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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비 혁명과 외경, 위경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52년 17세의 나이에 9세인 동생과 결혼하여 이집트의 왕이 됩니다. 당시 로마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권력싸움이 있었는데 폼페이우스가 권력싸움에 밀리면서 이집트로 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집트는 로마의 정쟁에 휘말리게 되지요. 로마에 반감을 품은 이집트인들은 폼페이우스를 살해하였고, 뒤쫓아온 카이사르도 민중의 습격을 받아 간신히 왕궁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때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젊음을 무기로 삼아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용하게 됩니다. 그녀는 나체로 자신을 포장하여 어둠을 틈타 카이사르의 방으로 갑니다. 당시 53세의 카이사르가 22세의 클레오파트라의 젊음에 포로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두 사람은 서로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를 복위시킨 대가로 돈을 요구했고 클레오파트라는 권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초기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했고 한때 이집트 땅이었던 남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포함해 가능한 한 많은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시키려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이를 출산하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개선한 후 클레오파트라와 자신의 아이를 불러와 로마에서 함께 살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클레오파트라도 이집트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에 로마의 새로운 실력자가 된 안토니우스를 유혹하여 다시 로마를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로마의 통치자가 되겠다는 망상을 갖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페르시아 공격 중 사람을 보내 클레오파트라를 불렀습니다. 이미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장교로서 이집트에 왔던 안토니우스를 14세 때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부름을 자신에게 온 2번째 기회로 여겨 기뻐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완전히 매혹 당했고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바람기 많고 경박한 성품을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는 바람에 야망은 물거품이 됩니다. 실의에 빠진 클레오파트라는 독사로 하여금 가슴을 물게 하여 39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1) 마카비 혁명의 발단
안티오쿠스 4세의 탄압이 극심할 때, 격렬한 저항과 순교를 당하지는 않더라도 보이지 않게 율법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스몬가의 연로한 제사장 마타티아스(Mattathias)가 있었습니다. 당시 안티오쿠스 4세는 마타티아스가 사는 모디인(Modiin)에 사신을 보내 제우스신을 위한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당연히 마타디아는 안티오쿠스 4세의 명령을 거부하지요. 마침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다른 유대인 제사장 한 명이 제단 앞으로 가서 마타티아스 대신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 순간 마타티아스는 그 제사장과 안티오쿠스 4세가 보낸 사신을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5명의 아들들과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사막의 동굴에 숨게 됩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군인들을 보내 마타티아스를 추격하다가 마침 다른 동굴에 숨어있던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1,000명을 죽어버립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하시딤들은 마타티아스와 손을 잡고 안티오쿠스 4세에게 대항하게 됩니다.
마타티아스는 안식일에는 움직이지 못하는 율법을 깨도 낮에는 은둔하다가 밤에 공격을 감행하게 됩니다. 스스로를 아마도 유대 땅을 정화하는 사람들로 인식한 것 같습니다. 헬라와 친숙한 유대 관리들을 내쫓고 율법을 권장하는 사람들을 대신 세웠으며, 할례를 권장했습니다. 1년간 홍길동 같은 무력 항쟁팀을 꾸려가던 마타디아는 갑자기 죽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율법에 대해 열심을 보일 것이며, 역사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상기하여라.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한 자손은 누구도 쇠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용기를 잃지 말고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 그리고 ‘망치질 하는 자’라는 뜻의 ‘마카비’라는 별명을 가진 셋째 아들 유다가 후계자가 됩니다.
2) 유다 마카비, 요나단, 시몬
마카비의 지휘 아래 안티오쿠스 4세와 전투를 치룰 때 마카비 혁명의 가담자들이 주로 사용한 방법은 게릴라 전법이었습니다.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에게 익숙한 유대 지형을 잘 활용하였으며, 이 전법에 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한 안티오쿠스 4세는 매 전투마다 패하게 됩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파르티아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출정하면서, 리시아스 장군에게 46,000명의 보병과 7,000기의 기병을 보내 유대의 반란군을 진압하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다 마카비는 3,000명의 군대로 급습하여 리시아스 장군의 군대를 물리칩니다. 그리고 리시아스 군대를 따라와 유대사람들을 노예로 팔기 위해 함께 온 노예상인들을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파르티아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출정했던 안티오쿠스 4세도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리시아스 장군은 유다의 마카비와 협상을 하게 됩니다. 이 협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청결하게 회복하고 유대인은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3년간의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가 끝나고 성전이 회복되자 유대인들은 이 날을 기념하여 수전절이라고 불렀으며, 오늘날의 ‘하누카’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시딤은 자신들이 원했던 목표를 이루자 마카비 군대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유대 마카비는 실질적인 독립을 위해 지속적인 투쟁을 계속합니다.
