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여행3 - 비와호수 이시야마데라 절에 도착해 겐지 源氏(원씨) 를 생각하다!
2024년 11월 20일 비와호수 남쪽 이시야마데라로 가기 위해 207번 버스로 시조가라스마
정류소에서 내려 6블럭을 걸어서 가라스마오이케 (烏丸御池 조환어지) 역에
도착해서는 역시 원데이 패스로 도자이센(東西線) 로쿠지조(六地藏) 행 지하철에 오릅니다.
미사사기역에 내려 4번 노리바에서 게이한게이신선 (京阪京津線) 전철을 타고 비와호 하마오쓰
(浜大津) 에 도착해 이코카 패스를 출구 게이트에 찍으니 에러가 나는데 미사사기역
에서 이코카 패스를 찍지 않고 바로 탄 때문이라..... 역무원에게 230엔 요금을 현금으로 냅니다.
다시 이코카 카드를 터치하고 들어가 게이한 이시야마 사카모토선(石山坂本線) 을 타고
11정거장을 가서는 종점인 이시야마데라역 (石山寺駅) 에 도착해
내려서 안내판을 둘러 보는데..... 이시먀마데라 까지는 800미터이니 10여분이 걸립니다.
이시야마역과 또 도로변에 깃발이 연이어 서 있는데, 깃발에 그려진 여인의 얼굴이
낯이 익어 자세히 보니...... 바로 겐지이야기를 쓴 그 무라사키 시키부 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1년에 한편씩 대하드라마를 반드시 제작하는 NHK 에서 금년 대하
드라마가 바로 겐지이야기인 光の君(광노군) 인데...... 무라사키 시키부가
여기 이시야마데라 절에 머물면서 저 겐지 이야기를 구상해 집필했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시야마데라 (石山寺 ) 에 도착해 500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데 길 양 옆에 등이 설치되어 있으니 그림과
글자를 보니 모두 겐지이야기에 나오는 한 장씩으로 시간만 있으면 하나 하나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시야마데라 (石山寺 ) 는 11세기초 무라사키시키부의 장편소설 겐지 이야기에 나오는 꽃 사찰로.... 단풍
시즌에는 2,000 그루 단풍나무가 있어 라이트업과 저녁 공연도 하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답니다.
바로 매년 개최되는 "이시야마데라" 의 인기이벤트인 "아타라요모미지" 로,
단풍 만이 아니라 본당과 타호토 등의 역사 건물도 아름답게 변신합니다.
절은 비와코 호수에서 나오는 게타가와 강변에 있어 일본 역사에서 유명한 가객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가
이시야마데라를 찾았을 때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라고 하는 유명한 소설의 구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이외도 절은 "마쿠라노소우시(枕草子)" 와 "사라시나 일기 (更級日記)" 등의
유명한 서적에도 나오니 헤이안시대 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이시야마데라 (石山寺 ) 는 아주 오래된 교토의 유명한 관광지로서 "안산, 액막이, 행복, 인연" 에도
좋은 힘을 얻을 수 있어서.....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위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시야마데라는 "꽃의 사찰이라는 별명도 있어 겨울에는 모란과 매실꽃, 봄에는 벚꽃, 여름
에는 진달래와 붓꽃, 가을에는 단풍등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시야마데라는 특히 가을 단풍의 명소로도 유명하니..... 천연기념물의 규회석과 잘
어울리는 단풍은 일본다운 풍경을 연출해 주며 밤에는 "아타라요모미지" 라고
하는 라이트업 이벤트가 개최되 조명이 비치는 단풍과 국보 건축물들은 볼만 합니다.
교토의 단풍명소인 사찰들 중에서도 여기 이시야마데라 (石山寺 ) 는 사람이 그렇게 만지 않은 편
이라 "단풍은 보고 싶은데 사람이 많은 곳은 사람에 부대껴서 싫다" 는 사람들
에게 추천하고 싶은 단풍의 명소인데..... 금년은 무더위로 인해 아직 단풍이 덜 든게 아쉽습니다?
무라사키를 보려고 700엔 추가 요금을 내고 특별실로 들어가서 구경을 하는데..... NHK
에서 금년에 방송중인 대하드라마가 바로 겐지이야기 源氏物語 (원씨물어,
겐지모노가타리) 인 光の君(광노군) 인데 그 내용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둘러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겐지(源氏) 는 일본의 4대 본성(혼세) 중에 하나로 보통 일족을 가리키거나,
설명을 할 때는 '源氏'(원씨) 라 쓰고는..... '겐지' 또는 '미나모토' 로 읽는데
'미나모토노' 라고 할 때, '노(の)' 는 '~의' 라는 뜻으로 '미나모토 가문의' 라는 뜻이 됩니다.
겐지(源氏 원씨) 는 타이라(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 와 함께 4대 본성, 즉 겐페이토키츠
(源平藤橘) 로 칭해지는데..... 원래는 일왕(천황) 의 아들이나 손자가 신적강하할 때
주어지던 씨(氏, 우지) 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족으로는 타이라씨와 타치바나씨가 있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 북위에서 선비계 황족인 탁발(拓拔) 씨가 한화 정책의 일환으로 원(元)씨로 바꿀 적에 방계
인 남량의 독발(禿髮) 씨를 소리가 같은 '원'(源) 씨로 바꾼 일을 본떠서 간무왕(천황) 의 차남이자
제52대 덴노였던 사가왕(천황) 이 아들들에게 '미나모토노 아손(아소미)' (源朝臣) 을 준 일이 처음 입니다.
