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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Lets go Libera 원문보기 글쓴이: 광복이
이완용 – 대세(大勢)와 시류(時流)에 민감했던 카멜레온인가, 매국노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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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大勢)와 시류(時流)에 민감했던 카멜레온
‘개화기 선각자’와 ‘매국노’의 두 얼굴
이완용 다시 보기 이완용(李完用, 1858∼1926).한일합방을 주도한 친일매국행적과 개화기 선각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
이완용(1858~1926). 우리나라에서 '매국노'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낼 때 반드시 동반되어 떠오르는 이름이다. 고종에게 칼을 들이대며 을사 조약 체결을 강요한 '을사5적'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일본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아 식민 치하에서 부귀영화를 누렸고, 심지어 며느리와 사통한 패륜아로도 전해진다.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와 인륜을 저버린 간특한 인간 말종. 여기까지라면 이완용에 대한 우리들의 돌팔매질은 무한한 도덕적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생각도 못 한 지점에서 우리의 발목을 건다. 퇴직 언론인 윤덕한씨가 저술한 '이완용 평전' 은 1897년 11월11일자 독립신문 1면 논설을 인용하며 시작된다. 그 논설의 요지는 이완용을 '대한의 몇 째 안가는 재상'으로 칭송해 마 지않는 것이다. 더구나 독립협회 회원들은 이완용을 '맑은 덕과 중한 물망의 소유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청빈한 목민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에게나 붙여질 수식어를 도대체 '매국노'가 어떻게 받을 수 있었나. 이완용이란 인물의 실체는 무엇인가. 저자는 이런 의문에서 평전을 출발하고, 그 해답을 밝힌다. 우봉 이씨 가문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 난 이완용은 먼 친척인 서울의 권세가 이호준 에게 양자로 입양돼 가문(그의 의붓형은 대원군의 사위가 됐고, 외가는 왕비 민씨와 일가 였다)과 시류에 힘입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고종과 왕비 민씨의 총애를 받아 왕세자(훗날 의 순종)의 교육을 맡았는가 하면, 정계진출 9년 만인 38세 때 학부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이완용의 생애를 기술하며 우리는 그 동안 간과됐던 대목들을 짚게 된다. 이완용은 불과 4 개월 남짓한 학부대신 재임기간 성균관을 개편하고, 소학교령과 한성사범학교 규칙을 공포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인 초등교육의 의무화와 그 체계의 제도화, 근대적인 교사 양성사업 같은, 우리 교육사에 획을 긋는 자취를 남긴 것이다. 또한 이완용은 술도 즐기지 않고, 여자도 밝히지 않았으며, 취미는 책을 읽고 서예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내성적 이고 치밀한 사색형의 성격에 오로지 글읽기와 쓰기, 시문 짓기를 낙으로 삼았다. 조상과 부모에 대한 예와 효도 깍듯했다. 그의 풍모 는 전형적인 조선 선비의 그것이었다.
이완용 평전. (윤덕한 지음, 중심 펴냄)
그렇다면 이완용으로 하여금 카멜레온적 변신 을 거듭한 역사의 매국노가 되게 한 원인은 무엇인가. 저자는 그것을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를 뿐 달리 길이 없다"는 이완용 자신 의 말로 설명한다. 요즘도 흔히 변명거리가 되곤 하는, 이른바 '대세를 따랐다'는 얘기다. 또한 이완용은 초대 주미공관원을 거치는 등 남보다 앞서 서구문물을 접한 인물임에도 '동도서기론'적 입장을 취해 수구적인 민씨 척족에게 충성을 바쳤다. 저자는 이완용이 서양의 침략에 대항해 동양 여러나라가 단결하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이른바 '동양평화론'에 동조하고 끝내 매국까지 하게 되는 정신적 배경의 실마리를 여기서 찾기도 했다. 이 책은 이완용에 대한 기성의 편견과 선입견 을 뒤집는 동시에, 한말의 역사적 사건과 현 대 한국의 정치사를 연관지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당시 왕과 행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하 기 짝이 없었으며, 임오군란이나 동학농민란, 갑오경장 같은 내정의 격변에 툭하면 외세의 개입을 부르는 개탄지경이었다. 이는 이완용 이란 매국노를 배양하기에 다시없이 좋은 태반이었으며, 오로지 그에게만 망국의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을 역설해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 인물의 평전만이 아닌 19세기말 저물어가는 조선의 상세도로, 오늘날 우리의 한심한 정치현실이나 미급한 수준의 국제화 밖에 이루지 못한 역사적 연원의 해부도로 읽힌다.