마카비가 죽자 마카비의 막내동생인 요나단이 유대인들의 지도자가 됩니다. 유다의 마카비가 용맹, 무력, 전략, 결단력으로 정복을 이룬 반면 요나단은 외교술로 정권을 유지합니다. 요나단의 외교술에 셀류커스 왕조는 요나단을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여 유대의 자치를 어느 정도 허용합니다. 사실 셀류커스 왕조는 복잡한 상황으로 유대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요나단이 로마와 스파르타를 상대로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자 주전 143년 셀루커스의 한 장군에게 살해당합니다. 요나단이 죽자 마타티아스의 아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둘째 아들 시몬이 대제사장직과 유대 지배권을 물려받습니다. 그리고 셀류커스 왕조는 유대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선언합니다. 시몬은 헬라파와 하시딤, 마카비파의 통합을 이루었으며 유대인들도 시몬에게 절대군주의 지위를 허락하였지만, 여리고 요새를 시찰하던 중 사위 프톨레미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시몬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대제사장직을 승계하였습니다.
3) 사두개파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로 인해 마카비와 하시딤이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두 집단은 하나의 거대한 적과 싸우기 위해 맺은 일시적인 동맹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요나단이 통치하던 시대에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이 뜻을 달리 하면서 세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이들이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중간계층의 사람들이라면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유한 귀족층과 세력을 가진 권력층과 제사장급의 사람들이었습니다. B.C. 2세기경부터 A.D. 66-70년 전쟁 때까지 계속해서 존재했던 유대주의의 한 집단이며, 돈 많은 상인, 정부 관리인, 기타 특수계층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으로 이들은 종교단체라기보다는 사회적 고위층들의 사교모임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사두개파의 이름의 유래는 솔로몬 왕의 제사장이던 사독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견해와 ‘의로운’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차도크’에서 파생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로마의 속국이었던 유대의 자치중앙사법기구 산헤드린의 회원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헤롯궁이나 로마에서 파견된 집정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헬레니즘을 숭상하면서, 로마제국과도 결탁하고 있었기에 유대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사두개인들이 로마 권력의 비호 아래 정치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선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구약의 예언서를 거부하고 오직 모세오경의 권위만 인정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천사와 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영혼불멸과 섭리, 장로들의 전통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메시아의 기대는 찾아볼 수 없었지요. 이들의 주된 본거지는 성전이었으며, 대제사장의 지위가 이들에게만 전수되었기에 권력은 이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예루살렘 귀족 일가 외에는 아무도 사두개파가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할 때 사두개파도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4) 바리새파
유대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종파는 바리새파입니다. 바리새파가 언제부터 있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요한 힐카누스 1세 시대(기원전 2세기 후반)에 이미 바리새인들이 영향력 있는 집단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대중에게 어찌나 크게 미치는지 그들이 왕이나 대제사장을 거슬러 말해도 즉시 옳다는 인정을 받는다.” 신약성경에 바리새인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바리새파의 기원과 효시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지 바리새라는 이름은 ‘구별되다, 분리하다’의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주전 164년 예루살렘이 재봉헌될 때까지 유대 마카비를 지원했다가 종교적 자유를 얻자 곧 마카비와 결별을 선언한 이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하시딤이 이들의 선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전통을 고수하지만 이들이 지닌 교리중의 일부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메시아 왕국을 기대한다든지, 사후에 생명이 있다는 생각과 마귀와 천사의 이중성 등이 바로 이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하는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구역성경과 구전법을 포함한 모든 책 즉 오늘날 구약성경의 대부분을 인정했습니다. 성경과 구전의 내용들을 다 지켰으며 부림절과 하누카 절기를 지켰습니다. 율법을 연구하던 서기관들과 학자들을 포함하여 대중으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았지만 정치적인 힘은 가지지 못한 경건한 서민이었습니다. 