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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묵상글 (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 하느님 체험의 단계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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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 체험의 단계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
간땡이가 붓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면, 망령이 단단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임금의 초대를 그리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진정 그들의 임금이었다면 그 신하나 백성이
임금이 초대한 아들의 혼인 잔치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을 우습게 생각한 것이고 아무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비유를 생각하며 우리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성찰했고,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한다면 우선 두려움의 하느님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지혜의 시초라고 했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겸손으로 인해 하느님 두려워할 줄 안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하였는데
큰 시련을 격음으로 인해 그 교만이 깨어지고 자기의 한계를 체험할 때
비로서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다음의 하느님 체험은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나는 너무도 미천하며,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나는 너무도 죄인이며,
하느님은 지극히 영광스러우시고 나는 너무도 초라합니다.
그러나 이런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런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초대하심을 대단한 영광으로 삼는 겁니다.
그다음의 하느님 체험은 사랑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은 크고 두려우시며, 높고 영광스러운 분이실 뿐 아니라
참으로 자애와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심을 더 나아가 체험하는 겁니다.
아버지 같으신 하느님에 어머니 같으신 하느님 체험까지 하는 거지요.
하느님의 이 사랑을 사랑하는 우리는
하느님이 보고 싶어 달려가고,
그리워서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그다음은 기쁨과 즐거움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이 어머니의 품처럼 그립고, 편할 뿐 아니라
세상 어떤 것보다도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세상 그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분이십니다.
이때의 하느님은 아마 연인과 같은 하느님일 것이고
이때에는 하느님께 기쁘고 즐겁게 나아갈 터인데,
솔직히 저는 이 정도의 하느님 체험은 아직 못했고,
성인들이 그러한 것을 보고 짐작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예복을 입지 않음에 대해서도
그 뜻이 무엇일까 짐작해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그러니 혼인 잔치에 먼저 초대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이고,
나중에 고을 어귀 길거리에서 초대된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리고 먼저 초대된 이스라엘 백성이건 나중에 초대된 이방인이건
하느님의 구원 잔치에 초대되었다면 그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하는데
그 예복이란 것이 바로 우리의 합당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마음가짐이란
하느님께 대한 합당한 두려움이요,
‘황공무지로소이다!’라고 할 때의 그 마음이요,
어머니에게로 갈 때의 그 그리움과 편안한 마음이요,
연인에게 달려갈 때의 그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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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주일 오후, 한가하게 텔레비전을 보며 쉬고 계시던 형제님께서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휴대전화에 자기를 뭐라고 저장했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아내 휴대전화가 앞에 있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술 단지’라는 호칭이 아내의 휴대전화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인생의 동반자이자 아이들의 아버지를 술 단지라고 부른다는 것에 너무 화가 났고 그런 아내가 너무나 얄미웠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얄미운 여자’라고 바꿔서 저장했습니다.
며칠 뒤, 아내가 이를 알아챘나 봅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울며 따지기 시작합니다. 스물여섯 살에 시집와 이사만 열네 번씩 하며 어렵게 아이들을 키웠는데, 어떻게 그 많은 호칭 중에 ‘얄미운 여자’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었지요. 남편 역시 자기도 할 말이 없지 않다면서, ‘술 단지’ 호칭에 대한 말을 꺼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큰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휴대전화에 저장한 호칭 하나로 가정에 불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남편은 그 순간에 화가 많이 났지만, 자기가 속 좁은 모습을 보였다고 반성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에, 연락처 속 아내의 호칭을 ‘평생 고마운 사람’이라고 바꿉니다.
며칠 뒤, 아내가 저장한 자기의 호칭을 우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오직 한 분’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말이 절대 틀리지 않는다면서, 요즘에는 서로 좋은 말만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말을 주고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이익과 편리를 생각하면서 때로는 상대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면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늘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주님께 우리는 과연 무엇을 봉헌하고 있을까요? 받는 것만 당연하고, 더 나아가 받는 것에도 불평불만으로 원망의 기도를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많은 사람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잔치에 참석하기는커녕 몹쓸 짓만 합니다. 그들을 벌하고 다른 사람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풀지만, 이 중에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혼인 잔치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혼인 잔치에 오지 않은 사람,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모두 임금의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무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미래는 밝지 않습니다. 혼인 잔치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면서 혼인 잔치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작은 물방울 같은 각자가 모여 세상을 만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강한 연대감을 느낀다(아키코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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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전례는 ‘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잔치’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는 구원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상하게도 이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고도 응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심부름꾼들마저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과 응답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응답하지 않은 이들에는 또 다시 두 부류가 있으니, 자신들의 생업을 핑계 삼아 응답하지 않은 이들과 심부름꾼들을 붙잡아 때리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박해자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먼저 하느님께 초대를 초대받았으나 응답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선택받았으나, 세속적인 탐욕과 진리에 대한 곡해로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임금은 말합니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이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마태 22,8-9)
이는 하느님의 초대에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의 초대는 인간적인 기준으로서의 선악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자비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은 설령 초대에 응답했다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지 않으면 잔치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 때 대문에다 ‘예복’을 미리 준비해두었고, 손님들이 ‘예복’을 입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을 모독하는 태도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응답한 이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곧 ‘예복’을 입은 이와 입지 않은 이입니다.
그렇다면, 초대받은 자가 입고 들어가야 하는 예복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렇습니다. ‘아버지 뜻의 실천’이 곧 ‘예복’입니다. 그러니, ‘오늘 당장’ 우리는 ‘아버지의 뜻의 실행’이라는 ‘예복’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초대는 먼 훗날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벌어지는 초대인 까닭입니다. 하늘나라의 잔치 역시 먼 훗날의 벌어지는 잔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잔치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의 ‘예복’을 갈아입고 이 은혜로운 잔치에 참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습니다.”(마태 22,14).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어서 혼인잔치에 오시오.”(마태 22,4)
주님!
당신의 초대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양팔 벌려 보듬게 하소서!