이완용(李完用) – ‘매국노’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부패하고 무능하며 저물어가는 조선 - ‘매국노’를 배양하기에 더없이 좋은 여건
이완용(李完用, 1858∼1926).
신동(神童) 이완용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 선악 개념을 떠나 지명도로만 따질 경우 국내 어느 역사적 인물보다도 널리 회자되는 이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완용에 대해 무지(無知)에 가까울 정도로 아는 것이 없다.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라는 수식어 때문에 비분강개하는 데 익숙했을 뿐 그가 어떤 삶의 과정을 거쳐 민족 반역의 길을 걷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탓이다. 따라서 이완용 일대기는 고종·순종실록을 토대로 하여 동시대 인물들의 기록, 독립신문 등 당시 언론 등을 날줄과 씨줄처럼 엮어야만 그 면모가 제대로 파악된다.
과거(科擧)를 치르고 급제한 선비에게 악공을 보내 축하연을 베푸는 장면.
<국조문과방목> 기록에 의하면 이완용은 아버지 이호준(李鎬俊), 생부(生父) 이호석(李鎬奭), 본관은 우봉(牛峰·지금의 김천), 거주지 서울로 되어 있다. 철종 9년(1858)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이호석과 신씨 사이에서 출생했으며, 10세 되던 1867년 같은 우봉 이씨 가문인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갔다.
30세에 주미 외교관으로 발탁되다
이완용의 성장사를 통해 우리는 이완용이란 인물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완용은 유학적인 학문 분위기와 가풍(家風)에 영향을 받아 양반적 특권의식에 젖어 있던 전형적인 양반 정치인이었다. 게다가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나 명문가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사실도 이완용의 성격 형성에 있어 중요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외교의 각축장이었던 조선 주재 외교관들. (왼쪽으로부터 독일,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19세기 말 ~ 20세기 초, 한반도는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서울에 와있던 각국 외교사절은 서로 경쟁과 협조관계를 맺으며 자기 나라의 국익을 추구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뢴돌프(Reinsdorf) 독일공사, 알렌(Allen) 미국공사, 가토(Kato) 일본공사, 플랑시(Plancy) 프랑스공사, 조던(Jordan) 영국공사. 1860년 중국-러시아 베이징조약(흔히 '북경조약') 이후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판도가 형성되었다. 조선반도를 완충지대로 하여 영국- 러시아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그 틈을 활용하여 청나라-일본-프랑스-독일-미국 등이 영향력을 강화하는 형세가 조성되었다. 그러니까 조선반도를 완충지대로 하여 ‘1부 리그(영·러)’와 ‘2부 리그(청·일·프·독·미)’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도한 상호대결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영국과 러시아는 조선반도가 상대국의 단독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선을 보호하려면 조선반도를 완충지대로 만들어야 했다. 그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어느 나라도 조선반도에 영향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특정 국가를 대리인으로 삼아 조선반도에 영향력을 갖도록 함으로써 상대국이 영향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바로 그 대리인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나라들이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운 청국과 일본인 것이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이완용은 정치가로서 긍정적 성격과 부정적 성격을 모두 갖춘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침착하고 의지가 굳으며 심사숙고하여 일단 결심한 일을 과단성 있게 밀고 나가는 추진력과 실행력을 갖추었다.(‘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 논설 참조). 반면에 좋게 말하면 적응력이요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적 처세술의 대가였다. 그는 자신의 처세술에 대해 김명수에게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그의 이름이 실록에 다시 등장한 때는 고종 24년(1887) 7월 20일. 이날 고종은 “이완용을 미국 주재 참찬관(參贊官)으로 임명하여 공사의 일을 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30세의 젊은 관리가 초대 주미 외교팀 외교관으로 선발된 것이다.