이들은 소수였고, 정치적인 종파도 아니었지만, 이들은 일반 대중을 대하는 태도가 오만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두개파에 대한 정치적 비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주의가 발전하게 된 배경에는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율법주의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귀환한 유대인들은 성전 제사가 확장되면서 율법교육이 강조되었는데 에스라, 느헤미야 등의 지도하에 전통적인 율법이 연구되고 적용되면서 바리새인들에게 잘 표현되었습니다. 둘째, 국가주의입니다. 바벨론 포로 당시 유대인들은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면서 서로가 끈끈히 뭉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정서가 귀환 이후에도 민족 동질성과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게 하였고, 함께 한 군사행동으로 인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바리새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 하시딤의 출현입니다. 하시딤들은 종교가 세속화되고, 헬라의 영향을 받는 것에 대해 경악하면서 그에 대항하는 더욱 경건한 유대교주의자들이 필요했는데 이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복장을 다른 분파들과 구분하였습니다. 그들이 차는 경문을 넓게 하여 옷술을 크게 하였고, 쉐마를 이마에 두르고 손목에 메고 다녔습니다. 이런 복장으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쉽게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성경에 대한 견해가 달랐으며 기득권과 그 권력에 대항하고 있었기에 이 두 집단은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5) 에세네파와 묵시문학
에세네파와 바리새파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하시딤의 신앙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집단의 차이점은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이 집행하는 성전예배를 인정하며 합당한 종교유산으로 간주한 반면 에세네파는 사두개인과 성전을 부정하고 수도원적인 공동체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에세네파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이 유대교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성전보다 율법의 준수가 더욱 본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에세네파 사람들에게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사두개파의 통치를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유대의 세속 정치와 대중들로부터 분리를 하게 됩니다. 그들은 사해 주변의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으며, 장로들의 자치적인 지도하에 생활했습니다. 사유재산이 아닌 공동재산 개념을 가지고 예배와 독서 공동식사를 중요한 행사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세례 요한과 그 제자들처럼 요단강 근처 동굴에 거주하면서 묵시문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켰습니다. 후에 이들은 유대독립전쟁중에 로마 군에 의해 전멸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대표적 업적은 성경의 사본을 많이 남겼다는 것입니다.
에세네파의 대표문서라고 할 수 있는 사해사본의 특징은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초기 문서들에는 ‘의의 교사’의 개념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후기 문서에서는 이 명칭이 등장하지 않게 됩니다. 둘째, 대부분의 문서들은 위경에 속합니다. 제작되는 문서들의 권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위대한 성경 인물들의 이름으로 문서가 제작됩니다. 이는 하시딤의 문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셋째, 쿰란 사본들은 대부분 묵시문학에 속하게 되는데, 묵시문학이란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숨겨졌으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암호와 같은 문서를 말합니다. 유대의 묵시문학은 신구약 중간기에 생겨났는데 그 이유는 지속되는 박해와 암담한 현실에 그 영향이 있습니다. 묵시문학의 메시지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이 고통스럽고 죄 많은 세상에서 시야를 돌려,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목표를 향하게 합니다. 또한 다가올 메시아 시대는 낙원의 축복을 동반하고 대심판의 날은 악인의 파멸과 의인의 승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6) 젤롯당(열심당)
하시딤의 영향을 받은 집단 중에 젤롯당이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들이 산적이나 도적들로 간주하며 주후 6년 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지만, D. S. 러셀은 지배민족에 대항하는 독립군으로 묘사하며 로마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들은 로마에 대한 항거가 특히 과격하고 정치적이기 때문에 매우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본래는 깊은 종교심과 애국적 마음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젤롯당은 율법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들이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주, 임금’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통치자이며 주님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칼을 차고 다니며 지나다니는 로마 군인을 죽이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축제기간이나 사람들이 많은 틈을 타 칼을 옷 속에 숨기고 있다가 살해했습니다. 그 후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분개하며 자신의 행동을 숨기는 수법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로마제국에 협조하는 대제사장들도 이들의 공격대상이었습니다. 이들은 고통을 하찮게 여겼으며,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가족과 친구들이 고통을 당해도 결코 타협하거나 협상하지 않았습니다. 늘 지배계급인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과 대립하였으며 로마 제국의 수탈과 폭력에 시달리던 민중들에게는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7) 신구약 중간기의 문서들
