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지루한 장맛비가 내리더니 어제부터는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진짜여름 맛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날씨가 돌아왔나 봅니다. 이런 더운 날이면 잘 익은 작은 수박 한 덩이 들고 사람들이 들끓지 않는,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의 나무그늘을 찾아가서 새끼폭포 두어 가닥이 사이좋게 졸졸과 콸콸의 중간음을 내며 미끄럼을 타는 그 아래 끄트머리쯤에 수박덩이의 고삐를 풀어놓고 바지를 걷어 올려 물에 발을 담그면 피라미의 새끼들이 처음 보는 사람의 다리가 너무 신기해서 다리 곁으로 모여들어 다가올 듯 말 듯 망서리다가 나증에는 입을 삐쭉 삐쭉거리면서 간지럼을 태우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경개(景槪)에 마음을 빼앗기면 내 자신을 잊어버리는 무아지경에 빠져버리지 않겠습니까. 이 순간이 바로 우리가 가야할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하고 싶기도 합니다. chang.
조선일보 [일사일언] “고등어의 뜻이 뭔가요?”
이진혁 출판편집자
간혹 이런 종류의 문의를 받는다. “방금 시집을 사서 읽었는데, 그 시에서 ‘고등어’가 뜻하는 바가 도대체 뭡니까?” 고등어란 고등엇과의 바닷물고기로 등에 녹검색 물결무늬가 있고 배는 은백색이며 구워 먹어도 조림을 해먹어도 얼마나 맛있는데요,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떠듬떠듬 설명을 시작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꼭 한 가지 해석만 있는 게 아닙니다. 독자분께서 읽고 느끼신 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오기 일쑤다. “아니, 정해진 뜻이 있을 게 아닙니까. 정답이 뭡니까?” 물론 다음과 같은 해설을 바라고 한 말일 터다. “고등어는 가난한 화자의 처지와 그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한 끼 식사를 책임지는 양식으로서 ‘위로’를 뜻하며, 고등어의 푸른색을 봤을 때 ‘생명’을 뜻하기도 합니다.” 듣는 입장에서는 만족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답은 불가능하다. 시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시를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 점점 힘들다. 이유가 뭘까. 시를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큰 원인은 시의 교육 방식에 있다. 우리는 비유, 상징, 운율 등 수사학적 지식 위주로 시를 배워왔고, 밑줄을 쳐가며 시어의 의미를 외워왔다. 가령 김수영의 ‘풀’은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민중의 저항 정신을 품은 詩로만 가르친다. 읽는 이가 자유롭게 시를 읽고 느낄 틈이 전혀 없다.
‘시, 재미도 없는데 안 읽으면 그만 아냐? 요즘 볼 게 얼마나 많은데’라는 반문도 있겠다. 물론 점점 더 난해성을 더해가는 요즘 시를 생각하면 그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한국어의 어휘 보존과 다양성 확보에 시가 기여하는 바를 생각하면 뒷맛이 씁쓸하다. 거기다 시는 짧은 시간에도 독서가 가능한, 요즘 시대에 맞춤한 장르다. 그 재미를 많은 이들이 누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겠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까. “방금 시집을 읽었는데, 고등어가 ‘모성’을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런 연락이라면 언제든 즐겁게 응할 자신이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