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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유사 판본
① 신사판(辛巳版) : 1881년 6월, 단양 남면 천동 여규덕의 집에서 간행.
② 계미판(癸未版), 경주판 : 1883년 8월, 신사판의 중간(重刊). 목각 활자본.
③ 계사판(癸巳版) : 1893년, 목판본
④ 1922년판 : 1922년, 목판본
1893년 계사판(癸巳版)『용담유사』
1. 『용담유사』판본
동학 경전에는 국문 경전과 한문 경전이 있으며 한문 경전은 『동경대전』이라 하고 국문 경전은 『용담유사』라 한다. 『용담유사』에 수록된 가사는 8편으로 교훈가·안심가·용담가·도수사·권학가·몽중노소문답가·도덕가·흥비가 등이다. 劒歌도 국문으로 된 노래로 당연히 수록되어야 하나 빠져 있다. 가사가 8편이 수록했다 하여 일명 가사팔편이라고도 불러왔다.
집필 시기는 최초의 용담가는 1860년 4월(양 6월)에 득도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었다. 그리고 안심가는 8월경에, 교훈가는 12월 초순경에, 도수사는 11월 중순경에, 권학가는 1862년 1월에, 몽중노소문답가는 6월에, 도덕가는 1863년 7월 하순경에, 흥비가는 8월 초순경에 지었다.
대신사가 일단 가사를 탈고하면 측근에서 여러 권을 만들어 지방 지도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지방에서도 다시 필사하여 일반 도인에게 널리 보급했다. 필사 과정에서 누락되거나 잘못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1863년 가을부터 한문 경전과 국문 경전 간행을 서둘렀다.
그러나 1863년 12월 10일에 대신사가 체포되자 중단되고 말았으며 19년이 지난 1881년 6월에 비로소 『용담유사』라는 이름으로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海月先生文集』에 의하면 ‘辛巳 六月 往本邑泉洞呂圭德家 刊出歌詞數百卷 頒布各處’라 하여 단양군 泉洞(大崗面 泉洞) 呂圭德의 집에서 수백 부를 간행했다 하나 이때의 인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경주판과 계사판 뿐이다.
청림교에서도 1917년에 開道解歌로 간행했으나 어느 판본을 중간했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전해지는 『용담유사』(가사팔편)는 충청도 사투리로 변해 있어 대신사가 쓰신 진본 여부를 거론하는 학자도 있다.
『天道敎書』(1920년 프린트)와 『天道敎會史草稿』에 신사 구송설이 기록되어 있어 이를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天道敎書』 1865년조에는 ‘先時에 동경과 유사가 대신사의 피체되심을 경하여 이미 火燼에 속하고 無餘한지라 신사 念久靈會하시다가 곧 동경과 유사를 口呼하사 人으로 하여금 書케 하시다’라 했다.
『天道敎會史草稿』(1932년 프린트) 1864년조에도 역시 ‘先時에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수운 대신사 피체되심을 經하여 火燼에 속하고 무한지라 해월신사 묵념하시다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口呼하사 人으로 하여금 書케 하시다’라 했다.
이 구송은 1880년 경전 간행 당시에도 있었다 했다. 『天道敎書』 1880년 5월조에 ‘先時 대구 참변 후 대신사의 所著 刊冊이 火爐 중에 소진하고 일(하나)도 가고할 바 무하더니 是時에 신사 친히 修輯하실 새 본래 문식이 무함으로써 기술을 부득이 하시고 천사께 고하사 강화의 교로 此經을 구송하사 문식의 人으로 하여금 代書케 했다’는 것이다.