외경 :
유대인에게 히브리어 정경은 토라, 느비임, 케투빔으로 구분됩니다. 토라는 모세 오경을 의미하며 느비임은 예언서, 케투빔은 성문서들을 의미하지요. 이것은 24권으로 되어 있는데, 표준역에 의하면 39권이 됩니다. 이렇게 구분된 정경은 부정한 손으로 만져서도 안 될 책으로 인정하며 권위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의 정경화에서 크게 두 학파간의 의견충돌이 일어납니다. 그 학파는 힐렐학파와 샤마이 학파인데요. 아가서와 전도서를 두고 견해차이를 보입니다. 결국 주후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힐렐학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아가서와 전도서를 정경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약과 구약 사이에도 많은 기록물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기록된 문서들이 외경과 위경, 사해 두루마리 사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외경은 본래 히브리어 성경 외에 따로 첨가된 자료들이라는 의미로 개신교인들이 부르는 명칭입니다. 본래의 의미는 ‘감추어진’이라는 뜻입니다. 가톨릭은 개신교의 정경 이외에 구약에 7권의 외경을 더해서 46권을 정경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앞에서 70인역에 대해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처음에는 모세 오경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200년에 걸쳐 39권의 성경 모두를 번역하게 되었고, 거기에 후대의 외경 15권이 더 번역되었고, 그 성경이 70인역으로 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경전의 범위를 어디까지 포함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시작되었고, 주후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정경이 결정 된 것입니다. 이 회의에서 아가서와 전도서는 정경에 포함되었지만, 포함되지 않은 문서들이 15권 있습니다. 그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 에스드라(The First Book of Esdras)
이 책은 에스라, 느헤미야와 역대하 정경과 동일한 역사적 소재를 담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에는 들어 있지 않은 광범위한 부분(3:1∼5:6)이 수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대체로 전설적인 이야기로 참 지혜를 확증하기 위해 다리오 왕정에서 세 사람의 유대인 시동(侍童)이 벌이는 경연으로 되어 있으며 스룹바벨이 승리자였다. 그는 상으로서 유대인의 송환과 예루살렘 재건을 왕명으로 허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책은 BC 100년경에 기록되었다.
제2 에스드라(The Second Book of Esdras)
이 책은 AD 100년경에 완성된 몇 편의 예언적 성격을 띤 묵식자품이다. 1∼2장은 유대인 에스라의 묵시 원문인 3∼14장에 첨가되는 반유대적인 부분이다. 3∼15장까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살랫디엘 묵시 : 3∼10장은 악의 문제와 이것의 내세에서의 해결을 취급하고 있다. ② 독수리 환상 : 11∼12장은 로마제국과 메시야 도래를 취급하고 있다. ③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인간(메시야)의 환상 : 13장, ④ 에스라가 어떻게 성문학을 재기록하였느나를 설명하는 전설 : 14장. ⑤ 마지막 15∼16장은 신약과의 어구적인 일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다소 뒤늦게 기록한 것으로 AD 270년으로 추정된다.
토비트(Tobit)
이 이야기는 BC 150년경에 기록된 종교소설이다. 이것은 앗수르에 이주되어 살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 토비트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토비트는 앗수르 치하에서 살해된 자기 동족을 격식을 갖추어 장사지내다가 사고로 눈이 멀게 된다. 비통 중에도 토비트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 토비아스를 보내서 가바엘이라는 친척에게 예치해 둔 돈 전부를 찾아오게 한다. 천사 라파엘이 믿을 만한 친족으로 가장하여 토비아스와 함께 간다. 그것은 눈 먼 토비트의 기도에 응답해 줄 뿐만 아니라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과 에드나의 딸 사라를 도와 주기 위해서였다. 악신 아스모데오의 시기로, 사라와 결혼했던 일곱 남편이 모두 결혼 첫날 밤에 차례로 살해되었던 것이다. 토비아스는 티크리스강가에서 야영을 하다가 물고기 염통과 간을 태워서 악신을 쫓아버리고는 사라와 결혼한다. 라파엘은 그 사이에 가바엘에게 달려가서 돈을 찾고, 니느웨에 있는 토비트와 그의 처 안나에게로 토비아스와 갓 결혼한 아내를 인도하여 돌아온다. 토비아스의 여행이 오래 지체됨으로 그들은 비통에 잠기게 되었으나 사랑하는 아들과 그의 신부를 맞이하여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 돈으로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라파엘의 지시대로 토비아스가 연로한 아버지의 눈에 물고기의 쓸개를 얹어 놓음으로써 토비트는 시력을 회복한다. 천사 라파엘은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사라진다.