육영공원(育英公院, The Royal University)에서외국인에게 수업을 받고있는 상투 튼 학생들.
최초의 영어몰입식 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育英公院)’은 조선에서 최초로 서방세계에 파견된 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가 미국에 다녀오면서 서양의 문물을 가르칠 신식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뜻을 세워 설립된 것이다.. 1884년 9월에 고종이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치하라고 허락했지만,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2년이 지난 1886년 7월에야 미국인 교사 3명이 입국했다. 길모어는 프린스톤, 벙커는 오베린, 헐버트는 다트머스 출신으로 모두 일류대학 졸업생이었다. 육영공원 좌원(左院)에는 젊은 관원들이 입학했고, 우원(右院)에는 똑똑한 젊은이들이 입학했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색당파에 안배하여 선발했다. 외국인이 가르치는 이 학교에서는 처음에 알파벳을 가르친 뒤에 영어로 강의했으며, 영어 원서를 강독하였다. 외부와 접촉이 없었던 조선의 현실을 고려해, 헐버트는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간단히 정리해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교과서를 만들었는데, 한글본을 시작으로 해서 한역본(漢譯本), 국한문 혼용본 등이 계속 나와 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동문학에서 영어를 배운 학생들이 조교로 채용되었으며, 인천, 부산, 원산의 해관세(海關稅)로 학교를 운영했다.
같은 해 8월 7일 실록을 보면 ‘고종이 주미(駐美) 전권대신 박정양과 참찬관 이완용을 불러 만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하직 인사를 위한 만남이었다. 임오군란 당시 민비와 고종은 대원군을 축출하고 구식 군대의 폭동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이 요청에 따라 조선에 파견된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 휘하의 오장경(吳長慶) 장군과 그의 막료 원세개(袁世凱)는 조선 초기부터의 조공관계를 내세워 조선의 외교 통상은 물론 국정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1 882년) 일본기를 들고 인천으로 도주하는 일본공사관원들.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8월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를 받던 구(舊) 영문의 군병들(고종의 황실근위부대였던 구식군대)이 제때 월급을 받지 못하고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분노로 일으킨 항쟁이었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881년 일본의 주도로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고 고종의 황실근위부대(구식군대)인 훈련도감, 용호, 금위, ·어영, 총융의 5영(營)은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2영으로 개편되었다. 여기에 소속하게 된 구(舊) 영문의 군병들은 자기들보다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는 신설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 하여 증오하였다. 구 군영 소속 군인들에게는 13개월 동안이나 월급도 나오지 않았으며 선혜청 도봉소에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급료로 지급하려 하자 이에 격분한 구식군대 군병들이 수령을 거부하고 선혜청 관리들을 구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보고를 들은 선혜청의 책임자인 민경호가 주모자를 잡아 처형하려고 하자 분노한 군졸들은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고 야인으로 있던 대원군에게 달려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달래는 체하면서 은근히 충동하였다. 이는 일본이 조선군대를 무력화 하기위한 계략이기도 했다. (1907년 결국 일본은 조선군을 해산시켜 군대가 없는, 나라 아닌 나라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대원군의 격려를 믿은 구식 군대의 군졸들은 군기과와 포도청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놀란 일본인들은 인천을 통해 본국으로 도망가고, 민비는 궁녀복으로 변장하여 급히 대궐을 벗어났다. 처음에는 서울 화개동 윤태준의 집에서 은신하다가, 사태가 위급해 지자 전 임천군수 이근영의 경기도 광주집을 거쳐 민영위의 본가인 여주로, 그리고 다시 장호원의 민응식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민비의 요청으로 출병한 청(淸)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개항 이후 대규모로 전개된 최초의 반봉건·반외세 투쟁이었던 임오군란(壬午軍亂)은 무력진압되고 말았다. 고종은 청나라를 동원해 임오군란을 막고, 임오군란 이후 청국이 원세게(袁世凱)를 통해 조선의 내정간섭을 하게 되자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고, 갑오농민전쟁을 막기 위해 다시 청을 끌어들이고, 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불러들이고, 마침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고종의 숨가쁜 외교정책의 배경에는 민비와 대원군의 생사를 건 권력쟁탈이 한반도의 비극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민비(명성황후)와 러시아의 결탁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은 결국 대한제국의 국모를 살해하는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일으켰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민비는 자력으로 청나라 세력을 배척할 수 없자 제3국 세력에 의존하여 청(淸)을 견제한다는, 이른바 ‘외친내소’(外親內疎) 정책을 추진했다. 여기서 제3국으로 떠오른 것이 미국이다. 고종이 미국을 염두에 둔 이유는 초대 주미공사단 일원이었던 이하영의 회고록에서 그 단서가 발견된다.