시대의 질곡과 고통을 기꺼이 온 몸에 걸치게 하소서!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는 빛나는 예복을 차려 입게 하소서!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당장 실천의 예복을 차려 입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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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혼인예복은 마음의 옷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랫동안 관심과 사랑으로 배려했던 이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이된 일입니까? 믿었던 이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오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기에 풍성하게 준비를 했는데 즐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쳐 그들의 속을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급기야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여 잔칫방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받은 은혜보다도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그들은 당장 내가 먹고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가 아니어도 축하객이 많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잔치는 매우 성대하였고 귀한 선물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초대 받은 사람은 핑계 아닌 핑계를 댐으로써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물을 차지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초대 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선택된 사람은 적었고 이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하는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묵시록 3장20절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드리는 역할은 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잔칫집에 가려면 그에 걸 맞는 예복을 입어야 하듯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배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이다.” 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헛배가 부르면 정말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헛배가 불러 다른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미사참례, 성지순례, 피정이나 세미나, 교육,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지만 그래도 기도시간을 챙겨야 합니다. 영적인 풍요로움을 찾지 않는다면 갈수록 영혼이 메말라 신앙이 죽게 됩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심지어 죄를 범하는 경우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도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한다면 그는 결국 뽑힌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예복도 없이 천상을 갈망한다면 허황된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교부들은 혼인예복을 사랑, 선행, 의로움의 실천으로 해석했습니다. 혼인예복은 마음의 옷이며 마음을 어떻게 가꾸었느냐에 따라 아름다움이 더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3,5-6). 혹 준비가 미흡하다면 지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회개와 행동하는 믿음의 예복으로 단장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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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뉴욕에 있는 분에게 송금할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카카오 뱅크처럼 미국에도 간편하게 송금할 수 있는 ‘벤모와 젤’이 있습니다. 수수료 없이, 소액을 송금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송금의 한도가 있습니다. 저는 송금 한도가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몇 번에 걸쳐서 송금하니, 은행에서 온라인 뱅킹을 막았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해결하려 하니 복잡했습니다. 은행에 가서 이야기하니,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은행을 통해서 송금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같은 금액을 몇 번에 걸쳐서 송금하려 했을 때, 은행은 제게 전화도 하고, 문자도 보냈다고 합니다. 제가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은행은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온라인 거래를 막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은행의 계좌는 본인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볼 수 있으면 곤란할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있는 사제관은 게이트가 있습니다. 게이트를 열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알아야 합니다. 단지에서는 비밀번호를 3개월에 한 번씩 교체하고 있습니다. 단지에 있는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무엇이 새 마음이고, 무엇이 새 영일까요? 새 마음과 새 영은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비밀번호’와 같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넣어 주신 ‘숨’입니다. 아담이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먹으면서 상실했던 하느님을 닮은 마음입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려는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려는 사양지심의 마음입니다. 겸손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위치의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이 겸손입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수오지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용서해 주셨고,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하리라.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하리라.” 우리의 죄가 크고, 많아서 하느님께 갈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는 하늘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와 같습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는 시비지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과 교만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을 잘 안다고 했지만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식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탐욕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율법과 계명을 이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과 자캐오의 나눔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세리였지만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식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간다는 것은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기쁨, 자유를 얻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이미 천상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 역시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함께 기도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좋은 선택을 하였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봉사가 주님의 잔치에 함께 할 수 있는 예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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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우리들의 모후이신 마리아는 오늘 복음처럼 하늘나라 잔치에 초대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삶 전체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초대에 응답하신 분이 바로 우리들의 모후이신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많은데 그 초대에 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초대받았습니다. 하늘나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초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것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중에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되지, 지금은 돈 벌어야 하니까, 지금은 아이들 키워야 하니까. 지금은 공부해야 하니까.
이렇게 세상 것을 바라보느라 하늘나라 잔치에 응답하지 않으면 그 초대는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성실히 초대에 응답하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또한 응답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초대에 꾸준히 그리고 성실히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의 초대와 그 응답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잠시 오늘 하루를 통해 나의 응답을 되돌아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모님 삶 전체에 드러난 응답의 모습을 살펴보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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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봤어~~~
두 달 전쯤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인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그곳 사장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감자가 참 맛있습니다. 이것도 한번 드셔보세요.’
사장님 손에 들려있던 것은 ‘감자전’이었습니다.
사실 감자전을 떠올리면 고소함과 조금의 느끼함입니다.
그런데 그 감자전의 맛은 고소함과 깔끔함이었습니다.
비결은 곱게 다진 청양고추를 전 반죽에 함께 넣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자봤어~~
다음에는 저도 똑같이 해봐야겠습니다.
청양고추를 다져서 안 보이게 쏙~~~
감자봤어~~
그 감자전은 꼭 ‘외유내강’의 우리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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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성소;聖召)은 선물이자 과제이다”
예닮의 여정
새벽 일어나 강론 쓰기전 일별해보는 인터넷뉴스와 동영상 제목입니다. 특히 동영상 제목만 봐도 국내외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몇가지 눈에 띈 제목입니다.
“탈영, 병역기피 5만명, 러, 심상치 않은 분위기”
3년째 계속되는 러시아-우크라이나의 무의미한 전쟁에서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음은, 살고 싶음은 젊은이들의 너무나 당연한 욕구입니다.
“시카고 등장한 오바마부부, 연설천재 사자후에 열광, 미셸 오바마 ‘더 높이 가자!’”
미국은 대선 열기로 뜨겁게 달궈지고 있고 오바마 부부의 열정적 연설은 군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습니다. “더 높이 나가자!” 정말 멋진 미셸 오바마의 구호이자 좌우명입니다. 주님께 불림 받은 우리도 주님을 향해 날마다 더 높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밖에도 무수한 국내외 동향을 알리는 제목들이지만 이만 생략합니다.
정말 쏜살같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입니다. 모두가 지납니다. 휴가 떠난 형제들도 순식간에 돌아오고, 2주 단위의 머리깍기도 순간입니다. 1주일도, 한달도, 봄-여름-가을-겨울 1년도 순간입니다. 흡사 기차타고 떠날 때 창밖 지나는 풍경처럼 그렇게 세월은 흐릅니다. 며칠전 서울 대교구 젊은 사제가 57세병환으로 선종했다는 소식이었는데, 어제 또 38세의 젊은 사제가 병환으로 선종했다는 소식입니다.
오랫동안 정주의 삶을 살다보니 세월의 흐름도 보입니다. 36년이 훌쩍 지나니 많은 형제자매들이 세상을 떠났고, 젊었던 수도형제들도, 꽃같이 젊었던 봉사자 자매들도 노년의 가을, 또는 겨울 인생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새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죽어야 하나? 자문하게 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정말 소중한 선물이자 동시에 과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삶의 지침이 됩니다.
“몸의 평안함은 애써 추구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착한 본성에 따라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다.”<다산>
“좋은 맛을 구하고, 미색을 구하고, 편안함을 구하는 것은 본성이다. 하지만 지켜야 할 천명이 있으므로, 군자는 본성이라 하지 않는다.”<맹자>
한마디로 각자 주어진 성소에, 천명에 충실할 때 저절로 몸의 평안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특히 믿는 우리들의 삶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 여정중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삶은 선물이자 과제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라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은 뚜렷합니다.
역설적으로 성소에 충실히 응답하여 주님을 닮아갈수록 참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참나로 익어가는 삶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세월의 흐름은 정직하고 자연스러워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니 배밭에서도 서서히 과일 익어가는 푸근하고 넉넉한 열매 향기가 납니다. 봄의 꽃향기보다 더 그윽하고 깊은 열매 익어가는 향기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계속되는 성인 기념일입니다. 엊그제의 성 베르나르도, 어제의 성 비오 10세, 그리고 오늘은 동정 마리아, 모두 선물이자 과제 인생을 100% 성공적으로 살아낸 성인들이며 오늘 기념하는 성모님은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의 유래를 나눕니다. 모후란 임금의 어머니를 말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임금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이심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시고 성모 마리아는 왕의 어머니가 됩니다. 1954년 비오 12세께서 제정하고 반포한 교서의 내용입니다.