유딧(Judith)
교훈적인 가치가 있는 소설적인 이야기로 BC 2세기에 기록되었다. 유딧은 용모가 아름답고 경건한 유대인으로 베툴리아(세겜의 가명)의 과부이다. 유딧의 용기는 홀로페르네스 휘하 느부갓네살 침략군으로부터 그녀가 속한 도시를 구해낸다. 그 도시의 장로들이 5일 이내로 아무런 도움도 오지 않으면 항복하기로 결정하자, 유딧은 당당하게 그 도시를 떠나 홀로페르네스 진영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미모와 언약을 통하여 장군을 현혹하였으며 마침내 그의 머리를 잘라, 자루에 담아 가지고 베툴리아로 돌아온다. 이 결과 그 도시의 수비대는 진격하게 되고 홀로페르네스의 대군은 잇따른 혼란 속에서 도망하다 파멸된다는 이야기이다.
에스더 부록(The Addititions to the Esther)
이것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본문 가운데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야기속에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 준다. 70인역에서는 정경 에스더서에 삽입되었다.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모르드개의 꿈과 그가 왕에 대한 모반을 사전에 막는 이야기. 히브리 정경 제1장의 앞에 17절이 포함디어 있다. ② 왕국의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라는 왕의 조서. 이 부분은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는 왕의 조서. 이 부분은 히브리 본문 3:13에 이어진다. ③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기도. 히브리 정경 4장에 이어진다. ④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을 극적으로 알현함. 5장에 8절이 추가된다. ⑤ 하만의 처형과 유대인을 칭송하고 자위적 방비를 허락하는 왕의 조서. 정경 8:12에 이어진다. ⑥ 모르드개의 꿈 해석과 부림절의 의미에 대한 끝맺음말. 이 부분은 히브리 정경 에스더의 마지막 장에 이어진다
지혜서(The Wisdom of Solomon)
이 책은 매우 매력적이고 흥미있는 외경서 가운데 하나로 BC 50년경에 기록되었다. 첫부분(1:1∼6:8)은 '종말서'라고 불리는데,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비교함으로써 비도덕성의 진상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부분(6:9∼11:1)은 솔로몬의 입에서 나오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지혜의 찬사이다. 셋째부분(11:2∼19:22)은 앞 부분들보다는 못한데, 이 부분은 애굽과 광야의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회고하면서 우상숭배(13∼15장)의 기원과 악함을 거론하며 끝맺는다. 복합적인 이책은 기록자 불명이다.
집회서(Ecclesiasticus, or the Wisdom of Jesus the Son of Sirach)
51장으로 된 이 책은 히브리 지혜문서에 속한다. 이것은 외경 가운데 저자가 알려진 유일한 책이다. 저자는 예루살렘 시락의 아들 예수(50:27)로 BC 175년경에 기록하였다. 그의 손자는 BC 132년 히브리 원문을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집회서의 전통적인 라틴어 명칭은 외경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교회서' 임을 보여 주며 '금언'이 지닌 높은 도덕성과 영적인 성격으로 초기시대 이래 그리스도인들에게 널리 호평을 받았다.
바룩(Baruch)
예레미야의 서기 바룩이 바벨론에서 기록한 것으로 공언되는 작품이다. 전반부(1:1∼3:8)는 산문체로, 후반부(3:9∼5:9)는 시가체로 기록되었으며,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및 기타 예언서와 흡사하다. 이 책은 포로시대 유대인들의 기도와 신앙고백을 담고 있으며 회복의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편지(The Letter of Jeremiah)
이 작품은 대개 예레미야가 BC 597년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바빌로니아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라고 추측하지만, 이 글은 편지가 아니며 예레미야가 쓰지도 않았다. 이 글의 내용은 거짓 신들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는 〈예레미야〉의 한 구절(10:11)을 중심으로 우상숭배에 대한 반론을 전개한 것이다. BC 300년경 바빌로니아에 살던 유대인이 쓴 것으로 추측되는 이 글은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충절을 위협한다고 강렬한 어조로 주장한다.
아자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노래 (The Prayer of Azariah and the Three Young Men)
정경 다니엘서에 추가되는 이 외경은 풀무불 이야기(단 3:23) 다음에 삽입되었다. 이 책은 아자리아의 감동적인 기도, 기적적인 구원의 기사와 세 젊은이가 합창으로 드리는 찬양시로 되어 있다.