조선의 지도자들은 중국이 노골적인 속방화 정책을 취하는 것을 보며 중화사상적 질서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대안의 모색 그 자체도 사대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다시 말하면 중국 대신 미국을 주인으로 섬기고자 했을 뿐 국가자존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과 조선에 파견된 원세개(袁世凱).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 사진왼쪽)이 조선에 파견한 원세개(袁世凱, 사진 오른쪽)는 임오군란을 막아달라는 민비와 고종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왔다가 국정 전반에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청(淸) 말의 외교관이며 정치가인 이홍장(李鴻章)은 한족계 중신으로 청의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사람이다. ‘태평천국의 난’ 이후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하였으나 청일 전쟁을 계기로 실각하였다.
그러나 딘스모어 미국 공사가 조선 공사단의 미국행을 강력히 추진하자 청나라는 조선 외교팀이 ‘영약3단’을 준수한다는 조건을 달아 주미 외교관의 파견을 허락했다. 영약3단이란, 조선 공사가 각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 공사관에 신고하고 청국 공사의 안내로 외무부에 간다. 외교가에서 향연이나 각종 교제가 있을 때 조선 공사는 청국 공사보다 낮은 자리에 앉는다. 외교에 관한 중요한 일은 조선 공사가 청국 공사와 협상한 후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조선에 미군 파병 극비리에 추진 이 시절 이완용을 비롯한 주미 공사단 파견 목적이 또 한 가지 있었으니, 청나라의 횡포를 응징하기 위해 미국에서 2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으려 했다는 점이다. 즉 부산·인천·원산 세 항구의 관세를 저당으로 미국에서 2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이 자금으로 20만 명의 미군을 청병(請兵), 형편에 따라서는 심양 일대까지 군대를 진격시킨다는 비밀계획이었다. (이하영의 회고록 참조).
‘대조선 주미국 화성돈(華盛頓: 워싱턴) 공사관’과 초대공사, 박정양 (朴定陽).사진 왼쪽은 미국에 설치된 대한제국의 첫 공사관, 오른쪽 사진은 주미 초대공사 박정양(朴定陽). 1888년 고종은 박정양을 워싱턴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하였고, 박정양은 처음에 세를 들어 사무실을 사용하다가 부임한지 3년 뒤인 1891년 고종은 사비 2만 5,000달러를 들여 빅토리아풍의 지하 1층, 지상 3층인 적갈색 주미공사관 건물을 사들였다. 1891년 설치된 ‘대조선 주미국 화성돈(華盛頓: 워싱턴) 공사관’은 대한제국이 구미에 개설한 유일한 외교 공관이다. 이후 이완용을 비롯한 5명의 전권공사와 8명의 변리공사가 이 곳에서 공관장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공사관은 폐쇄되었다. 또한 1910년 한일병합 직전 일본은 단돈 5달러를 주고 건물을 강탈한 뒤 미국인 개인에게 주미공사관 건물을 팔아 넘겼다. 현재 이 건물은 미국인 변호사의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외관은 대한제국 시절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 우리정부는 이 구한말 주미공사관 건물을 매입하여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확보하게 되면 한국역사 자료와 도서 및 이민사 전시실로 꾸며 공개할 예정이다.
고종: “미국의 면적이 일본에 비해 몇 배나 되는가.”
