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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書日記- 1417년, 근대의 탄생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의 이야기
스티븐 그린블렛 지음
이혜원 옮김(2013년 번역본)
7,8년 전에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을 그야말로 대충 책장 넘기기 식으로 읽었다. 그러나 원문이 라틴어로 쓰여진 시(詩)인 만큼(물론 번역본이지만) 읽기가 너무 어려워서 솔직히 읽었다고 할 수 없다.
루크레티우스(T Lucretius,BC98-BC55)의 이 책은 에피쿠로스학파의 물리학, 우주론, 윤리학을 전해주는 소중한 저서이다.
그러나 원문이 라틴어로 쓰인 시(詩)인 만큼 읽기가 너무 어려워서, 올해 친구 두산(斗山, 金文洙)의 추천으로 스티븐 그린블랫의 『1417년, 근대의 탄생』을 읽게 되었다.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의 이야기라는 부제(副題)와 같이 이 책은 1417년 포조 브라촐리니라는 한 책 사냥꾼이 남부 독일의 한 수도원의 먼지 덮인 서가에서 발견한 옛 필사본 한 권에 대한 것이다.
탁월한 인문주의자였던 포조가 발견, 필사한 이 책이 발견 당시 1,450년 전 쓰였고 그동안 긴 세월에 걸쳐 잊혀 있던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아스의 바로 『사물의 본성』이었다.
그러나 이 필사본은 이후에는 일시적인 관심이 대상조차 되지 못한 채 잠들어 망각된 채 60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서야 스티븐 그린블랫에 의해서 비로소 세상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스티븐 그린블렛의 유려한 문장으로 쓰인 『1417년, 근대의 탄생』은 포조의 일대기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루크레티우스의 책의 내용을 전해 준다. 또한 루크레티우스는 위대한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다시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데카르트가 1641년에 쓴 인식론에 관한 저서 『성찰』의 진짜 제목은 ‘신의 존재와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구별이 증명되는 제1철학에 대한 성찰’이다.
그는 이 책에서 신의 존재를, 둘째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구분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데카르트가 도달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 ‘나’는 생각하는 ‘나’이다.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몸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정신은 물질과 동일하지 않고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람도 있고, 나무도 있고, 동물도 있고, 바위도 있고, 사람들도 갑순이 갑돌이 등 그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모든 것들을 비슷한 것끼리 묶으면 가장 크게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철학자들은 여기에서 실체라는 개념을 생각해낸다. 실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세상의 근원이 되는 것을 말한다. 데카르트에게 이 세상의 실체는 정신과 물질이다.
데카르트는 정신은 생각이라는 성질을 지니고 있고, 물질은 연장이라는 성질을 자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말이 아직 일천해서 철학의 번역에도 어휘가 풍부하지 못하다. ‘연장延長’이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체가 정신과 물질 두 가지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이원론(dualism)이라고 한다.
이원론자들은 심신心身의 문제에 대해 마음과 몸은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구체적으로 별개의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이 이론을 데카르트적 이원론(Cartesian dualism)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는 정신(영혼)과 육체는 모두 물질이라고 규정한다. 그 과학적인 세계관, 무한한 우주에서 무작위로 움직이는 원자들에 기초한 고대의 그들의 세계관은 참으로 탁월하고 놀랍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영혼은 육체와 구분되는가? 영혼은 물질이 아닌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나의 깨달음은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믿는다.
현대에 이르러서 신경과학의 발달로 정신의 많은 부분이 사실은 뇌의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뇌도 몸의 하나이므로 마음과 몸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일원론(monism)이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1994년 미국의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우(Antonio Damasio, 1944-)는 『데카르트의 오류』 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였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규명하여 노벨상을 받은 프란시스 크릭(Francis H. C. Crick, 1916-2004)은 정신이 뇌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놀라운 가설 The Astonishing Hypothesis, 1955』라는 책으로 자신의 학설을 발표하였다.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적 구세주인 에피쿠로스는 에게해에 있는 사모스 섬에서 기원전 342년 태어났다.
기원전 5세기에 데모크리토스에 의해서 탄생한 원자의 개념은 매력적인 추론에 지나지 않았다. 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한 원자는 그것이 나름의 크기, 모양,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어떤 특징도 없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오래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 개념이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유망한 단서로 보였고 이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이끄는 바에 따라서 공부를 계속했다. 서른두 살에 마침내 그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체계를 갖춘 사상으로 정립할 준비를 마쳤고, 그리하여 아테테의 한 정원에서 우주에 관한 포괄적인 설명과 함께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을 구축했다.