수산나(Susanna)
정경 다니엘서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외경으로, 정숙한 바벨론 부인 수산나가 어린 소년 다니엘의 지혜로 어떻게 조작된 간음혐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헬라어 역본에서는 제1장 앞에, 라틴어 불가타역에서는 제13장에 기록되어 있다.
벨과 용(Bel and the Dragon)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우상숭배를 조롱할 의도로 기록되었다. 이 책은 다니엘서의 세 번째 추가 외경을 형성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상 벨 신상은 살아 있는 신이어서 매일 밤 그 곁에 차려진 엄청난 양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고 생각되었다. 다니엘은 신전 바닥에 재를 흩뿌려 놓아서 제물을 정작 먹어 없애는 것은 벨신 제사장이라고 왕에게 증언한다. 그 즉시 왕은 벨 신상을 파괴하며 그 제사장들을 처형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바벨론에서 숭배되는 용의 이야기다. 용에게 경배하라고 소환된 다니엘은 역청과 머리털과 비계를 섞어 용에게 먹임으로써 용의 숭배를 타파시킨다. 격노한 백성들은 사자굴 속에 다니엘을 던져 넣으라고 왕에게 강요한다. 이 속에서 그는 유다에서 추수꾼들에게 음식을 가져가는 길에 천사에 의해서 머리털을 휘어잡혀 바벨론으로 옮겨진 예언자 하박국의 도움으로 엿새 동안을 먹고 지내게 된다. 7일째 되는 날 왕은 다니엘을 건져내고 그를 해치려던 자들을 굶주린 사자굴에 집어넣는다.
므낫세의 기도(The Preyer of Manasseh)
이것은 의도적으로 기록된 므낫세의 참회기도다. 그는 유다의 사악한 왕으로 앗수르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었다. 대하 33:19 이하에 삽입되었으며, 대체로 BC 1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마카베오 상(The First Book of Maccabees)
수준 높은 역사, 문학작품. 이 책은 134년 모데인반란(BC 167년)에서 시므온 마카베오의 살해(BC 134년)까지 마카베오 일가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그 후임자에 맞서 싸우는 모데인의 마타티아스 아들들, 즉 유다, 요나단, 요한, 엘르아살과 시므온의 전율어린 용솟음치는 애국심이 전편에 흐르고 있다.
마카베오 하(The Second Book of Maccabees)
이 책은 부분적으로 마카베오상과 동시대(BC 175-160년)의 기록이나, 역사적인 가치면에서는 그것보다 떨어진다. 그리스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저항운동이 다소 신화적인 찬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구레네 사람 야손의 작품을 요약한 이야기라고 하나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헬라 문화권에 속하여 70인역 성경에 익숙했던 로마교회와 유럽의 교회들은 얌니아 회의의 결정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모든 로마교회와 유럽교회가 모두 외경을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던 중 주후 390년 로마교회(가톨릭)은 70인역을 라틴어로 번역하게 되었고, 후기문서들인 15권은 외경이라는 이름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외경을 평가하기를 정경과 동등하지는 않으나 읽으면 교회에 유익한 책이라는 해설을 붙였습니다. 이 라틴어 성경을 ‘불가타 성경’이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번역했던 제롬은 종교개혁 당시에도 가장 권위있는 성경으로 가톨릭 예배의 경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30년 정도 지난 1546년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가톨릭교회가 후기 15개 문서 가운데 11개의 문서를 제 2경전으로 승격시켰고 구약성경에 포함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을 39개의 문서로 하는 것은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며 이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여준다는 이유였습니다. 이것이 현재 가톨릭교회의 정경이 되었습니다. 이와 달리 개신교는 1517년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라틴어 번역본인 불가타 성경대신 팔레스타인에서 사용했던 히브리어 성경으로 번역하다보니 외경 부분은 빠지게 되었습니다.
