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성강현 전문.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http://m.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79513763108327
<‘경주판’ <동경대전>. 1883년 8월에 해월이 세 번째로 제작한 <동경대전>이다.
간행 장소는 목천이었지만 수운이 태어나고 도를 받은 경주를 기리기 위해 ‘경주판’이라고 이름 붙였다. 간행 당시 동학의 주요 지도자들이 대부분 참여했다. 원본은 천도교에서 소장하고 있다. >
신비 체험보다 이웃 돌보는 것이 바른 도
해월은 동학이 신비를 추구하는 종교로 흐르지 않고 현실 생활에서 동학의 이념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다고 해월이 신비한 종교체험을 경험하지 않거나 종교체험을 경시한 것은 아니었다. 해월은 ‘90리 밖의 사람을 본다거나 큰 비가 내려도 옷과 두건이 젖지 않고 사악한 기운을 끊어 버리는’ 등의 다양한 신비 체험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해월은 이러한 신비 체험을 사소한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중요한 것은 일용행사에서 도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해월의 지향은 이후 수운에게서 뿌리를 찾는 많은 동학 계열의 신흥 종교들과 차별된다. 동학 계열의 신흥종교들은 대부분 신비에 빠져 현실 생활을 도외시하고 종교체험만을 강조해 현실 생활과 도를 접목하지 못해 거의가 도태되었다. 해월은 신비 체험을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성만 있으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했다. 신앙의 과정에 신비 체험에 집착하게 되면 이는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해월에게 있어서 ‘도를 통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이어서 이를 위한 엄격한 자기 수양과 성실한 직분 수행을 강조했다.
이러한 해월의 생각은 그의 가르침 속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1883년 3월 10일 수운의 19주기 순도 제례를 마친 후 해월이 각 포(包)에 전한 ‘동학도들이 실천해야 할 생활규범 11개조’가 대표적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에게 충성하고(忠君上), 부모에게 효도하고(孝父母), 스승에 길이 극진하고(隆師長), 형제간에 친목하며(睦兄弟), 부부의 직분을 다하며(別夫婦), 친구를 믿고(信朋友), 이웃을 돌보아주며(恤?里),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修身齊家), 사람을 잘 대하고 물건을 잘 다루어라(待人接物)
해월은 동학도들이 동학에 입도해서 자신이 발을 붙이고 있는 가정과 사회에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는 것이 도를 잘 하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11가지의 생활 규범은 이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11가지의 생활규범 중 눈여겨 볼 것이 ‘휼인리(恤?里)’이다. 이웃을 잘 돌보아주라는 ‘휼인리’는 해월이 강조하는 ‘유무상자(有無相資,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도와주기)’와 의미가 상통한다. 해월은 신비 체험을 많이 하는 것이 동학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살피고 서로 도와주는 것이 도를 잘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인접물’ 또한 마찬가지다.
< ‘경주판’ <용담유사>. 해월이 두 번째로 간행한 <용담유사>다. 현재 1881년에 간행한 ‘신사판(단양판)’이 발견되고 있지 않아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원본은 천도교에서 소장하고 있다. >
‘경주판’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간행
1883년 5월 공주접에서 ‘계미중하판(癸未仲夏板)’, 일명 ‘경주판’ <동경대전>을 간행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이해 2월에 ‘목천판(계미중춘판)’ <동경대전>이 간행되자 공주의 도인들은 “수년 전에 동협(東峽,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과 목천에서 정성을 모아 경전을 간행했으나 경주판각이라 이름한 것은 나오지 않았으니 이는 도중의 흠이다. 경주는 본시 선생께서 도를 받은 곳이요 포덕하신 곳이라 불가불 경주판이라는 이름으로 한 간행이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호서의 공주접과 영남의 여러 접, 그리고 강원도의 접들이 힘을 모아 ‘경주판’ <동경대전>이 간행되었다.
공주접이 주도해서 간행한 ‘경주판’ <동경대전>은 이름만 ‘경주판’이지 실제 만들 곳은 목천이었다. 해월은 발문의 말미에 특히 목천의 성우용(成虞鏞), 공주의 윤상호(尹相鎬), 그리고 인제의 이만기(李萬基) 등 ‘경주판’ 간행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3명의 이름을 기록했다. 이외에 영양접주 황재민(黃在民), 공주접주 김선옥(金善玉), 정선접주 전시봉(全時鳳) 등 당시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의 동학 지도자들이 간행에 힘을 보탰음을 밝혔다. 이는 수운의 창도지인 경주를 기념한 ‘경주판’ 간행에 전체 동학도인들이 정성을 모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특히 황재민은 수운이 살아있을 때 임명된 접주로 경전 간행에 직접 참여해 감회가 남달랐다.
‘경주판’ 판각의 특징은 목각활자로 조판하였다는 것과 ‘목천판’에 비해서 책의 크기가 조금 커졌다는 것이다. ‘목천판’은 한 쪽을 8칸으로 구획하였고 1칸에는 13자를 판각했는데 ‘경주판’은 한 쪽을 9칸으로 나누고 1칸에는 20자를 조판했다. 또 ‘목천판’에 수록되어 있지 않았던 ‘유고음(流高吟)’과 ‘우음(偶吟)’이 추가되었다. 이를 통해 경전의 판각이 거듭될수록 수운의 경편들이 추가되고 잘못된 글자와 빠진 글자를 수정하여 경전의 완성도를 높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경주판’ <동경대전>이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경전이라 하겠다.