“‘그의 아들이 왕이 되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된다.’고 했던 천사의 말씀과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부른 성경 구절을 기초로할 때, 이 두가지 성경은 당신 아들의 왕권 때문에, 마리아 역시 그에 상응하는 위대성과 탁월성을 갖고 계심을 보여준다.”
1925년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지정된 이후부터 성모 마리아가 왕의 어머니시라는 축일도 정해져야 한다는 요청이 쇄도했고, 비오 12세는 “하늘의 여왕께” 라는 회칙을 통해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했고, 1954년 성모성년의 폐막식을 기념하여 선포한 축일로 교황 비오 9세가 1854년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마리아 대축일’을 선포한지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으로 당신 성소의 선물을 100% 과제의 완성으로 살아냈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어제에 이어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어제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였고, 오늘은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새삼 우리 인생을 혼인잔치 하늘 나라 축제인생임을 깨닫습니다.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축제인생 혼인잔치에 초대 받은 이들은 무지에 눈이 멀어 한결같이 이러저런 핑계로 거절하고 혹자는 초대 사절로 온 종들을 때리고 죽입니다. 주님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을 뜻하지만 우리일수도 있습니다. 초대받은 은총의 사실을 잊고 마구 되는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받았다고 보장된 구원이 아니라 날마다 하루하루 하늘 나라 초대 잔치에 응답하여 축제인생을 살아내야 합니다. 선인과 죄인이 함께 공존하는 하늘 나라 우리 교회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하늘나라 교회 공동체내에 몸담고 있다하여 무조건 구원이 아니니 바로 혼인잔치 예복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임금이신 주님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이에게 말합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물으신후,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속으로 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우리에겐 바로 죽음이 심판과 구원의 갈림길입니다. 이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기도하라, 회개하라, 사랑하라 연장되는 삶이요, 살아있을 때 기도요 사랑이요 회개이지 죽으면 다 끝입니다.
혼인예복이 상징하는바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의 책임인 과제입니다. 밀렸다 한꺼번에 과제 다 못합니다. 하루하루 넘어야 하는 첩첩산중의 삶처럼, 하루하루 과제를 다하며 넘어야 하는 산같은 인생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을 적다.” 선물인생에 충실한 과제 이행으로 응답한 이들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택 역시 우리가 스스로 책임의 과제를 다할 때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부르심에 따른 성사의 은총이 우리를 돕기에 도저히 핑계댈 수 없습니다. 에제키엘서에서 약속한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실현되고 있으니 용기백백하여 하루하루 책임의 과제를 이행할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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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때>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그분께서
나를
부르시는
때는
그분께
내가
부르심 받고 싶은
때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부르시고 싶은
때랍니다
내가
그분께
응답하는
때는
내가
그분께
응답하고 싶은
때가 아니라
내게
그분께서
응답받고 싶은
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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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마태 22,3-4)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신자라면 누구나 임금 아들의 혼인과 혼인 잔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식탁은 바르게 참석하고자 하는 이 누구에게나 얼려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거기에 참석히는 것이 허락된 사람일지라도 어떤 식으로 그 자리에 가야 하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주님의 두 가지 잔치 에 대해 알려 줍니다. 하나는 선한 이들과 악힌 이들이 모두 참석하는 잔치고, 다른 하나는 악인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잔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들은 잔치에는 선인과 악인이 모두 와 있습니다. 핑계를 대고 이 잔치에 오지 않은 이들은 악한 자들이지만, 이 잔치에 온 사람들이 모두 선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심판 저는 이 잔치에 온 선한 손님들인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9) 라는 말씀을 새겨 들으십시오.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교회와 동떨어져서 헛되이 선을 찾지 말고 그 안의 악을 참고 견뎌내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여기서 엑카르트는 하느님 나라의 식탁을 신적인 식사의 복과 연결한다. 엑카르트는 하느님 나라를 예수를 따르는 것과 동일시한다. 우리는 이 설교에 인용된 성서 구절을 통해 그가 어떻게 이러한 착상을 떠올리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엑카르트는 행복과 복을 하느님 나라의 잔치와 연결한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의 식탁은 모든 존재가 존재의 터에 마련된 식탁에 둘러앉아 벌이는 공동 잔치와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존재에 환호하면서 이 식탁에 물러앉는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모든 벗이” 이 식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본 설교에서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믿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 가까이 다가왔다고 말한다. 엑카르트가 단수형인 “나”를 강조하지 않고, 복수형인 “우리”를 강조한 것은 반갑고도 신선한 일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엑카르트 시대 이래로 수많은 심령주의적 신학자들이 루카 복음을 지나치게 개인화하여 “내 안에’(with me)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엑카르트는 나와 너, 안과 밖을 가르는 이분법을 버리고, ”하느님의 모든 벗”의 잔치를 더 선호한다. 우리는 셜교 37의 주석에서 이러한 하늘 잔치의 발전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224)
✝️ 목요일 성모님의 날✝️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천국으로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소년의 방에 들어오자 그는 최고의 경의를 다해 영성체할 수 있도록 침상에서 일어나 앉으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처음으로 성체를 영한 프란치스코는 참으로 기뻐했다. 그는 어머니께 다시 한 번 영성체를 할 수 없을까고 물었지만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임종이 가까운 자신을 어머니께 숨기려는 것이었다.
실상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죽을 때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히야친타에게 그리고 루치아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천국에 간다. 천국에 가면 예수님과 성모님께 너희들도 천국에 불러 주시도록 꼭 부탁드릴 거다."
히야친타는 이제 정말로 오빠와 작별하게 된 것을 슬퍼하면서 마지막 부탁을 했다.
“예수님께, 성모님께 많이많이 인사해 줘 . 그리고 죄인들을 위해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용서를 빌기 위해 원하시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참겠다고 말씀드려 줘.”
두 소녀는 거의 종일 소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소년은 두 사람에게 이제 자기는 묵주 기도를 드릴 수 없으니 대신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는 중에 밤이 깊어가서 두 소녀는 작별하기로 했다.
“안녕, 프란치스코, 오늘 밤 천국가거든 우리를 잊지 말아. 알겠니?"
“응, 난 절대로 잊지 않아. 걱정 말어."
“그럼 안녕, 천국에서 만나자."
그날 하루 종일 병세는 더 나빴으나 영성체를 한 다음부터는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다음날 1919년 4월 4일 프란치스코는 자기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 특히 대ㅁ부님께 여러 가지로 걱정을 끼쳐 드려 미안하다고 용서를 청했다.
아침 여섯 시쯤 그는 어머니께 말하였다.
“저것 봐, 엄마! 오, 아름다운 빛! 저것, 저 문옆에!"
조금 있다가 다시 말했다.
“아아, 이젠 보이지 않는다.”
그때의 소년의 얼굴은 천사처럼 숭고하게 빛났다. 이렇게 알쥬스트렐의 소년 목동은 임종의 괴로움도 어려움도 없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전에 이승에서 잠깐 어슴프레하게 뵙던 아름다운 귀부인의 마중을 받으면서 이제야말로 영원한 사랑을 찬미하러 천국을 향해 떠난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1908년 6월 11일생이니까 만 11세가 채 못되었다.
