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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
막 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막 7:24-30 /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마15:21-28] 예수께서는 갈릴리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거기 계시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려 하셨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문이 금방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25) 바로 그때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든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자마자 달려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26)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여자는 업신여김을 받는 헬라인으로 수로보니게 태생이었다. 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먼저 내 식구들인 유대인들부터 돌봐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음식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8)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흘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질 않습니까?' 29)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훌륭한 대답이다. 내가 네 어린 딸을 고쳐 주겠다. 집으로 돌아가라. 귀신이 벌써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어린 딸은 조용히 자리에 누워 있었고 귀신은 떠나가고 없었다.
정(淨)과 부정(不淨)에 대한 논쟁, 정결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은 이방인 구원에 관한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이방 땅 두로에서 이방 여인의 딸을 고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치유 이야기는 복음은 특정 민족과 지역에 갇혀서는 안 되며, 이방인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약 전체의 흐름과 일치합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24-26) 예수님께 이방 여인이 와서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의 고침을 간구합니다. ‘이방’과 ‘더러운 귀신 들린’이라는 두 개의 부정(不淨)이 겹쳐 있는 상황입니다. 그녀는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 일곱 나라 중 한 나라의 출신입니다. 수로보니게 족속과 유대인은 조상 때부터 심한 적대관계에 있어 서로를 경멸하고 증오합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이 유대인 예수님께 나와 엎드립니다. 부정이 정결 쪽으로 다가와 계속 치유를 요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럽혀질까 봐 피하지 않습니다. 그녀를 내치지 않고 호소를 들으십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으로 새로운 정결 개념을 몸소 보이십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27-28) 수로보니게 여인의 요청에 관한 예수님의 대답은 경멸과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가혹해 보이는 예수님의 말은 인간들이 만든 정결 개념을 뛰어넘어 더 깊은 구원으로 오라는 초대였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 초대에 응합니다. 가혹해 보이는 예수님의 말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구원으로 뛰어듭니다. 이방 여인은 예수님의 비유를 응용하여 집안의 개들도 상 밑에서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다는 말로 계속 치유를 요청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자신보다 높이는 겸손의 태도를 흔들림 없이 유지합니다.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29-30) 이방 여인의 ‘이 말’(29)은 ‘큰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마 15:28). 그녀의 끈질기고 겸손한 태도는 응답받았고, 예수님은 구원을 받는 정결은 음식과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칠 때 병자에게 하시는 명령인 “돌아가라”로 이방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음을 선언하십니다(막 2:11; 5:19, 34).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가 있었습니다.
적용 : 내게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보인 믿음이 있습니까? 겸손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그 단순한 믿음 말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비천한 신분과 처지에 관계없이 오직 믿음과 간절하고 뜨거운 간구로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딸의 병이 낫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왜 우리는 기도하는데 응답받기가 그렇게 어려울까요. 미약한기도, 응답이 없는 기도의 근원에는 부족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믿음을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확고한 믿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할 때에 응답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 설 교 >
기적을 불러오는 말 한 마디
김상수 목사
얼마 전에 백세에 가까운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인 김형석박사(장로)가 모(某) 신문에 기재한 컬럼의 내용 중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
굳이 긴 신문내용을 다 소개하지 않아도 이 한 마디만으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명언이라는 생각이 든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사랑으로 하나 되면 얼마든지 피보다 진한 관계가 될 수 있다(우정, 입양, 성도의 사랑 등). 우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고, 우리 성도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우리들이 피보다 진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 중의 하나가 “좋은 말, 믿음의 말”이다. 진심이 담긴 사랑과 신뢰의 말 한 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 시키고 기적을 일으킨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증명이 된다.
우리들의 믿음의 말 한 마디가 신앙적으로 얼마나 큰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오는지 한 실례를 보자.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고대 페니키아 문명 지역)으로 들어가셨을 때 베푸셨던 한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집에 들어가셨을 때, 예수님이 그곳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와서 예수님께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실 것을 간구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뜻 밖에 이 여인에게 자존심이 매우 상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말씀이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만약 여러분들이라면 예수님께 이런 말을 들었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험한 표현들을 총동원해서 독설을 퍼붓고 떠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
사실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는 말은 충격을 넘어 치욕적이기까지 한 말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반응했다. 다시 말하면 그녀에는 그만큼 절박함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 절박함이 체면이나 고집을 내려놓게 하였다. 성경에서 응답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한결 같이 절박한 믿음으로 간구한 사람들이다(한나의 기도, 천사와 씨름한 야곱, 굴속에서 부르짖은 다윗, 풀무불 속에서 건짐 받은 다니엘의 친구들, 죽음을 각오한 에스더 등).
