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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년 10월 25일 영국왕 헨리5세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에 대승
아쟁쿠르 전투 모습
영국왕 헨리5세가 열악한 군사조건을 무릅쓰고 프랑스에 대승을 거둔 아쟁쿠르 전투가 1415년 10월 25일 일어났다.
헨리5세는 야심을 가진 젊은 왕으로 프랑스 왕권을 되찾기 위해 6,000명의 군사로 1415년 8월 13일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한다. 그러나, 프랑스 대군에 몰려 퇴각하는 중 퇴로를 봉쇄당하자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군과 일대 접전을 벌이게 된다. 더구나 영국군은 이질과 영양실조에 걸려 군기가 엉망이었다. 헨리5세에게는 고작 1,000여명의 무장 군인과 5,000여명의 굶주린 궁수들과 보병 뿐이었으나 프랑스 군은 8,000여명의 기사와 10,000여명의 무장 군인들과 보병들이 있었다.
헨리5세에 대항하기 위해 부르군디, 아르나냑, 오를레앙, 부르봉, 알랭숑 등지에서 모인 프랑스 군대를 지휘한 사람은 달브레 백작이었다. 숫적으로는 프랑스군의 완승이 예상되었지만 승리의 여신은 헨리5세에게 미소지었다. 이날 전투가 있기 하루 전에 내린 비가 원인이었다. 질퍽한 들판은 갑옷으로 중무장한 프랑스군 기사들과 말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영국 궁수들은 그들에게 분당 40,000개의 화살을 쏘아대며 달려오는 프랑스군을 무력화시켰다. 기병 뒤를 따라가던 프랑스 보병들은 쓰러진 기병들의 시체로 진군을 방해받을 정도였다. 역사가들은 시체가 벽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더구나 헨리5세는 프랑스군 포로를 감시하는 데 허비하는 군사력을 전투에 투입하기 위해 2000~3000명의 포로들을 모두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날 전투로 사망한 프랑스군은 거의 10,0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헨리5세는 역사에 포로들을 살해했다는 오명을 남겼으며 중세의 기사도 정신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프랑스인들은 전쟁에 패배했다는 사실보다 이러한 영국왕의 행위 때문에 그후 수세기 동안 영국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증오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은 1429년 오를레앙 전투에서 잔다르크가 보여준 애국심을 보고 나서야 아쟁쿠르 패배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09년이라크 정부청사 테러
▶ 2008년 오늘
'독도의 날' !
독도를 울릉도 부속섬으로 정한
1900년 10월 25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등 국내 주요 교육·사회단체들이 공동으로 매년 10월25일을 ‘독도의 날’로 정해 25일 선포식을 가졌다. 울릉군이 2008년 조례로 ‘독도의 날’을 제정한 적은 있었지만 전국 차원에서 기념일을 선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누리꾼은 2005년 시마네현이 조례로 정한 ‘다케시마(竹島·2월22일)의 날’을 따라했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일본 언론도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교총은 이날 서울 흑석초등학교 강당에서 한국청소년연맹, 우리역사교육연구회, 독도학회, 한국시인협회, 청소년적십자와 공동으로 ‘독도의 날’ 선포식을 개최했다.
교총은 또 흑석초교, 동명여고(이상 서울), 풍양초교(경기), 봉화중(경북) 등에서 독도와 관련한 공개 특별수업을 열고 홈페이지에서 독도 퀴즈대회도 진행했다. 교총 관계자는 “전국 단위에서 기념하는 ‘독도의 날’이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내년부터는 관련 단체가 힘을 모아 더욱 체계적으로 기념식을 운영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교총 등 단체들은 민간 차원의 ‘독도의 날’ 선포가 정부 차원의 ‘독도의 날’ 제정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교총 김동석 대변인은 “1900년 10월25일은 고종 황제가 대한칙령 제41호를 제정해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공표한 날”이라며 “칙령 제정일을 기념하고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계속 알려나가겠다”고 말했다.
‘독도의 날’ 후원 단체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의장으로 있는 민주평통자문회의, 동북아역사재단을 비롯해 한국교육학회, 한국교육행정학회, 한의사협회,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한국노총, 한국자유총연맹, 해병대전우회 등이 포함됐다. ‘독도의 날’ 제정은 민간단체인 독도수호대 김점구 대표가 2000년 처음 제안했다. 울릉군이 2008년 조례로 ‘독도의 날’을 제정했으나 전국적인 기념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해외 네티즌의 반응을 소개하는 사이트 가생이닷컴(www.gasengi.com)에 따르면 일본 주요 포털사이트에는 “독도는 가공의 지명일 뿐이다”, “한국의 날조교육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고 있다”, “1년 365일을 혐한의 날로 정하자”는 등의 글이 올려졌다. NHK, TBS 등이 교총 측에 선포식 관련 자료 등을 요구했고 중국 한 언론사도 취재를 요청했다고 교총은 전했다.