8월에는 ‘경주판’ <용담유사>도 간행했다. ‘경주판’ <동경대전>을 간행한 공주접에서 이어서 간행하였다. 1881년 간행된 ‘단양판(경진판)’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주판’은 현재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경주판’ <용담유사>는 한 쪽을 9칸으로 만들었고 한 칸에는 16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목판에는 현재에는 사용하지 않는 아래아(ㆍ)를 사용하였는데 예를 들어 사람은 ‘??람’, 하늘님은 ‘?????님’으로 표기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1881년에 이어 두 번째로 <용담유사>를 간행하였지만 ‘북접신간(北接新刊)’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해월이 관장하는 북접이 모두 참여한 ‘경주판’의 초판이라는 의미이다. ‘경주판’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현재 천도교에서 소장하고 있다.
09-3
<익산 사자암. 미륵산 중턱에 위치한 사자암에서 내려다보면 익산의 드넓은 지평선이 눈앞에 펼쳐진다. 해월은 이곳에서 4개월간 은거하며 동학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 사자암은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의 주무대다.>
단양 은거 시기 막 내려
해월은 수운이 순도한지 20년 만에 강원도와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까지 동학을 확산시켰다. 그리고 이곳에서 동학의 초기 역사를 정리한 <도원기서>를 편찬하고 한문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특히 경주판은 수운의 저작이 거의 대부분 포함되었고 글자체도 잘 만들어져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다. 해월은 경전을 가지고 각지를 다니며 동학을 전파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1880년대 들어와 충청도 북부지방에 동학이 널리 세력을 펼쳐나갔다.
1884년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이 순도한 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수운의 순도일인 3월 10일 많은 동학도들이 단양의 장정리로 모였다. 송두둑에 있던 해월은 1882년 6월에 송두둑에서 장정리로 이사했다. 장정리는 송두둑과 인접해있는 곳으로 은거에 더 용이했다. 장정리에서 단양관아까지는 20km 이상 떨어져 있었으나 외지 사람이 수시로 드나들자 관의 주목을 피할 수 없었다. 단양관아에서는 장정리를 해월의 은거지로 지목해 탐지하기 시작했다. 1884년 6월 관졸들이 송두둑으로 들이닥치자 해월은 가족을 남긴 채 황급히 전라북도 익산 사자암(獅子庵)으로 몸을 숨겼다.
사자암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구룡길 57-125에 위치해 있다. 사자암은 해발 439m인 미륵산 동쪽 계곡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만 암자이다. 해월은 4개월간 사자암에 숨어 있으며 수행에 전념했다. 해월을 사자암으로 피신하도록 소개한 인물은 박치경(朴致京)이었다. 박치경은 전라남도 완주읍 고산면의 접주로 해월이 최초로 포덕한 전라도인으로 알려져 있다. 완주군은 익산에 접해 있어 박치경은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어 해월에게 사자암을 소개해주었다. 해월은 4개월 동안 사자암에 머물면서 박치경의 안내로 익산, 전주, 여산, 고산, 삼례 등지에 동학을 전파하였다. 전라도 지역의 동학의 확장에 박치경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해월이 사자암에 은거하고 있는 동안 제자들은 해월의 가족을 피신시켰다. 해월의 가족이 피신한 곳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봉촌리 앞재였다. 제자들은 앞재 마을에 초가를 지어 해월의 가족을 옮겼다. 해월은 사자암에서 다시 단양으로 일시 돌아왔다가 공주 가섭암(迦葉庵)에서 들어가 21일간 수련에 들어갔다. 해월은 가섭암에서의 수련을 마치고 11월이 되어서야 상주 앞재 마을로 가서 가족을 상봉했다. 이렇게 해월의 단양 은거 시기가 막을 내렸다.
1874년부터 1884년 6월까지 약 10년간 해월은 단양에 은거했다. 해월의 10년간의 단양 은거 시기의 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해월 중심의 일원적 교단 체제를 완비했다. 둘째, 수운이 행하던 제례인 천제(天祭)와 개접(開接)을 부활시켜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를 집단적인 종교 활동인 고천제(告天制)로 만들어 의식의 통일과 교세의 확장을 꾀했다. 셋째, 초기 동학의 역사를 정리해 <최선생문집도원기서>를 편찬했다. 넷째, 수운이 남긴 동학의 경편을 모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이러한 일들이 모두 단양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해월은 단양의 절골, 송두둑, 장정리에서 은거하면서 각지를 다니며 많은 성취를 만들어냈다. 결론적으로 해월의 단양 은거 시기 10년은 영해교조신원운동 이후 와해된 교단을 수습하고 해월 중심의 교단 일원화를 이루어 동학의 인적, 물적 자원을 확대시킨 시기였다. 이를 기반으로 사적의 정비와 경전의 간행을 성취하였고 이는 1880년대 후반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의 폭발적인 동학의 확장으로 귀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