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의 도리인 대승불교의 가르침 속에서 깨달음을 이루었건만 너는 어찌해서 아직도 고통의 세계를 헤매고 다니는가. ♧18♧
그런데 문제는 동상(同相)쪽이 아니라 이상(異相)쪽에 있다는 것이다. 부처와 차별이 없다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런 도깨비 같은 몰골을 한 채 삼계를 떠돌아다니는 유랑자 신세의 부평초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확실히 짚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들 앞에서 주장자만 들었다 하면
ㅡ너가 부처야. 부처와 너는 둘이 아냐. 아침마다 너는 부처와 함께 일어나고 밤마다 부처와 함께 잠자리에 든단 말이야ㅡ
고 한다. 이런 동상(同相)의 법문 때문에 근기가 얕은 중생들은 그들의 간만 어설프게 부풀리어져 있게 된 것이다.
''어떻게 왔어?'' ''오고 감이 어디 있습니까?'' ''뭐 이런 거랑말코 같은 놈이 다 있냐.''
이렇게 주워들은 동상(同相) 이야기로 이제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이 부처 흉내를 내기에 이르른다. 참 가당찮은 일이다. 꼭 원숭이가 두 팔을 가졌다고 해서 자기도 인간이라고 설쳐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복덕과 지혜가 없는 중생들을 상대로 법문할 때는 동상(同相)보다 이상(異相)의 상태를 중점적으로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ㅡ너희들은 정말 골치 아픈 중생이다ㅡ
는 사실을 무엇보다 확실히 밝혀 주어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의 마음은 억겁동안 삼독으로 인하여 아주 심하게 혼탁되어져 왔기에 그런 것이다. 그 결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보지 못하고 물에 집어넣은 막대기처럼 심하게 굴절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기신론에서 아주 명확하게 잘 언급해 주고 있다.
따라서 중생은 반드시 더 배워야 하고 더 닦아야 하며 더 복덕을 쌓아야만이 자신 속에 숨겨져 있는 동상의 세계가 열린다는 취지로 취향해 나아가는 설법을 해 주어야 하는데도 맨 날
ㅡ너가 부처야ㅡ
라는 소리만 책임 없이 반복해 주다 보니 선근이 없는 중생들은 천지를 모르고 교만해져서 결국 말장난에 빠져드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부처와 중생이 어디 있습니까. 다 마음의 장난이지.'' ''이리 와 봐.'' ''아얏! 왜 폭력을 쓰십니까?'' ''아프고 안 아프고 어디 있냐. 짜석아.''
잘 못하다가는 이처럼 언어는 부처인 동상(同相) 쪽에서 하고 몸은 중생인 이상(異相) 쪽에 머물러 있는 이상야릇한 불자가 되어 버릴 수 있다.
슬프게도 이렇게 그저 소득 없는 말장난만을 즐기는 부류의 사람들이 꼭 쌀밥에 모래알처럼 구석구석에 끼어 있어서 자기는 물론 타인의 신심까지도 떨어뜨리고 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들은 아주 비겁하게 말장난을 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때와 장소에 따라 백팔십도로 말을 뒤엎어 버린다.
자기의 처지가 좀 불리하다 싶으면 동상에서 이상으로 왔다 갔다 하고 좀 유리하다 싶으면 이상에서 동상으로 순식간에 오르고 내리며 말 타기를 즐기고 있기에 그렇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幾人道道 空門裏 汝何長輪 苦趣中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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