성모님은 약속을 충실히 지키셨다. 고바 다 이리아에서 맨 끝에 있던 프란치스코는 맨 먼저 천국으로 갔다.(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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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사실 부르심을 받는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22,14)
예전 초등학교 다닐 땐 자주 친구들과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먼저 해야 할 숙제나 과제물 준비를 미처 해놓지 않아서 등교할 시간이 되어 허둥대고 울다가 학교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기억이 떠오르면 참 씁쓸해집니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차츰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구별하게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흔한 표현으로 아무리 바느질이 급하다고 하더라도 바늘허리를 묶어서 옷을 꿰맬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중요한 일, 먼저 해야 할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 일에 몰두하고 ‘all-in올인’한다, 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일은 바로 일의 우선순위를 아는 것이고, 자기 능력과 시간을 어떻게 선용할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일을 하던지, 항상 자신이 늘 준비하고 있는 존재로 살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늘 깨어 준비된 존재여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저는 이 비유에서 초점은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보다 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어떤 자세로 참석하느냐에 관건이 있다고 먼저 전제하고 들어가고 싶습니다. 예전 누이들의 혼인 잔치는 대개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들을 초대해서 베풀었기에, 단지 음식의 풍요로움만이 아닌 일가친척들로 북적거리는 집 안 공기가 얼마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혼인 잔치하면 이런 시끌벅적거림과 풍성함, 즐거움으로 넘쳤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그때가 그립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혼인 잔치의 이상한 점은 처음엔 제한된 사람만 초대했다가 차츰 모든 사람에게 다 개방하고 초대합니다. 왜 처음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기쁨이 넘친 혼인 잔치에 만사 제쳐 놓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기기 위해서 달려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복음에선 처음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별로 내키지 않아서 거절하자, 재차 종들을 보내어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이제 잔칫상을 다 준비했으니 오라고 했건만 그들은 그런 초대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지만”(22,5), 그 이외에 나머지 사람들의 반응은 더 가관인데 보낸 심부름꾼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22,6)까지 하였으니 초대한 임금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속상했으면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22,7)라고 전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비유에서 초대를 아랑곳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이며,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지 못한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잔칫상을 이미 마련한 임금은 그 잔치에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라고 종들을 보냈고, 종들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모든 사람을 데려오니 마침내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지요. 물론 이를 본 임금은 흐뭇하고 한결 마음 편해져 잔칫방을 둘러보고 사람들을 만나는 데 그 방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혼인 예복을 갖추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사람을 밖의 어둠으로 내던져 버리게 합니다. (22,13참조) 왜 그를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던져 버렸을까요? 처음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그 잔치가 썩 달갑지 않아서 자기 의지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들을 보내어 이번엔 초대장도 없이 마구잡이로 아무나 길에서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해 놓고서 미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바깥 어둠으로 내던져 버렸다고 하니 도대체 그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바쁘게 사느라 힘든 사람 데려올 때는 언제고 혼인 예복을 입었느니 입지 않았느니 자격을 따지고 있으니, 왜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은 일,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러기에 서두에 제가 전제를 드렸지요. 초대한 사람보다 초대받은 사람이 어떤 처지에서든지 늘 깨어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 고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먼저 하느님에게 혼인 잔치와 초대는 무척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생명과 사랑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생명과 사랑으로 인간과 다시 결합 되길 원하셨기에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사랑으로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과 사랑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 초대했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로 초대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런 연유에서 구원의 혼인 잔치에 모든 사람이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우리는 초대받은 혼인 잔치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의 예복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 혼인 잔치에는 어떤 예복을 입어야 하고 어떤 예복이 적합할까요?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으십시오.”(에4,22/콜3,9참조)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늘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답게 그리스도의 얼과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복을 입어야 하리라 봅니다.
하늘나라는 사랑의 나라이기에 그 혼인 잔치에 맞는 예복은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복음 선포의 첫 마디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4,17)라고 선포하시며, 이 하늘나라(=구원)는 누구에게나 곧 선한 사람 악한 사람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에게나 곧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겐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혼인 잔치에 적합한 예복은 사랑인 하느님 아드님의 혼인 잔치이니만큼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우선해야 할 것이며, 그다음으로 사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곧 그 사람의 존재 자체보다 지금 여기 혼인 잔치에 적합한 예복을 갖추고 있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만을 강조하시고 구원에 있어서는 아무도 예외가 없이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리라, 고 기대하지만,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해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는 없다는 사실 또한 맞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씀이라고 느껴집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는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22,14) 독일의 신학자인 한스 큉은 그의 책 「믿나이다.」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스스로 원하지 않는 사람도) 구원 하고자 하신다는 것! 그러나 하느님이 모든 인간(=스스로 원하지 않는 사람)을 구원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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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하늘나라 잔치 초대장 받은 우리는 /
박윤식 [big-llight] 2024-08-21 ㅣNo.175244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최고의 혼인 잔치를 차려 주셨다. 그런데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가운데 어떤 자는 일에 매달리느라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돈에 정신이 팔려 장사를 하러 나간다. 술과 도박에 빠져 잔치에 오지 않은 자들도 더러 있었다. 심지어는 오로지 자기만을 믿다보니 초대하는 이를 이유도 없이 미워하는 자도 분명 있었을 게다. 잔치 주인은 화가 났다. 그는 종들을 사방 보내어, 길거리에서 만나는 이 모두를 잔치에 부르게 했다.
그러자 잔칫방은 온갖 이들이 떼거리로 가득 찼다. 가난한 이, 장애인, 걸인들이 저마다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역설적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이는 버림받은 이‘들이 더 많을 수가. 잔칫방은 악한 이 선한 이 할 것 없이 손님들이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 곧 새 인류와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소개하신다. 이렇게 유대인 및 이방인에게도 열어 놓으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신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초대는 기쁘기 그지없는 혼인 잔치마냥 웃음이 철철 넘치는 초대일 게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기쁨이 넘쳐나야 하리라. 그렇지만 초대받은 이가 의무를 게을리 하거나 다른 데에 한눈을 팔 경우에는, 그에 따른 의당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곳이기도 하리라.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교회 백성인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에 따라 복음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이들이어야 한다.
이렇게 만일 우리가 우리 공동체에 잔치를 벌인다면 누구를 초대하겠는가? 자신의 잔치에 가난한 이나 장애인이나 거지를 기꺼이 초대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결코 아닐 게다. 초대 손님으로 먼저 가까운 친지나 좋아하는 사람, 부자들을 우선은 떠올릴 게다. 그렇지만 하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는 자격에는 재주나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건 정녕 아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만을 갖추면 족하다. 모든 이를 초대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모든 이가 다 귀하다는 뜻이리라. 그런 만큼 주님 초대를 받는 데에는 신분이나 직업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하늘 나라는 주님의 자비로 우리에게 거저 선사되는 것이기에 우리가 준비하고 책임져야 할 것이 있을 게다. 그것이 무엇인지 마음속에서 절실하고 명확하게 떠오를 때 비로소 이 하늘 나라의 존재를 보리라. 우리 가슴속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열망, 그저 자신의 처지에 주저앉아 눈앞의 일에만 안달할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진실한 세계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우리의 믿음을 지켜 준다. 이렇게 참되고 고귀한 갈망이야말로 하늘 나라의 초대장이 아닐까?