그러면 우리들은 어떤가? 기도하면서도 바램은 있으나 절박함이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쉽게 말해서 ‘되면 좋고, 안되도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다. 충청도 사투리로 이렇게 ‘개갈 안 나는 믿음’으로는 기적을 기대할 수 없다. 지금도 여전히 때로 주님은 다양한 방법과 형태로 우리들에게 질문하실 수 있다. 어떤 때는 응답이 늦추심으로, 어떤 때는 긴 침묵이나 고난을 통해서 또 어떤 때는 불편한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실 수 있다. 이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믿음의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이 여인의 대답을 들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딸을 고쳐주셨다(막7:29, 마15: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 7:29)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중에 “이 말을 하였으니”라는 말씀과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여인은 ‘믿음의 고백’이 사랑하는 딸을 살려냈다. 물론 그녀의 이런 고백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은 것이 아니다. 그녀의 말은 곧 그녀의 마음과 신앙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예수님을 본 순간부터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22절)라고 외쳤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나는 당신의 종이며, 나는 당신을 메시아로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의 말이 예수님을 감동시켰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감동시키고, 자녀들을 살려내고, 사람을 살려내는 믿음의 말들을 하자(‘00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의 말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단지 신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실제 의학적으로도 얼마든지 증명이 된다. 사람의 대뇌와 언어의 연관성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뇌과학자 사토 도미오(佐藤富雄)박사(의학박사, 농학박사)는 “기적의 입버릇”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뇌의 대부분은 의식보다는 잠재의식이 차지한다. 그런데 말은 뇌의 잠재의식을 자극한다. 그래서 좋은 말 긍정적인 말, 감사하는 말을 지속적으로 입버릇으로 하게 되면 잠재의식이 자극되고, 결국은 운동효과 즉 학습능력을 길러져서 그 사람의 인생을 바뀐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미래에 대해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라는 말들을 계속해야 한다”
긍정적이고 격려하는 말들이 뇌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처럼, 그와 반대로 부정적인 말들이 뇌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전에 EBS 방송의 어느 프로에서 이런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다. 실험대상자들에게 일반적인 단어들을 들려주다가 중간에 부정적인 말들(욕설 등)을 들려주었다. 이 실험 결과를 보면 부정적인 말이나 단어들은 다른 일반적인 단어들 보다 4배나 강하게 사람의 뇌에 기억되고, 분노와 공포 등을 느끼도록 자극해서 이성적인 뇌의 통제력을 잃게 만드는 것이 밝혀졌다. 흔히 사람들이 아홉 가지를 잘 하고도 한 마디 말 실수를 하면, 앞에서 잘한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실수한 한 가지만 기억하면서 흥분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연구진은 부정적인 말들이 왜 이처럼 정상적인 뇌의 활동을 막는지 그 원인을 연구해 보았다. 그랬더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부정적인 말을 할 때 사람의 뇌에서 죽음의 호르몬들이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욕설을 할 때 나오는 침의 분비물을 검사했더니, 우선 색깔부터가 갈색의 침전물이 나오고, 그것을 쥐에게 주입했더니 즉시 사망했다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cvkeifNFm8 / EBS 말의 힘-긍정어와 부정어가 만들어내는 호르몬(동영상):
사실 굳이 이런 의학적인 연구결과를 들지 않아도 이미 성경은 길들여 지지 않은 사람의 말에는 쉬지 않는 악과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씀했다. 성경은 현대의학이 이제야 밝혀내고 있는 부분까지 이미 오래 전부터 다 말씀했다. 성경 속에 이미 사람들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
약 3:8-10 /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랑하는 주민 여러분이여, 그러므로 우리들도 독을 품은 더러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자. 그대신 우리들 모두는 어디에서든지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려내고,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오는 믿음의 말들을 하자. 늘 서로를 향해 ‘미고사축’(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을 비롯해서 늘 서로를 격려하고 칭찬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믿음의 말을 하자.
특히 초신자, 상처가 있는 사람, 질병, 인생의 가뭄을 만난 사람들이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결심한 사람들 그리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더욱 믿음의 권면과 격려의 말을 해주자. 그래서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는 말이 우리들의 교회와 가정과 생활 속에서 아름답게 이루어지게 하자. 주님이 함께 하신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놀랍다!
Everything He Does Is Wonderful!
마가복음 7:24-37 / 김태환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좀 긴 말씀입니다. 본문에 두 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쳐 주셨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4:24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시리아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병든 사람을 모두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는데,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 귀신들린 사람, 간질병에 걸린 사람, 그리고 중풍에 걸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베데스다 연못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연못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양의 문 (Sheep Gate) 가까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사용할 양을 들여가는 문입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양을 씻겨서 양의 문으로 들여갔다고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항상 병자들로 붐볐습니다. 이 연못의 물이 가끔 움직일 때가 있는데, 그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뛰어드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연못 주변에 있는 행각 (porches)에는 항상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도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 일은 옆에서 지켜 보던 제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셨고 우리의 질병을 떠맡으셨다”는 이사야 53:4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8:17).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자기의 해석을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병 고치는 사역을 기록했을까요?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읽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을 떠나 두로 (Tyre) 지방으로 가셨다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마태복음에는 두로와 시돈 (Sidon) 지방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5:21).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지방의 북서쪽으로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 지역을 수리아-뵈니게 (Syrian Phoenicia) 지방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수로보니게는 수리아-뵈니게를 합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땅을 잘 떠나지 않습니다. 자기 땅을 떠나면 모두 이방 땅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사는 땅에 잘 가지 않습니다. 이방인의 땅은 부정하다 (unclean)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unclean”한 것은 먹어서도 안 되고, 접촉해서도 안 된다는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날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말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곳에 가셨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을 읽어 봐도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에 가신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그곳에서 한 수로보니게 여자를 만난 일 밖에는 다른 일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신 것은 이 수로보니게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가셨다고 밖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여자는 그리스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 사람인데 그곳 수로보니게에서 난 사람 (a Greek, born in Syr-ian Phoenicia, NIV, a Greek, a Syro-Phoenician by birth, NKJV)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 딸에게 더러운 귀신이 들어갔으니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와서 고쳐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해가 지고, 하루 일과가 다 끝날 무렵에 병자들을 데리고 와도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4:40).
그런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들을 먼저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서 개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 (27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 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t isn't right to take food from the children and throw it to the dogs.” 자녀들의 음식을 가져다가 개에게 던져주는 것이 옳지 않다.” 이렇게 직역할 수 있습니다. 깜짝 놀랄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여자를 개에다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투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보기엔 인자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지 않습니다. 퉁명스럽게 이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마음을 시험해 보시기 위해서 하셨다면, 이 여자가 정말 예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제 딸을 고쳐 주지 않으시면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인지 시험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예수님은 퉁명스럽게, 약간은 귀찮은 듯한 말투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님, 옳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그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 먹습니다.” (28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Good answer! Now go home, for the demon has left your daughter (좋은 대답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떠났다)." (29절)
2,000년 전에 수로보니게에 살았던 이 여자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 여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이 여자를 도와 주기 위해서 그곳에 가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도와 주기 전에 그 여자를 시험하셨습니다. “잠깐!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저를 개라고 하신 것입니까? 제가 딸이 아프다고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화를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모든 것을 참고 견뎌냈습니다. 그만큼 이 여자는 절박했습니다. 예수님 밖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절박함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도움을 청할 곳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기도하는 것도 많은 것 중에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도가 많은 도움의 손길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돕기 위해서 그곳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시험하셨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도움이 그 여자에게 전부인지 아닌지를 시험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수로보니게에서 난 그리스 사람이었습니다. 마가가 이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 여자에게 이런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만 있으면 그 사람이 누가 되었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마태나 마가는 장차 유대인뿐만 아니라, 그리스인도, 그리고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도 돌아 올 때가 다가 오고 있다는 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각으로 그들이 기록한 이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한 수로보니게 여자의 이야기가 결코 작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입니다. 위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유대인들은 정결한 것 (what is clean)과 부정한 것 (what is unclean)을 구별하는 훈련을 어렸을 때부터 받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님께,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32절) 이 말씀은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deaf man with a speech impediment was brought to him, and the people begged Jesus to lay his hands on the man to heal him.” “말을 잘 못하는 청각 장애자를 데리고 예수님께서 왔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렇게 직역할 수 있겠네요.
