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유일한 승전지 광교산 전투
용인과 수원 사이에 위치한 광교산의 비로봉 밑 바위에 金俊龍 戰勝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정확히 형제봉에서 광교산 방향으로 1.3km 지점 비로봉 200여 m 지점이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은 이를 보고 김준용이란 분이 6.25 때 참전한 장군인가 짐작만 하며 갈 뿐이다. 그러나 이 글씨는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유일무이한 승전보를 전해주는 새김 글씨이다. 이 글씨는 수원화성 축성을 위해 성 돌을 캐기 위해 광교산에 올랐던 사람들이 장군의 전승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를 수원화성 축성을 맡았던 총리대신 채재공에게 알려 새긴 것이라 한다.
병자호란이란 무엇인가? 여진은 중국 변방에 사는 민족으로, 중국의 분열 정책으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였고 중국으로부터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여진은 사는 지역에 따라 크게 건주·해서·야인 여진으로 구분되었는데, 이 중 건주 여진의 족장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1616년 후금을 건국한 뒤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후금과의 전쟁에 조선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은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요구에 따를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광해군은 이미 쇠약해진 명나라와 강성해진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다. 광해군의 명을 받고 출병한 강홍립은 명나라가 전쟁에서 패하고 수세에 몰리자 후금에 항복하고 어쩔 수 없이 출병했음을 해명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으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면서 외교 정책이 크게 변화하였다. 인조와 서인 세력은 후금과의 관계를 끊고 명나라를 지원하는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추진하였다. 후금은 명나라와 조선 양쪽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었고, 경제 교류까지 막히게 되자, 결국 무력을 이용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이다. 인조반정 직후 조선에서는 이괄의 난이 일어났고, 난은 진압되었지만 남은 반란 세력이 후금으로 넘어가 광해군이 억울하게 왕위에서 쫓겨났음을 호소하며 전쟁을 부추겼다. 이를 계기로 후금은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평양까지 내려왔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하였다. 이때 정봉수·이립 등을 비롯한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후금군에 맞서 싸웠는데, 후금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조선과 형제의 나라로 지내자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그 후 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발했으니, 그 이유는 조선은 오래 동안 여진을 아래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사실 300년 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당시 동북아 판도에선 여진족은 조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는 동북면(東北面)의 덕원(德源)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고려인과 여진족이 섞여 살던 이 지역에서 원나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리가 되었다. 이후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이춘(李春)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원의 천호(千戶) 등 지방관을 역임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도 쌍성총관부의 천호였고,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장대한 기골과 총명함을 자랑했고 무예,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힘이 좋아 남보다 갑절은 무거운 활과 화살을 쓰면서도 빗나감이 없어 명궁 소리를 들었다. 나중에 이성계가 왜구를 칠 때 따라다니며 오른팔 노릇을 한 퉁두란도 여진족 출신이다. 우왕 6년 1380년에는 아기바투(阿其拔都)가 이끄는 왜구가 함양과 경산, 상주까지 올라와 노략질을 했는데, 이성계가 이들을 운봉에서 맞아 섬멸했다. 이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 하는데, 당시 퉁두란이 화살로 아기바투의 투구를 벗기니까 이성계의 화살이 목구멍을 꿰뚫었다고 한다.
이런 건국 역사를 가진 조선(朝鮮)이 강압적으로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게 되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뿐 아니라 전쟁 후 엄청난 액수의 물자를 요구하는 후금에 더욱 큰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뿐 아니라, 황금과 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 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 왔다. 조선은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그 해 11월 선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후금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 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청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선양에 모아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과 패륵(貝勒) 악탁(岳託) · 호격(豪格) · 두도(杜度) 등을 이끌고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예친왕 다탁은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하도록 했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해 밤낮을 달려 선양을 떠난 10여 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했다는 급보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의주부윤 임경업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狀啓)가 도착한 뒤였다. 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비로소 적의 형세가 급박한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진격해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인조는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서 청군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해, 한 부대를 보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 가는 길이 끊겼다고 보고했다. 청나라 군사들은 정묘호란을 통해 왕이 피란 갈 곳을 알고 있어 이미 강화도 가는 길을 차단하였기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은 곧 청나라 군대에게 포위되었고 인조는 이곳에서 47일 동안 항전하였으나 식량이 부족하고 얼어 죽는 사람이 생기는 등 성안의 상황은 비참하고 끔찍했다.
이때 성안에 있는 군사는 1만 3000명으로 성첩(城堞)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 · 부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을 청했다. 당시 성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청태종은 다음 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굽어보며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이러할 즈음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왔던 관군들은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䂓)의 군사는 험천(險川, 용인시 고기동)에서 패해 이성현감(尼城縣監) 김홍익(金弘翼), 남포현감(藍浦縣監) 이경(李慶)이 전사했고,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泳)의 군사도 광주(廣州) 쌍령(雙領)에서 괴멸해 두 병사도 전사했다. 또,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금화(金化)에서 전사하고,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은 맹산(孟山) 철옹(鐵甕)에서 사로잡혔으며, 도원수 김자점의 군사는 토산(兎山)에서 패주 하고,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 함경남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의 군사도 패배해 중도에서 좌절되고, 경상도 김식회(金湜會)의 의병은 여주에서 퇴주하는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의 군사와 함께 조령(鳥嶺) · 죽령(竹嶺) 사이를 잠행하다가 청군의 기습이 있다는 와전(訛傳)을 듣고 도산해 실전에 임해보지도 못했고, 의승군(義僧軍)도 봉기했으나 큰 전공을 세우지는 못하여,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명나라에 구원을 청한 것도 국내 유적(流賊)으로 인해 원병을 보낼만한 처지가 못되었고, 겨우 등주총병(登州總兵) 진홍범(陳弘範)에 명해 수군을 동원하려 했으나 그것도 바람과 파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오직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경기 용인 광교산(光敎山)에서 적장 백양 양고리( 白羊 楊古利)를 죽이고 승첩을 거두었다. 양고리는 후금 태조의 사위이자 청나라 태종의 매부로 청나라 제일의 장수이다. 황금 투구를 쓰고 전투에 임했던 그가 사살되자, 청태종은 자신이 입었던 곤룡포로 시신에 덮어준 후 3일간 식음을 전폐했다고 하며 이 기록은 청나라 史書에 실려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대승을 거둔 이래, 1637년 병자호란 때 전라 병마절도사 金俊龍 장군이 육지에서 거둔 엄청난 쾌거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남한산성 구원 오는 군사가 모두 붕괴되고, 안과 밖이 끊어져서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강화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여론은 화의를 맺는 쪽으로 기울었고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신하 수십 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 앞에 신하 나라가 큰 나라를 만났을 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인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조선과 청나라는 신하와 임금의 관계를 맺었다.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방식은 “궤”(跪)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서고,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 이를 삼전도의 치욕이라 한다.
지난 2월 6일, 수지도서관 회의실에서 광교산 포럼 임종삼 시인 사회로 <광교산 전투 승전 387주년 축하 행사>가 열렸다. 참석한 사람은 김준용 장군의 14대 종손 김영수, 이석순 광교산 포럼 고문, 수원대 명예교수 심곡서원 講長 김광옥, 경기 시조시인협회 부회장 김동석 외 다수의 시인 수필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