병으로 귀국한 이완용은 8월 21일 전보국 회판, 10월 14일에는 교섭통상사무 참의로 임명됐다가 12월에 다시 임시 대리공사로 임명돼 미국으로 갔다가 고종 27년(1890) 10월에 귀국했다. 이완용의 주미 외교관 생활은 16개월 간 계속됐다.
이완용의 처, 1899년 미국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는 주미 외교관 생활을 통해 친미 개화적인 미국관을 형성하게 된다. 이완용은 미국이 거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 3권분립의 민주공화제, 강력한 군대와 시장경제, 신분차별이 없는 평등사회, 주권재민과 언론, 철도와 교통, 교육제도 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미국이 국민교육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근대적 교육제도 도입에 큰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만국공법, 즉 국제법이 서구 열강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란 점을 인식했다는 점일 것이다.
갑오년인 1894년에 발발한 중국(淸)과 일본의 전쟁은한반도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그들의 야욕이 깃들어 있었다.
<“이처럼 사무가 복잡한 때 외국과 교제하는 관리들은 일반 규례에 구애되어서는 안 될 것이니 거상(居喪) 중에 있는 전권공사 이완용을 불러내 지시를 받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승인했다.>
그러나 이완용은 상중임을 내세워 부임하지 않다가 외부 협판(차관급)에 등용됐다. 일본은 러시아, 프랑스 등의 압력에 의해 3주 만에 요동반도를 포기함으로써 여순·대련항은 러시아 차지가 되었으며, 조선은 러시아의 세력권에 놓이게 됐다. 일본이 국력을 총동원하여 조선에서 청나라를 몰아내자 러시아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3국간섭(三國干涉)’ 이란..
청일(淸日)전쟁의 결과 1895년(고종 32)에 체결된 일·청 강화조약(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차지한 요동반도(랴오둥,遼東)를 러시아·프랑스·독일 등 3국이 개입하여 청(淸)에 돌려주게 한 사건이다. 일본이 요동반도를 영유하게 됨으로써 부동항을 획득하려는 의도가 좌절된 러시아가 중심이 되어 추진했으며,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심을 아시아에 두게 하려는 독일의 의도가 합치하여 3국이 공동보조를 이루었다.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 일본국과 청국의 협정 조인식.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은 1895년 3월 20일부터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열린 청일전쟁의 강화회의로 체결된 조약이다. 4월 17일 일본제국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을 인정할 것. 2. 타이완을 일본에게 할양한다. 3. 청국은 일본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 4. 청국의 사스(沙市) ·충칭(重慶)·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의 개항과 일본 선박의 양쯔강 및 그 부속 하천의 자유통항 용인,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승인할 것.
고종과 민비는 극심하게 내정간섭을 하던 일본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외세로 다가온 러시아와 미국에 의존하여 ‘배일(排日)-친미(親美)-친러(親露)’ 노선을 걷게 된다.
손탁 호텔을 운영했던 앙뜨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孫澤) 여사와 손탁호텔 모습.
왼쪽 사진은 고종황제가 마련해준 손탁호텔 입구 계단에서 주한 외교관들과 환담하고 있는 손탁여사,. 오른쪽은 정동의 손탁호텔(Sontag Hotel)이다.