경상도 사투리로 되어 있어야 할 가사가 충청도 사투리로 되었다거나, 신사의 구송에 의해 되살려졌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대신사의 친저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신사 구송설은 합리성이 결여돼 있다. 『天道敎書』나 『天道敎會史草稿』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집필한 것인데 1910년부터 『천도교회월보』에 연재된 吳尙俊의 「本敎歷史」나 1900년대 초에 집필한 『海月先生文集』이나 1880년에 집필한 『崔先生文集道源記書』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은 구송설을 어떤 자료에 의해 기술했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최초의 간행 때 목격했던 金演局은 侍天敎 刊 『동경대전』 跋文에 ‘낱권으로 흩어져 있던 원본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집대성한 것’이라 밝혔다. 즉 ‘해월성사는 이 경전으로 이 도를 전해 왔는데 성덕에 잘못됨이 있을까 두려워 흩어져 있던 경편들을 거두어 판각하여 출판하는 공을 크게 이루었다[海月聖師 以斯經傳斯道 或恐聖德之有誤 收其散編 大成之功]’고 했다. 이 증언은 『천도교서』나 『천도교회사초고』의 신사 구송설을 의심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경상도 사투리가 충청도 사투리로 변한 것은 가벼운 실수로 볼 수 있다. 즉 판본에 글을 쓸 때 충청도 사람이 불러주고 충청도 사람이 받아썼기 때문이다. 착오가 없도록 하기 위해 불러주고 받아 쓴 것이 결국 경상도 사투리를 충청도 사투리로 바꾸게 된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경주판 『용담유사』는 대신사가 집필한 원본을 저본으로 하여 간행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 『용담유사』 의의
이 『용담유사』는 서민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가사로 졌다는 점에서 국문학적으로도 큰 의의가 있겠지만 『동경대전』을 이해하는 데도 크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예컨대 논학문의 侍者 설명에서 ‘內有神靈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 하여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 어려우나 교훈가에서 ‘날로 믿고 그러하나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어서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 하단말가’라 하여 시천주의 侍者는 ‘우리 몸 안에 한울님이 모셔져 있다’고 명확히 설명되어 있다. 수덕문의 ‘仁義禮智先聖之所敎修心正氣唯我之更定’이란 구절도 애매하지만 도덕가에서 ‘수심정기 하여내어 인의예지 지켜두고’라 하여 역시 명확한 해석을 내려주고 있다. 이처럼 『용담유사』는 『동경대전』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하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집필 연도와 고장 그리고 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 『용담유사』 내용
1) 교훈가
癸巳版 『용담유사』에는 이 교훈가를 경신작이라 했으나 내용상 신유년작이 분명하다. 즉 대신사가 1861년 12월 초순 남원으로 가던 도중에 지은 작품이다. 경주를 떠나 울산을 거쳐 고성에 들렸다가 여수로 가서 충무공의 사적을 돌아보 고 구례 쪽으로 올라갔다. 남원에 도착한 것은 12월 20일경이므로 12월 초순에는 求禮에 도착, 며칠간 묵으면서 이 교훈가를 지었다고 추측된다. ‘동지섣달 설한풍에 촌촌전진 하다가서’라는 글귀를 보면 분명 12월(동짓달) 초에 지은 것이 확실하다.
227 구로 된 교훈가의 구성은 ① 용담에 돌아와서 중한 맹세를 다시 하고 처절한 구도생활을 하다가 ② 경신 4월 5일에 득도한 경위와 ③ 처자들이 놀란 광경 ④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방 ⑤ 관의 탄압과 남원행 ⑥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순으로 되어 있다.
2) 안심가
慶州版과 癸巳版에는 안심가를 경신작(1860)이라 기록했으나 글의 내용으로 보아 신유작(1861)이 분명하다. 6월부터 포덕을 시작한지 두 달쯤 지나자 문중과 동리 인사들이 서학으로 몰아세우며 비방하기 시작했다. 뜻밖의 구설수에 오른 대신사는 도인들에게 ‘나의 가르침은 장차 있을지도 모를 침략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보국안민의 대도’임을 밝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1861년 8월 초순경 이 안심가를 쓰게 된 것이다.