이런 사람에게 손을 얹는다는 것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시고 낫게 해 주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손을 얹으시면 병이 낫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unclean한 사람에게 손을 얹는다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을 계속 읽어가면,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귀에 손가락을 집어 넣으시고, 손에 침을 뱉어서 그 사람의 혀를 만지셨다는 말씀은 지금 우리가 봐도 충격적인 이야기이지만, 2,000년 전에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마가에게도 이런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장면을 자신이 목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통해서 이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어떤 생각으로 그의 복음서에 이 이야기를 기록했을까요?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율법의 규정도 중요하지 않았다. 예수님께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저하지 않고 unclean한 사람에게 손을 댄 이유이다.” 마가는 분명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의 복음서를 썼을 것입니다.
마가가 기록한 이 이야기는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마치 그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보다 더 생생하게 그 때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깊은 숨을 쉬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 사람에게 ‘에바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분명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34-35절) “에바다 (Ephphatha)”라는 말은 아람어 (Aramaic)입니다. 신약성경은 희랍어 (Greek)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 말인 히브리어를 사용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람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아람어는 그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일상 언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듣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이 사람을 고쳐 주셨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모두 훌륭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Everything he does is wonderful!” (37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Wonderful”이란 단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Wonderful”이란 말은 메시아의 이름입니다. 이사야 9: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And His nam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NKJV).” Wonderful을 우리 말로 기묘자라고 번역했는데, 잘 된 번역입니다. 신기하고 놀라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만 해도 기묘자가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이 말이 “이상하게 생긴 상자나 모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사야는 기묘자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는 메시아의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고 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Everything he does is wonderful!”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계속해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보십시오.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하고, 말 못 하는 사람도 말을 하게 해 주신다.” (37절)
위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마가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베드로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 많은 이야기 중에 마가는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를 그의 복음서에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이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 35:5-6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그 때에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시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다시 들을 것이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사람이 기쁨으로 노래할 것이다. 광야에 샘물이 흐르고, 메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모두 메시아의 사역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분명히 마가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떠 올리면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은 우리들의 입에서도 같은 고백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은 놀랍다!” 이 고백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Wonderful입니다. 예수님은 Wonderful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이 Wonderful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치하시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삶도 Wonderful한 삶으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안식일의 규정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회복 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Wonderful하신 주님, 저의 삶에 들어오십시오. 그리고 저의 삶을 다스려 주십시오.”
어머니라는 이름
이정선 목사
오늘 Mother's Day를 맞아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남으로 해서 세상에 존재하게 됩니다. 어머니 없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고, 어머니 없이 존재하게 된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모두의 존재의 근원입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낳았다는 사실 하나만 해도 지고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또 하나의 위대한 가치가 존재합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사랑입니다.
모든 동물에게는 새끼에 대한 어미의 독특한 사랑이 있습니다. 새로운 개체는 대부분 매우 연약한 형태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보호와 양육이 필요합니다. 모성이라는 것은 새끼를 보호해서 종족을 보존하려는 본능입니다. 그런데 종류마다 보호와 양육의 기간이 다릅니다. 소는 한 6개월 정도 어미젖을 먹습니다. 개는 한 달 좀 지나면 새끼를 어미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 보호와 양육의 기간이 지나면 어미와 새끼의 관계도 종결되고, 모성이라는 것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살 때, 집에 닭도 키우고 개도 키웠습니다. 그런데 개 중에 한 마리가 아주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닭이나 토끼 같은 가축을 잡아먹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놈이 집 지키는 데 꼭 필요했기 때문에 없애지 못하고 키우고 있었습니다. 밖에서 갑자기 닭이 소리를 지르고 도망치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면 영락없이 이놈이 닭을 쫓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놈을 잡아서 두들겨 팹니다. 그래도 그 버릇은 없어지지 않더군요.
그런데 암탉 한 마리가 병아리를 깠습니다. 일곱 마리를 깠는데 하나는 병들어 죽고, 또 하나는 솔개가 덮치는 바람에 다쳐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다섯 마리가 남았는데, 걱정은 이 병아리들을 어떻게 개로부터 지키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혀 걱정할 거리가 아니더군요. 개가 병아리 근처에 다가가기만 하면 어미닭이 목덜미 깃털을 세우고 개를 사정없이 쪼아버리는 것입니다. 개가 쩔쩔매면서 도망갑니다. 그렇게 힘도 없고 순하기만 하던 암탉이 큰 셰퍼드 개를 이겨버리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모성의 힘입니다.
그렇지만 어미닭의 모성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두어 주 지나니까 병아리들이 커서 어미닭 없이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이 개가 병아리들을 다 잡아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암탉도 결국 개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놀랍고 감동적이던 어미닭의 모성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우선 인간의 양육기간이 무척 깁니다. 그만큼 어머니가 더 많은 희생과 사랑을 쏟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오랜 양육기간을 통해서 어머니와 아기 사이에 놀라운 유대감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낳은 정, 기른 정이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낳아준 정도 크지만, 기른 정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는 말이지요.
