모두 내려놓으시고 미루나무 흔들고 가는 바람처럼 가볍게 가십시오. 이제는 보행의 불편함을 떨치고 지평선을 단숨에 뛰어올라 온 세상을 찬란하게 비추는 별빛이 되어 사랑하셨던 강성애 사모님과 가족들을, 그리고 우리들을 비추어 주십시오. 시인이 죽으면 나비가 된다는데 꼭 천 마리의 나비가 되어 오십시오. 저희들이 그리우면, 또 저희들이 그리워하면 언제든지 천개의 바람이 되어 우리 곁에 다시 오십시오.
‘여러분, 이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서울현충원 충혼당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무거운 짐 모두 벗어놓은 천개의 바람이고 햇살입니다. 날마다 가죽가방 메고 광화문에 나가 여러분을 기다리며 못다 읽은 책 펼치고, 못다 쓴 시 쓰며 평화로운 시의 나라, 사랑 가득한 시인의 나라 만들고 있겠습니다. 이제는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선생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추모메세지-----------------------------------
어제도 오늘도 찬연한 별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바람에 날리기도 하고 나무사이로 별똥별처럼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하느님이 지으신 세계다. ‘아래로 부터의 영성’일까. 낙엽도 사람도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갈 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는 듯하다. 일평생을 시인으로 사신 고매한 시인의 영혼이여, 가을 낙엽처럼 훨훨 날아올라 아름다운 곳 하늘에 닿으소서. - 박원혜 배상
선생님, 당신은 동구 밖 키가 큰 나무 한 그루, 바람 불어도 비가와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서 있는 잎이 넉넉한 나무입니다. 햇살 좋은날 그늘 아래 쉼을 만들고 비가 오면 모두의 우산이 되어주는 오래된 나무, 비바람을 견디다 쓰러졌지만 모두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는 광화문 입구에 서 있던 나무 한 그루십니다. - 강동수 배상
웃음에 젖은, 주름지고 맑은 눈매가 그립습니다. 느릿한 말투에 어린, 정겨운 유머레스한 선웃음이 그립습니다. 다른 세상에서 바라보는 각자의 의미 있는 소신들 지키며 때가 되면 또 만나리라 생각합니다. 평안하십시오. - 김일용 배상
선생님, 모두를 아우르던 다정했던 그 미소, 이젠 뵐 수 없지만 그리움으로 남깁니다. 광화문이 이젠 텅 빈 것 같네요. 선생님, 그곳에서 평화와 안식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제주도에 딸 산후조리차 와있어 마음으로만 기도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 김희식 배상
존경하는 고 이충이 시인님, 선생님을 뵈온 뒤로 시를 알게 되고 가슴이 따듯해졌습니다. 선생님이 내어 주신 환한 그늘에 오래도록 서 있고 싶었습니다. 스승님 계실 푸른 하늘 아득히 올려다봅니다. 그곳에서 다시는 아프지 말고 시도 내려놓고 유유자적 행복하십시오. 삼가 슬픔에 잠겨 - 김명숙 배상
발인식 잘 다녀가셨지요? 저는 참석이 어려워 어제 밤 12시40분에 들려 마지막 가시는 길 인사드리고 왔습니다. 늦게라도 다녀와야 제 위안이 될 것 같았습니다. 문상객들 다 다녀가신 뒤라 조용히 인사드리고 왔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늘 건강하게 지내세요.
- 정은율 배상
이충이 선생님의 소천에 직접 조문하지 못하고 부의금만 보냈습니다. 저는 5년 전 간이식 후 담도협착 중증질환이 낫지 않아 지금은 가급적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고 있습니다. 모쪼록 시와 산문의 발전을 바라오며 간간이 소식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 안정희 배상
너무 안타깝습니다. 가뵙지 못하고 작은 조화로 대신해 너무 죄송하고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 고철종 배상
슬픈 소식입니다. 깊은 애도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곳에서라도 소담한 국화 영전에 올리며 영면과 조의를 표하겠습니다.
- 최춘이 배상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코로나가 아니었더라면 한 번이라도 뵈올 수 있었을 텐데요. 급한 일 마무리하는 대로 빈소로 가 뵈옵거나 다른 방법으로 위로 드리겠습니다.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리며 삼가 명복을 비옵니다. - 박정인 배상
이충이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유가족들의 아픔을 아파합니다.
