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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엔스는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학자였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은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상징적 존재라는 주장을 폈다가
(미국에서 제일 보수적 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쫒겨났다.
그 이후 피터 엔스는 성서를 어떻게 읽는 것이 원래 성서가 쓰인 목적에 부합하는지를 놓고 깊은 씨름을 거듭하며,
그런 고민과 연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호수아에 나오는 가나안인들의 대량학살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역사적 아담 문제,
구약성서 역대기와 열왕기의 서술 방식의 차이 문제 등을 다룬 후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어떻게 구약성서를 창의적으로 인용하고 해석하는지를 다양한 실례를 통해 보여준다.
최종적으로 피터 엔스는 성서를기계적-문자적으로 읽는 대신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읽되,
성서 편저자와 독자의 문화적 층위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성서의 메시지를 현대적으로 재구조화하는 것이
올바른 성서 읽기의 방식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3:16-17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며, 장로회 신조 1조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라고 선언하며 다른 교단의 신조도 성경에 관하여 비슷한 내용을 규정한다.
이 성경 구절 또는 신조를 추상적으로 읽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당면하는 구체적인 문제들에 관해 성경으로부터 지침을 구하려고 할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성경은 현대의 복잡한 문제 대다수에 관해 침묵하며, 때로는 현대 과학이 밝혀낸 우주와 지구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내용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 거기서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민족을 진멸하라고 하는 것처럼 현대인의 도덕 감정에 어긋나는 명령을 하기도 하고, 예수의 생애에 관해 사복음서가 서로 다르게 기술한다거나 고대 이스라엘의 왕정에 대해 (사무엘서 및) 열왕기와 역대기가 다른 그림을 제시하는 것처럼 성경 상호 간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성경이 틀렸고 현대의 과학적 진리와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사실만이 옳다는 견해를 취할 수는 없다. 저자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오늘날 우리의 합리적 사고의 틀을 통해 읽은 성경을 방어하라고 가르치며, 그러기 위해 애쓰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놓친다고 말한다. 대신 저자는 우리에게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구절이 고대인의 맥락에서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묻고, 이를 바탕으로 그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으며 성경에 우리의 기대치를 부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성경을 읽으라고 도전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먼저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우리에게 매우 불편한 폭력적인 하나님 문제를 제시하고, 이 명령과 관련하여 우리가 고려해야 할 다양한 요소를 제시한다. 이어서 저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과 당혹스러운 부분들을 제시하고 우리가 성경에 대해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예수와 바울의 예를 통해 보여준다.
저자는 성경이 아니라 예수가 기독교 신앙의 진짜 초점이라고 강조한다. 곧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너머 예수 안에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초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성경을 통해 서술된 이스라엘의 이야기의 출발 지점이자 종료 지점이며, 성경에 기록된 문자들이 그 이야기를 견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견인하신다. 예수는 성경보다 크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으면 그동안 문자주의에 갇혀 어둠속을 헤매는 것 같던 성경 읽기에 서광이 비추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을 존중하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기계적인 이해로 말미암아 성경 기록의 문자적 의미를 맹목적으로 신봉한 나머지 거짓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가짜 뉴스의 주된 생산자와 전파자와 소비자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본서는 성경을 맹목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우리의 합리적 사고를 투영하여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은 말하는 내용에 관해 원래의 상황과 맥락에서의 취지를 알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탐색하려는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확실히 독자들은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이 책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내어 정독할 것을 적극 추천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은 하늘로부터 내려받은 하나님의 규칙집이자 하늘의 지침인 진리로서 그 지시들을 따르면 진정한 신자가 튀어나오고 그 대본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이 오셔서 모든 힘을 다하여 당신을 망가뜨리실 것이라고 배웠다. 신자들은 만일 누가 이 견해에 도전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공격들에 맞서 “성경을 방어하라”고 배운다. 이제 문제가 해결되었다. 당신이 실제로 성경을 읽기까지는 말이다. 성경을 실제로 읽어보면 당신은 성경을 규칙집으로 보는 이 견해가 모조품 샤넬 가방 같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호기심이 있고 꼬치꼬치 캐묻는 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한 문제가 없다. 내가 발견했고 이 책에서 당신에게 전해주고 싶은 점은 성경에 관한 이 견해가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호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을 규제한 데서 왔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는가? 성경이 내게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내 앞에 문 세 개가 있었다.