145구로 된 안심가의 구성은 ① 구도를 위해 가족과 같이 고생하던 지난 일을 회상하며 ② 경신 사월 초오일에 무극대도를 받던 상황과 ③ 득도의 기쁨을 노래했으며 ④ 향중에서 비난의 소리가 더욱 높아지자 ⑤ 나의 가르침은 침략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도임을 알리고 ⑥ 아국운수를 보존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3) 용담가
대신사가 최초로 집필한 글은 이 용담가이며 1860년 4월 5일(양 5월 25일) 무극대도를 받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글을 썼다. 다른 가사들은 도인들을 가르치는데 주력했으나 이 용담가는 득도에 이르기까지의 경위와 종교경험 그리고 의의와 기쁨을 노래했다. 72구로 된 용담가는 ① 신라의 전통과 기상을 노래하고 ② 귀미산과 용담정에 얽힌 부친의 회고 ③ 기미 10월에 용담을 찾아들던 처절한 심경을 읊었으며 ④ 경신 4월 5일에 득도하던 종교체험을 소상히 묘사했고 ⑤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기쁨을 노래했다.
4) 몽중노소문답가
계미판 등에서 이 몽중노소문답가를 신유작이라 했으나 임술년(1862) 6월에 남원 교룡산성 내은적암(德密庵)에서 지은 글이다. 도참사상과 풍수지리설을 원용하여 역사의 변혁을 설명하고 새로운 무극대도가 이 세상에 나와 태평성세를 다시 정해 국태민안이 된다는 희망을 주는 글이다. 몽중노소문답가라 한 것은 글 속에 백발 신선이 14세 소년과 만나 이루어지는 대화가 있기 때문이다. 즉 가사 중에 ‘처자 산업 다 버리고 팔도강산 다 밟아서 인심 풍속 살펴보니 무가내라 할 길 없네... 내 나이 십사 세라 전정이 만리로다’, ‘금강산 상상봉에 잠깐 앉자 쉬이다가 홀연히 잠이 드니 몽에 우의편천 일도사가 효유해서 하는 말이…’라는 대목이 있어 이름지어진 것이다. 이 몽중노소문답가는 86구로 됐으며 글의 핵심은 해체기에 접어든 조선조 사회를 비판하고 다시 개벽을 통해 미래사회의 도래를 예언한 글이다.
5) 도수사
이 도수사는 남원에 도착하여 일단 자리를 잡은 후에 쓰신 글이라 믿어진다. 천도교 남원종리원 연혁에 의하면 대신사는 ‘本郡에 到하사 廣寒樓下 烏鵲橋邊 徐亨七(當時 藥房)에 留하시고, 主人 甥姪 孔昌允家에 宿寢하사 留數十日에 徐亨七·孔昌允·梁亨淑·徐公瑞·李敬九·梁得三 諸賢의 同情으로 布德하시다’라 하여 일단 孔昌允의 집에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때 이 도수사를 쓰신 것 같다.
일반 도인에게 보낸 것이 아니고 지도자급 도인들에게 주는 글로서 간절한 당부가 담겨져 있다.
100구절된 글의 줄거리는 첫째, 난법난도하는 지도급 도인들을 걱정했으며, 둘째,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 타일렀으며, 특히 책재원수이니 먼저 자신들이 수범을 보이라고 했다. 셋째, 가르쳐 준대로 호말인들 변치 말라고 했다.
6) 권학가
이 권학가는 1862년 1월 초 남원 교룡산성 내 은적암에서 지었다. 『崔先生文集道源記書』에는 대신사가 교룡산성으로 들어간 것은 12월 그믐경이라 했다[抵到隱寂庵 時惟臘月 歲聿旣暮].
114 구절로 된 글의 줄거리는 ① 은적암에 들어와 송구영신하면서 고향의 벗들이 생각났으며 ② 세상 풍속이 매사에 눈에 거슬려 역시 시운이라 치부했다. ③ 도탄 중에 빠진 세상을 어떻게 구제하여 보국안민할 것인지 걱정하면서 ④ 서학이 성군취당하며 극성을 부리고 있음을 비판했다. ⑤ 만고 없는 무극대도가 이 세상에 창건된 것도 시운이니 성지우성 공경해서 한울님만 생각하라고 했다.