에피쿠로스의 설명에 따르면, 원자들은 부단히 움직이며 서로 충돌하고 서로 결합하여 더 큰 물체를 이루기도 한다. 가장 큰 물체라 할 수 있는 해와 달은 물론이고 인간이나 모래알도 마찬가지로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천체도 신성한 존재가 아니고 단순히 자연 질서의 한 부분이며 원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물로서 천체를 구성하는 원자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창조와 파괴의 원리를 따른다.
설령 자연의 질서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복잡하다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구성요소와 보편적인 법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실제로 이런 이해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쾌락의 하나이다.
이런 쾌락이야말로 에피쿠로스 철학이 가진 강력한 영향력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사실 에피쿠로스 철학의 영향을 제대로 음미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그 쾌락이라는 것이 너무나 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에피쿠로스 단언했다. 이 세상에는 원자와 진공이 있을 뿐이다. 오직 원자와 진공,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현대 뿐 아니라 고대에서도 삶을 무겁게 내리 누르는 고통이었다. 에피쿠로스는 가르쳤다. 미신으로부터 해방되면 자유롭게 쾌락을 추구할 수 있다고. 머리가 셋 달린 무시무시한 개가 지키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사후 세계, 그 강 너머 끔찍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을 생각하면 겁나지 않는가? 이 그리스 철학자는 죽음 뿐만이 아니라 삶에 관한 것도 도움을 주고자 했다. 모든 것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소멸한다는 것, 육신 뿐만 아니라 영혼도 소멸한다는 것은 이 모든 고통에 대한 충분한 위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적들은 그가 쾌락의 추구를 긍정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의 방탕함에 대한 악의적인 이야길 꾸며내어 퍼뜨렸다.
사실 이 철학자는 남달리 검소하고 단출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추종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검약을 위해서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쾌락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다.” 그러나 세네카에 따르면, 그곳을 방문했던 여행자들은 보리죽과 물뿐인 지극히 소박한 식사를 대접받았다고 한다.
그는 편지글에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방탕하고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자는 것이 아니라네.”라는 문구를 남기고 있다.
그의 신봉자 중 한 사람인 필로데모스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쾌락으로 이끄는 가장 필수적인 이 욕구들은 대체 무엇인가? 신중하고 공정하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는, 용감하고 온화하고 관대하게 살지 않고는, 벗을 사귀고 인류를 사랑하지 않고는 쾌락을 누리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것이야 말로 에피쿠로스의 정통 추종자의 목소리다.
아무리 쾌락이 절제되고 사려 깊은 언어로 정의되었다 하더라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쾌락이라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적 주장은 큰 충격을 주었다.
쾌락이 최고의 선이라고? 신과 조상들에 대한 경배는 어쩌고? 가족과 도시, 나아가서 국가에 대한 봉사는? 성실하게 법과 명령을 따르는 것은? 덕이나 신을 따르는 것은?
에피쿠로스의 사상에 대립하는 주장들은 하나같이 금욕적인 자기부정, 자기희생, 심지어 자기혐오를 수반했다.
이러한 반 에피쿠로스의 사상에 뒤에는 반쯤 숨겨진 공포가 자리한다.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이 사실은 호소력 있는 목표이며 충분히 인간의 삶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원칙으로 성립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에피쿠로스의 사상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면, 사회를 지탱하는 희생, 야망, 사회적 지위, 규율, 신성함 등으로 대표되는 유서 깊은 다른 원칙들 전체가 그 원칙들이 봉사해온 사회기관들과 함께 거센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쾌락의 추구라는 에피쿠로스의 사상의 핵심을 괴이하고 관능적으로 방종으로 몰고 갔던 것은 바로 그런 도전을 막기 위함이었다.
역사 속의 진짜 에피쿠로스는 아테네에 있는 그의 외딴 정원에서 치즈, 빵, 물로 식사를 해결하며 조용한 삶을 살았다. 사실 그에게 뭔가 정당하게 비난할 만한 것이 있다면 오히려 그의 삶이 ‘지나치게’ 조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테테의 정세에 깊이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경구 중 하나인 다음 문장은 부정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안정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 벽이 없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추종자인 루쿠레티우스가 쓴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시에 따르면,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두려운 죽음에 앞서 더 높은 벽을 쌓아보려는 불안하고 저주받은 시도를 그만두는 것이었다. 벽을 쌓는 대신에 우리는 쾌락이라는 밭을 일구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책들 중에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극히 드물다.
