尸解仙시해선 백운자 사마승정(司馬承禎)
서예와 학문에 일가를 이루다.
唐代(당대) 도사 司馬承禎(사마승정)은 자가 子微(자미)인데 학문이 깊고 넓었으며, 그의 문장 또한 준수하고 아름다웠다. 書藝(서예)에 뛰어났고 특히 篆書(전서)를 잘 썼는데 독특하면서도 특이하여 스스로 하나의 문을 이루어 그의 글씨를 金剪刀書(금전도서)라고 하였다. 일평생 동안 名利(명리)에 초연했고, 道術(도술)에 심취하였으며 기를 단련하여 금단을 이루는 煉氣服藥(연기복약)의 묘술을 터득했다.
天台山(천태산) 옥소봉에 은거하여 만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수련하였다. 자기 스스로 別號(별호)를 지어 "白雲子" (백운자)라고 하였다. 당나라 女皇帝(여황제)인 則天武侯(측천무후)가 일찍이 사마승정의 크나큰 명성을 듣고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장안으로 불렀으나 종래 산을 내려오지 않았다.
당나라 예종에게 도를 설파하다
그 후 당나라 睿宗(예종)이 道敎(도교)를 숭상하였는데, 다시 사마승정에게 특별히 정중하게 예를 표시하며 장안으로 와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때 사마승정은 당 예종의 道心(도심)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처음으로 장안에 왔다.
사마승정을 만난 예종은 陰陽術數(음양술수) 등에 대한 깊고 현묘한 도리들을 물었다. 사마승정은 예종에게 그 깊은 묘리를 쉽게 설명했다. 老子(노자) 道德經(도덕경)을 인용하여 "조금 덜어내고, 다시 조금 덜어내면 곧 아무 것도 없는 것에 도달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것, 알고 있는 것은 이미 너무 많습니다. 설사 조금씩 덜어낸다 하여도 다 덜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아있는 精力(정력)이 없어 이단을 배척하고 지혜를 증가시킬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예종은 이 말의 요점을 알아듣고는 이어서 물었다. "선생께서 주장하시는 몸을 잘 길러(養身:양신)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것(無所作爲)을 귀중하게 여긴다는 이것은 확실히 매우 높고도 맑은 것입니다. 다만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도 作爲(작위)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가능합니까?"
無爲(무위)여야만 큰 정치가 가능하다
사마승정은 대답하기를 "修身(수신)과 治國(치국)의 도리는 똑같습니다. 도덕경에서 이르기를 "마음이 평안하고 담담하면(心情恬淡 :심정념담) 정신의 상태 또한 안정됩니다." 만사만물이 모두 그 자연스러움에 따르고 추호의 사심이 없이 할 수 있으면 국가도 큰 다스림(大治 :대치)을 이룰 것입니다. 易經(역경)에서는 성인의 성품과 덕은 천지와 같습니다. 천지가 비록 말은 하지 않지만 매우 신용이 있습니다. 비록 인위적으로 하지 않지만 만물을 잘 자라게 합니다. 이로 보건대 無作爲(무작위)의 법칙이야말로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임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예종은 이러한 높고 깊은 사마승정의 가르침을 극찬했다. 그리고 사마승정에게 관직을 내려 붙잡아 두려고 하였으나 그는 결연하게 사양하였다. 장안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마승정은 예종에게 이별을 고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예종은 사마승정에게 진귀한 거문고와 화려한 비단옷 등을 선물로 내려 전송하였다. 조정의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도 예종의 체면을 고려하여 앞 다투어 시를 지어 사마승정의 떠남을 아쉬워하는 척하였다.
송별시 "백운기" 널리 읽혀
司馬承禎사마승정이 당 예종의 부름을 받아서 長安장안에 왔다 天台山천태산으로 돌아갈 때 朝廷조정의 벼슬아치들이 送別詩송별시를 지어 이별을 아쉬워했다. 이때 常侍상시 벼슬을 하던 서언백이 이 시들을 모아서 그들 가운데 잘된 30여 편을 가려 뽑아 제목을 "白雲記"백운기라 하고 몸소 머리말을 쓰고 책으로 엮었다. 이 책은 그 당시 식자층에 널리 퍼져 읽혔다고 한다.
사마승정을 전송한 사람 중에 盧藏用노장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원래 그는 이름난 隱士은사로서 終南山종남산에 은거하였다. 그 명성이 대단하여 황제가 조서를 내려 장안으로 불렀다. 이 노장용이 산을 내려오자 조정에서는 바로 높은 벼슬을 내렸다. 노장용은 사마승정이 장안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천태산으로 가려 하는 것을 보고 장안 가까이 있는 종남산을 가리키면서 "아 종남산에도 좋은 곳이 많이 있는데 하필이면 천태산으로 돌아가려고 합니까?"하였다.
이에 사마승정이 천천히 대답하였다. "내가 보건대, 종남산은 벼슬아치가 되는 하나의 지름길일 뿐이다." 이 말을 들은 노장용은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듯이 얼굴이 붉어졌다.
중원 오악에 사당을 건립하다
唐 玄宗 당 현종이 황제에 즉위하자 더욱 도술을 숭상하였다. 여러 차례 사마승정을 불러서 내전에 머물게 하고 일체 접대 예절이 주도면밀하여 소홀함이 없었다고 한다. 현종은 시간이 날 때면 늘 사마승정에게 수명을 연장하고 인간세상을 제도하는 秘訣비결을 묻곤 하였다. 사마승정은 아주 현묘하고도 정미하게 설명했고 이를 듣는 당 현종도 마치 무엇을 깨달은 듯하였다.
한번은 현종이 泰山태산에 올라 封禪봉선 행사를 마치고 궁중으로 돌아와 사마승정에게 "五岳오악(남 형산, 북 항산, 서 화산, 동 태산, 중 숭산)은 어떤 신이 주관합니까?"라고 물었다.
사마승정은 "거대한 산을 바로 岳악이라고 부르는데,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며 神仙신선을 능히 숨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산의 仙官선관이 주관합니다. 태상노군께서는 산신들이 권세와 복덕을 망령되게 이용하지 않을까, 또 살아있는 生靈생령을 살해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높은 신선들에게 명산대천을 잘 감독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五岳眞君오악진군이 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으나 靑城丈人청성장인이 또한 이들 오악의 우두머리입니다. 응당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올려야 합니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당 현종은 조서를 내려 오악의 산꼭대기에 오악진군을 모시는 사당인 眞君神廟진군신묘를 건립했다고 한다.
尸解仙시해선을 하다
사마승정은 천태산에서 성심성의를 대해 부지런히 수련하여 일백여 살까지 살았는데, 童顔鶴髮동안학발이었고 신체는 건강하고 민첩하였다. 그곳에서 70여 명의 제자를 거두어 도술을 전수하였다. 어느 날 하루 제자들에게 "나는 이곳 천태산 옥소봉에서 수행한 이래, 동쪽으로 蓬萊仙山봉래선산을 바라보면 늘 신선들이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지금 동해 靑童君청동군, 東華君동화군께서 나를 소환하는데 나는 곧 인간세상을 떠나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숨이 끊어져 죽었다.
마치 금 매미가 껍질을 벗듯이(金蟬脫殼:금선탈각) 尸解仙시해선을 하였다. 제자들은 사마승정의 의관만 관에 집어넣고 성대히 장례식을 거행하였다고 한다.
[출처] https://blog.naver.com/wndeh9876/222850811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