7) 도덕가
기록에 의하면 이 도덕가는 1863년 7월 하순 경 용담에서 지었다 한다. 즉 7월 23일 파접 통문을 발송하고 나서 며칠 후 道修歌 또는 道修詞를 지었다고 했다. 도수가 또는 도수사는 도덕가를 잘못 기록한 오기이다. 68구로 된 이 도덕가는 득도한지 3년 후에 쓰신 것이라 매우 종교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크게 나누어 보면 첫째 대목은 ‘노류한담 무사객이’에서 ‘뉘라서 지도할꼬’까지이며 둘째는 ‘시운을 의논해도’에서 ‘무가내라 할길 없다’까지이다. 셋째는 ‘하원갑 편만하니’에서 ‘어린 소리 말았어라’까지이며 넷째는 ‘그 말 저 말 다 던지고’에서 ‘흠재훈사 하였어라’까지이다. 요지는 첫째로 한울님에 대한 경외지심을 강조하였고 둘째로 한울님 관념을 새롭게 해석했으며 셋째로 참된 도덕군자의 인간상을 제시했다.
8) 흥비가
대신사가 체포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가사는 흥비가이다. 신사 해월 崔慶翔에게 북도중 주인의 직책을 맡긴 다음 1863년 8월 초순에 이 흥비가를 지었다. 『崔先生文集道源記書』에는 ‘八月作興比歌’라 했고 『大先生主文集』에는 ‘八月十三日 作興比歌 無所傳之際 慶翔適至’라 했다. 즉 8월 13일에, 흥비가를 짓고나서 전할 데가 없던 참에 마침 해월이 찾아왔다고 했으니 8월 13일 이전에 지었다. 흥비가를 제자들에게 面講까지 한 것으로 보아 이 가사를 소중히 여겼던 것 같다. 『崔先生文集道源記書』에 보면 ‘10월 25일경에 제자들이 찾아오자 전에 반포한 흥비가를 잘 읽어 보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面講을 받았다’고 했다.
93구로 된 흥비가는 詩經의 比興에서 유래한 것으로 재미있게 비유해서 설명하는 가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크게 나누어 보면 앞부분은 ‘시운 벌가벌가’에서 ‘포식양거 되었으니 문장군이 네 아니냐’까지이고, 둘째 부분은 ‘그 중에 현인 달사’에서 ‘이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까지이다. 내용은 첫째 ‘목전지사 쉬이 알고 심량 없이 하다가서 말래지사 같잖으면 그 아니 내 한인가’라 서두로 시작하여 가르침을 어기는 교도들의 유형을 비유해서 예시했다. 즉 교사하고 가소로운 자, 탁명자와 몰각자, 여사애당자와 음해자, 지각없는 자, 문장군과 같은 자 등을 열거했다. 둘째는 목표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서 주저앉는 비유를 들었다. 과거에 전념하다 실패하는 사람, 먼 길을 떠났다가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 아홉 길 조산하다 마치지 못하는 사람, 썩은 나무가 양공이 미치지 못하면 잘못되는 경우 등을 들었다. 그리하여 초지일관 꾸준히 수행하고 정진해서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고 했다.
9) 검가
검가는 검결과 다른 것인지 아니면 검결이 곧 검가인지 분명치 않다.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기록들에는 한결같이 劒歌로 되어 있다. 1864년 2월에 대신사를 신문한 결과를 보고한 경상감사 서헌순의 狀啓에도 검가로 되어 있다.
그러나 『大先生主文集』이나 『崔先生文集道源記書』에는 1861년 4월경에 검결을 지었다 하여 역사 기록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
검결은 1861년 4월에 경주에서 지은 것이 확실하나 이것이 바로 검가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天道敎創建史에는 1862년 2월경 남원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劒歌를 지으시고 本劍을 잡고 月明淸風한 밤을 타서 妙高峰上에 獨座하야 劒歌를 노래하시니 歌에 가르되…’라고 했다. 앞으로 검결과 검가가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를 가려야 할 것이다.(表暎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