따라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주님께서 심어 주신 하늘 나라에 대한 이 갈망을 유혹과 곤경 속에서도 꿋꿋이 지키는 데 있음을 분명히 느끼자. 사실 우리는 자신의 앞날을 잘 모른다. 알려고 애써도 알 수도 없다. 더더구나 미래를 안다면 삶의 의미는 오히려 반감될게다. 고통과 시련을 만나도, 끝을 보기에 덤덤해지리라. 성공을 거두어도 결과를 알기에 싱거울 수도.
그러기에 희망은 미래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현실에 있다. 임금은 아들의 혼인 잔치에 많은 이들을 초대하였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거부당했다. 자기 길이 더 바쁘단다. 그래도 임금은 잔치를 연다. 그분은 당신 계획을 결코 바꾸시지 않는다. 그 잔치에 초대받은 이가 하찮은 이유로 거절을 해도, 끊임없이 줄곧 부르신다. 그러기에 그분께서 내민 초대장을 잘 보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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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마태오 복음서에서, 임금이 준비한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가지가지 이유를 앞세우며 오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21장에서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았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여기에 해당하고(마태 21,23-27 참조),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말을 듣고도 가지 않은 아들이나(21,28-32 참조)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도(21,18-22 참조) 그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임금이 보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거부하였음을 의미하고,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게 파괴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다시 초대된 이들은 처음 초대받았던 이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21,31) 들어가고 있는 세리와 창녀,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나중에 초대받은 이들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혼인 예복입니다.
초대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그 초대를 받은 사람 편에서 초대에 알맞게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 선물은 효력을 잃고 맙니다.
먼저 초대받았던 이들이 밭과 장사를 앞세웠기 때문에 그 초대를 잃어버렸다면, 그 뒤에 초대받은 우리도 이 초대보다 다른 무엇을 앞세울 때 그 초대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마침 오늘 입당송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입니다.
하늘 나라의 초대를 소중히 여기고 잘 간직하여 깨끗한 혼인 예복을 입고 그 나라에 들어갈 날을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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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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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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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께서 천상의 여왕이 되신 이유는?
저희 살레시안들은 저녁 식사 설거지가 끝나면 자동으로 모이는 곳이 있습니다.
야외에 서계시며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시고 도와주시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 상 앞입니다.
한 형제의 선창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합니다.
형제들이 함께 수도원 경내를 천천히 산책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이 시간, 하루 일과 중,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묵주기도가 끝나갈 무렵, 발걸음은 다시금 성모상 앞으로 향합니다.
기도 끝에는 어김없이 성모님 노래를 합창합니다.
“마리아 모후여, 어지신 어머니~”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모후’라는 말은 ‘왕의 어머니’, 또는 ‘여왕’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충실히 협조하셨던 성모님의 머리 위에 빛나는 왕관을 씌워드린 것을 경축하며 ‘여왕’ ‘모후’라는 칭호를 붙여드렸습니다.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바치실 때, 제일 마지막 5단은 어떤 신비를 묵상합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워드림을 묵상합시다.”입니다.
일종의 대관식 장면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삼종기도 첫구절은 어떻습니까?
“천상의 모후여,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태중에 모시던 아드님께서 알렐루야!”
보십시오! 여기서도 천상의 모후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모님 성가 중에 아주 유명한 성가 있습니다.
“하늘의 여왕 되시는 오 마리아!” 매일 수도자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이런 찬미가를 부릅니다.
“여왕이시며 사랑에 넘친 어머니”
보십시오. 하늘이 여왕이신 성모님에 대한 표현이나 이미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 여기저기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여왕’ ‘모후’라는 호칭은 단순하고 소박하신 성모님, 고향에 계신 우리 어머니 같은 성모님께 그리 잘 어울리는 호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는 분,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마니피캇 찬가의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어 버리십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십니다.
부요한 자들을 빈손 돌려보내십니다.
목에 잔뜩 힘주는 사람들, 잔뜩 폼 잡는 사람들을 바닥으로 내치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한결같은 충실함으로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셨던 지극히 겸손하신 성모님께 큰 축복을 내리시어, ‘모후’‘여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모후요 여왕이기는 하시지만, 동시에 한없이 겸손하신 여왕이십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갖은 고통과 상처로 힘겨워하는 어린 양들을 측은지심의 눈빛으로 굽어보시고, 살뜰하고 극진히 챙기시는 봉사의 모후이십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천상 모후의 관을 받으신 후에도, 한결같이 자애롭고 온유한 모습으로, 죄인인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봉사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성모님께 여왕이란 어마어마한 칭호를 붙여드린 이유는 그분이 하느님의 여종으로서 최선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평생토록 침묵 속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고, 계속되는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기도하고 희망하며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이것이 여왕이 되신 이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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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혼인 잔치의 비유
주님의 잔칫상은 그 자리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혼인 잔치에 비길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당신의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했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4절)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 버렸다. 밭으로 간다는 것은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이고, 장사하러 가는 것은 세상에서의 활동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다른 것에 몰두해 있으므로 임금이 차린 혼인 잔치에 가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초대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를 전하는 이들을 박해하기까지 하고, 더러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들을 불살라 버렸다.”(7절) 초대를 거부하는 것은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잔치는 치러져야 한다. 임금은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8-9절) 종들은 거리로 나가서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고,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잔치의 모습은 악인들과 선인들이 모여 있는 현세의 교회를 의미한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을 둘러보려고 임금이 왔다. 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한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사랑인데, 그는 믿기는 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다. “이 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3-14절) 손과 발을 묶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못 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깥 어둠은 거룩한 영광과 완전히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옷은 의로움의 옷이며 준비를 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 가운데 추궁당하고 손발이 묶여 바깥으로 던져진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 넘치는 만남의 초대인 것임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영원을 내다보며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믿음의 자세를 보이는 것을 뜻한다. 우리 마음 안에서 이미 언제나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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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는 세례를 잘못 받고 있습니다
신학교 때 예비군 훈련을 하면 신학생들은 수단을 벗고 예비군 군복을 입고 밖으로 나갑니다.
예비군복장은 군대 제대할 때 입고 나왔던 옷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옷만 입으면 사람들이 바뀝니다.
말년 병장으로 모두 변하는 것입니다.
모자를 비뚜로 쓰고 윗도리는 밖으로 내고 담배를 뭅니다.
돌아올 때는 술도 거하게 취하여 워커 끈을 다 풀은 채로 복귀합니다.
그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복장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겉은 군복을 입었지만 속은 여전히 수단을 입고 있는 신학생들도 발견이 됩니다.
