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티 ; 홍차에 도라지위스키 1~2티스푼을 혼합한 차. 가장 맛있는 위티는 단골다방 마담이 영업
시간이 끝난 뒤 새로 온 레지 손에 들려 하숙방으로 보내주는 특별 서비스, 100% 위스키다. -
돌체다방은 개업하자마자 명동의 새 명소로 자리잡았다. 돌체는 클래식 SP판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돌체의 최고 명물은 박기준 시인이었다. 그는 항상 술이 거나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스피커에서 드보르작의 《첼로협주곡 b단조(op. 104)》가 흘러나오면 어푼 넥타이를
고쳐 매고 앞으로 나가 멋진 제스처로 지휘를 했다. 모나리자다방에도 명물이 하나 나타났다. 한복
을 곱상하게 차려입은 무명의 여가수였다. 그녀는 매일 같은 시간에 살그머니 들어와 간드러진 목청
으로 <가거라 삼팔선> 딱 한 곡을 부르고는, 마담으로부터 돈을 몇 푼 얻어 쥐고 나가곤 했다. 그녀
의 신분이나 거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배우 김선영이 명동의 새로운 히로인으로 떠오른 것도 이때였다. 김선영은 낙랑극회 소속의 무명
여배우였는데, 이서향 연출로 무대에 올린 연극 《뇌우(雷雨)》에 여주인공으로 발탁되면서 각중에
명동식구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기 시작했다. 김선영이 비극적인 여주인공 역을 워낙 잘 연기한 덕분
에 시공관은 연일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좌익 인사들에 대한 검열이
점점 심해지자 김선영을 비롯한 좌익 배우들이 한 사람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연출가 이서향은
애인 김양춘을 데리고, 극작가 박영호는 애인 이선희를 데리고 따로따로 월북했다. 뒤를 이어 낙랑
극회 운영자 심영이 홀로 월북했다.
대폿집 명동장과 무궁원도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었다. 두 대폿집은 문을 열자마자 발 디딜 틈이 없
을 정도로 성시를 이루었다. 명동장에는 시인 조병화가 항상 마도로스파이프를 입에 문 채 가장 먼
저 나타나 한쪽 구석에 있는 지정석에 자리를 잡았고, 언론인 이진섭이 뒤따라 들어와 조병화의 맞
은 편 의자에 가 앉았다.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에 곡을 붙여 불후의 명곡으로 탄생시킨 이진섭
은 방송 및 시나리오 작가, 작곡자, 번역가 등 각 분야에 두루 일가를 이룬 팔방미인이었다. 무궁원
에는 오상순의 출근이 가장 빨랐다. 그는 술을 마실 때도, 목욕탕에 들어가서도 불을 꺼뜨리지 않고
줄담배를 피워댔다. 구상‧김광수‧김동리‧김병욱‧김수영‧서정주‧조연현‧조지훈 등도 매일 무궁원을 찾
아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문예빌딩도 문인들의 단골 집합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시인 모윤숙과 평론가 조연현은 해방 후 처음
으로 순수 문예지 『월간 문예』를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잡지사 사무실이 세를 든 빌딩이라 하여
문인들 사이에서 문예빌딩으로 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술 더 떠 빌딩 주인은 지하에 <문예싸롱
>이란 다방을 차려놓고 본격적으로 문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홀이 널찍한 문예싸롱은
여러 문인들의 단골 출판기념회 장소로 자리를 굳혔다.
명동파출소 골목 어귀에 문을 연 신아오뎅집은 여색을 밝히는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박마담은 언제
나 화사한 미소를 띤 채 단골손님과 합석하여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 얘기를 주고받았다. 박종화‧오
종식‧김진섭 등이 박마담을 가장 좋아했다. 세간에서는 이 세 문인을 ‘명동의 3대 주붕(酒朋)’이라고
불렀다. 시인 김광주와 테너 이인범도 단골이었다. 대단한 미남이었던 이인범은 국내 테너 1호 성악
가였는데, 화재로 전신화상을 입어 구사일생 살아났었다. 얼굴에도 화상을 입어 심하게 일그러져 있
었지만, 다행히 성대는 손상을 입지 않아 변함없이 맑고 높은 테너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인범이 연
대 음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나는 운 좋게도 <박태준 음대학장 정년퇴임 기념음악회>에서 그 분
의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김수영 시인이 충무로 4가에 방을 얻어 독립해 나와 살 때였다. 그는 방들이 겸 송년회를 하자며 친
한 문인들을 방으로 초대했다. 한창 술판이 벌어져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 목소리를 높여 언
쟁을 벌이는 사람, 삼이웃이 시끄러울 정도로 떠들어대고 있을 때였다. 체격이 남산 절반만 한 사람
이 문을 벌컥 열더니 식식대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세를 든 방이라고 하지만 야심한 밤에 이웃 생각도 해야지, 무슨 문화인들이 이리 소란이
요?! 새벽바람에 트럭 운전을 나가야 하는데, 이거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집 주인이었다. 트럭 운전을 한다는 말에 미국 물을 먹은 박기준 시인이 나섰다.
“미국에서는 트럭 운전사가 최고의 문화인 대접을 받습니다. 트럭 운전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직
업이니 분명 문화인 아닙니까? 선생도 우리와 같은 문화인이니 이해를 좀 해주시구려.”
금방 누구와 멱살잡이라도 할 것 같던 집 주인의 표정이 문화인이라는 한 마디에 금세 환하게 누그
러지더니 허리를 굽혀 방바닥을 짚어봤다.
“문화인들이 처음으로 모여서 노시는데 방바닥이 이렇게 차서야 쓰나. 내 장작 가져다가 군불 좀 지
펴드리리다.”오래지 않아 방바닥이 뜨끈뜨끈해졌고, ‘문화인’들은 밤을 새워 마음놓고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100세에도 바깥활동을 하시던 박용구 옹
이즈음 모든 명동식구들의 최대 관심사는 평론가 박용구의 행방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낙화암으로 간다’는 밑도 끝도 없는 편지 한 장을 남겨놓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박용구는 영주
풍기 사람으로 왜국에서 고등음악학교를 나왔는데, 실인즉 이승만 정권의 지식인 탄압이 싫어서 친
구들이 많은 왜국으로 밀항했던 것이다. 1960년에 귀국한 박용구는 한국 최초의 뮤지컬악단 ‘예그
린’을 설립하여 단장을 맡는 등 국내 음악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우리나라에 팬클럽을 도입하고 한
국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희곡과 오페라 대본을 집필하여 문화
예술 발전에 큰 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박용구 선생은 100壽 기념잔치 때도 정정한 모습을 보이는
등 102세까지 장수를 누리셨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처가쪽의 일로 부산을 며칠 다녀 옵니다. 과거보러 한양천리 라는 옛말의 행로가 멀기만 하였지만 과거도 급제한 인생역전의 행운도 있었기에 잊혀지지 않는 험난한 산길 이었습니다. 부산까지 불과 2시간 몇십분의 고속철, 이 구간은 거의 터널과 산속을 지나는 터널이어서 창밖의 풍경이 별로 없습니다. 매봉역 근처 양재천변의 벚꽃과 개나리가 어울린 풍경이 가득합니다.
좋은 하루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