에피쿠로스의 작품도 대부분 소실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사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글을 썼다. 그러나 다른 많은 저작자들의 책과 같이 대부분 기후와 해충 탓으로 파피루스와 양피지는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상태가 악화될 수밖에 없었고 수용성인 잉크(검댕이)는 책에서 사라져 갔으며 가장 무서운 책벌레로 인하여 종국에는 한 줌 재로 변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총 7,400행에 달하는 이 시는 강렬한 서정적 아름다움의 순간, 종교에 관한 철학적 명상, 쾌락, 죽음, 물질계, 인간 사회의 발전, 성의 위험과 즐거움, 그리고 질병의 본질 등에 관한 복잡한 이론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다. 시의 언어는 대체로 까다롭고 어려우며, 구분은 복잡하고, 전채적으로 놀랄 정도로 수준 높은 지적 야망으로 가득하다.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하나의 질병이라면 루쿠레티우스가 가져온 질병에 붙일 수 있는 단순한 병명은 이른바 무신론(atheism)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쟁점이자 대단히 불온한 논쟁의 시발점이 된 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이 물질계였다.
다음의 짧은 목록들은 루쿠레티우스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 그의 주요 주장이다.
*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만들어진다.‘
이들은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서로 충동하고 결합하여 새로운 모양을 이루며, 다시 갈라지고 결합하기를 반복한다.
*물질을 구성하는 기초 입자인 ’사물의 씨앗들‘은 ‘영원하다.(아직 ’원자‘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입자들로 만들어졌으며, 이 입자들은 파괴될 수 없으며 불멸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총 물질량은 언제나 똑 같으며 산 것과 죽은 것 사이의 균형은 언제나 유지된다.
* 기본이 되는 입자들은 그 수는 무한하나 형태와 크기에는 제한이 있다.
사물의 씨앗 중 일부는 더 일반적으로 쉽게 서로 결합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서로 밀쳐내고 저항하는 것도 있다.
*모든 입자는 무한한 진공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무한하다. 고정된 지점은 없으며 시작점도 중간도 종점도 없다. 그러므로 한계도 없다. 한마디로 우주는 물질과 만질 수 없는 비어 있는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
이 세상의 질서와 무질서의 반복은 어떤 신성한 계획의 산물이 아니다. 신의 섭리란 것은 환상일 뿐이다.
* 사물은 일탈(逸脫, swerve)의 결과로 태어난다.일탈은 가장 최소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어느 것이나 이와 같은 미립자들이 불규칙적으로 일으키는 충돌로 인해서 가능한 것이다.
*일탈은 자유의지의 원천이다.
모든 움직임이 하나의 긴 예정된 연쇄작용에 속할 뿐이라면 자유의지가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 만약 정해진 운명을 따른다면, 태고부터 하나의 원인은 또 다른 원인에서 기인된 것이므로 자유의지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 자연은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시작의 순간, 창조라는 신화적인 장면이 연출되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는 식물과 곤충, 더 상위의 포유류와 인간에 이르기까지 전부 길고 복잡한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왔다.
* 우주는 인간을 위해서 혹은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종의 생명체의 운명이 사물이 회전축이 될 수는 없다. 인간 역시 하나의 종으로서 영원하리라고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인간은 물질계에서 벌어지는 훨씬 더 큰 물질 순환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 인간 사회는 평화롭고 풍부하던 황금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원시의 전쟁 속에서 시작되었다.
문명화된 세계의 예술은 하늘의 입법자가 규칙을 제정하여 반포하듯이 인간에게 하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種)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정신적 힘을 공유함으로써 수고롭게 만든 것이다.
* 영혼은 죽는다.
인간의 영혼은 육신과 똑같은 물질로 만들어진다. 혈관과 근육, 신경 등에 흩어져 있어서 우라가 가진 측정 수단으로는 영혼의 무게를 잴 수 없다는 의미일 뿐이다.
* 사후 세계는 없다.이 땅에서의 삶이 인간 존재가 가지고 있는 전부이다.
*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당신이 죽으면, 즉 지금까지 서로 결합되어 있던 당신의 형상을 이루고 당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던 입자들이 흩어져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면,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쾌락도 고통도 염원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 모든 체계화된 종교는 미신적인 망상이다.
이 망상의 근원은 깊게 뿌리박힌 인간의 염원과 공포, 그리고 무지에 있다. 인간은 소유하고 싶은 권력과 아름다움, 완벽한 안전에 대한 이미지를 투영하여 그에 따라 신들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의 꿈의 노예가 되고 만다.
* 종교는 일관되게 잔인하다.
종교는 항상 희망과 사랑을 약속하지만 그 깊은 내부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는 핵심은 잔인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응징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며 어김없이 추종자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한다.
* 천사니, 악마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은 없다.