한 어머니가 자식을 키우면서 겪을 수 있는 고통과 희생,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 이런 것들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오늘 본문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슬프고 불행한 어머니입니다. 어린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어머니의 기쁨이라면 아이가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자녀가 똑똑하고 재주가 있으면 그것이 어머니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러나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가진 이 어머니는 기쁨이나 자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귀신 들려 이상한 행동을 하는 딸을 보면 가슴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또 이웃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맘 편하게 집밖을 다니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자는 새끼를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약한 놈은 살아남을 수 없고, 강한 놈만 살아남아 더 강하게 길러집니다. 그것이 밀림의 왕의 생존철학인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하고 못난 자식에게 더 애틋한 정을 쏟습니다. 더 많이 보호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서럽게 살았을지, 그리고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몰래 조용히 다녀가시려고 했지만,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어머니의 관심을 피해 몰래 다녀가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딸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고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어머니인데, 딸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오셨는데 어떻게 그 어머니가 그것을 놓칠 수 있겠습니까? 이 어머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만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리 호의적인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했더니, 자녀의 떡을 뺏어다가 개에게 주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어머니는 오히려 개 취급이라도 해 달라고 더 간절히 부탁합니다. 딸이 온전한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개 취급이 아니라 더 심한 모욕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암탉은 개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존재지만, 어미닭은 사나운 개를 쫓아낼 수 있을 만큼 강합니다.
어머니라고 해서 여자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연약한 여자가 할 수 없는 일도 합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되는 순간 수퍼우먼으로 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머니 역시 여전히 연약한 여인이지만, 자식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희생과 헌신이 어머니로 하여금 그렇게 변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암탉이 아무리 힘을 내서 싸워도 셰퍼드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새끼 병아리들을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기가 얼마나 싸움을 못하는지 계산을 하고 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가 개든 호랑이든 싸워야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미리 계산해서 싸울지 도망갈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 어머니는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고 있는지 계산을 하지 못합니다. 자존심보다 더 큰 것이라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딸내미가 낫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닭이 죽기 살기로 덤비니까 덩치 큰 개가 도망을 갑니다. 개는 닭에게 쪼이면서까지 닭과 싸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자존심 내팽개치고 딸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어머니는 마침내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이처럼 어머니의 희생은 위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유태인들의 속담에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다 돌볼 수가 없어서 대신 어머니를 보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비추어본다면 맞는 말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그 의미에는 공감이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 세상에서 아가페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가페 사랑의 특징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방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적이고 쌍방향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조건과 보상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잘 생겼다거나, 돈이 많다거나, 공부를 잘한다거나, 아니면 나 없이는 못 살겠다고 쫓아다닌다거나 하는 조건들에 의해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을 했는데 상대방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무슨 사건이 일어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롬 5:8), 그러니까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전혀 아니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확증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자식이 보답할 것 계산해서 사랑합니까? 어머니는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사랑합니다. 또 어머니의 눈에는 자기 자식이 제일 예쁘게 보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끼가 아침에 학교에 가면서 깜빡 잊고 도시락을 안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토끼 엄마가 도시락을 챙겨가지고 학교에 가다가 고슴도치 엄마를 만났습니다. “어머, 고슴도치 엄마, 아침부터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가세요?” “네, 우리 고슴도치네 선생님이 좀 만나자고 하네요. 그래서 학교에 가는 길이에요.” “마침 잘 됐네요. 학교에 가시면 제일 예쁘게 생긴 아이에게 이 도시락 좀 전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염려 마세요.” 고슴도치 엄마가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다 살펴봤는데, 자기 자식보다 더 예쁘게 생긴 아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토끼 엄마의 부탁대로 그 도시락을 고슴도치에게 주었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사랑이라는 것은 그만큼 귀중한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번은 하나님이 천사에게 세상에 내려가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천사가 세상에 내려와서 보니까 마침 봄이었는데 아름다운 꽃들이 형형색색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꽃을 꺾어서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어린 아기의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미소를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천사가 세상에 더 머물면서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사랑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을 또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바구니를 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아름다웠던 꽃은 다 시들어가지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 그토록 천진난만하던 아기의 미소는 이제 말썽꾸러기 소년의 심술궂고 반항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여전히 고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성경에는 어머니에 관해 매우 특별하게 말하는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가 아이를 낳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니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3장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여자가 뱀의 유혹을 받아 죄에 빠졌다는 말을 하는 중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따서 먹고 아담에게도 준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잉태하는 고통을 벌로 주셨습니다(창 3:16). 그래서 여자들은 아이를 낳으면서 죽을 고생을 합니다. 옛날 의료시설의 도움을 받지 못하던 우리 어머니들은 출산하러 들어가면서 댓돌 위의 신발을 뒤돌아보았다고 합니다. 내가 살아 나와서 다시 저 신발을 신을 수 있을까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는 것이 저주입니까? 여자에게 있어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만큼 큰 축복이 없습니다. 구약의 여인들을 보면 아이를 낳기 위해 필사적이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되는 것은 여인들만의 특권입니다. 무엇과 그것을 바꾸겠어요? 문제는 그 잉태와 해산에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이 저주이고 형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저주마저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에게는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을 것을 얻게 되리라는 저주를 내리셨는데(창 3:19),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저주입니까? 열심히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것, 매우 정당하고 공평하잖아요? 여자가 아홉 달 동안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다가 고통 중에 아이를 낳음으로써 어머니가 아이를 더 귀히 여기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자가 아이를 낳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아이를 낳을 때 그 고통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그 하나님의 저주를, 그 저주를 받게 된 범죄, 뱀의 꼬임에 넘어갔던 것을 기억하고 반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고통을 당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구원과도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는 일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면 여자가 남자보다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 결과로 누구에게나 가장 아름답고 존귀한 이름은 어머니일 것입니다. 가장 편안하고 포근한 곳은 어머니의 품이고, 가장 그리운 사람은 어머니가 됩니다. 우리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어머니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머니를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머니를 주셔서 생존하게 하시고, 또한 그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더욱 어머니를 사랑하고, 또 나아가 우리 자녀들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자녀 사이에 믿음이 전수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눔으로, 정말 아름답고 축복이 넘치는 가정을 우리가 다 이룰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한 이방인의 믿음
김경호 목사
우리가 보는 사물은 보이는 모양대로의 사물의 세계가 있는 반면 그 사물이 그렇게 자리잡고 있는 원인이 되는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따로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사물의 세계-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 기운이 있고 그것이 뭉쳐서 보이는 형태의 세계를 이룬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신적인 신비와 권능을 부여한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에 루아흐는 바람, 영, 성령, 또는 인간에게 적용해서 입김, 숨등 개역성경에서 36개의 다양한 용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말이 기운, 바람에서 성령, 하나님에게까지 번역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신비와 신적 영역에 놀라운 권위를 부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과학적 세계관은 보이는 세계 외에는 의심할 뿐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게 하는 세계관을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자본주의적 상업적 세계관 결합되면 인간 행위의 모든 가치를 화폐와 숫자로 환산하는 귀재들이 되게 됩니다.
