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 없는 자의 끈질긴 기도
누가복음 11:5~13
찬송가 441장(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본 후에 자기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을 때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하여서는 주 기도문을 알려주시었고, 그 다음 이어서 기도의 자세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려고 든 비유를 보면, 한밤중에 친구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친구를 맞은 사람은 집에 빵이 없었기 때문에 한 동네에 사는 친구 집에 가서 빵을 급하게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밤중이라서 집안 식구들은 다 자리에 누운 지 오래이고 온 식구가 한 방에서 자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웃 친구가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빵을 좀 빌려달라고 청하면 사실 잠자던 온 식구가 다 깨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빵을 챙겨주려면, 잠을 자던 친구집 식구들은 여간 번잡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벗었던 겉옷을 다시 입어야 하고, 방에 불을 켜야 하고, 자는 사람들 깨어나게 되고, 여주인도 부엌에 가서 빵을 챙기려고 부엌 찬장도 여닫고 빵을 건네줄 바구니도 챙겨야 합니다. 그러니 이런 일들을 하게 만드는 친구의 방문과 빵을 좀 달라고 청하는 것은 사실 잠자던 친구 집에 큰 부담을 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한밤중에 자기 집에 친구가 찾아왔다고 한 동네의 다른 친구 집에 가서 빵 종 빌려달라고 청하는 사람은 여간 뻔뻔스러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그 사람의 행위를 기도의 자세로 추천하고 있습니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주님은 그 친구가 ‘친구’라서 빵을 준 것이 아니고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줄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와서 빵 세 덩이만 꾸어달라고 계속하여 문을 두드리면서 청한 그 염치 없는 사람처럼 주의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 찾아와서 염치 불구하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그 요구대로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원문에서 ‘간청함을 인하여’라는 말을 살펴보면, 헬라어로 ‘아나이데이아’로서, ‘부끄러움이 없이’라는 뜻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나데이아’는 “뻔뻔스러움, 파렴치함, 고집, 오만불손함” 등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뻔뻔한 기도를 드린 사람, 부끄러움 없이 드린 간구의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을 구하려고 하나님께 소돔 성에 있는 의인의 숫자가 50명만 있으면 용서해달라고 청하기 시작했다가 무려 10명에까지 내려가기까지 창피함 모르고 간절히 매달리고 매달렸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 성에 의인 열 명도 없어서 그 성은 멸망하되 하나님은 그렇게까지 끈질기게 자기 조카 롯을 구원하려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기억하시고 롯의 가족은 건져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방 지역인 시돈과 두로에 가셨을 때에 그곳에 살고 있던 한 가나안 여인이 귀신들린 자기 딸을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간구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달려나와서 그 앞에서 떠나지 않고 물러섬 없이 계속 매달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개라고 비유하면서 그 여인의 간구의 진정성을 모욕적으로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굴하지 않고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모든 창피함을 다 팽개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처럼 염치를 다 내려놓고 끈질기게 기도한 결과 마침내 주님께서 그녀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셔서 그 날 멀쩡해졌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그의 백성들이 사람이 보기에 염치가 없을 만큼 뻔뻔스럽게 하나님께 매달려 간구하는 것이 좋은 기도의 자세라고 추천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에게 향하여 그처럼 매달리면 뻔뻔하고 창피하게 보이는 일이고 체면이 깎이는 모습일테지만 하나님께 나와 그처럼 뻔뻔하리만큼 대담하고 물러섬 없이 매달려 구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한 기도가 도리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뻔뻔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터무니 없이 큰 요구마저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높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자비하시기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인에게까지조차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끈질기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드높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을 다 마치고 돌아와 부하들에게 수고한 대로 상을 내리는 중에, 각 부하들이 청하는 대로 상을 베풀어주었답니다. 부하들은 각자 자기의 수고한 만큼 상을 구하는데 어떤 부하는 자기가 행한 것보다 터무니 없이 큰 보상을 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다른 신하들은 화가 나서 그 부하를 비난하였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그 부하들 앞에서 그 신하가 이만큼 자기가 통 크게 베풀어줄 것을 믿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그 신하가 요구한 크나큰 상을 다 그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늘 소소한 기도를 드리며 감사하며 자족하는 것 역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자비와 사랑과 자기 백성에 대한 한량없으신 선하심을 믿고서 염치 없이 뻔뻔하고 대담하게 하나님께 은혜와 상을 간구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시고 넘치도록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성경의 예를 들면 구약 시대에 유다 지파의 족장 갈렙이 드빌 곧 기럇 세벨을 쳐서 점령하는 자에게는 자기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고 하였더니 그의 조카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함으로 갈렙이 자기 딸 악사를 옷니엘에게 시집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악사는 자기 남편과 함께 시집 가면서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는 동시에 더 좋은 선물을 구하였습니다. 시집 가던 중에 나귀에서 내려서 아버지 갈렙에게 가까이 가자 아버지가 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그러자 갈렙은 그 딸과 사위를 위하여 윗샘과 아랫샘까지 더해주었습니다. 딸은 친정 부모님에게 주고 싶은 도둑이라고 하는 말대로 갈렙은 자기 딸이 밭도 구할 뿐 아니라 샘물까지 구하니까 윗 샘 아랫 샘까지 더해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갈렙이 시집 보내는 자기 딸 악사를 위하여 딸이 구하는 것보다 더 좋고 많은 것을 더해주는 것처럼,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도 더 선하고 더 능력이 많고 더 자비로우시기에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들보다 훨씬 더 좋고 더 풍성한 것으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구한 것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구한 것을 주시면 우리에게 해가 될까봐 안 주신 것이거나 가장 좋은 때까지 주시기를 미뤄두시는 것일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강청하여 구하는 것을 조금도 싫어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구한 것을 주시지 않는 것조차 그 기도에 대한 가장 좋은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이제부터 주님께서 추천해주신 그 간청하는 기도의 자세, 원문 그대로 하면 염치 없이 뻔뻔스럽게 끈질기게 기도하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함으로 인하여 좋으신 하늘 아버지로부터 구하는 모든 것에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