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강론>(2023. 9. 4. 월)(루카 4,16-30)
복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6-30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구원과 해방의 완성을 향해서 끝까지 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6-21)”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해방 선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원래 ‘구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선포’는 말로만 ‘선언’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선포되는 순간 효력이 즉시 생기는, 즉 선포하신 그 일이
곧바로 이루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해방되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다고 무조건 자동적으로
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인간들 쪽에서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참여해야 이루어집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고,
안 믿었으니까 예수님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감옥의 문을 열어 주었는데도 그냥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면서, 감방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감방에서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은
구원도 아니고 해방도 아닙니다.
스스로 원하고, 스스로 구원과 해방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되고 해방이 됩니다.
<나자렛에서 거부당하신 일을 십자가 수난의 예고편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실패하려고,
또는 일부러 거부당하려고 나자렛에 가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그렇게 해석한다면,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려고 한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하느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한 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과는 반대되는 선택을 한 것이고,
그것은 그들 자신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만들어 놓으신 시나리오대로 한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구원과 해방을 얻어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완전한’ 구원과 해방은 아니고,
지금은 시작 단계, 또는 진행 중인 단계일 뿐입니다.
구원과 해방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그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신앙생활을 중단한다면, 또는 한눈을 팔거나
옆길로 빠진다면, 완성에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미 얻은 은총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린 것들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말고
잊어버려야 하고,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끝까지 전력을 다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끝까지 갈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가 아니라...)
신앙생활은 ‘대충 적당히’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야 하는 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것’, 그것이 바로 ‘순교 정신’입니다.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만이 순교 정신이 아니라......
신앙인들은 인간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항상 박해와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박해시대 때에는 우리 교회의 신앙이
더 순수해지고 단단해졌는데, ‘유혹의 시대’ 때에는 너무 쉽게
타락했고, 박해 때보다 더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아마도, 지금 이 시대도 그런 ‘유혹의 시대’일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더욱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출처]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