제가 사는 동네인 곤지암에 가면 배연정 소머리국밥이란 간판이 돋보입니다. 매일 그 앞을 지나면서 배연정이 소머리국밥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가 끓이는 방법이나 알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저기 “유퉁의 국밥집”이란 간판도 보입니다. 그의 연기생활은 짧은 편이었는데, 유퉁은 사라져도 국밥집은 영원합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나있으면 그것이 곧 상품화됩니다. 처음에 연애인이 국회의원 나오는게 참 이상했는데 지금은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고호로 기억되는데.. 그가 태어난 도시는 그의 생애를 중심으로 생가, 박물관, 살던 집, 들리던 카페 등이 관광 상품화되었고 매년 그 작은 마을에서 고호의 그림이 들어간 기념품, 복사본의 특허화로 인하여 벌어들이는 수입이 1억 달러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정작 고호 자신은 불행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만 살아서는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마을의 후손들이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요번 청년신도회수련회로 장수를 갔는데 거기에 몇 년전에는 없던 논개 사당이 성역화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논개를 차지하려는 싸움에 진주와 장수가 맞서고 있다고합니다. 지자체가 되니 서로 경쟁적으로 역사의 인물을 자기 고장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씁니다. 홍길동을 두고 강원도와 전라도 인지 충청도인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애쓴다고 하는데 이거 홍길동이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 인물이라서 돌아가서도 여기저기 번쩍 번쩍 하시는 것 같습니다. 장수 근처에 흥부의 고향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무얼 상품화 할까 궁금해집니다. 글쎄 천연 바가지를 아니면 호박죽을.... 어떤 사람의 지명도, 심지어는 역사적 인물일지라도 알려진 모든 것이 상품화됩니다. 아는 것이 상품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 모든 것이 상품과 연결되야 비로소 의미가 해석되고 궁금증이 풀리기도 합니다. 누가 조금 호의를 베풀더라도 저 사람이 왜 그럴까하는 것이 계산되고 해석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제가 마을을 위해서 일할 때도 사람들이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나중에 마음이 풀린 다음에 와서 하는 말이 “아 목사님, 다음에 이지역 국회의원 출마하실 때는 저희가 혼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라는 뜻밖에 인사였습니다. 그런 계산이 나름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도움 마저 불편한 것이지요.
심지어는 목사가 기도하고 방문하는 것까지도 상품화되기도 합니다. 심방할 때 당혹하게 되는데, 목사가 심방할 때, 예배 보시라고 주로 밥상을 놓는데 그 위에 뎅그머니 흰 봉투 하나가 올라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애 그러냐고 물으면 먼저 교회에서 그렇게 훈련받앗다고 합니다. 물론 헌금하는 정신은 중요하지만-그리고 무안해 하실 까봐 이야기 안하지만, 심방헌금은 다음부터 예배실 뒤에 있는 헌금함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든 가치가 금방 보이는 돈으로 환산되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나타나고 보이는 세계 외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있고 그렇게 화폐화 되지 않고 오고가는 소중한 마음들이 일혀질 때 우리는 참으로 사람이 사는 맛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수로보니게(시로 페니키아)여인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는 복음서 예수님 말씀 중에 가장 예수님 답지 않은 대화이기도 합니다. 왜 예수님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여인에게 이렇게 전후사정도 없이 딱 잘라 거절하고 면전에서 “개”라고 모욕적인 발언을 하셨을까? 그 당시 사회적 배경은 약간의 그럴만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여기 이 여인은 그리스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이 식민지는 특히 로마에 대한 저항의식이 두드러지는 땅이었습니다. 열심당들이 거기서 거주하는 그리이스-로마인들에게 테러를 감행하는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 머물러 사는 그리이스 여인은 필경 로마를 대표하는 고급 지배층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특히 그당시 로마는 약품들을 매점매석해서 식민지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거액을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 식민지 국가에서는 병든 사람이 가족 중에 발생할 때, 부득이 가족 전체의 생존을 위해서는 환자를 격리하거나 분리시켜야하는 나머지 가족이 생존가능한 상황이 되곤 했습니다. 요한복음의 베데스다 못가의 이야기는 사랑하는 가족을 그냥 버릴 수는 없으니까 연못 물이 동하면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낳는다는 신화를 빌미삼아 가족을 격리시키는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이런 사람들을 만나 그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같이 우시고, 진흙도 개어 바르고 하늘을 향해그 환자의 아픔을 고치기위해 소리도 치며 갖은 애를 다 쓰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앞에 엎드린 여자는 최고의 의술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고 최고의 지배계급의 귀부인이었습니다. 그런 것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기적을 일으키던 예수는 이런 상황에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이런 기적 이야기의 배경에는 최고 하층민들이 자리잡고 잇습니다. 그들은 기적 이야기의 운반자요 사실 이런 기적 아니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이런 기적만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 앞에는 식민지 지배계급의 상층 여인이 간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보자마자 그 당시 유대인에게 흔한 민족적 감정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민중과는 달리 사유를 묻지도 않으시고 거절하십니다. 그것도 평소 소신과는 다른, 흔히 유대인이 생각하는 대로 강한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
거절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절당한 경험은 평생 우리를 따라다니며 정신적으로 우리를 흥분시키고 괴롭히는 기억이 됩니다. 돈이나 물질은 금방 쓰면 없어지지만 거절당했던 좋지 않은 경험은 평생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추측해 보긴 했으나 아무튼 무슨 이유인지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당당하게 그 거절을 뚫고 나갑니다. 여기에 이 여인의 믿음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면전에서 모욕하십니다. 그를 “개들”이라고... 이 대화만 보면 예수님께 실망감이 들 정도로 상대를 무참히 모욕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시험해 보느라고 그러셨겠지요(! ?) 그러나 이 여인은 이러한 모욕도 뚫고 나갑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8절) 예수님이 모욕하려고 했다가 굉장한 펀치를 맞습니다. 이 말에 담긴 인간의 폭이나 인격, 겸손, 적대감 없는 평안하게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을 대하는 말이 강하게 예수님의 마음을 새롭게 열어갑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유대인의 민족감정으로 그를 대했을 지 모릅니다. 