첫 번째 문: 그날 샌더스 극장에서 들었던 것을 무시하고 방금 내게 일어났던 일이 일어나지 않은 체하며 영적·지적 자동 조종장치로 내 삶의 길을 가면서 이 모든 볼을 그럭저럭 물 아래 가라앉게 한다.
두 번째 문: 나는 내가 속한 전통이 내게 기대했던 문을 취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방금 들었던 것에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경의 방어자”가 되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경을 필요로 하는 신앙의 요구를 보호하기 위해 물결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이었다. 나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휴대용 우물이 된 바위에 관해 그런 어리석은 아이디어를 신봉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내 삶을 헌신할 수도 있었다.
세 번째 문: 나는 방금 본 것을 직면하고, 도전을 받아들이며, 성경에 관해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성경에 자신의 질문을 부과할 것이 아니라 고대의 문제들을 묻는 것을 배우고,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을 인도할 긴 여행에 착수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 및 초기의 예수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하늘 높은 데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상황과 부침을 통해 지금 이곳에서 만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거룩한 성경이 영적 위로, 안내, 통찰의 책으로 기능하는 방식이다.
_1장 나는 세 번째 문을 택하겠다
스페인 사람들은 1493년부터 이런 식으로 서인도 제도에 “정착”해왔다. 학살은 1552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해에 도미니크회 수사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가 『인도 제도의 멸망에 관한 짧은 보고』(A Short Account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를 썼는데, 이는 자신이 그동안 목격했던 모든 참사에 대한 암울한 이야기였다. 그는 원주민의 땅과 물건을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민족을 몰살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 목록에 들어있지 않으리라는 점을 정책 결정 권한을 지닌 사람들에게 납득시켰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라스 카사스처럼 인종 학살을 악으로 규탄한다. 결국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가 주민의 체계적인 말살을 옹호하리라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게다가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성경에 수록된 하나님의 폭력에 당혹해하고 괴로워한 최초의 인물인 것은 아니다. 성경이 존재해 온 이후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은 이 문제를 두고 씨름해왔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가나안 주민을 도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확실히 대다수 독자에게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같은 무신론자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김영사 역간])에서 기쁘게 이 점에 달려들어 기독교의 “사랑의 하나님”이 갈등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지적한다. 어떻게 이슬람이 이교도를 쳐부수는 호전적인 신을 조장한다(9/11에 대한 기독교의
흔한 요약이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있는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비행기만 없을 뿐 똑같은 일을 하는데 말이다.
나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이런 묘사를 진지하게 여기지만, 그것을 마지막 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숨기고 이것이 사라지기를 바랄 수 없다. 성경의 이 부분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이것과 씨름할 때만 우리는 어떻게 성경 자체가 우리를 이런 이야기들 너머의 여정으로 나아가 그 너머의 훨씬 크고 훨씬 풍요로운 지형을 보게 해 주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고대의 저자들은 모든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대에 그들에게 해당하는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을 유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해 세부사항을 얼버무리고 “설명들”을 만들어내는 대신 실제로 이 고대의 음성들을 존중하고 그것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 수 있는 좀 더 나은 위치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복음은 언제나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이야기들이 읽히는 렌즈였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이
아니라 예수가 최종적인 말씀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는 성장해 왔는데 우리도 그래야 한다.
_2장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셨다고?