이런 종류의 비물질적 영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인생 최고의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인생은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국가에의 충성, 신 또는 지배자의 영광, 자기 희생을 통한 고된 덕의 수행 같은 것이 중요하다는 여타의 주장은 모두 부차적인 것을 가장 중요하다고 착각한 것이거나 기만인 것이다.
인간의 자연적 욕구는 사실 단순하다. 쾌락을 증진하고 고통을 경감하는 것, 이처럼 단순한 욕구의 한계를 부인해 보아야 인간이라는 존재는 덧없고 헛된 허우적거림만을 계속하게 될 뿐이다.
*쾌락에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 아니라 망상이다.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주요한 적은 유한한 세계에서 가능한 그 이상을 얻으려는 환상인 과도한 욕망과 삶을 좀먹는 공포이다.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깊은 경이로움을 낳는다.
우주가 원자와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 세상은 창조주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정신적 삶과 육체적 삶도 다름 생명체들과 비교했을 때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 영혼도 육신만큼이나 물질적이며 소멸하는 것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해도 절망에 빠질 이유는 없다.
오히려 사물의 실제 본성을 이해하게 된 것이야말로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길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걸음이다.
인간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인간이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착각하거나 신을 두려워하거나 필멸의 존재를 초월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가치를 위해서 자기자신을 고결하게 희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달랠 수 없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행복한 인생의 주요한 장애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의 수련을 통해서 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
정통 기독교단이 명료하게 기술된 루크레티우스의 무신론을 그냥 넘길 리 없었다. 보다 정확히는 종교재판관의 심문 교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위험천만한 시기에 피렌체 한 쪽에서 한 젊은이가 『사물의 본성』을 조용히 손수 필사를 하고 있었으며 그 손글씨의 주인공은 바로 니콜로 마키아벨리였다.)
포조가 이 책을 발견하여 필사한 후 100여 년이 지난 후인 1516년 피렌체 종교회의에 모인 고위 성직자 집단이 학교에서 루크레티우스를 읽을 것을 엄금했다. 이 금서목록은 1966년에야 폐지되었다.
토머스 모어는 쾌락의 추구라는 이 원칙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매우 급진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남긴 회고록을 읽고, 그를 기려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된 신대륙을 상상하면서 토머스 모어는 베스푸치가 여행 중에 마주친 사람들을 기록한 내용에 주목했다. 베스푸치는 이렇게 썼다. “그들의 삶은 전적으로 쾌락에 기초하고 있었으므로 에피쿠로스주의적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남미의 토착민들에게 가장 위험이 된 유럽인은 사실 이제 내가 너희들의 지배자라고 선언한 침략자가 아니라 그의 옆에서 코를 훌쩍이고 있던 감기 환자였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어쨌든 모어는 유토피아인들이 가지고 있는 에피쿠로스주의에 대한 묘사는 생활 전체를 아우르는 더 큰 맥락에서 읽을 때에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신의 섭리와 사후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루쿠레티우스의 시 전체를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에라스무스와 모어는 기독교 신앙과 에피쿠로스주의를 어떻게 하면 이상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경건한 가톨릭 성인인 모어는 동시에 이 시의 두 기둥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세심하게 그 핵심을 제거한 셈이다.
브루노는 우주의 시공간에 한계가 없다는 것, 규모가 아무리 크고 작든 모든 것은 원자로 구성된다는 것, 그리고 원자야말로 모든 존재의 기본 구성요소이며 바로 그 원자를 통해서 개체와 무한히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고 전율을 느꼈다.
어쩌면 지난 1.0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루쿠레티우스가 쓴 철학적이면서 관능적인 베누스 찬가를 온전히 이해한 최초의 사람은 브루노였을지 모른다. 생성, 파괴, 재생의 끊임없는 과정을 거치는 우주는 본질적으로 성적性的인 것이다.
브루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닌 것처럼 태양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한마디로 말해서 우주에는 중심이라는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브루노는 런던에 머무는 동안 토머스 해리엇을 만났을 것이다. 해리엇이 한 많은 발견은 갈릴레오와 데카르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또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해리엇은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출판하는 날에는 공격이 더욱 거세질 것임을 알았다. 결국 해리엇은 명예보다 목숨을 택했다. 누가 감히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브루노는 목숨보다 명예와 진실을 택했다. 1591년 브루노는 이탈리아로 돌아갔으며 베네치아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다. 그는 8년간의 위협과 고문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1600년 2월 17일, 캄포 데이 피오리 광장에 세워진 화형대에서 브루노는 산 채로 불탔고, 채 타지 않고 남은 뼛조각도 긁어모아 산산이 가루로 만들었다. 화형의 흔적인 뼛가루와 재는 그렇게 흩어졌다. 이제 그 작은 입자들은 브루노가 믿었던 것처럼 즐겁고 위대한 영원한 물질의 순환 속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1989년 이튼 학교의 도서관 사서였던 폴 쿼리는 1363년에 출간된 『사물의 본성』의 사본을 경매에서 250파운드에 낙찰받았다. 여백마다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잔뜩 적혀있고 먼지로 덮힌 메모지의 이 책의 소유주를 찾는 데는 상당히 애를 먹었지만 밝히고 보니 원 소유주는 몽테뉴였던 것이다.