역사의 정의감, 계급적 분노, 오랜 착취에 한이 맺힌 식민지 모순, 그 마음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념적, 계급적, 역사적 한이 이 여인을 한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의 어린 딸을 위해 간청하는 한 어머니로 보지못한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으십니다. 예수님은 사회적 관념에 의해 순간적으로 기울어진 마음을 회복하셨습니다. 어떤 생각에서든지 그것이 올바른 역사의 인식이건 정의감이건 한 인간의 가치를 왜곡시키고 홀대해 보게 하는 것은 정당한 사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런 것에 의해 가장 소중한 인간의 가치를 보지 못하고 지나갈 뻔했습니다. 더군다니 지금 이 여인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어린 딸이 귀신들린 것을 고쳐달라는 인도적이고 생존적 간청인데 예수님은 자신이 그것을 이념적 갈등을 앞세워 판단했다는 오류를 금방 깨달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람들 사이의 믿음은 존경할 만한 것이 있을 때, 존경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믿음은 “~할 만한” 조건들을 뛰어넘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계산되어서 해볼만하니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도덕적 판단을 뛰어넘어 믿습니다. 키엘케골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단계는 믿음으로 사는 단계, 신앙의 단계라고 합니다. 그런 예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사건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칠 때 그날 하나님의 명령을 듣자마자 바로 아들을 바친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는 아주 담담하게 “사흘길을 걸어서 모리아로 갔다”라고 말합니다. 나귀에 장작을 지우고 제물로 바칠 아들과 단둘이 사흘길을 걷는 동안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 까요? 그의 마음 속에 가장 큰 어려움은 아마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일 겁니다.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에 별과 같이 많은 후손,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그를 75세 되는 나이에 그의 고향을 떠나 광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겨우 백세가 되어서야 아들 하나를 주시더니 이제 그가 한껏 귀여움을 받을 무렵 그를 아버지의 손의 제물로 잡아 바치라는 부도덕한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하나님을 믿을 모든 이유가 끝장났습니다. 아 이런 하나님께 내가 이제 까지 속아서 살았다. 이 따위 부도덕한 명령을 즐기는 하나님을 내가 신뢰하며 이 광야까지 나왔다니.... 그는 언제라도 돌이킬 수 있는 발걸음을 한걸음 한걸음 그렇게 사흘길 다가서 그 아들을 제단에 놓고 칼을 빼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모든 도덕적 이유가 다 끝장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힘이 그를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들었을 까요? 바로 그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이유가 다 끝장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인간의 모든 조건, 모든 계산을 뛰어넘는 무조건적인 관계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믿음의 단계의 삶입니다.
요한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일서에서 보는 대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겠느냐는 말씀에 따라 형제사랑은 곧 바로 하나님 사랑이라는 도식을 내세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서로 주고 받는 영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과는 다른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한 최소한의 선행 그것은 서로 영광을 주고받는 차원입니다. 이 상호적인 믿음, 사랑, 영광은 어떤 의미로든지 서로의 교환가치가 균등을 이루는 관계일 때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것을 초월합니다.
창15, 6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도덕적으로 올바릅니까? 짧은 창세기 본문 중에도 그렇지 않은 여러 가지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군주들에게 자기 부인을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서 몸 시중-동침을 시킵니다. 이런 부도덕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이삭을 보기 전에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봅니다. 그건 문제도 아니고, 이삭이 태어나자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 쫒습니다. 그래도 자기 아들을 내 쫒으려면 종이나 재산을 딸려서 그가 살수 있게 해서 내어 보내야 할텐데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런 보호장치없이 단둘이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물병하나 들려서 죽음의 광야로 내어몹니다. 하갈은 물이 떨어지자 차마 어린 아들이 죽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어 죽어가는 아이를 내려놓고 화살 쏘아 떨어지는 길이 만큼 떨어져 하나님께 울부짖습니까? 얼마나 한스럽고 그때 얼마나 아브라함이 원망스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시는 기준이 의의 분량이 아니고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기준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전적으로 새롭게 판단하십니다. 의인의 표적은 “믿음”입니다.
아까 하나님 믿음이 사람의 믿음과 다르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인간의 관계를 한계지워 놓고 그만큼만 대해야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담론, 하나님 이야기,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한 고백이지만 이 고백들은 보이는 모든 것의 관계를 뚫고 그것을 새롭게 하며 전적으로 보이는 세계들의 한계를 뛰어넘어 혁명하며 개선해 가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적인 것은 비과학적이거나 허무한 이야기들이 아니고 현실을 개혁하는 상상력이며 지금 있지 않은 새 세계를 현실로 불러들이는 혁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는 그것이 사람에게 나타나 확장되어야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의 깊이는 어렵지만 인간들 사이에 계산을 넘는 신뢰관계, 믿음의 관계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남을 인정하고 칭찬하면 좋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나 칭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믿음이 있지 않으면 절대로 그렇게 못합니다. 마음에 준비가 안된 사람은 남을 칭찬하면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마지못해 칭찬하고도 반드시 한마디 사족을 갈고리 처럼 달아서 걸어넘어집니다. 정말 남은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 겸손할 수 없고 칭찬할 수도 없습니다. 이 여인 처럼 모역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상아래 개일지라도.... ”이런 말을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겸손과 믿음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습니까?
