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에 뜻을 둔 학인(學人)들이 흔히 빠져들기 쉬운 몇 가지 함정이 있다.
첫째는 고전(古典)이라는 함정이고
둘째는 요즘 소위 무슨 싸이트니 카페니... 하는 ‘시장에 나도는 지식’의 함정이다.
고전의 함정이란 대략 몇 가지에서 측면에서 그 피해가 나타난다.
우선 ‘고전(古典)의 맹신(盲信)’이라는 함정이다.
초학자들은 고전을 절대적 그 무엇으로 여기는 치명적 오류를 범하기 쉽다.
물론 고전은 존중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고전이 고전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은,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검증’의 단계를 거쳤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속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진리’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무릇 옛 고전들은 거의 ‘필사본’ 형태로 초본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의 출판 상황에
비하여 엄청나게 열악함을 드러낸다. 자평진전(子平眞詮)만 하더라도 현재는 모두 52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본래의 책 이름 [자평수록삼십구편(子平手錄39篇)]에서 보듯이 원래는 39장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중간에 수많은 내용들이 후학들에 의하여 삽입되거나 변질될 개연성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모든 학습자들은 고전을 대하면서, 그 서책의 내용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 무엇인가를 짚어내야 한다.
그리고 중간에 그 핵심적 내용과 현저하게 상반되는 내용이 나타날 경우,
그 이유와 원리에 대하여 전체 논리와의 인과적 상관성을 상세하게 논하지 않고 있거
나, 아예 언급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대개 후대의 삽입으로 간주해야 한다.
보다 상세한 접근은 소위 ‘문헌비평(textual criticism)'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은 몇 가지의 세분화된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첫째는 판본학(板本學)이다.
판본학은 다시 서지학(書紙學)과 문자학과 문헌제조 및 인쇄술 발달사와 연관되어 있다.
요즘 방송 중에서 ‘진품명품(珍品名品)’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곳에서도 고문헌이나 서예작품을 감정하면서 종이에 대한 문제를
자주 거론하는 것을 독자들도 보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이(紙)도 시대에 따라서 그 質과 제조방법이 다르게 되며,
특히 서책인 경우 인쇄에 사용된 활자(活字)의 모양과 특성이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감정가들은 그것을 주목하여 출판 년대를 추적하게 된다.
특히 문자학은 아주 정밀한 세분화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계문(契文: 胛骨文), 금문(金文: 鐘鼎文), 주문(籒文: 대전大篆), 전문(篆文:소전小篆),두문(蚪文), 고문(古文),
석문(石文), 고새문(古璽文: 도장에 쓰인 글자), 예서(隸書),해서(楷書) 등의 상세한 분류를 거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서기 6~7세기 이전에는 ‘얻을 득’이 지금처럼 “得”이 아니라 “淂”으로 쓰여지고 있는데,
만약 淂으로 쓰여진 책이 있다면 그것은 대개 6~7세기 이전의 책으로 보면 된다는 등
의 소위 지식고고학적 학문체계를 총 망라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현존하는 수많은 서책들은 당시의 열악한 출판환경에 비추어 필연적으로 후대
의 삽입과 덧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斯界에서는 이제 상식에 속한다.
따라서 학습자들은 모름지기 고전(古典)을 대하면서 그 핵심적 주 내용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고전을 확 뒤집어 볼 수 있는 용기와 기백도 지녀야 한다.
또한 고전의 한 글자 한 글자 모두가 ‘완벽한 진리’라는 꿈에서 빨리 깨어나야 한다.
고전의 주요내용들도 엄밀히 보아 ‘한 개인의 사유체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학들의 노력과 연구에 의하여 새롭게 발전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무릇 고전에만 함몰되는 자는 윤택함을 잃은 마른나무 같이 영구히 그 ‘오의(奧義)’를
깨닫기 어려울 것이오, 그렇다고 고전을 무시하는 자 또한 학문의 빈천함과 정저지와(井底之蛙)의
편굴함을 면키 어려운 것이니,모름지기 모든 학인들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중용적 태도를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큰 함정은 근자에 횡행하는 무슨 ‘사이트’니 ‘카페’니 하는 소위
‘시장적 지식(市場的 知識)’의 범람에 빠지는 오류이다. 무릇 이러한 시장에 나도는 지식
이란 대개 별 쓸모없는 것에 불과한 것들이다.
시장에 내놓은 모든 대부분의 지식들은 거의 ‘핵심’은 빠지고 자기과시나 남의 것을 공짜
로 주우려는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혹 누가 후학들에 대한 순수한 자비심의
발로로서 자신이 애써 이룩한 핵심적 비전을 내 보인다고 해도 요체는 빠지기 마련이며,
그렇지 않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질시나 폄하로 인하여 그 빛이 퇴색되어 그 진가(眞價)를 알아보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즉 옥석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오히려 혼란스러움을 겪기 쉽다.
이러한 곳에 나도는 시장적 지식의 큰 특징은 바로 ‘원칙이 없다’는 것에 있다.