절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밖의 복장보다 내면의 복장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입어야 할 옷은 종의 옷이며, 사람들을 만날 때 입어야 할 옷도 종의 옷입니다.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대한 믿음에 따라 우리 삶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 잔치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혼인 잔치에서 쫓겨납니다.
그는 분명 자신은 혼인 잔치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은 그 삶의 태도를 그에 합당하게 바꿉니다.
혼인 잔치를 망치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힘으로 무화과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습니다(창세 3,7 참조).
자기들 스스로 하늘 나라에 합당한 존재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가죽옷을 만들어주셨습니다(창세 3,21 참조).
하느님을 만나 생겨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옷은 곧 정체성입니다.
새 정체성은 만남을 통해 얻어집니다.
만약 내가 미혼 남성이었는데, 어떤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면 이제 그 여인 때문에 나는 남편이라는 새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이 되면 이전 정체성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만나오던 여자들이 있었다면 새로운 정체성을 위해 그 관계들을 끊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전 옷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성사로 치면 이 과정이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세례는 어떤 옷, 곧 어떤 정체성을 가지게 할까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6-27)
저희 성당에서 강론이 끝나고 우리는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입니다.”를 외칩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리스도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3-4)
우리가 그리스도께 감사해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죄로 살던 이전의 내가 죽었고 이젠 그리스도를 입어 그리스도로 믿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나를 그리스도로 살게 하고 하늘 나라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갖춘 존재로 만듭니다.
50조 사업가 ‘댄 페냐’의 쓴소리를 들어봅시다.
“당신은 당신과 어울리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친구를 보여주세요.
당신 미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누구와 어울리나요? 당신은 빌 게이츠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스티브 잡스나 워렌 버핏도 아닙니다.
당연히 일론 머스크와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나요? 그들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일론 머스크의 일과 삶에 균형을 이룬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스티브 잡스가 살아있을 때의 일과 삶의 균형을
이뤘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빌 게이츠처럼 사나요? 헨리 포드처럼 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세상의 부를 만든 사람 중 아무도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면 왜 당신은 그들이 가졌던 것을 가질 것으로 생각하세요? 20년 또는 30년 후에 당신이 있고 싶은 곳에 있는 사람을 찾아서 지금 그 사람에게 가세요.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자존감을 키우고 싶다면 일론 머스크처럼 사십시오.
그러면 높은 자존감은 엘론 머스크와 커피를 마실 시간을 마련해 줄 것입니다.
은행에서 돈을 받고 싶다면, 당신 나라 대통령처럼 옷을 입으십시오.
당신 나라 총리처럼 옷을 입어요.
당신에게는 첫인상을 남길 기회가 한 번뿐입니다.
그러나 당신들 대부분은 당신들 옷차림 때문에 부끄러울 것입니다.
두 번째 인상은 입을 열 때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가장 큰 존경심을 가지고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더듬거리고, 중얼거리고, 땀을 흘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출처: ‘50조 사업가: 부자 되려면, 옷부터 똑바로 입어야’, 필미필키 티비, 유튜브]
저 같은 경우는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믿기 위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를 자주 외웁니다.
그리고 마치 그리스도의 그 심장이 나의 심장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혼인 예복을 입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를 입고 그리스도라 믿지 않았다면 진정으로 세례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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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늘나라의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2-10).”
1) 하늘나라의 혼인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2코린 11,2ㄴ).”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혼인 잔치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입니다.
따라서 ‘나’는(모든 신앙인은) 하늘나라의 혼인 잔치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공입니다.
그 잔치는 바로 ‘나를 위한’ 잔치입니다.
내가 무사히 하늘나라에 잘 도착했음을 환영하고 축하하는 잔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초대’ 라는 표현과
‘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그것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을 하는 것처럼 하는 사람들을
꾸짖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초대받은 손님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는 집으로, 아버지의 집이면서 동시에 ‘나의 집’인 그 집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2) ‘혼인 잔치’ 라는 말에서, ‘혼인’은 예수님과 신앙인의 ‘일치’를 나타내고, ‘잔치’는 “하느님의 나라는 곧 기쁨의 나라”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치’와 ‘기쁨’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제시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고, 그 일치 자체가 곧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된 것이고, 나중에(종말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기쁨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그 기쁨을 ‘지금’ 누리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5절의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간 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다른 것에서, 즉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에서 기쁨을 찾는 자들입니다.
과연 그런 것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서 잠깐 동안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 즐거움은 금방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3) ‘혼인 잔치의 비유’는,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 또 신앙생활을 하긴 하는데 세속의 생활을 신앙생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겨냥한 비유입니다.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위선자들도 포함됩니다.
잔치에 참석하지 않고 밭으로 가거나 장사하러 간 자들은, 참석하겠다고 응답을 했으면서도 실제로 참석하지는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마태 7,21).
<원래 이 비유는 유대인들을 겨냥한 비유이고,
그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이방인들에게로 구원의 은총이 넘어간다는 뜻인데,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이나 그들의 구원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우리 자신의 구원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다고 해도,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것은 처음부터 신앙인이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가?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신앙생활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또 진지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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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유다인의 상류 사회에서는 잔치를 베풀고 친지들을 초대할 때 두 번에 걸쳐 초청하는 절차를 밟습니다. 먼저 잔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어 그 날 올 수 있는지 여부를 묻고, 준비가 다 된 후에는 먼저번 초대에 승낙한 사람에게 잔치를 여는 정확한 시간과 구체적인 장소를 알려주며 다시 한 번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잔치 준비가 완료된 상태이기 때문에 거절하면 커다란 실례가 됩니다. 처음부터 못간다고 했으면 다른 이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자리를 ‘빈 자리’로 만듦으로써 더 많은 이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큰 기쁨을 나누고자 했던 주인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임금이 자기 초대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이들에게 불 같이 화를 내는 게 이해가 됩니다. 심지어 초대를 거부하는 것이 정말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부득이하게 그런 게 아니라,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가는’, 본인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이유 때문이니, 큰 맘 먹고 그들을 초대한 임금 입장에서는 그들이 자기 성의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무시하며 업신여긴다고 느낄 겁니다. 더 나아가 초대장을 전하기 위해 보낸 자기 일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죽이기까지 하니 그들의 악행에 분노가 치밀었겠지요.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죗값을 치르게 됩니다.