위경 :
위경은 ‘거짓이름으로 기록된’이란 의미로 외경보다 훨씬 범위가 넓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도 일치된 견해를 내어 놓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대략 17개의 문헌이 존재합니다. 위경은 신구약 중간기와 주후 1세기에 기록된 문서들을 말합니다. '위경'의 한가지 특징은 위경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 한 권의 책도 정확한 저자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위경의 책들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을 그 책의 저자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솔로몬, 엘리야, 다니엘 등 구약에 등장하는 위인들의 이름을 빌려서 그들을 저자로서 내세우고 있는 것이지요. 실제의 저자들은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 뒤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위경의 기원은 팔레스타인에서 비롯된 것과 헬라에서 기원된 것으로 구분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비롯된 위경
제1 에녹서 6`36, 37~71, 83~90, 9~104
- B.C.164년경
2. 희년서 ? B.C.150년경
3. 12족장의 유언서 ? B.C. 140~110년경
4. 솔로몬의 시편 ? B.C.50년경
5. 욥의 유언서 ? B.C. 51세기
6. 모세의 승천서 ? A,D,7~28sus
7. 예언자들의 생애 ? A.D.1세기
8. 이사야 순교사 ? A.D.1~50년
9. 아브라함 유언 ? A.D.1~50년
10. 아브라함 묵시록 ? A.D.70~100년
11. 제2 바룩서 혹은 바룩의 묵시록
? A.D.50~100년
12. 아담과 이브의 생활 혹은 모세의 묵시록
- A.D.80~100년
헬라에서 비롯된 위경
13. 무녀의 신탁서 3권 ? B.C.150~200년경
4권 ? A.D.89년경
5권 ? A.D.130년 이전
14. 제3 마카비서 ? B.C.1세기말 경
15. 제4 마카비서 ? B.C. 1세기말 경 ~A.D.1세기 초
16. 제2 에녹서 혹은 에녹 비밀서 ? A.D.1~50년
17. 제3 바룩서 ? A.D.100~175년
사해 두루마리 사본
사해 두루마리는 쿰란 사본이라고도 부르는데, 1947년 사해의 몇 계곡에 위치한 동굴들에서 발견된 문헌들을 말합니다. 이 문서들은 가죽에 쓴 것들이 대부분인데, 가장 긴 것은 8.6m나 되는 것도 있습니다.
사해사본 두루마리들은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쿰란 주거지에서 적게는 125m (제4동굴)에서부터 1km (제1동굴)까지 떨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살던 주거지에서 발견된 문서는 없으며, 염소와 양을 치는 베두인 모함메드 아흐메드 엘-하메드가 1947년초에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양치기가 잃은 동물을 찾기 위하여 돌멩이를 동굴로 던졌는데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나서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오래된 항아리에 들어있는, 면에 싸여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루마리들은 골동품 상인인 이브라힘 이즈하(Ibrahim 'Ijha)가 베들레헴에 가지고 들어왔으며, 시나고그(유대교회당)에서 훔쳤다는 의혹 때문에 그들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그 후 이 문서들은 칸도라고 불린, 칼릴 에스칸더 샤힌(Khalil Eskander Shahin, "Kando")이라는 도굴꾼이자 골동품 상인에게 넘어갔습니다. 처음 베두인들이 이 문서를 발견했을 때에는 세 개의 두루마리를 꺼냈는데, 칸도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나중에 동굴에 다시 들어가 더 많은 문서들을 꺼내오게 되었습니다.
베두인에게서 건네받은 문서들은 제 삼자에게 흥정을 통해 넘어갔습니다. 그 중 하나는 시리아 정교회의 일원인 게오르게 이샤야(George Isha'ya)였고, 그는 곧 이 문서의 정체를 문의하기 위해 성 마가 수도원에 접촉했습니다. 이러한 발굴 소식은 메트로폴리스 주교 아타나시우스 예수에 사무엘(Athanasius Yeshue Samuel)---또는 마르 사무엘(Mar Samuel)이라고 더 잘 알려짐---에게 전해졌습니다.
문서를 조사하고 나서 오래된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마르 사무엘은 이를 사는 데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4개의 두루마리들을 곧 사게 되며 이들은 현재 유명한 이사야 스크롤 (1QIsa)과, 공동체 규칙, 하박국 페샤르(하박국 주석)과 창세 묵시록입니다. 또다른 두루마리들이 고문서 시장에 나돌았으며, 이스라엘의 고고학자이면서 히브리 대학의 교수인 엘레이저 수케닉(Eleazer Sukenik)교수가 3개의 두루마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전쟁 두루마리, 추수감사 찬송과 이사야 문서의 단편들이었습니다.
이후로 계속 발견되는 사본들을 사해사본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루마리들은 4,000개 이상의 단편들이 있으며 그 연대는 B.C.200년부터 A.D.70년까지의 것으로 추정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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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