과거를 단어들 안에 넣으려는 모든 시도는 “순수한 역사”가 아니라 과거의 해석들이다. 순수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도 말이다. 여기에는 성경도 포함된다. 성경을 쓴 이야기꾼들은 과거, 종종 먼 과거를 “객관적으로”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회상한다. 그들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
다. 성경은 그들의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현재에 의미를 주기 위해, 즉 설득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영감을 고취하기 위해 과거의 내러티브들을 짰다. 모든 이야기꾼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쓴 사람들은 자기의 목적을 위해 대화와 인물과 장면들을 만들고 확대하여 과거의 순간들을 매끄럽게 흐르는 이야기로 바꿨다. 그것은 그들이 게을렀거나 비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모든 이야기꾼이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기 위해 할 필요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청중을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과거를 이동시키고 배열하거나 별개의 순간들을 함께 엮었다.
우리가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가려내고 실제로 일어난 일을 “진정한” 예수의 모습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인 추구일 뿐만 아니라 요점을 놓치는 처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통해 진정한 예수는 전체 이야기의 예수, 즉 부활하신 예수라고 믿는다. 그 예수는 갈릴리와 갈릴리 주변에서 예수와 동행한다고 해서 이해되지 않았고, 그 방법으로 이해될 수도 없었다. 예수가 자기의 일을 계속 수행하라고 선택하신 제자들 자신이 큰 그림에 대해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진정한 예수는 그의 부활 이후 예수가 누구셨고 그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좀 더 넓은 함의가 좀 더 잘 파악되고 난 후에야 참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복음서 저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수다.
사무엘서와 열왕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에 있을 때 쓰였고 아마도 그들이 본토에 귀환했을 때(기원전 6세기말에서 5세기 사이에) 편집되고 업데이트되었을 것이다. 이 저자에게 절실한 질문은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리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바빌로니아에 유배되었는가? 우리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했는가?”였다. 그들은 일어난 일에 대해 이해하려고 했다. 역대기는 약 200년 뒤인 기원후 4세기의 어느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여러 세대를 산 뒤에 쓰였다. 그 저자의 질문은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해도 마땅할 무슨 짓을 했는가?”가 아니라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난 후에도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이 오셔서 이 혼란을 고치실 것인가?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가?”였다.
이스라엘의 기원 이야기들, 특히 창세기를 읽으면 당신은 앞으로 주의를 끌게 될 내용에 관한 예고, 훗날 약속된 땅에서 이스라엘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관한 의도적인 배경이 내장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의 이야기(왕정과 그 이후)에 익숙할수록 당신은 이스라엘의 기원 이야기들을 읽을 때 이 이야기들이 더 낯익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점을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자. 태곳적(이스라엘의 기원) 이야기들은 의도적으로 현재(위기로 끝난 왕정 시기)를 반향하도록 쓰였다. 말하기의 방
식에서는 그 현재가 지금 말해지고 있는 좀 더 심원한 이야기다.
_3장 하나님은 이야기들을 좋아하신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성경은 이야기다. 하나님의 백성의 길고, 다양하고, 부침이 있는 영적 여정의 이야기다. 그리고 1,00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다양한 사람이 다른 상황에서 다른 이유로 쓴 이야기다. 성경은 평시와 전시, 안전할 때와 유배 때, 이스라엘의 어릴 때와 징벌을 받은 성인기에 쓰였다. 성경은 마이어스-브릭스(Myers-Briggs)의 MBTI 성격 유형이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간과 지리적으로도 떨어진 제사장, 서기관, 왕들에 의해 쓰였다. 그런 책은 다양한 모든 상황에서 어떻게 믿음의 삶 속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일관성이 있고 천편일률적인 지침서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책은 우리에게 믿음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지혜는 인생에 대한 빠른 답변을 제공하기 위한 열쇠를 발견하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색인에서 당신이 해결하려고 하는 주제를 찾아 그것이 나와 있는 부분을 보면 되는 식으로 말이다. 지혜는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삶의 번잡함 가운데서 어떻게 실시간으로 스스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배우기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다양한 영적 여정을 기록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반영한다. 