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쪽 성벽을 새로 쌓아올린 끄트머리 자락에 1930년, 독일인 선교사가 지은 붉은 벽돌집이
있습니다. 두개씩 나란히 뚫린 정면의 창문...담쟁이 넝쿨이 유리창을 감싸며 올라가는 벽돌집이죠.
애절한 봉선화 바이얼린 선율이 매마른 담쟁이 가지를 흔들며 흐느끼게 하는듯 했습니다.
가옥 내부 공간은 아담하며 포근해 보였습니다. 민간 소유였던 홍난파선생 가옥을 종로구가 사들이면서,
음향시설을 갖춰, 50명 정도 수용가능한 음악회 공연장으로 재탄생시켰다고 합니다.
1935년부터 1941년 홍난파선생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던 집
선생의 부인은 이미 떠나셨고, 가족인 운영자가 문을 열고 맞이해 주는 군요.
난파 홍영후(1898~1941년)
난파는 그분의 호였고, 본명은 홍영후.. 작곡가일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얼리니스트였습니다.
건물은 지상 1층, 지하 1층의 규모로 붉은 벽돌조.
주변에 선교사 주택이 여러 채 건립되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당시 근처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었던 관계로 독일 계통 선교사의 주택 단지가
이곳에 세워졌던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민간인이 살던 이 가옥이 또 다른이에게 넘어갈 뻔했는데..
작곡가 최영섭선생과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이문태 이사장이
종로구청 관계자를 설득하여 등록문화재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는군요.
홍난파 선생의 연보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남양 홍씨인 부친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악기를 연주할 줄 알았는데,
차남인 홍영후(난파)는 앙금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난파는 장성한 후에 붙여진 호가 아니라 음악을 좋아한 부친이 금파(錦坡), 난파(蘭坡) 로
어렸을 적부터 지어준 별호였더군요.
1899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게 된후,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난파는 서양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세례교인이 되어
성가대 활동과 바이얼린 연주 선교를 했다고 합니다.
1926년경 작곡된 봉선화
봉선화를 최초로 부르고 널리 퍼지게 한 당시 소프라노 김천애의증언에 의하면
봉선화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은 이웃에 살았던,작사자 김형준의 집에 봉선화꽃이
가득했고, 형준은 우리 신세가 봉숭아꽃 같다고 했다 합니다.
'1942년 일본 하비야공원에서 열린 신인음악회에서 김천애가 <봉선화>를 부른 것이 시초였고,
귀국 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 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하였다.'
'봉선화는 주권을 일본에 침탈당한 국민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였기에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었으나, 일본 경찰 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봉선화>의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성하에의 애절함이라면, 2절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의 조사를 뜻하는데, 이어지는 3절이 애절한 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다.
곧,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 역할을 한다.'
-위키백과에서
1921년 작곡한 고향의 봄.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오빠생각〉, 〈나뭇잎〉, 개구리〉를 비롯하여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였습니다.
<홍난파는 1931년, 미국의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를 2년간 다녔다
그때,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게 되는데, 흥사단은 미국에 있는 조선인의 가입을 이끌며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홍영후의 미국 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수업료를 내야 하는 납부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해
분납을 하며 생활해야 했고, 뜻하지 않은 교통 사고를 당하며 늑골을 다치고 말았다. 이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시달려야 했고, 귀국 후에도 잦은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할 정도로 그의
건강이 나빠지게 되었다. 홍영후는 1932년 12월 8일 흥사단에 단우 번호 266번으로 가입하게 된다.> -위키백과.
운영자의 안내 설명
(난파는 첫부인 김상운과 사별 후, 경성보육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
제자인 이대형과 재혼하였습니다. 두 번의 결혼에서 각각 딸을 하나씩 얻었다고 합니다.
현재 등록문화재인 홍난파 가옥은 외손자 홍익표 가족이 돌보며 운영하고 있습니다).
벽난로가 있는 거실
전에는 연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외손녀 홍난표님의 피아노 소리를
가끔 들을 수 있었다는데, 그분도 노쇠하셔서 다른 곳에 계시다고 합니다.
전에 살던 소유주가 거실과 방을 터서 사용했기에 마루바닥 문양이 다릅니다.
출입제한 지역은 전 소유주가 가옥을 넓혀지은 집을 막은 것 같았습니다.
좌측 나무계단으로 반지하층으로 내려갈 수 있어요..
난파선생은 문필에도 뛰어나 글을 잘 썼습니다.
음악 칼럼들 중에서 뽑은 글...
저 창문으로 북악산이 보이고...딜쿠샤와 큰 은행나무도 보입니다..
반지하층의 방
난파의 형인 금파 홍석후는 구한말 (최초?) 양의사였다고 합니다.