정동구락부의 근거지는 정동에 있는 ‘손탁호텔(Sontag Hotel)’이다. 손탁 호텔을 운영하던 여인은 한국의 러시아 초대 공사로 부임해온 베베르(웨베르)의 처형이다. 이름은 앙뜨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안토니에트 존타크)으로 내한 당시 32세 과부였다. 고종황제는 손탁이 살고있던 정동 러시아 공사관 입구에 개인 집을 사서 호텔을 지어 손탁에게 주었다. 손탁에 대한 고종황제의 신임 표시이기도 하려니와 외국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침략 일본에 시위를 한 것이기도 하다. 손탁호텔(Sontag Hotel)은 400여 평 대지에 회색 벽돌 2층 양옥인데, 2층은 귀빈실로 사용하고 아래층은 보통실과 커피숍을 겸한 식당을 두었다. 바로 이 커피숍이 구한말 외국인들을 결집한 사교장이었다. 손탁(앙뜨와네트) 여사는 미국 공사, 프랑스공사, 그리고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미국선교사를 비롯하여 민영환, 이상재, 윤치호, 이완용 등이 회원인 ‘정동구락부’의 마담 노릇을 자처했다. 그녀의 동생인 베베르(웨베르) 러시아 공사의 부인은 한국에 사는 외국인 사교의 마돈나였으며 1주일에 한 번씩 정동 러시아공사관에 외국인들을 부부동반으로 초대하여 파티를 베풀고 볼룸을 꾸며 무도회를 주최하곤 했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의 지식층이 친미(親美) -친러(親露) -배일(排日) 색채를 노골화하면서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일본은 ‘여우사냥’이라는 암호명의 민비(閔妃) 시해사건을 일으켰다. 다음은 고종 32년 8월 20일 실록.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은 광화문 밖에서 살해당하고 궁내대신 이경직은 전각 뜰에서 피해를 입었다. 난동은 점점 더 심상치 않게 되어 드디어 왕후가 거처하던 곳을 잃게 되었는데, 이때 피살된 사실을 후에야 알았기 때문에 반포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군대를 앞세우고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으로 향하는 대원군. (Sharf Collection, Boston Museum 소장, 기록화)
대원군이 청나라에서 귀국하자 민비(閔妃)는 즉시 대원군의 일가 친척 수십명을 잡아 죽였다. 원한이 뼈에 사무친 대원군은 일본 군대를 앞세우고 민비 척족을 권력에서 제거해버렸다. 이 때부터 민비는 일본에 이를 갈면서 러시아를 끌여들였으며 민비가 노골적으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에 붙자 대원군과 일본은 민비 제거라는 공통 목표에 합의하게 된다. 암호명이 ‘여우사냥’인 민비 시해사건 당일인 1895년 8월20일(양력 10월8일) 새벽, 대원군은 '암여우(민비)를 죽여라'고 외치는 일단의 일본 낭인들과 일본군이 훈련시킨 조선군 훈련대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의 거처이던 마포 공덕리 별장을 떠나 경복궁으로 향한다. 대원군은 함께 따라나서기를 간청하는 종손자 이준용에게 "너는 여기 남아 있다가 오늘의 거사가 실패하면 일본으로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하라"고 말한 뒤 가마에 올랐다. 대원군은 출발에 앞서 자신의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告諭文)'을 발표하고 이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고유문(告諭文)은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척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 민비시해 사건은 그 실행은 일본인이 했지만 '거사'의 주범은 어디까지나 대원군이었다. 민비의 시해는 한 마디로 1873년 11월 대원군이 민비의 책동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이래 22년간 계속된 며느리와 시아버지간의 추악이 극에 달한 권력쟁탈극의 종결편에 해당한다.
한 나라의 왕비를, 그것도 왕궁 안에서 무참히 살해하여 시신을 불태운 사건은 일본의 만행을 탓하기에 앞서 당시 조선의 치안과 안보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력했는지를 증거하는 사건이었다. 민비 시해사건이 벌어지자 그동안 ‘배일(排日)-친미(親美)-친러(親露)’정책을 추진하던 이완용, 이하영, 이채연 등 정동파 인사들은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
정동파 인사들은 미국, 러시아 공사와 아펜젤러· 언드우드 등 미국인들의 협조 아래 일본군에 포위되어 있던 경복궁에서 고종을 탈출시키기 위한 모의를 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춘생문 사건’이다.
춘생문 사건은 정동파 인사들이 고종을 일본의 감시와 위협에서 탈출시켜 국모(國母) 살해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주모자는 이완용과 알렌, 러시아 공사 베베르였으며 이완용의 서형(庶兄)인 이윤용, 이채연 등 정동파 인사와 언더우드, 다이, 르장드르, 닌스테드, 에비슨 등이 가담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전에 밀고되어 주모자들이 체포되었고, 이완용은 다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신세가 됐다.