그들의 여정의 뒷부분의 어느 시점에 (우리는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에 도달했는데, 그 대답은 바로 한 하나님만 존재하신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는 그 하나의 답변이 참이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다른 묘사들—하나님이 많은 신 중 하나의 신이라는 견해—은 버려졌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의 역사의 많은 기간 동안 가정했던 하나님에 대한 묘사—하나님이 많은 신 중 최고 신이라는 견해—는 사실에 관해 참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그 결론을 내려도 하나님이 나무라시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기독교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한층 더 내려오신다. 하나님은 우리 중 하나, 곧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 되신다. 우리는 실제로 높은 곳에 계시면서 거리를 유지하시는 하나님보다는 반응하시고, 마음을 바꾸시고,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논쟁할 수 있는 하나님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 그런 하나님이 없다면 기도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 제발…해 주세요”라는 기도에 관해 생각해 보라. 그리고 질병의 치료, 고통 중의 위로, 새 직장, 스포츠 경기 결승전의 결과 등으로 빈칸을 채워 보라. 많은 기도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에 관한 것일 수 있고 때로는 조용한 묵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도는 종종 도와 달라고 부르짖으며 우리 방식대로 사안들을 보시도록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한다.
바빌로니아 유배에서 돌아온 뒤 살았던 성경의 편집자들은 이 법전들을 우리가 성경에서 그것들을 보는 방식으로 편찬했다. 그리고 혹자가 이런 다양한 전통들을 모아서 하나의 긴 법을 만든다면 우리가 위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은 긴장과 모순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같은 성경 안에 존재하는 다른 법전은 우리가 앞장에서 논의한 네 가지 버전의 예수의 삶 및 두 가지 버전의 이스라엘 왕정과 비슷하다. 물론 복음서들 및 이스라엘의 이야기들 같은 별도의 책들을 나란히 배치하면 차이가 좀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율법 편집자(들)는 우리에게 별도 버전의 율법들을 전해주지 않았다. 대신 다양한 율법들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산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해주는 하나의 이야기 안으로 엮였다.
_4장 하나님은 왜 마음을 굳히시지 않는가?
예수는 자신의 성경을 우리가 그분이 읽으실 것이라고 예상하는 방식대로 읽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성경에 쓰인 단어들과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에 매이지 않으셨다. 두 가지 요인이 예수가 왜 그런 식으로 성경을 다루셨는지를 설명한다. 첫째, 예수는 유대인이셨다. 위의 예는 우리에게 아무리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예수가 자기의 동료 유대인들과 공유하신, 창의적으로 성경을 다루는 접근법에 부합한다. 따라서 예수가 그의 성경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기대를 치워 놓고 예수를—그렇다, 수조차 말이다—고대 유대인 세계의 완전한 일원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예수는 종종 하나님 및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이전의 사고방식에 도전하는 신선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으셨다(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특히 그는 종종 마치 자신이 단순히 성경을 해석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성경의 초점인 것처럼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셨다. 하도 그렇게 하시다 보니 예수는 유대인의 교사들과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부정적인 주의를 끄셨다. 이 요소들을 함께 고려하면 예수의 성경 읽기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예수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 독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셨으리라고 가정하는 방식 안에 머물지 않으셨다. 예수는 특히 성경이 말하는 바를 엄격히 따르도록 자신이 구속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성경이라는 규칙집의 독자가 아니라 성경보다 크신 존재셨다.
성경, 특히 토라에 관해 논쟁하고 변하는 시대를 다루기 위해 창의적으로 읽는 것은 신실한 유대교의 특징이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다루는 것에 관해 “율법주의적”이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흔히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구속력이 있었지만 그들은 토라를 포함한 성경이 모든 시점에서 문자적으로 따라야 할 규칙집이 아니라고 이해했다. 지금 여기서 성경에 충실하다는 것은 유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의 논쟁은 성경이 여전히 구속력이 있는가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어떻게 유연하고 창의적일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었다. 예수는 그런 세상에서 사셨다.