상황이 그 정도쯤 되면 잔치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자기들끼리 조촐하게 기쁨을 나누는 정도로 끝내고 싶을텐데, 오늘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사람들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거두지 않습니다. 그 임금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임금이 준비한 혼인잔치는 그저 자기 아들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게 아니라, 그 잔치에 참여한 이들이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한, 그렇게 하여 모두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기 위한 ‘구원의 잔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라도 더 그 잔치에 초대하기 위해 다시 종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아무나 만나는대로 잔치에 불러 오라’고까지 명령하지요. 그 말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초대는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려있음이 드러납니다. 즉 구원의 초대는 인간적인 기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 가득한 부르심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그분의 선물이자 자비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구나’ 그 잔치에 초대되었지만 ‘아무나’ 그 잔치의 기쁨을 누리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함에도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구원의 잔치에 나를 불러주셨다면, 그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입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종들이 길거리에서 ‘만나는 대로’ 잔치에 데려갔는데 어떻게, 어느 틈에 혼인 예복을 갖춰 입느냐고 따져묻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은 잔치를 베풀 때 대문에다 손님들이 입을 예복을 미리 준비해 걸어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처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손님들은 그것을 입고 잔치에 들어감으로써 주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표시했다고 하지요. 그렇기에 주인이 미리 준비까지 해 둔 예복조차 갖춰입지 않고 그냥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의 성의를 대놓고 무시하는 ‘모독행위’로 간주되었고, 주인은 그런 사람을 쫓아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갖춰입어야 할 혼인예복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 안에 그 힌트가 있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당신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혼인잔치가 ‘사랑의 잔치’이니 그 예복 또한 ‘사랑’과 관계 있음은 당연할겁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잔치를 마련하시고 심지어 예복까지 미리 준비해주셨으니, 우리도 그 예복을 정성스레 갖춰입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되겠지요. 그러니 사랑의 실천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즉시 실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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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유배지에서 예언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방의 신들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잊지 않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버림 받은 것 같아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이러한 심정으로 하시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5-26)
하느님의 징벌의 댓가로 유배를 가게된 것 같지만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갔지만 호렙산에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그리고 야훼를 그들의 하느님으로
계약을 맺은 것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시고 새계약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임금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를 들어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정작 초대받은 이들은 오지 않았는데 어떤 이들은 자기 밭에 또는
어떤 이들은 장사하러 간다고 초대에 오지를 않습니다.
주님께서 포도밭 주인과 일꾼들에 대한 비유말씀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오전 아홉시, 열두시, 오후 2시, 오후 5시에도 일꾼을 포도밭으로 보내는 것처럼
여러차례 종들을 보내어 혼인잔치에 초대합니다.
임금은 나중에는 만나는 사람 아무라도 초대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마태 22,10)
나중에 임금이 초대한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는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으로 부터 징벌이 내립니다.
유대인들을 구원에 초대했지만 그들이 응하지 않자 이방인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람 저사람 아무나 초대하지만 그래도 주인께서는 예복을 요구합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인자하시고 너그러우시지만 그래도 주님의 뜻에 맞갖은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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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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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백성이고 신부인 우리의 자격을 돌아보게 해 주십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마태 22,8)
성경의 언어에서 혼인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임금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는 한편으로는 이 지상에서 하느님 백성으로 초대받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세에서 어린양의 천상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9)
혼인 잔치가 준비되었지만 처음 초대받았던 이들이 참석을 거부합니다. 제 일들이 먼저였고, 그만큼 잔치는 안중에도 없었고, 또 임금과 종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복음사가는 그 이유에 대해 별로 지면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거부 당하고 버림 받은 하느님의 모습이 비쳐지지요.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이 내내 부르짖는 외침이 바로 이처럼 상처입은 하느님의 목소리였습니다.
게다가 종들까지 붙잡히고 얻어맞고 죽음을 당했다니 행복해야 할 혼인 잔치가 피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진노하여 그들을 처단하고 종들에게 새로이 하객들을 불러모으도록 지시합니다. 혼인 잔치에 축하객이 없다는 건 임금의 수치가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처음에 심혈을 기울여 고심하며 초대 명단을 뽑았을 임금이 이번에는 마음을 비우고 대문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혼인 잔치가 누구라도 올 수 있게 모두에게 열린 장으로 변합니다.
처음 초대를 받았지만 참여를 거부한 이들 덕분에 다른 많은 이들이 혼인 잔치에 참여할 기회를 얻습니다. 마치 구약의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모든 이민족들에게 구원의 지평이 무한히 확대된 인류의 구세사와 맥을 같이합니다.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마태 22,12)
그런데 한없이 허용적일 것 같았던 임금이 제동을 겁니다. 아들의 혼인 잔치에 "아무나" 들어올 수는 있어도, 혼인 예복만은 반드시 갖춰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이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가혹한 징벌을 받지요. 이런 임금님 태도의 반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혼인 예복"
혼인은 신랑 신부, 두 개인 뿐만 아니라 가족과 가문과 지역을 하나로 아우르고 일치시키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할 때 입는 예복은 신랑 신부는 물론 가족과 가문과 지역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표현하기에 가난한 이건 부유한 이건 나름 정성껏 마련해 놓았지요.
제1독서에서는 배반과 불륜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님께서 관계의 회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에제 36,23) 이미 하느님과, 신부인 당신 백성과의 혼인은 신부의 불륜으로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편에서 우상숭배로 부정해진 신부를 얼마든지 내치셔도 좋을, 그런 상황을 신부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요.
그런데 더럽혀진 당신 이름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주님의 해법은 인간의 방식과 사뭇 다릅니다. 그분은 더럽혀진 것을 송두리째 도려내거나 잘라내 버리는, 그야말로 이스라엘과 완전히 갈라서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시지요.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겠다. ...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5-26) 하느님은 당신 아닌 다른 애인에게 눈을 돌리게 만든 굳은 마음, 돌 같은 마음을 치우고 살처럼 부드럽고 새로운 마음으로 갈아 넣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네가 지금 어떤 상태여도 다시 나의 신부다움을 되찾아 주어, 우리의 사랑을 깨뜨리지 않겠다. 네가 아무리 불결하고 부정해도 너를 떠나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마음이 읽힙니다.
사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그리 교만할 일도 우쭐할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저 "아무나"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아무나'일지언정 혼인 예복은 필수로 갖추어야 합니다. 주님의 신부로 불리움 받아 주님과의 사랑과 일치의 혼인 상태에 머무르려면 꼭 갖추어야 할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그 자격이 "정결"과 "새 마음과 새 영", "살로 된 마음"이라고 일러 줍니다. 이는 주님의 은총과 우리의 결단이 이루는 협주에서 비롯되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은 이미 불결해진 우리를 정화해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을 되찾아 주시려고 결심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쪽에서 그분께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알고도 모르고도 눈 돌렸던 애인들, 주님보다 더 애착하고 기대했던 재물이며 사람이며 자기 영광 등의 우상을 치우고, 정성껏 혼인 예복을 갖춰 입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복음환호송)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으로 결단하고 주님께 돌아설 수 있다면, 이 순간이 바로 구원의 때가 됩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고 다시 일어서서 신랑이신 분께 고이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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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삶
<2024.8.22> 아침을 여는 묵상 (렘 51:45~53절)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삶❞
❚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는 불신자에 대한 징벌과 달리 긍휼과 자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회복의 약속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45~46절).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는 유다의 백성들을 향하여 바벨론에서 도망쳐 여호와의 진노로부터 목숨을 구하라고 명합니다. 특별히 그들을 향하여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임을 밝히고 있습니다(45절). 이는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측은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여 재차 언약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임박한 북방 연합군들의 인하여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난무해 사람들을 공포와 두려움으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회복의 약속을 믿고 용기를 잃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46절).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심판 받을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악인들의 삶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심판의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은 교회와 성도를 향하여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간에 혼란에 빠뜨립니다. 물론 잘못된 점이 있긴 합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떠드는 ‘풍설’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회개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굳건히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문화와 가치관을 과감히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 가운데서도 실망하지 않고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며 용기를 얻어 세상을 이기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온전한 회복의 은총을 주실 하나님을 소망하며, 악취가 나는 죄악의 현장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영적인 회복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47~49절).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날은 바벨론이 신뢰하던 우상들까지 벌을 받는 날이며, 바벨론의 온 땅이 치욕을 당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47절). 아울러 바벨론에 의해 고통을 당했던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파멸하는 자가 바벨론에 임하는 것을 볼 때 크게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48절). 그리하여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49절).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은 곧 이스라엘에게는 해방과 회복을 얻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최후 심판 때에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완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원수들은 멸망을 당하겠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죄와 사망의 압제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기쁨의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환경을 일구어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며 헛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삶을 온전히 살아가길 기도하며, 영적인 회복을 소망하므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영원한 본향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50~53절).