‘춘생문(春生門) 사건’ ‘춘생문사건’은 고종이 직접 기획한 것이었다. 민비가 처참하게 시해된 뒤 궁중에 연금되어 아내를 살해한 일본 세력에 둘러싸여 있던 임금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저항했다. 눈 앞에서 딴 깡통 연유와 날 달걀 외에는 일절 먹지 않음으로써 독살을 피했고, 밤마다 미국 선교사들을 궁으로 불러 자신의 침실을 불침번으로 지키게 함으로써 암살을 피했다. 고종은 밀지를 내려 친미파와 친로파 성향의 인사들, 곧 종친 이재순과 이범진을 비롯한 대관들과 임최수를 비롯한 시종신(侍從臣)들과 참령 이도철 등의 장교들로 하여금 쿠데타적 군사작전을 벌이게 하여 왕궁을 탈출하려는 계획을 준비했다.
구(舊)시위대 군인들이 안국동을 경유하여 건춘문(建春門)에 이르러 궁궐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삼청동으로 올라가 춘생문에 이르러 담을 넘어 입궐하려 했다. 사전에는 이진호가 문을 열어 주어 그들이 궁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다이와 이진호 사이에 협의가 이루어져 있었으나, 이진호가 변심하여 미리 군부대신 서리 어윤중(魚允中)에게 계획을 밀고한 것이었다. 그 결과 친위대 숙위병이 명렬히 반격을 가함으로써 '춘생문 사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고종을 구출하는데 실패한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 인사들이 다시 한번 시도하여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시킨 사건이 고종 33년(1896) 2월 11일에 벌어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베베르 공사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150명의 러시아군을 상륙시켜 100명은 러시아 공사관을 경비하고 50명은 완전 무장하여 고종을 모셔오는 호위병으로 동원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 일행이 건물 밖을 내려다보고 있다. 2층 중앙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 중 오른쪽이 고종이고, 왼쪽은 왕태자(뒤의 순종)이다. 좌우에 서 있는 사람들은 각 부 대신이다. 국모를 살해하는 참혹한 을미사변까지 일으켜 무도하게 조선 궁중을 장악한 일본은 조선을 자국의 세력권 안에 확고하게 편입시킨 것으로 계산했다. 절대군주 체제에서는 군주를 확보하는 것이 곧 그 나라 전체를 확보한 것이 되기에, 조선의 대군주(고종)를 궁중에 연금하고 외부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삼엄하게 감시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기 위해 새벽에 변장을 하고 경복궁을 도망치듯이 빠져나와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긴 사건이 ‘아관파천’ 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임시 거처인 행재소로 정한 다음 친일파 각료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김홍집과 정병하는 순검에게 체포되어 경무청으로 끌려가던 도중 광화문 앞에서 군중에게 맞아 죽었고, 군중들은 시체의 양쪽 발을 밧줄로 묶어 종로 네거리까지 끌고 다녔다.
이완용, 근대적 학교 설립하다
이완용은 갑오경장과 아관파천 시기에 학부대신의 자격으로 미국에서 보고 들었던 대로 교육을 통한 국가 근대화의 추진을 위해 각종 교육제도의 혁신을 추진한다. 그는 학무아문을 독립시켜 소학교·중학교·대학교·사범학교·기예학교·전문학교 등 근대적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이완용이 추진한 교육제도 개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완용은 근대 문물제도 수용과 외교활동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외국어학교 관제를 반포했다. 이 조치에 의해 1895년에 일어학교(인천), 불어(佛語)학교, 1896년에 러시아어(俄語)학교, 1897년에 중국어(漢語)학교, 1898년에 독일어(德語)학교가 설립됐다. 이완용, 독립협회 회장을 맡다 이완용을 비롯한 정동파는 일본 외무성 자금으로 창간된 ‘한성신보’(1895년 2월 16일 창간)에 대항하여 한글신문 발행을 기도했다. 이 내용은 윤치호의 일기(1895년 8월 5일자)에 ‘학부대신 이완용이 서울에 한글판 활자를 갖춘 인쇄소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정동파는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할 때 적극 지원하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비밀본부였던 한성신보 건물 앞에서 명성황후를 시해를 담당했던 일본인들이 찍은 단체사진이다.