- 이소천 배상
갑작스런 부고 소식에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공소야 배상
문단을 이끌던 시인 한 분이 떠나셨습니다. 정말 슬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김주완 배상
삼가 이충이 선생님의 영전에 명복을 비오며 시와산문이 영원하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 고기범 배상
후학들을 위해서 애쓰시다 하늘의 별이 되신 선생님, 작은 촛불이나마 광화문 그 골목을 밝히겠습니다. 부디, 편안히 영면에 드십시오.
- 조광자 배상
다시 뵐 수 없음을 믿을 수가 없네요. 오늘 이 아침, 비록 가까이선 아니지만 진한 그리움을 담아 보내드립니다. 더 좋고 아름다운 곳으로... 안녕히 잘 가십시오. - 배연옥 배상
은인이시고 은사님이신 이충이 선생님, 걸어가신 길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손목터널증후군으로 양손을 수술해서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라 죄송하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기도로 함께 하겠습니다.
- 남현이 배상
신인문학상 행사에 함께 하시고, 마치시고 가신 것 같아요. 발행인 이충이 시인님의 오랜 마음을 기도로 올리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장주희 배상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좋은 일 많이 하시고 가셨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오며 시와산문사 여러분께도 위로를 드립니다.
- 김동정 배상
아, 결국 말씀으로만 시인님을 뵙게 되었군요. 너무 아쉽고 감사한 시인님, 명복을 빕니다. - 이경숙 배상
저절로 눈물이 쏟아지네요. 감사했던 순간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박정애 배상
슬픔이 크시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좋은 곳에 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 주경림 배상
이충이 선생님, 뜻밖의 소식에 슬픔을 금할 길 없습니다. 선생님이 계셔서 든든한 거리였는데... 이제 광화문 거리도 쓸쓸해지겠네요. 멀리 있다는 핑계로 생전에 뵙지 못한 게 한이 됩니다. 이제 어디서 조용한 모습을 뵈온단 말입니까. 선생님, 이제 아프지 마시고 편히 쉬세요
- 박순선 배상
오직 한길 문인의 길을 걸으신 선생님, 30여 년의 인연 따스하고 뜻 깊었습니다. 수필집 『근원수필』을 보내 주신지가 엊그제 같은데 먼저 가시다니요. 부디 가신 그곳도 글과 함께하는 세상이길 빕니다. 애통한 마음으로 그 은덕 되새겨봅니다. - 김연주 배상
2015년 여름, 광화문 옥빌딩 5층 『시와산문사』를 찾아갔던 날, 선생님을 처음 뵙고 등단 시 묶음을 든 손은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온화한 말투로 『시와산문』의 이모저모를 들려 주셨지요. 무엇보다 ‘등단’의 문턱을 넘어야만, ‘시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을 수 있기에 『시와산문』과의 만남은 설렘이 컸답니다. 그 후 2016년 오디가 익어갈 무렵 전주에 내려오셨지요. 그때는 이곳 고향에 사시는 문단 원로님들과의 만남으로 형님 동생 하면서 흐뭇해하시던 모습이 선연합니다. 그리고 풋내기 등단 시인을 위한 절절하신 당부의 말씀이 지금도 제 귀에 쟁쟁 합니다. 그동안 선생님께서는 병원에서 많이 고생하신다는 소식을 접하곤 했지만, 지방에 살고 있다는 핑계로 찾아뵙지도 못한 것이 이제는 못내 아쉽고 무겁습니다. 선생님의 부음 소식을 접하고는 이루 가늠할 수 없는 죄송함과 안타까움에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이 되고 말았습니다. 깊은 사죄를 이 글로나마 올리옵니다. 비록 짧은 인연이지만 대선배님이시자 스승님의 귀한 말씀 이제는 다시 들을 수 없어 아쉬움이 큽니다. 주옥같은 말씀 더 깊이 간직하면서 부단히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선생님! 이제는 이생의 잡다한 일 다 잊으시고 평화롭고 광대무변한 하늘나라에서 영락을 누리옵소서!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 이점이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