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강의를 마치고 늦게 들어가 [썰전]과 [블랙하우스]를 번갈아 보다가 뉴스 속보를 접했다. “트럼프 북미회담 최소”.
화가 났다. 화보다는 분노가. 그리고 이런 우리 상황이 슬프다.
구실이야 무엇이건 국가간 신의는 차치하고라도 북한이 핵실험장을 폐쇄하면서 비핵화, 혹은 핵 완전폐기라는 로드맵의 첫걸음을 떼자마자 그런 발표를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최종 결정은 트럼프가 했겠지만 그의 트윗을 보면서 트럼프도 이 문제만큼은 미국 내 매파들의 결정을 거스를 수 없었구나 싶은 생각에 더 걱정스러웠다. 시리아-이란 뒤의 보험처럼 여전한 갈등 지역으로 북한을, 아니 한반도를 남겨두고 싶은 자신들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표시를 감추지도 않고 드러낸 것은 아닌가.
어제 그 시각, 제일 걱정스러웠던 것은 그 뒤 북한의 반응이었다. 미국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대한 극렬한 비난과 핵폐기 로드맵의 전면 철회, 핵무기 위협을 통한 강경 재대응, 뒤 이은 미국의 비난과 상호간 협박, 이런 그림이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내내 우려스럽고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오늘 아침 북한의 반응은 냉정하고 차분했고, 그런 결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요구하는 비핵화 프로그램을 수용하겠다며 언제든 다시 대화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점심시간 뉴스를 통해 들었다. 적어도 북한의 의지는 분명해보여서 다행이다. 현재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이보다 더 한 굴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수순이 혹 오게 되더라도 북한이 여전히 동일한 스탠스를 취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경제적 원조를 선택한 입장은 분명하고 확고해 보인다. 불가능할 정도의 상황이겠지만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문제는 미국의 태도다. 미국이 요구하는 모든 선결조건을 수용하려는 북한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요구사항들을 추가하면서 북한이, 그리고 중국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들을 내걸면서 북한과 중국을 더한 굴욕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으면서 북한으로 하여금 결국 반발하게 하는 상황으로 끌고 갈 것인가. 다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북한, 그리고 한반도의 현 상황에 대해 진정 미국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트럼프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내는 북미정상회담 최소를 통보하는 서간문과 함께 올린 트윗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Sadly, I was forced to cancel the Summit Meeting in Singapore with Kim Jong Un.”
‘Sadly’라는 감정이 트럼프 자신의 감정인지, 그저 외교적 언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자신의 솔직한 감정이기를 바랄 뿐. 이어 “I was forced to cancel”이라고 썼다. 자신의 온전한 결정이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은 그러기를 희망한다.
그간 봐 온 트럼프의 화법과 성격상 에두르지 않고 무례할 정도로 직설화법을 사용하는 트럼프라면 “누구로부터 (혹은 어떤 상황으로부터) 강요받았다”라고 쓰지 않았을 것이다. “I Judged” 라거나 혹은 “I decided”라고 썼을 것이다, 순수한 자신의 결정이었다면. 물론 이 화법에는 “(이 결정이) 내 의지가 아니라 (그가 공개 서간문에서 밝힌 것처럼) ‘북한이 보인 무례한 태도’라는 외적 요인 때문임을 강조하기 위한 외교적 언사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까지 화해무드를 진전시켜 온 트럼프가 그 정도의 문제로 정상회담을 갑자기 취소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의 이면에는 트럼프 자신도 어쩔 수 없는(적어도 지금까지는) 다른 압력이 작용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고 논리적일 것이다. 미국 내의 매파들, 공화당과 민주당 양 정파의 정치적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 점에서만은 하나가 되는 미국 매파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으며 트럼프는 그 압력을 이길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는 트럼프 자신의 불완전한 정치적 입지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민주당은 정파적 적대당인 공화당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여러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고 생각하는 트럼프가 자신들도 성공하지 못한 북핵 폐기를 달성한다는 사실을 마냥 두 손 놓고 환영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님은 당연하다. 그것은 곧 어쩌면 트럼프, 혹은 다시 공화당 출신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일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북핵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공화당내에서는 북핵폐기에 이은 북미 평화무드 분위기 속에 북한을 정상국가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노골적이고 암묵적인 반론들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추진하는 당시자가 자기당 출신 대통령인데다 북미간 회담을 통한 세계평화 구축이라는 명분을 노골적으로 반대하기는 어려웠던 터라 속앓이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후보일 때부터 트럼프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우려는 존재해 왔고 특히 외교문제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컸음을 감안하면,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가 자신의 치적을 위해 북한에 너무 많이 양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우려가 컸다는 것도 언론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언론에 드러났던 트럼프의 입장과 다른 공화당 내 매파들의 주장(볼튼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을 통해 가시화된)은 트럼프에 대한 압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진짜 북미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또 그 내용을 서로에게 솔직하게 밝힐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트럼프는 정상회담 취소 공개서한을 보낸 하루 뒤에 회담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하고 북한도 동일한 입장을 표명했다. 북한과 미국이 진정 한반도에서 핵위험을 철폐할 의지가 있는지는 앞으로 이어징 논의들에서 드러날 것이다.
우리의 운명이 걸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조정과 매개자의 역할뿐이라는 건 비극이지만 국제정세란 역학관계에서 현 상황을 마냥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하다. “Sadly”가 트럼프의 진정이기를, “I was forced to cancel”가 트럼프의 속내와는 다른 미국 내의 이런 상황이 그에게 어쩔 수 없이 강요한 것이지만, 북미 평화체제 구축은 트럼프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기를, 그리고 그의 동키호테같은 성향이 이 점에 있어서는 미국 대통령이라는 권한으로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지속적으로 고착시키고자 하는 미국내 매파들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기를 희망할 뿐. 역설적이지만 클린턴도 부시도 아니고 트럼프이니.
첫댓글 저녁에 집에 들어오니 속보로 정상회담이 다시 열릴 수도 있다고, 물밑 작업이 진행중이란 뉴스가 올라온다. 북한의 대응에서 진정성을 느껴지는 것, 미국의 모든 요구를 다 수용할 수도 있다는 태도가 보이는 것 같다. 다행이다. 일단 입구로 들어가는 게 지금은 관건이다. 출구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으니 어떻게든 마주 앉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트럼프는... 믿을 수 없지만... 왠지.. 이번만은 트럼프를 기대하게 만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