이 사진은 명성황후 시해를 담당했던 일본인들의 단체사진으로 당시 한성신보사 사장이면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행동대장격인 아다치 켄죠우(安達謙藏)의 사진과 함께 현재 구마모토 신문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사진의 배경이 된 <한성신보>는 당시 덕수궁 앞에 있던 신문사로 '명성황후시해사건'의 비밀 작전본부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가담자인 마츠무라 다츠키(松村辰喜,1868-1937)는 아소에서 태어나 15세때 소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21세 나이로 교장에 등용됐다. 이후 당시 한성신보사 사장으로 한성에 있던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행동대장격이였던 아다치 켄죠우(安達謙藏, 1864-1948)의 요청을 받고 한국으로 건너와 <한성신보>사에 입사했다. <한성신보>는 일본 외무성이 한반도의 침략을 위해 기밀보조비를 지급해 경영을 도운 신문사로 '명성황후시해사건'의 비밀 본거지로 사용됐다. 실제 명성황후 시해에는 <한성신보> 전 사원이 동원됐다.
‘구한말 친미 개화파 연구’라는 저서를 출간한 한철호 박사는 “독립신문 간행은 서재필과 이완용, 박정양 등 정동파의 공동노력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독립문 완공직후 모습.
구한말 친미 개화파(정동파) 인사들이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서재필과 함께 영은문 터에 독립문을 건립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내외에 알리고자 했다. 사진은 독립문 완공 직후의 주변 모습인데 독립문 앞에 보이는 한옥이 1896년 창립된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되던 ‘독립관’으로 원래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이던 건물을 개수해 만들었으며 ‘독립관’ 현판은 순종이 황태자 시절 한글로 썼다. 완공된 독립문의 ‘獨立門’이란 현판글씨는 독립협회 초대 회장으로 활약했던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독립문과 독립관 일대에는 독립공원이 만들어졌으며 독립관은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에도 강연회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요,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해하려고 할 지경이면 구라파에 있는 필랜드(폴란드)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라. 세계사에 두 본보기가 있으니 미국같이 독립이 되어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필랜드같이 망하든지 좌우간에 사람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라노라.”>(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독립신문과 서재필에 대한 부정적 평가
서재필은 갑신정변에서 친일 쿠데타에 실패하여 조선조정으로부터 매국노 수배를 받았다. 그는 일본의 도움으로 군함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미국에 갔던 인물이다. 처음 망명할 때 이미 미국시민권자로서 그가 돌아와 독립신문을 창간할 때는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이라는 미국인이었다.
서재필(徐載弼, 1864 – 1951) 박사.
호는 송재(松齋)이고, 미국 이름은 ‘필립 제이슨( Phillip Jaisohn)’ 이다.1888년에 미국의 라파에트 대학, 1889년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세균학을 전공하고 미국의 의사 자격을 따낸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이다. 갑신정변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1885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의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 대령의 딸과 결혼했다. 서재필을 흔히 독립신문 창간자로서 그 '독립'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독립’은 미국인의 위치에서 탈청입일(脫淸入日)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적다. 일본 텐노(천황)는 서재필에게 신문사 건물을 장만해 주고 창업자금 4400원을 따로 주었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그의 연봉으로 3500원 정도를 약속해 주었다. 소 한 마리가 20원에서 40원 정도였으니 그 돈들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런데도 서재필은 신문사 창업 자금 중 1400원으로 자기 저택을 따로 구입했다. 서재필이 주관한 독립협회는 친일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황제는 결국 서재필에게 다시 추방령을 내렸다. 갑신정변 때 겨우 탈출하여 생명을 부지했지만 목숨이 위태로웠다. 서재필의 하수인들이 그의 출국을 만류했다. 그는 영어로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나라가 광복되자 서재필은 미국 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다시 귀국했다. 그러나 같은 친미 인사였던 장덕수가 총에 맞아 암살당하자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은 철저한 미국사람 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