겐지(源氏) 중에서도 일파가 나뉘어 21류파가 존재하며, 그중에 세이와 겐지(清和 源氏, 청화 원씨)
계열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니...... 세이와 겐지는 제56대 덴노 세이와왕(천황) 의 자손들 입니다.
그중에 카와치쿠니(河内國, 하내국) 카와치 겐지(河内 源氏, 하내 원씨) 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미나모토노
요시미츠,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한 정이대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이 이 계열이었으며,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가 아시카가 가문과 에도 막부의 쇼군가인 도쿠가와 가문도 카와치 겐지의 분파입니다.
세이와 겐지 외의 겐지류파 중 유명한건 세이가케(청화가) 9가중 하나인 쿠가(公家) 가문이나 무로마치
막부 이세 슈고 무라카미 겐지(村上 源氏, 촌상 원씨), 센고쿠시대 롯가쿠씨, 쿠로다씨의 시조
우다 겐지 (宇多 源氏, 우다원씨) 의 사사키씨(佐々木氏) 나 사가 겐지(嵯峨 源氏, 차아원씨) 등이 있습니다.
무가정권 시절에도 황실 가문과 연결된 일족이 아니면 고위직에 오르기는 쉽지않았으니 막부를 수립한
가문은 모두 천황가와 연관되어 있었으며,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를 개막한 정이대장군
가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니...... 실력자들이 족보 조작을 통해서 미나모토 일가임을 자칭했습니다.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일파 닛타 씨(新田氏)의 세라다(世良田) 도쿠가와
(得川) 가문 후손을 자처하며...... 외국에 보내는 문서에는 자신들의 성을 미나모토로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즉 미나모토씨(源氏) = 일본 열도를 지배하는 자(쇼군가) 라는 상징이 되었던 셈이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 이 "조선왕조실록" 에는 원 가강(原 家康) 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기록된 일본 영주는 대내전(大內展) 으로 무려 250회나 나오는데...... 대내전,
다시말해 오우치씨의 조상은 백제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 태자이니 611년 야마구치현 동부
스오쿠니(周防國 주방국) 다타라하마 (多々良浜) 에 상륙해 쇼토쿠 태자 를 만난후 다타라 성씨를 칭합니다.
그 16대 후손 오우치 모리후사는 세력을 길러 성을 오우치 大內(대내) 로 바꾸고는 서부 일본 4국에
북규슈 2국등 6개국 을 지배하는 대영주(슈고) 가 된 후에 고려와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를 소탕해주는 대가로 불경을 얻어가고 무역까지 했으며, 중국 영파까지 무역선을 보냈습니다.
30대 오우치 요시오키는 서부 일본 나가토, 스오, 이와미, 아키에 북규슈 치쿠젠(후쿠오카) 과
부젠에다가 더해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해 야마시로(교토) 까지 점령하여
7국을 지배 하며 무로마치 막부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 를 옹립하고 위세를 떨쳤습니다.
31대 오우치(大內) 요시타카 는 빙고(히로시마) 를 거두었으나 교토 정치에 집중 하다 보니
이즈모의 아마고씨의 침략을 받아 패전하고 쓰키야마 저택에서 시와 유희 에 빠집니다.
“연못은 바다요, 나뭇가지 끝이 여름엔 산이구나”
池はうみ こずえは 夏のみ 山かな
문인, 묵객과 미녀 들에 둘러쌓여 시와 유희로 정사를 소홀히 하니 중신 스에 다카후사 가
모반을 일으키자 패하여 할복자결하는데, 그전에 문답한 내용이 전하니 타이네이사
주지 이세츠 가 “ 죽음을 앞두고 무념 무상 에 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고 진언하자....
“뭐가 어떻게 되든 좋습니다. 지금은 마음속 하늘에 달 이 보입니다” 라고 달관하니....
훗날에 이르러 세인들로 부터“말세의 수행자” 라는 평을 얻는데....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 에게 야마구치 백성들에게 예수교 전도 를 허락한 연유를 알만합니다!
대영주 오우치 요시타카 는 할복하기 전에 절명시 를 남겼으니....
“죽이려는자도 죽는자도 모두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구나, 부처가 세상을 구하려고 오는 것 또한 이와 같다”
討つ人も 討たるる人も 諸共に如露如電, 應作 如是觀
요시타카 가 죽으니 새로 옹립된 군주는 오우치 요시나가 인데.... 오우치가의 막장인
모리 모토나리 가 이 혼란을 틈타 거병하니 모리군에게 쫃기어 1557년에
고잔지 功山寺 로 피신했다가 할복자결하니 백제계 오우치가 후손이 멸절 되었던 것이라!
오우치 요시나가 도 죽으면서 5,7,5 조의 하이쿠로 된 절명시(絶命詩) 를 남깁니다.
( 誘ふとてなにか恨みん時きては 嵐のほかに花もこそ散れ )
데려간들 무엇이 원망스러우랴 갈 때가 된 다음에야,
폭풍이 몰아치는 사이 다른 곳에는 꽃 또한 지노라.
모리 모토나리는 오우치 가문을 이어 아마고 가문과 은광 쟁탈전이 전개되었고, 1562년 모리 가문이 승리해
완전히 손에 넣었지만.... 돗토리성 함락 3년 후인 1584년 모리 가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복속 합니다.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을 제치고 세게 제일은 은광이 된 시마네현의 이와미 은광은
이후 모리가문에서 도요토미 가문 으로 넘어가는데....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니, "임진왜란을 일으킨 막대한 군자금은 이와미 은광" 에서 충당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