홍난파는1933년, 형 금파와 함께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했다구요.. 트리오중 일찍 요절한 조카
홍성유(1908 ~ 1936)는 홍석후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홍영후의 막내동생 민후는 해방 후 30여년간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서 '백중약국'을 경영하며 약사로서
평생 선업을 쌓아 지역민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약사 홍민후는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께는
약값을 받지 않았고, 위중치 않은 환자들께는 '웬만하면 약 먹지 마셔요'로 처방하여 유명하였답니다.
난파는 1910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여, 고학과 아르바이트로 7원 50전이라는 돈을 모아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연습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후, 일본 유학시, 계몽운동가이며 교육자이던
윤치호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바이올린에 관한 서글픈 일화가 있군요.
홍영후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로 승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와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이하 생략) ....윤치호의 일기 中
바이올린이나 첼로등 악기 전공자는 실력이 높아지면 바꾸고 싶은 마음, 바꿔야 되는 게, 정설인데,
그 시절에는 이해가 안됐던 모양입니다. 홍영후는 형을 통해서 알게된 부자 윤치호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모양이구요...
홍영후는 이때 느꼈던 구두쇠 부자에게 제한적으로 받았던 감정을 잊지못해, 훗날 유언까지
남겨, 유족은 생전의 약속대로 연주하던 바이올린과 대표작들의 악보 등, 총 116종 900여점의 유품을
단국대학교에 기증했습니다. 홍난파의 유품 대부분은 단국대가 소장하고 있답니다.
한국의 슈베르트인 홍난파선생은 1941년, 암울하던 시기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긴 옥살이와 병약한 심신에 건강이 나빠져 사경을 헤맬 때, 그는 자신의
부인에게 "얼른 연미복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일이 무리임을 알자,
"자신은 연미복을 입혀 화장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홍난파 부인 이대형(1913년 ~ 2004)여사는 제 대학시절 명동 메트로호텔 부근 골목에
'개선문'이라는 찻집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차를 마시며 그분을 훔쳐보곤 했었지요.
한참후, 없어진 그집 앞쪽 바닥에 홍난파 부인이 운영하던 개선문 자리라는
동판을 본 것 같은데, 지금은 그마저 없어졌습니다.
첫댓글 해외에 나가면, 위대한 예술가들의 생가가 훌륭한 관광지가 되는 것을 볼수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멋진 홍난파선생님의 집이 있네요.
작품설명과 홍난파에대한 부연설명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친애하는 후배님, 감사한 덧글..반가워요~~
홍난파 선생의 유택을 종로구가 사들여 기념관을 만들게끔 도우신 분들께
감사를 표합니다. 위대한 예술가가 생을 마감한 주택을 꼭한번 찾아가
보고 싶어요.상세히 올려준 금지님 고마워요.
그쪽 가는 길이 현재 LG 자이 등 대단지 개발로 좀 복잡하지만, 백범선행의 경교장, 베델의 집터, 딜쿠샤 등
근대문화유산이 많습니다..
예, 언니댁은 문화 가족이니 한번 가보셔요... 주말 및 공휴일은 휴관, 11시~ 17시까지 개관 합니다.
정보를 넣었습니다...
박노수 미술관도
예, 현 종로구청장이 건축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청운동 윤동주문학관(폐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이용)과
아름다운 박노수화백의 옛집도 좋은 문화공간으로 시민들께 돌아왔지요...언니, 찾아가 보시라고 개관 안내 정보를 넣었어요.^^
생생한 고급 정보 감사합니다^^
경교장, 베델의 집터, 달쿠샤...이렇게 돌면 하루 걸리나요?
경교장을 대충만 본다면, 반나절이면 될 것 같습니다.^^
대화는 되겠어요
종로구가 한양 500년 중심이므로 보물단지 맞아요..언니~~
우리나라 문화 수준이 점점 높아감을 실감합니다. 천재 음악가의 자취를 후세가 찾아볼 수 있도록 보존해주어 고마운 마음입니다. 국력이, 경제가 뒷바침되니 문화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 것이 다행입니다. 금지님 좋은 곳 소개해주어 감사합니다.
예, 서울, 지방 할 것 없이 문학관이다, 미술관이다, 연고가 있으면 짓고, 스토리텔링하기에
바쁘지요. 대부분, 깡그리 없애뒀다가 뒤늦게 그터를 되사들이지 못하면, 이웃에 터를 사서 넓다랗게
주차장부터 만들고...그렇게 허허실실한 경우를 참 많이 보게 됩니다. 난파가옥은 그런 점에서 참
안온하게 느껴지더군요...
참 아름다운 집이네요^^
언니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가보고 싶어요.
선혜님,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