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의 회상과 증거
부활성야
우리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와 문화, 빅데이터와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의 발달에 따른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으며, 엄청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 사회 또한 이러한 도전들 앞에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회상하고, 그 빛으로 내 삶의 현주소를 바라보며, 희망 속에 부활의 신비를, 삶의 현장에서 증거할 결심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구원업적을 생생하게 회상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보시니 참 좋은 것들을”(창세 2,31) 창조하시고, 친히 우리의 사랑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온갖 인간적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파라오와 그의 군사들을 무력화 하시어, 바다에 길을 여시고 홍해를 건너게 해주셨지요.
주님께서는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이사 55,1) 하시며, “변치 않는 자애로”(55,3) 친히 생명과 희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용서해주시어,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시며”(에제 36,26), 죽음의 과거에서 해방된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셨습니다.
이 밤에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를 회상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사랑의 절정을 보여준 것이며, 부활은 그 참을 수 없는 사랑의 결과인 셈입니다. 부활은 남을 위해 조건 없이 땀을 흘리고 희생하며, 남을 위해 자신을 죽지 않고는 체험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유대 군중들, 빌라도와 로마병사들의 편견과 악행과 비웃음, 거짓과 탐욕과 편협한 정치이념, 제자들의 무지와 약한 믿음 때문에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마지 못해 맞는 ‘수동적 죽음’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무력화하신 ‘능동적 사랑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세상의 악과 폭력과 거짓과 음모, 그 어떤 것으로도 죽이려 해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그리고 ‘변함없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절대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회상하고, 확고히 믿어야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갈 힘이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생각 속에 가두어둬서는 안되겠습니다.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으니,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우리가 살아내야 할 부활은 무엇입니까? 삶에 지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해방의 손길에서 희망과 삶의 의미를 발견했듯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우리 안에 자라는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와 거짓, 무관심과 차별의 그림자를 지워버리는 것이 부활입니다. 거짓을 밝혀 진실을 인양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불평등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이 부활입니다.
탐욕스런 자본에 의해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과 시간제 노동을 철폐하고, 인간다운 노동을 실현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10%의 소수가 45%의 이익을 독차지하는 탐욕이 사라지는 것이 부활입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밖에 없는 N포세대가 다시 희망을 찾도록 해주는 것이 부활입니다. 청년과 노인 자살율 1위의 오명을 씻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이 부활입니다. 흙수저와 금수저가 사라지고,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도록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부활입니다.
힘없는 서민들의 숨통을 조이는 부당한 정치권력에 맞서, 삶의 기본적인 가치를 되찾는 것이 부활입니다. 국민이 주인임을 알아 국민을 섬기는, 정치의 정상화, 상식적인 민주주의가 바로서는 것이 부활입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사라지고, 법 앞의 평등이 회복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이념논리와 간교한 프레임을 이용하여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에 맞서, 정의에 터잡은 하느님의 화해와 자애를 드러내는 것이 부활입니다.
권력과 자본의 도구가 되어, 왜곡된 가짜 소식을 전함으로써, 사회정화와 인간다운 삶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언론이, 발을 딛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불의와 반생명적 죽음의 문화 앞에,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부활입니다. 자본과 정치권력과 이념에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에 따라 고귀한 인간성을 추구하는 신앙인, 목자가 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이런 부활이 가능할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마태 28,10) 사실 이런 부활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죽어야만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삶의 갈릴래아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오늘 내가 걷고 있는 바로 이곳, 나의 갈릴래아는 우리의 갈릴래아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의 계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죽여도 영원히 죽지 않으시는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으며,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죽고 남을 위해 죽음으로써, 마음과 시선이 바뀌고 삶이 변화되는 부활을 재현해야겠습니다. 알렐루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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