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미륵사 대원지및 사적지탐방
일시:2023년 5월21일(일) 9시30분~11시
장소:충주시 미륵면 대원미륵사 대원지
주최: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후원:행정안전부
미륵대원, 1000년 잠에서 깨다
1976년,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 절터의 집을 옮기는 과정에서 석물이 나왔다. 미륵대원이 1000년 잠에서 깨어나는 찰나였다. 그 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미륵댕이’라 부르는 논밭이고 집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한 수행자가 암자를 짓고 미륵불에 제를 올렸으나, 미륵의 일부만 보이는 상태였다. 석등도 대부분 땅에 묻혀 있었다.
미륵대원지는 1977~1993년에 발굴되었다. 1차 발굴에서 ‘명창3년 대원사 주지 승원명(明昌三年大院寺住持僧元明)’이라 적힌 기와가 나왔다. 사찰 이름이 대원사라는 게 밝혀졌다. 4차 발굴 때는 동쪽 언덕에서 원(院)이나 역지(驛址), 군사시설로 볼 수 있는 흔적을 발견했다.《삼국유사》 〈왕력〉편에 적힌 ‘계립령금미륵대원동령시야’의 미륵대원이었다. 사찰인 대원사와 관리들의 숙소 격인 미륵대원이 유기적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구획뿐인 경계를 넘어 절터로 걸음을 낸다. 절터는 북향으로 길쭉하게 자리한다. 왼쪽은 낮은언덕이고, 오른쪽은 인공 하천이 지난다. 그 중심에 오층석탑(보물 95호)과 석등(충북유형문화재19호), 석조여래입상(보물 96호)이 일렬로 서서 축을 이룬다. 가장 먼저 부러진 채 누운 당간지주가 반긴다. 발굴 전에는 동네 ‘미자 할머니네 장독대’로 쓰였다고 한다. 끝자락의 연꽃 모양이 눈길을 끈다.
곧이어 비석의 받침돌로 쓰였을 귀부(충북유형문화재 269호)다. 비석은 찾을 수 없는데, 불사과정에서 미처 올리지 못한 채 방치됐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에는 주로 거북의 몸에 용의머리를 새겼지만, 미륵대원지 귀부는 오롯한 거북의 머리다. 규모도 전국에서 손꼽을 만하다.원래 자리에 있던 자연석을 조각해 만들었다. 앞으로 내민 오른발과 살짝 발가락만 보이는 왼발의 모양새가 흥미롭다. 몸에 새긴 또 다른 부조도 재미나다. 왼쪽 어깨 주름 아래 새끼 거북 두 마리가 어미의 등에 기어오르고 있다.
귀부 뒤로는 전각이 있던 터다. 석탑과 석등이 뒤를 잇는다. 오층석탑은 절터의 중심이다. 땅 깊숙이 뿌리 내린 하부 기단은 자연석으로 보는견해가 있다. 석탑과 일직선에 있는 석등과 석조여래입상 역시 자연석기단 위에 들어섰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래서 일직선이지만 정확한직선은 아니다. 그 경우 석탑은 사찰 건축의 출발점이다. 석등은 팔각석등과왼쪽의 사각석등(충북유형문화재 315호)이 있는데, 석등 사이로 보이는 석조여래입상에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석조여래입상이 북쪽을 바라보는 절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마의태자가 서라벌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지었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패망한 나라의 태자가 그만한 세력과 경제력이 있었을 리 만무한데, 미륵불인 석조여래입상이 마의태자의 여동생 덕주공주가 세운 북쪽덕주사의 마애불과 마주 보고 있다는 이야기도 내려온다.
미륵불에 더한 신라인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고려 초기 고구려의 옛 땅을 찾겠다는 신흥국가의 염원을 담았다고도 한다. 인근 마을의 고구려식지명 상모리에서 근거를 찾는다. 하지만 지세에 따라 주봉 월악산을 보고 북향으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의도는 기록으로 남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 그저 중원의 운명이다.
중원은 충주의 옛 지명이다. 통일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충주를 9주5소경의 하나인 중원경이라 했다. 고려 때 충주로 개칭했으나, 오랜 시간 중원부나 중주 등으로 같이 불렸다. 중원은 넓은 들판의 중앙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군웅이 할거하는 격전장으로 종종 등장한다. 충주는 삼국시대에도, 통일신라를 지나 후삼국 때도 가장 첨예한 전장이었다. 무수한 사연과 이야기 또한 거기에서 기원할 것이다.
미륵대원은 사찰의 창건 시기 또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대략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시점으로 추정한다.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가 지었다는 설도 있으나, 고려 태조와 혼인한 충주 유씨 집안에서 창건,불사했다고 본다. 그렇다고 미륵불이 간직한 의미와 가치가 바뀌지는 않으리라. 미륵불은 불교의 부처 가운데 말세에 중생을 구제하러 올 것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담은 부처다.
석조여래입상 앞에는 그 증거처럼 염원이 서린 바위가 있다. 동네 할머니들이 날마다 소원을 빌었다는 바위다. 바위에 쌀알을 놓고 손바닥을 돌릴 때 쌀알이 부서지지 않으면 아들을 낳고, 쌀알이 부서지면 딸을 낳았다고 전한다. 화강암 바위의 손바닥만 한 머리 부분은 반질반질하게 닳아 윤기가 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 그 위에 더해졌을까. 빈 절터가 허전하지 않은 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끝나지 않은 바람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