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 대에 스페인 원정대가 침범하였다.
이때 몬테수마 2세와 원정대 사이에 격렬한 전쟁이 있었다. 원정대가 승리하면서 왕, 귀족, 전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다. 일반 백성을 종처럼(노예는 아니다.) 부리면서, 농장을 일구고, 은과 황금을 채취했다.
식민 통치 시대 — 원주민의 피눈물이 있었고, 저항 의식도 자라났다.
스페인 침범
1) 침범의 목적은 경제적 수탈이다.
원정대는 수입은 1/5만에 왕에게 4/5는 원정대가 차지했다.
2) 수탈에는 총칼로 폭력을 휘둘렀다. -->원주민의 분노가 높았다.
3) 카톨릭 선교 — 전통문화를 말살하고
유럽문화(카톨릭)를 이식하였다.
*1500 – 1600년 대의 멕시코는 최고 지배자인 총독은 스페인에서 직접 파견했다.(식민지 출신 백인은 한 단계 낮았다.)
이 시기는 유럽인의 착취와 카톨릭을 이식하는 역사였다.
유럽의 계몽사상과 미국 독립이 불을 질렀다.
1810년에 카톨릭 신부 ’미겔 이달고‘가 군중 앞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우리에게 오늘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쪼매 생략하고)
그대들은 증오스러운 에스파냐 인이 300년 전에 나타나서 당신들의 조상으로부터 뻬앗아 간 땅을 되찾을것인가를 결정합시다. 우리는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
이달고 신부의 연설은 ’들로네스 외침‘이라고 한다.
*이달고
멕시코 농민 출신으로(크리오여 이다) 대학에 가서 성직자의 길을 밟았고, 모교인
니콜라스 대학의 학장까지 되었다.
성직자이지만,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보수적인 전통 성직자와는 달랐다. 교회법을 무시하고, 농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 성직자이면서 결혼하여 자녀가 5명이었다.
2) 사목일보다 영농기술을 연구하고 보급했다.
많은 농민이 굶주리자, 영농법이 농민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흉년이라 농민이 굶고 있는데 상인이 창고에 곡물을 쌓아놓고 값이 더 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3) 무장 투쟁을 계획
4) 무장 투쟁이 독립 투쟁으로 나아갔다. 많은 크리오요가 무장군으로
참가했다.
5) 무장 투쟁이 성공을 거두어 멕시코 시티의 함락을 눈앞에 두었다.
6) 무장 성공을 눈 앞에 두고 무고한 희생을 막는다면 군대를 철수했다
이에 많은 참전자들이 실망했다고 한다. 또 이탈했다.
7) 반란군은 이달고의 만류에도 약탈을 일삼았다.
8) 크리오요의 반란군 지도자는 목적이 다른 이달고를 잡아서 처형했다.
9) 반란군은 흐지브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독립의 열기는 남겨 두었다.
1700년 대에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가 스페인의 왕이 되었다. 이로서 남미의 모든 식민지는 브르봉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유럽의 왕들은 계몽적 전제군주라는 탈을 쓰고 경제적 착취를 하였다.
미국을 통해서 진짜 계몽주의 사상도 들어왔고, 프랑스 혁명 소식도 들어왔다.
남미의 식민지는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다. 총독은 스페인 출신의 스페인이었다. 스페인 혈통이라도 남미서 태어난 자는 신분이 한 단계 낮았다. 남미 출신의 스페인인은 불만을 가졌다. 이에 이달고가 불을 붙이자 폭발했다.
이달고는 ’과달루페 성모상‘ 깃발을 앞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이들은 오합지졸이면서도, 잔학한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다. 이달고는 이런 짓들은 제어할 능력이 없었다. 신부인 이달고는 백인 혈통의 반란군 지도자와 투쟁 노선을 두고 의견대립이 생겼다. 결국 이달고는 배신자의 모략으로 붙잡혀서 총살 당하였다. 이달고가 불을 붙인 독립전쟁은 끝났지만, 독립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독립전쟁의 방향은 이달고의 목적과 달라졌다. 이달고는 하위 계층인 농민을 위한 전쟁이었지만 스페인의 지배 계층(스페인에서 파견한 총독, 왕당파, 상위 스페인 혈통의 백인 등)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독립의 목적이 변절되었다.
1820년에 스페인의 본토 안달루시아에 반란이 일어나자 페르난드 7세는 난관에 부딪혔다. 남미 출신의 스페인 백인은 스페인과 줄을 끊고, 독립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스페인은 어쩔 수 없어서(능력이 안 되어서) 1821년 8월 24일에 ’코르도바 조약‘을 맺고, 멕시코 독립을 인정 받았다.
맥시코 백인도 스페인 출신의 백인이 신분이 더 높았고 멕시코 출신의 백인(크리오요)는 신분이 낮았다. 크리오요는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독립을 원했다.
***베나토 후아레스(1806 – 1872)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서, 3세 때 부모가 죽고, 삼촌에게 갔다.
12세 때 삼촌은 안토니오 집에 하인으로 보냈다(이때까지도 글을 읽지 못했다)
안토니오의 인정을 받고, - 카톨릭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시작한다.
안토니오는 고놈 참 똑똑하다 면서 사위로 삼았다.
1847 – 변호사를 거쳐, 오아카 주의 주지사가 된다.
1855 – 후안 알베레스 정부의 사법장관이 된다.
후아레스 법 — 법 앞에 만인은 평등, 카톨릭 특권을 제한
(교회 소유 재산권 제한)
6. 1856 -- 레르도 법 공포
교회의 토지 소유를 전면적으로 제한하는 법이다. - 보수세력의 반발
7. 1857 -- 헌법 공포
8. 1857 - 벨렉스 들로마가 장군(보수 세력)의 쿠데타
진보- 자유 세력이 저항하면서 내전으로 번졌다.
9. 1861 – 임시 대통령 후아레스가 멕시코 시티 탈환
*당시의 카톨릭은 멕시코 농지의 1/3을 소유하였고, 농민은
교회의 소작인이었다.
농민은 살기 위해서 교회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교회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언제나 보수 편에 섰다.
이에 후아레스는 교회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려 했다.(레르드 법 공포)
이에, 1857년에 들로마가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군과 교회가 손잡고 일으킨 반동이었다.)
1862 -- 보수 세력은 외세를 끌어들여 진보세력과 싸웠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새는 3만 군사를 파병했다.
1863 -- 프랑스 군이 멕시코 시티를 점령했다.
멕시밀리안 1세(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ㅇ)을
황제로 세웠다.
*멕시밀리안 1세는 원주민과 노동자에게 유리한 법을
발표함으로 보수 세력의 분노를 유발했다. - 보수 세력이
저항했다.(황제의 속 마음은 친 농민 편이었다고 한다.)
프랑스는 멕시밀리안 1세로 꼭두각시로 내세워 멕시코를 착취했고
(힘이 없는 황제는 프랑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멕시밀리안 1세는 후아레스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거절 당한다.
후아레스는 이리저리 쫒겨다니면서도 저항했다.
1865 - 미국 남북전쟁이 끝나고, 후아레스를 지원한다.
마침내 후아레스가 승리하여 멕시코 시티를 탈환한다.
1867, 6. 10 – 멕시밀리안 황제 총살
그는 죽을 때 ’멕시코 만세‘를 부르고 죽었다;
1867 — 후아레스가 멕시코 공화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1872. 7. 18 – 대통령 임기를 끝내지 못하고 죽었다.(병사)
멕시코는 그를 영웅시하여, 그의 집을 보존하여
관광소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