‘칼을 피한 자들...’은 바벨론의 멸망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경건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뜻합니다. 즉, 바벨론의 멸망 중에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바벨론 땅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속히 바벨론 땅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50절). 이 명령에 대해 백성들은 바벨론이 여호와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힌 것으로 인해 수치를 당했고, 모욕이 그들의 얼굴을 덮었다고 탄식합니다(51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더럽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한 바벨론 사람들과 그들의 신을 벌할 것을 밝히십니다(52절). 바벨론이 하늘과 같이 높은 곳에 요새를 쌓고 대적의 공격을 막으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세우시는 ‘멸망시킬 자’가 반드시 바벨론에 임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53절).
하나님은 오늘도 죄악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을 향하여 죽음의 땅인 이 세상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속히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악한 자들의 삶에 물들어 함께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늘 생각하며 그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바른 삶의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고 깊이 묵상하는 자는 정욕과 악한 생각으로 고통을 받게 될 것이지만, 말씀을 마음에 두고 깊이 묵상하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대한 미련으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 중에 바라보며 믿음의 걸음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어떤 상황에 직면할지라도 절망하지 말고 회복의 약속을 소망하며 회개함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아 누리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나아가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렘 51:45~5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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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婚姻 잔치에 招待받은 이들 (마태22,1-14)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4&id=2101304&menu=4770
김종업로마노 [rlawhddjq] 2024-08-21 ㅣNo.175242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婚姻 잔치에 招待받은 이들
복음(마태22,1-14)
1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 하느님 나라의 완성(完成)은 안식(安息)이다. 하느님의 아들과 한 몸이 됨으로 이루어지는 안식(安息)이다.
(창세2,1-2) 1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엿샛 날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렇게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바로 다음날 이렛 날에 쉬셨다. 안식(安息)이다. 곧 사람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졌다” 하신 그 쉼, 안식의 나라로 바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잘 살던 사람(아담)이 뱀의 유혹으로 곧 거짓 가르침으로 하느님 처럼의 자리에 앉는 그 교만의 죄를 짓는 바람에 스스로의 열심, 노력을 부려야만 쉼(안식)을 얻게 되었다.(그러나 불가능이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 되었다.
곧 사람이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결국엔 자신의 본질인 흙의 먼지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창세3,21)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 하느님께서 어린양을 속죄(贖罪) 제물로 죽이시고, 피 묻은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심으로 하느님을 피하게 했던, 그 사람의 죄(罪 알몸. 부끄러움-창세3,7-8)를 덮어 주셨다. 자비, 사랑이시다. 죄인은 그 피 묻은 가죽 옷을 입으면 되는 것이다.
곧 모든 사람(죄인)은 십자가에서 속죄(贖罪) 제물로 대신 죽으시고 흘리신 피, 그 ‘새 계약의 그리스도’로(루가22,20) 그분과 하나, 한 몸이 되어,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되는 것이다.
기쁜 소식, 복음이다.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 독서(牘書)에서 말씀하신 새 마음, 새 영(靈)이 되는 것이며, 하느님의 규정들을 따르고,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처럼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고집한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 하느님처럼의 자리를 고집한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 창세기의 어린양의 죽음을 다시 말씀하심이다.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 복음 말씀을 전하는 이들까지 죽여 가며, 곧 말씀을 무시하며 스스로 안식을 누리려 열심을 부린다. 하느님 처럼의 인간은 자신들의 열심, 노력을 의(義), 진리라 하며 칭찬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혐오하신다.(루가16,15)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미사)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 하늘나라는 아무나, 곧 악(惡)한 사람, 선(善)한 사람, 모두 갈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손수 준비하셔서 사람(아담)에게 입혀주셨던 가죽을 입어야 한다. 곧 어린양(그리스도)이 대신 죽어 남긴 ‘피 묻은 가죽 옷’을 입어야 한다. 그것이 혼인예복이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스스로 열심을 부려 해 입은 자신의 옷이 좋고 정당하다고, 주인이 준비해 놓은 가죽 옷으로 갈아 입지 않은 것이다. 사도는 그것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는 ‘구원받지 못할 죄(罪)’라는 것이다.(로마10,1-3)
교리(敎理)는 먼저‘ 사람이 선행(善行), 의(義)로 성화(聖化)를 이뤄야 하느님과 일치(一致)를 이루게 되고, 하늘의 영화, 영광, 평화,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교회의 가르침이 우리의 선행(善行), 의로움, 그 성화를 강조한다.
아니다. 먼저 성경(聖經)을 통해 말씀을 깨달아, 하늘의 의(義, 그리스도의 대속)를 진리로 입어야 하느님과 일치(一致)를 이루게 되고, 그 다음 하느님의 평화, 생명, 구원을 받는다.(마태6,33 루가2,14참조)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억울하고 분(憤)해서가 아니라고 했다. 마음에 간직한 새 마음, 새 영(靈)이 되는 하느님의 규정, 법규, 그 새 계약의 말씀, 곧 영원한 안식,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씨)이 없어 씹을 것이 없어 영원히 이(齒)만 갈게 되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다.
그 끔찍한 곳에서 ‘나를 당신 아들의 피’로, ‘새 계약의 말씀’으로 구해주신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 영광(榮光), 감사(感謝)가 고난(苦難)의 삶을 이기는 우리의 힘이며 치유(治癒)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 거짓 가르침을 조심해야 한다. 끔찍한 곳으로 들어가게 하는, 곧 믿음과 관련 없는 사람의 열심, 선행, 의로움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 말하는 도덕과 윤리의 가르침을 조심해야 한다.
하늘나라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을 믿고, 입어야만 갈 수 있다.
(에페2,13) 13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베드1,18-19)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제사와 윤리)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인간의 노력, 힘)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 하느님의 지혜(智慧), 계시(啓示), 진리의 영이신 성령(聖靈)께서 깨닫고 믿게 하심으로 완성(完成)된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선택의 자리에 들 수 있도록 저희들의 마음의 발길에 하느님의 지혜, 진리가 충만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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