▶2002년북, 선핵포기 공식거부. 美에 불가침조약 제의
▶2001년헌법재판소, 국회의원 선거구 헌법 불합치 결정
▶1999년`그린 신사` 스튜어트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
▶ 1996년 오늘,
한국 '경제협력기구' (OECD)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29번째 '선진국 클럽'가입!
축하 샴페인의 거품이 사그러들기전에
딱! 1년후,1997년 '대한민국 국가부도'
IMF구제금융 신청하다.
도대체,1년 365일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기에...
▶1995년한국-라오스, 국교수립
▶1986년한강유람선 운항 개시
▶1983년미국, 그레나다 침공
▶1979년미국 언론, 남아공 첫 핵실험 성공 보도
▶1979년소련, 대(對)중공 정상화 제의
▶1973년마라토너 아베베 사망
▶1971년중국 유엔 가입과 대만의 축출
1971년 10월 25일, 제26차 유엔총회에서 중국의 유엔 가입과 대만의 유엔 축출을 명시한 '알바니아안'이 찬성 76, 반대 35, 기권 17, 불참 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됐다.
대만 대표는 표결 전에 유엔 탈퇴를 선언하고 대회장을 떠났다. 투표에 앞서 미국과 일본 등 22개국이 제안한 '역 중요사항안'이 부결됨으로써 대세는 이미 기운상태였다. 역 중요사항안이란 중국의 유엔 가입과 자유중국(대만) 추방을 제안한 알바니아안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유엔 가맹국 3분의 2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안이다.
1971년은 '죽의 장막' 중국이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첫해였다. 대외적으로 대만을 지지했지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타진하던 미국은 그 해 4월에 탁구 선수단을 중국에 보내 이른바 '핑퐁외교'의 물꼬를 터뜨렸고, 6월에는 닉슨 미국 대통령이 대 중국 금수조치를 해제해 화해 제스처를 내비쳤다. 6월 11일에는 리비아 대통령 카다피가 대만과의 수교를 끊고 중국을 승인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대만 63개국, 중국 62개국이었던 수교국가수가 하루 만에 뒤집혔다. 국제적인 세력판도가 중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중국은 유엔 가입까지 추진할 수 있었다 .
이로써 중국은 건국 22년 만에 세계 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했으며, 대표권 분쟁을 둘러싼 대만과의 외교경쟁에서 확실한 우위에 서게 됐다.
▶1961년유엔사회복지위, 인권조례 채택
▶1961년한국경제인협회 발족
▶1960년제5차 한일회담 개최
▶1958년고등법원서 조봉암에 사형 언도
▶1957년유엔총회, 한국의 유엔가입자격 재확인
▶1954년민국당 선전부장 함상훈, 신익희, 조소앙의 뉴델리 밀회설 발설
▶1951년판문점서 휴전회담 재개. 휴전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변경
▶1950년춘원 이광수 사망
▶1950년중국군, 한국전 개입
한국전쟁 당시 압록강까지 진격 했지만
10월 25일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투입된다. 이미 26만명이 매복을하고 기다린 상태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전쟁은 원치않는
한 치 앞을 예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중국의 인해전술로 인한 공격으로 미군과 한국군은 계속 밀려 내려오게 되었다.
▶1946년함흥 학생 반공의거
▶1945년대만, 일본으로부터 독립
▶1945년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회중앙협의회 구성
▶1944년가미카제 특공대 첫 전투
몽골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폭풍 때문에 실패했다.
일본인들은 몽골군을 물리친 두 번의 폭풍이 간절한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들을 보호해 준 신을 기리기 위해 일본 사람들은 그때의 폭풍을 ‘가미카제(神風·신이 일으키는 바람 또는 신성한 바람)’라고 부르게 됐다.
오늘날 가미카제라는 단어는 다른 뜻도 갖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새로운 유형의 전사를 탄생시켰다.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적 함정에 돌진하는 자살 특공대도 ‘가미카제’로 불렀다.
1944년 10월 25일 오전 8시.
첫 가미카제가 필리핀 레이테 만 미군 함정 정박지에 출현했다. 각각 250kg의 폭탄을 실은 일본군 단발엔진 전투기 4대가 고도 2만 피트(약 6100m)에서 최고 시속 372마일(약 600km)로 미군 항모 1척과 군함 3척을 향해 돌진해 자폭했다.
이후 일본 패망 때까지 2500여 명의 ‘인간 폭탄’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 들었다. 성공 확률이 겨우 6%였던 가미카제는 적군에 두려움을 주는 심리전의 성격이 더 컸다. 가미카제의 주요 장비는 비행기와 어뢰였는데 가끔은 글라이더와 보트도 사용됐다고 한다.
