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집 담 너머 수국이 졌다. 동네 북쪽 높다란 아파트 옥상에 걸린 구름 덩이가 짙고 힘차게 보인다. 국보로 밥집 아저씨가 물 빠진 저수지에서 잡아 왔다는 우렁이들을 동네 사람들이 들여다보고 있다. 잡혀온 우렁이들은 다라이 안에서 헐떡거리며 물을 마시고 있다.
1월이 떠나고 이제 2월의 초승보다 푸르러진 산야가 무대위 무희처럼 젊음을 펼친다.
내일모레면 할아버지 기일인데 원주 큰집까지 가는 길이 떠오른다. 모내기가 끝난 논들이 보인다. 저 시원하게 꿈꾸는 듯한 증평들, 음성들 이제 막 벼들의 천국일 것이다. 신입생들로 넘치는 초등학교 운동장 아닌가? 새로 개통한 지 10여년 된 자동차 전용도로가 충주호를 가로지르는 아치형 교량으로 건너간다. 그 위를 우리 형제는 바람처럼 달려갈 것이다. 야동 휴게소쯤에서 차 한 잔 하며 달려가던 길을 돌아다보면 어떨까? 서울 마포강을 떠난 뗏목이 짐을 싣고 내려왔다는 그림 같은 목계나루가 선하다. 그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 따라 가난하던 옛날을 벗어난 소도시와 농촌들이 아름다워졌다. 가고 싶은 곳은 모두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고 거기 신록이 넘치고 겨울이 시작된다. 이제 정말 겨울이다.
불현듯 꿈 깨듯 상상을 접고 뜨락을 보니 밤새 떨어진 모란꽃 꽃잎들이 쌓여 있다. 저 꽃잎 바라보니 한 계절을 잘 살고 가는 이별의 말씀이 들린다. 이제 가는 거라고 잘 잊고 있으면 또 올 것이라고 그러나 어떤 시인의 시처럼 저 꽃에 대한 은근한 기다림은 겨울 지나는 순간부터 나도 남몰래 절절하지 않았을까?
모란이 피기까지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계절을 기다리고 꽃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은 아름답다. 우리는 연인을 만나면 함께 꽃을 보러 가지만 혼자되어 외로움 속에서도 꽃 보는 재미로 사는 것 아닐까? 여름에 피는 장미, 메꽃, 나리꽃, 망초, 봉숭아들은 여름의 신화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그들 역시 가을이면 다 떨어져서 그 비극적 생리가 더욱 아름답게 가을꽃을 부른다. 이제 봄이다. 막 피어나는 봄의 꽃은 진달래꽃의 계절이다. 여름꽃 생각에 젖다가 문밖 슈퍼에서 싱싱한 참외 한 덩이를 샀다. 수년 전 금연을 한 나는 직장에서 쉬는 시간에 이런 계절 과일을 한 조각씩 먹는다. 아작아작 씹는 달달한 계절의 맛에 얇은 허기와 피곤이 달아난다. 어제 창고에서 꺼내다 잘 청소해 놓은 선풍기가 이제는 제철이다. 나는 한여름을 선풍기와 산다. 런닝셔츠에 반바지만 입고 대야에 물을 받아다 놓고 언제든지 훌훌 씻으며 일을 한다. 폭염이 때로는 짜증도 나지만 점심 후엔 샤워장으로 달려가 샤워를 하고 회사 등나무 그늘에 누워 먼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정말 어려웠던 50년대 6.25 난리 때가 생각난다. 피란민들이 나의 고향집에 수백 명 몰려들어 밤이면 텃밭의 채소나 감자들을 다 캐다 먹어 정작 우리 식구는 미숫가루로 살던 일, 전염병에 시달리던 일을 돌아본다. 더우면 에어컨을 틀고 영양식을 얼마든 즐길 수 있는 지금의 여름은 덥다고 해도 별것도 아니다.
올해는 어느 멋진 바닷가로 가 보고 싶다. 동해 낙산사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세상의 고단한 일들을 잊을 만큼 절경이었다. 속초 울진 양양 등을 거쳐 영덕으로 돌아오는 해안도로 7번 국도를 승용차로 돌아보니 700여 km가 넘었다. 이번 여름휴가엔 거기를 다시 돌아볼까? 돈행할 문우를 서너 명 찾고 미리 계획을 세워야겠다.
첫댓글 분홍머리 님의 글솜씨가 절정에 이르고 있군요.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