모두 ‘느낌과 직관’에 의존함으로써 오히려 후학들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가히 일인인파(一人一派)요 무원칙의 범람이고, 검증이라는 ‘시간의 테스트’가 결여된
설익은 풋과일과 흡사한 것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기발한 착상’이나 ‘그럴듯한 가설’이 결코 아니다.
수많은 시간의 테스트를 견뎌낸 중량감에서 나오는 흔들림 없는 일관된 지식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같은 스승에게 사사한 문파의 학인들 사이에서도, 소위 용신이 제각각인 것은 물론이고,
본인 스스로도 때에 따라서 그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학문이 학문으로서 갖추어야 할 ‘객관성과 법칙성’이라는 최소한의 조건도 결여하고 있는
이 개탄스러운 현실을 학습자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하며,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어떻게
학습하고 연구해야 할른지는 스스로 궁리하고 연구해야 한다.
스승을 만나거나 서책을 읽는 과정에서 학습자들에게 한 가지만 조언을 한다면....
확고한 논리없이 그때그때 ‘느낌과 직관’이라는 무원칙에 의존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라는 것이다. 느낌과 직관은 ‘학습’에 의하여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시간과 경제력의 낭비로 이어지기 일쑤인 것이다.
염화시중의 미소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배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무릇 학습자들은 고전에서 그 대의를 짚은 후에, 자신의 궁리와 노력으로 이치의 오의를
터득해야 하며, 틀려도 좋으니 우선 확고한 원칙을 세운 다음에 검증의 단계를 거치면서
스스로 터득하는 과정의 반복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확고한 원칙을 세워야만 그 원칙과 다른 경우의 발생에 대하여, 고치고 수정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원칙을 세워놓지 않으면...고칠 방법이 없게된다.
어쩌면...스승과 서책은 그 과정에서의 길잡이일 뿐이다.
#.위 본문 내용중 得과 관련되어 "口"로 표시된 글자는....
좌측의 변이 '마음 심'변으로 된 글자임.
시장적 지식이니뭐니,,고전이니,직관이니 하는거 어떤점이 위험한지 설명 잘 들었구요,.확고한 원칙을 세워야만 그 원칙과 다른 경우의 발생에 대하여, 고치고 수정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원칙을 세워놓지 않으면...고칠 방법이 없게된다___라고 한 부분요,...확고한 원칙이라함은 님은 무얼 뜻하는 겁니까>>? ????@부연 설명 부탁드립니다..그렇게 말하는..과연 님의 말은 입증된건가요?
조주 스님이나, 마조 도일이나 임제나 모두....당대에 이미 " 文字의 정상'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성철 스님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분이 얼마나 치열한 문자의 세계를 거쳤는지 아십니까? 그러나 문자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헤엄치며 건넌 사람에게만 진정한 禪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 공부도 하지 않고 禪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동악재님 39편에 첨가하여 52장을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39편을 나누어서 52장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않나요? 이 글은 전체적으로 좋은 글이네요. 그러나 아래 리플중 염화미소부분은 전생의 인연으로 처음부터 별 공부안해도 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우스같은 수학천재들 처럼요. 그렇다고 조은님께서 그런 분이라는 건 아니구요.
첫댓글 좋은 말씀입니다만..초보들은 그걸 분간할 능력이 없으니 문제군요..오늘날 존경받는 [적어도 숨어계신분은 말고]스승으로 모실분이 계실까요?....
참으로 어렵네요....다 좋은 글 같아서 수집해 놓은 자료가 가득인데...
막지마오~~난 그래도 직관과 철학 다 좋아,,~같이 섞어찌게 할꺼야 누가머래도 갈거에요~.,
무릇 모든 고전은 ...등대와도 같습니다. 그것을 거친 후에야 '직관과 느낌'이 빛을 발합니다. 팔만대장경이라는 엄청난 '언어적 행위(사변적 과정)'가 있은 다음에야....염화시중의 미소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시장적 지식이니뭐니,,고전이니,직관이니 하는거 어떤점이 위험한지 설명 잘 들었구요,.확고한 원칙을 세워야만 그 원칙과 다른 경우의 발생에 대하여, 고치고 수정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원칙을 세워놓지 않으면...고칠 방법이 없게된다___라고 한 부분요,...확고한 원칙이라함은 님은 무얼 뜻하는 겁니까>>? ????@부연 설명 부탁드립니다..그렇게 말하는..과연 님의 말은 입증된건가요?
조주 스님이나, 마조 도일이나 임제나 모두....당대에 이미 " 文字의 정상'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성철 스님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분이 얼마나 치열한 문자의 세계를 거쳤는지 아십니까? 그러나 문자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헤엄치며 건넌 사람에게만 진정한 禪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 공부도 하지 않고 禪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동악재님 39편에 첨가하여 52장을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39편을 나누어서 52장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않나요? 이 글은 전체적으로 좋은 글이네요. 그러나 아래 리플중 염화미소부분은 전생의 인연으로 처음부터 별 공부안해도 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우스같은 수학천재들 처럼요. 그렇다고 조은님께서 그런 분이라는 건 아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