미국 위스콘신대 인류학과 오누키 에미코 교수는 가미카제에 대한 연구 논문에서 ‘가미카제 병사의 85%가 고등교육을 받은 학도병이었고 상당수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대학이었던 도쿄(東京)제국대 출신이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오누키 교수는 “가미카제는 천왕을 위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무사도로 무장된 사람이라기보다는 대다수가 지원을 강요받았으며 불가피한 죽음을 맞은 불쌍한 젊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도쿄제국대 재학 중 가미카제로 징집된 하야시 다다오의 일기에는 “지금은 새벽이다. 오전 3시다. 아! 죽고 싶지 않다”라고 적혀 있다.
가미카제를 창설한 일본 항공부대의 오니시 다키지로 해군 중장은 일본 패망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 가미카제 영령들에 대한 사죄를 담은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1943년항일투사 홍범도 사망
항일독립투사 홍범도 장군 세상 떠남.
봉오동, 청산리전투에서 왜군에게 대승을 거두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해 9월 일제가 민중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위해 총포급 화약류단속법을 공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크게 분노하여 11월 차도선, 태양욱과 산포대를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킨 뒤 북청의 후치령을 중심으로 갑산, 삼수, 해산, 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차도선, 조맹선등과 포수단을 조직하였다. 이후 교포들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연락, 애국지사소집과 독립군양성에 전력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후 3~6월 사이 '대한독립군'을 창설했다.
같은 해 8월 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갑산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감을 갖고 정예부대를 인솔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
만포진을 습격한 뒤 자성해서 3일 동안 일본군과 교전하여 70여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1919년 삼일운동 후
동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간도대한국민회'를 결성하자, 1920년 5월 합작하였다. 간도대한국민회 와
대한독립군의 합작 군사조직으로
제1군사령부가 결성되었고, 홍범도는
정일 제1사령에 임명되었다. 1920년 5월 27일 북로사령부로 개명되었고 이후
최진동이 지휘하는 도독부와 통합하였다. 최진동의 독군부 부장, 안무가 부관,
홍범도가 북로 제1군 사령에 임명되었다.
확대 개편된 500여명의 대부대로 국내진입 작전을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최진동과 협력하여 종성 삼둔자 부근에서 국경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며 두만강 대안의 '봉오동'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키는 큰 성과를 올리니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 전투'이다 또한 같은 해 12월 청산리 전투에서도 제일 연대장으로 참가, 제2연대장 김좌진, 제3연대장 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한 왜군이 계속해서 추격해오자 독립군조직을 총망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에 선임되었다. 그뒤 간도지방에 김좌진 ,최진동부대와 함께 노령으로 이동 흑룡강 자유시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협조를 얻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반으로 무장해제된 뒤
많은 단원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겪게 된다.
이 사변이후 1922년 고려공산당과 한족 공산당이 통합하여 조직한 고려중앙정청의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었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 되어 이곳에서 극장수위 등으로 일하다가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43년제1회 학병징병 검사 실시
▶1941년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 사망 - 오르피즘 창시
▶1921년좌측통행제 실시(1906년 이후 우측통행제 실시)
▶1907년`이태리 건국 삼걸전` 국내 첫 출판
▶1881년프랑스 화가 피카소 출생
피카소 [Picasso, Pablo (Ruiz y), 1881.10.25~1973.4.8]
피카소는 독특한 양식으로 20세기 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스페인의 미술가이다. 10세 때 뛰어난 소묘실력을 보고 그의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적극적으로 아들을 지원했고 13세 때 첫번째 개인전을 열어 주었다. 1901년부터 1904년 중반까지 피카소의 회화는 청색이 주조를 이룬다. 친구인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의 자살로 받은 충격이 감동적인 '청색 시기'의 작품들을 낳게 한 것이다. 1904년 봄, 파리로 이주했으며 여성의 신체를 심하게 왜곡한 <아비뇽의 처녀들 Les Demoiselles d'Avignon>(1907)을 그려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파리 생활에서 브라크와 세잔을 사귀었고 특히 세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09~12년의 3~4년간 피카소와 브라크는 함께 매우 긴밀한 작업을 하며 이른바 분석적 입체파로 알려진 미술 양식을 발전시켰다. 피카소는 말년까지도 끊임없이 새로운 미술을 추구했다. 이로 인해 그의 생전에나 그 이후에 많은 오해와 비판을 초래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에 와서야 그의 말년 작품들이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중요 작품으로 1937년 파시스트들의 폭격을 받은 바스크 마을에서 제목을 따온 벽화 <게르니카 Guernica> 등이 있다
▶1877년볼셰비키 지도자 레온 트레치키 출생
▶1838년가극 작곡가 조르주 비제 출생
▶1826년정신질환자에 대한 인간적인 치료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프랑스의 의사 피넬 사망
▶1825년오스트리아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출생
▶1811년프랑스의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 출생
▶1767년프랑스 소설가 앙리 뱅자맹 콩스탕 출생
▶1759년영국의 해외 노예무역을 폐지한 영국의 정치가 그렌빌 출생
▶1415년영국왕 헨리5세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에 대승
▶1394년이성계, 한양 천도 시작
https://youtu.be/E3Cl4uM47JA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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