안효관 목사
여러분! 존 밀턴, 세르반테스, 베토벤, 루스벨트 대통령, 랜스 암스트롱,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나라 사람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강영우 박사, 피아니스트 이희아, 시인 송명희, 이분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분들은 모두 장애를 가졌지만, 그 장애를 뛰어넘어 남들보다 더 위대한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 영국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실명한 후에 『실락원』이라는 12권으로 된 대 서사시를 썼습니다.
-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는 젊었을 때 오스만 제국의 투르크인들과 싸우다가 가슴에 2번의 총상을 입었고, 3번째 입은 총상으로 평생 왼쪽 팔을 쓸 수 없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스페인 최고의 작가가 되었습니다.
- 우리가 잘 아는 음악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인 청각장애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후에도 교향곡 9번 ‘합창’과 같은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은 39세에 소아마비에 걸려 하반신을 못 쓰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미국에서 유례가 없는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 1971-)은 미국의 사이클 선수입니다. 그는 고환암과 세포 종양이 뇌와 폐로 전이되는 악성 질병에 시달렸지만, 그 고통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의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대회에서 7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어느 누구도 세우지 못한 대 기록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린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장애를 뛰어넘은 사람은 굉장히 많습니다.
- 우리나라의 강영우 박사(1944-)는 중학교 1학년 때 공에 맞아 실명한 시각장애인이지만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보좌관을 역임했습니다. 지금은 UN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과 루스벨트재단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1985-)는 손가락이 네 개 밖에 없는데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 시인 송명희 씨(1963-)는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만,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수많은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나와는 너무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분들은 비록 장애를 가졌지만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도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애를 장애로 생각하지 않고, 장애를 이기려고 했고 장애를 극복하려 했기 때문에 장애를 이기고 인간승리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장애를 장애물이라고 생각하고 삶을 포기한 사람은 평생 그 앞에 쌓여진 장애물로 인해 한숨 쉬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장애를 장애물로 여기지 않고 뛰어넘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수없이 많은 장애물 속에서도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는 어떤 장애물이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내 인생이 힘들고 고달프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진짜 큰 장애물을 건너 뛴 한 여인이 있습니다. 너무너무 바쁘게 사역하신 예수님께서 좀 쉬시려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그의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많은 박해와 반대에 부딪히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을 마가복음 7:1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 들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 몇 명을 갈릴리에 파견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구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적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7:1-2절에 중요한 동사 2개가 있습니다. “모여들었다가... 보았더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오자마자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두 동사 사이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내려온 사람들이 상당기간 동안 유심히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적을 관찰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건수를 잡을 수 있는 게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제자들이 씻지 않는 손으로 떡을 먹은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반드시 손과 발을 씻은 후에야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정결예식으로 유대인들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정결예법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강력하게 항의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사역하시기가 결코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정당한 사역이기 때문에 부끄러울 것이나 눈치 볼 것이 없지만, 예루살렘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서 배회하고 있다면 갈릴리 사람들이 오히려 더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중앙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조사하러 왔는데, 갈릴리 사람들이 전과 같이 편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땅을 떠나신 것입니다. 쉬셔야 할 필요도 있고, 예루살렘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로 인해 갈릴리 사람들의 마음이 뒤숭숭해져 있던 터라 잠깐의 여백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소문이 덜 나 있는 곳을 택해 북쪽 두로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이스라엘 밖 이방지역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쉬시기 위해서 한 집에 들어가 쉬려 하시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 지역에 살던 그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누가복음 6:17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이미 두로와 시돈이라는 이방 지역까지 예수님의 소문이 났고, 거기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병고침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여인은 예수님을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에게는 귀신들린 어린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귀신들린 사람은 대부분 육체적인 질병과 고통을 동반합니다. 더구나 마태복음 15장에 의하면 이 어린 딸은 “흉악하게 귀신 들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흉악하게 귀신 들렸다’는 말은 귀신들림으로 인해 당한 고통이 아주 극심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딸이 귀신이 들려 고통당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아마도 그 엄마는 자기 딸을 고치기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당을 찾아가서 굿을 해보기도 하고, 자신들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신에게 찾아가서 온갖 정성을 다 들려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딸의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질 뿐입니다. 그런 딸을 바라보며 아픈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갈릴리에 내려가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온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갈릴리에 예수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실 때에 그 말씀에 권세가 있고 어떤 병에 걸렸든지 그분 앞에만 가면 다 고침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그 어린 딸을 데리고 그 먼 길을 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로는 갈릴리에서 약 67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남자 장정이 걸어서 이틀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 거리를 귀신 들려 고통당하고 있는, 몸이 몹시도 여윈 어린 딸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 엄마는 가슴만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자신이 살고 있는 두로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녀는 곧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의하면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바로 예수님을 찾아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가는 그 여인의 마음에는 갈등으로 가득했습니다. ‘내가 가서 예수님께 어린 딸을 고쳐달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실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여인의 그런 갈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진 않습니다. 그러나 26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 여인의 갈등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여인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이 말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예수님께 나갈 수 없는 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에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는 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5장에서는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소개합니다. 같은 사람인데, 왜 마태복음에서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말하고 마가복음에서는 헬라 사람이라고 말했을까? 그건 당시 유대인들이 표현방식 차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백성이 아닌 비 유대인들을 통상적으로 ‘헬라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세계는 헬라문화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동족이 아닌 사람을 통칭해서 헬라사람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그 여인을 헬라사람이었다고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더 설명합니다.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말입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두 단어가 합해진 것입니다. ‘수로’라는 말은 시리아(Syria)라는 뜻이고, ‘보니게’라는 말은 페니키아(Phoenicia)라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수리아의 페니키아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왜 그렇게 그 여인이 이방여인이었다는 것을 강조했을까요? 그건 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오기가 결코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과 그리 먼 도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심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개’라는 아주 모욕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이방인이 유대인인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여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 여인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것 자체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 성에서 예수님이 만난 여인의 입술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가 성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계시던 예수님께서 낮 12시에 물을 뜨러온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건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참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조차 하지 않는 게 당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그것도 유대 남자인 당신이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니 이런 일도 있습니까?’ 하는 뜻입니다.