그는 책의 여백에 수많은 주석을 달았았는데, 특히 그는 수차례에 걸쳐 영혼도 물질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런 글귀는 몽테뉴가 시를 읽으면서 정리한 내용이자 그 자체로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에서 끌어낼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결론들이었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도움을 받아 화체설(化體說-축성을 받은 제병祭餠과 포도주가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설)과 현실세계의 물리법칙 사이의 갈등을 미묘한 방법으로 중재하고자 하였다. 인간이 감각으로 경험하는 것은 단지 빵의 우연성에 불과하다. 축성을 통해 받은 제병의 본질은 신인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호전적이고 궁지에 몰린 반종교개혁 성향의 가톨릭 세력에게는 고대 유물론의 부활이 마치 또 하나의 위험한 전선을 구축하는 것처럼 보였다. 교회는 어느 누구도 이 무기에 손을 얹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교회의 사상적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종교재판을 통해서 이 위험한 무기의 영향이 확산되는 그 어떠한 분명한 징후도 놓치지 않고 주의를 기울였다.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의 압력을 받았고 더는 같은 주장을 펼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간신히 빠져 나왔다. 그러나 1632년 갈릴레오는 다시 종교재판소에 고발당했고 종교재판이 소집되었다.
이듬해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오가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이단적 주장을 신봉하는 등 이단으로 의심된다는 준엄한 판결을 내렸고 그는 여생을 집에 연금당한 상태로 보낼 것을 선고받았다. 1982년 이탈리아의 학자 피에트로 레돈디는 종교재판소의 문서 보관소에서 갈릴레오가 원자론을 지지한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자 새로운 과학의 발달과 지적 성찰 능력의 확대, 그리고 이 위대한 시 자체의 매력은 대중화를 시도하려는 욕구를 계속 억누르기에는 너무 커져버렸다.
유럽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매우 어렵기는 했지만 신을 최초에 원자를 창조한 자로 설정함으로써 원자론과 신앙의 병존이 가능해졌다.
아이작 뉴턴은 자신의 책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시 제목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원자론자라고 선언했다.
19세기에 찰스 다윈이 인간이라는 종의 기원을 둘러싼 신비를 풀기 위해서 닻을 올렸을 때, 그는 전적으로 자연스러우며 계획되지 않은 과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생성과 파괴, 끝없이 계속되는 성적 재생산을 굳이 루크레티우스의 시에 표명된 선견지명을 빌려서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실험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는 과학에 기초하여 사고했으며 고대 철학의 추론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자신도 알고 있었고 또 인정했듯이, 고대의 철학적 사색은 현대 원자론을 지지하는 경험적 증거들이 나올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다.
설령 이 한 편의 고대 시가 더 이상은 아무도 읽지 않는 가운데 방치된다고 해도, 이 시를 둘러싸고 벌어진 소실과 복원의 극적인 드라마가 다시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고 해도, 그리고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포조 브라촐리니가 거의 완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밀려난다고 해도, 이제 이 모든 것은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현대 사상의 주류로 흡수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1820년 일흔일곱 살의 전직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인 여든다섯 살의 존 애덤스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물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다른 존재도 있는 것이지요. 나는 그것들을 ‘물질(matter)’라고 부릅니다. 또한 나는 그것들이 장소를 바꾸며 움직이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이것이 ‘운동(motion)’이지요. 그리고 그런 물질이 없는 곳은 ‘진공(void), 무(nothing), 또는 비물질적 공간(immaterial space)’이라고 부릅니다. 물질과 운동으로부터 받는 감각에 기초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고 필요로 하는 모든 확실성들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겠지요.
이것이야말로 루크레티우스가 독자들에게 가장 심어주고자 했던 점이다. 한 번은 한 서신 상대자가 제퍼슨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 제퍼슨은 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에피쿠로스주의자입니다.”
끝.
첫댓글 어렵고 긴 글 두 번 앍었는데 아직도 모르겠다.
한 번 더 읽어 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