예수는 당시의 여느 유대인들처럼 자신의 성경을 존중하고 존경하셨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문자적으로 따라야 할 대상으로서의 성경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신다. 예수는 성경을 창의적으로 개조하시고 때로는 심지어 그것의 일부를 버리기도 하신다.
_5장 예수는 성경보다 크시다
성경은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은 아니었고 예수가 최종적인 말씀이셨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그것 자체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부활하신 메시아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예수를 중심으로 재형성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 교훈을 놓친다면—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에 관한 불변의 정보 모음집으로 보고 예수의 실재가 어떻게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변혁시키는지를 놓친다면—초기 기독교의 저자들이 말하려는 바를 놓칠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놓칠 것이다.
토라의 위반이 유대인들을 완전히 구원받고 회복되지 못하게 하는 이스라엘의 문제라면 도대체 어떻게 처형당하고 부활한 메시아가 하나님의 해법일 수 있는가?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토라의 위반이 진짜 문제라면 아마도 그것은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해법이라면 아마도 하나님이 염두에 두고 계시는 문제—좀 더 깊은 문제—는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죽음은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문제다. 그래서 죽음을 패배시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해법이다. 마찬가지로 죄—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부당한 행동들—역시 보편적인 문제였다. 예수의 죽음은 단지 또 하나의 로마의 처형이 아니라—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위한—죄를 위한 제사였다.
마치 성경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편으로서 매뉴얼이나 지침서이기라도 한 듯이 성경의 모든 부분을 고수하면 우리는 바울과 신약성경의 나머지 저자들이 거듭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성경에 기록된 문자들이 그 이야기를 견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견인하신다—를 놓치게 된다. 예수는 성경보다 크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는 “누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가?”가 아니다. 문제는 지금도 “누가 예수를 바르게 이해하는가?”이며 과거에도 항상 그랬다. 복음서 저자들과 바울은 그 점을 매우 분명하게 밝혔다.
_6장 아무도 이 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성경은 겨우 1,000년에 걸쳐 은하 하나에 있는 행성 하나의 작은 부분에 살던 작은 무리의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 이 성경이 고대의 순례자들의 사고와 묵상을 담고 있는데,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해온 동안 그들을 인도하고, 위로하고,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된 창조세계의 이 하나님은 그런 말들을 통해 완전히 포착되시거나 제약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다.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주기 위해 반드시 천체물리학이나 전자현미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성경이 이미 그 일을 한다.
성경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지 말라.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라. 그런다고 해서 당신이 생각이 없는 좀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당신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믿음을 통해 우리 자신보다 큰 뭔가가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보다 큰 누군가가 배후에 있으며 우리가 그것의 일부가 될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경이 자체의 관점에서—하나님의 관점에서—성경이 되도록 놔둔다면 우리는 도전, 울퉁불퉁함, 고대의 이상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것들 때문에 육신을 입으신 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신성한 책을 쓰게 될 방식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선하시고 현명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가지도록 허락하신 방식이다.
우리가 성경에 대한 우리의 버전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겸손하게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발견되기를 원하시는 모습대로의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한다.
_7장 있는 그대로의 성경
흔들리고 있는 신앙은 성숙하고 있는 신앙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얼마나 자주 흔들렸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투를 추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ㅡ 조만간 그것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ㅡ 우리는 자신의 영적 여정에서 모종의 분투를 예상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앙에서의 참된 분투는 극도로 긴장되는 경험이며, 그 것이 없이는 신앙 안에서 성장하지 못한다. 신앙의 분투가 없이는 유아 상태에 머물거나 교만해진다.
신앙에서의 불편함이나 도전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자신의 안전지대, 곧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자신의 아이디어들에 머물고 그 아이디어들을 참된 아이디어와 혼동하는 지점에서 끌어내시는 것일 수도 있다.
흔들린다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스럽게, 그러나 주의를 끄는 방식으로 이제 성장해야 할 때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