그만큼 당시에는 남녀구별이 아주 엄격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기에 수로보니게 족속의 이 여인이 유대 남자인 예수님께 찾아간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이 아니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가면서 속으로 많이 갈등했을 것입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면 어떻게 하지? 내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면 어떻게 하지? 나 같은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이 정말 잘한 일일까?’
어쩌면 이 여인은 이방인이라는 게, 그리고 더구나 여자라는 게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데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모든 갈등과 장애를 뛰어넘었습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민족 간에 높여 쳐져 있던 그 장벽, 남자와 여자는 상종하지 않는다는 문화적인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까? 첫 번째는 사랑의 힘이고, 두 번째는 믿음의 힘입니다. 그 여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은 그 어떤 장애물이라 하더라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러나 사랑만 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딸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랬기에 장애물 뛰어넘어 예수님께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랑과 믿음의 힘으로 그녀는 자신의 태생적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장애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에게서 또 한 번의 장애물을 만나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마태복음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여인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자마자 소리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모른 척하고 자신의 길을 가실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계속해서 소리를 지릅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전히 그녀를 모른 척하고 가셨습니다.
보다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여기서 “보내소서.”라는 말은 쫓아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녀는 두 번에 걸쳐 장애물을 만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무관심이 첫 번째 장애물이고, 쫓아버리라는 제자들의 말이 두 번째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장애물 앞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 장애물이 나타났습니다. 그건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건 분명한 거절입니다. 첫 번째 장애물은 좀 낮은 것이었습니다. 그저 무관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장애물은 아주 큰 장애물입니다. 고쳐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역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러자 네 번째 장애물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네 번째 장애물에는 그녀가 뛰어넘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딸을 고쳐주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을 시험해 보신 것이란 사실이 이 말씀 속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는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이방인들을 모욕하며 쓰던 ‘개’라는 말과는 다른 단어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개는 헬라어로 ‘퀴나리온’(κυνάριον)이란 말로, 주인의 사랑을 받는 애완용 개를 말합니다. 우리말로 한다면 ‘귀여운 강아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완전히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애완용 강아지를 방에서 기르긴 하지만 자식들보다 먼저 밥을 주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강아지에게 밥을 주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단어가 “먼저”라는 말입니다. 먼저 자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요? ‘먼저’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그 다음도 있다는 뜻입니다. ‘너는 첫 번째가 아니라 다음 차례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그 말씀을 재빨리 받습니다. “주님, 옳습니다. 상 아래서 먹는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습니다. 그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그제서야 예수님께서 사랑스런 말투로 대답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마태복음에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여’라는 말은 아주 사랑스럽게 부르신 말입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라는 말씀은 시험에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네가 장애물을 잘 통과할 수 있는지 내가 시험해 보았더니 다 통과했다’는 뜻입니다. 장애물에 통과했기 때문에 그의 간청이 응답되어, 귀신들렸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태생적 장애물이 있습니다. 본문의 여인에게는 이방인이라는 것, 그리고 여자라는 태생적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애물을 그녀는 딸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로부터 주어진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관심, 상처를 줄 것 같은 제자들의 막말,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예수님의 말씀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가 가진 사랑의 마음과 믿음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그 장애물은 그녀에게 뛰어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장애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애나 장애물을 제거해 주실 때도 있지만, 더 자주는 그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장애물을 뛰어넘어 더 큰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장애물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애물을 제거해주지 않으십니다.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뛰어넘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자 카프만 여사가 쓴 『광야의 샘』이라고 하는 책 속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에고치 4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누에고치 하나에 바늘구멍만한 구멍이 하나 뚫렸습니다. 그 구멍이 조금씩 커지더니 그 구멍을 통해 작은 나방 한 마리가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오랜 시간 안쓰러워 못 볼 정도로 기를 쓰더니 드디어 나방 한 마리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가뿐하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다닙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그 사람이 다른 누에고치에다가 나방이 좀 더 쉽게 나올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나방은 별 고생도 하지 않고 쉽게 고치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쉽게 빠져 나온 그 나방은 날개를 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얼마 못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나방이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으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나방의 몸에 묻어 있던 체액이 나방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나방의 몸이 가벼워집니다. 그 체액은 나방의 몸속에 들어가 나방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줍니다. 그리고 몸부림을 치면서 날개와 어개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와서 힘차게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론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 때문에 우리는 삶이 힘들다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때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장애물이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신앙을 능력 있는 신앙으로 만들어줍니다.
인생의 장애물이 없는 삶이 축복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이 축복입니다.
강진희 씨를 아십니까?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좋은 그녀의 어머니는 눈물로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이 아이에게 소리를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분명 다른 재능을 주셨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10년 동안 그림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림 공부에 별로 흥미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텔레비전을 보다가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이에게 발레를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큰 장애물에 부딪치고 맙니다. 청각장애라는 태생적인 장애물 말고 인간에게서 오는 장애물이 그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발레 선생님이 ‘듣지 못하는 얘가 무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핀잔을 주면서 발레 가르치기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던 중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무대 위에서 발레를 하는 꿈을 꾸게 되었고, 이 아이가 해야 할 일이 발레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해서 발레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 발레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그녀에게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5번 연습할 때 그녀는 20번씩 연습을 했습니다. 귀로 들을 수 없는 음악을 그녀는 온 몸으로 느끼며 춤을 췄습니다. 열 개의 발톱이 다 빠지고 양 다리의 색깔이 검붉게 변해가는 데도 그녀는 아무렇게 않다는 듯이 참아가며 연습을 했습니다. 너무너무 힘들 때에는 누군가가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 한마디만 했다면 그만 두었을 텐데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인내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녀는 지금 세계에서 단 한 명밖에 없는 청각장애 발레리나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조승미 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이며, 조이 발레 선교단 단장을 맡아 하나님의 사랑을 그의 무용으로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도 새벽마다 그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장애물이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걸려 넘어지라고 우리 앞에 장애물을 두신 것이 아닙니다. 뛰어넘어 더 큰 축복의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장애물을 우리 앞에 두셨습니다.
때로 그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이 힘들거든 하나님 앞에 와 도움을 청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