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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심
막 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막 7:31-37 /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치시다] 예수께서 두로 지방을 떠나 시돈에 가셨다가 데가볼리 지방을 거쳐 갈릴리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33)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들 틈에서 따로 불러내어 손가락을 그의 양쪽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 하고 명령하셨다. 이는 `열려라!'라는 뜻이다. 35) 그러자 그 사람은 즉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완전히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36)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이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나 엄하게 이르면 이를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그 소문을 퍼뜨렸다. 37) 그들은 그 놀라운 일을 보고 `그분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신기하다. 귀머거리와 벙어리도 낫게 하시다니!' 하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이방으로 갔다가 시돈과 데가볼리를 거쳐 다시 갈릴리에 오신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십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예수님의 소문은 더욱 널리 퍼집니다.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31-32) 마가는 예수님이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과 데가볼리 중앙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 지역에 이르렀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계속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사실이 암시됩니다. 갈릴리에 오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려와 안수(막 5:23; 6:5)를 부탁합니다.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33-35) 병자를 만난 예수님은 그 사람을 무리에서 분리했습니다. 병자에게 안정감을 주고, 인격적 친밀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음에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당시에 일반적인 치유 행위였지만(8:22-26; 요 9:1-7) 그에게 도움이 되는 상징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치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행동은 병자를 위한 배려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예수님은 “에바다!”라 외쳤습니다. 이 외침은 두 가지 병을 포함하여 그를 얽매는 모든 사슬에서 그를 해방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에바다!”라 외치는 순간, 병자는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통해 그는 병만 나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열리고 해방된 것은 그의 전 존재, 전 인격이었습니다.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36-37) 사람들은 놀랍니다. 예수님의 업적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붙들림, 재판, 십자가 처형으로 이어질 종의 고난은 아직 남았습니다. 종의 고난이 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온전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경고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더욱 전파합니다. 경고할수록 예수님의 소문은 더 퍼져갑니다. 사람들이 놀라며 한 말(37)에는 창조의 마지막을 보도하는 문장(창 1:31)과 메시야가 가져올 시대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문장(사 35:5-6)이 겹쳐 있습니다. 새 창조를 하시는 분이자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통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적용 : 내게 필요한 건 문제 해결 이전에 내 전 존재와 인격이 하나님께 열리고,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에바다!”라 외쳐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한 것은 내일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필요를 구하라고 하신 주님의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오늘을 위한 양식을 구하라는 것은 내일에도 양식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내일을 위한 오늘의 기도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와 오늘의 필요를 위해 믿음의 기도를 하는 것이 말씀에 근거한 기도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설 교 >
에바다의 신앙
안효관 목사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는데, 고쳐주신 방법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드러운 말씀으로 “네가 병에서 놓여났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고쳐주시기도 했고, 때로는 병자를 만나보지도 않으시고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시기도 했습니다. 또 귀신들린 사람을 향하여는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썩 나오라”고 호통을 치시며 고치기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히 손으로 만져주심으로 고쳐주시기도 했고, 기름을 발라 고쳐주신 경우도 있고(막6:13) 안수하심으로 고쳐주신 경우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고쳐 주실 때에는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그러시면서 고쳐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셨는데, 특이한 행동을 하시면서 고쳐주신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도 보면 특이한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한 병자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동쪽에 있는 데가볼리라는 지역을 지나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귀먹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병자 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안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를 따로 데리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시더니, 손가락을 양 귀에 넣고 혀에 침을 바르시고는 하늘을 향하여 탄식하시며 기도하심으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쳐주신 특이한 행동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혀에 침을 바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치료의 방법이었습니다. 의사들도 종종 그런 방법을 사용했고, 민간요법에서도 그 방법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말씀 한마디로도 병을 고치실 수 있는데 왜 그런 방법을 사용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고침받아야 할 그 사람의 환처에 손을 대심으로 그 사람과 특별한 인격적인 교류를 하신 것입니다. 그건 그 다음에 나오는 특이한 두 번째 행동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특이한 행동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는 것은 지금 그 병자가 안고 있는 고통을 예수님께서 깊이 통감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그 고통을 함께 느끼신 것입니다. 그 병자를 보시자 예수님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마음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을 토해낼 만큼 마음이 아프셨던 예수님께서 그를 직접 손으로 만져주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서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하여 “에바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에바다’라는 말은 아람어인데, 그 뜻은 ‘열려라’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막힌 귀야 열려라’ ‘굳어 어눌해진 혀야 풀려라’ ‘귀먹고 어눌한 고통의 자리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으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듣게 되었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병자를 고쳐주신 짧은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가 과연 어떠한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열려라’ ‘해방되어라’ 라고 외치신 이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들의 닫혀 있는 것들을 열어주는 놀라운 능력의 말씀으로 들려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향하여 ‘에바다 - 열려라’ 라는 음성이 들려질 때 아직까지도 막혀져 있던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가 열리게 되는 것이 ‘에바다의 신앙’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는 사랑하는 모든 교우님들에게 오늘도 주님께서 “에바다 - 열려라” 하신 말씀이 들려짐으로 아직도 맺혀져 있는 것들과 어눌해서 고통을 주는 모든 삶의 문제들과 영적인 상태가 열려지는 귀한 역사가 베풀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열려야 합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열려라 - 에바다 하실 때 우리의 무엇이 열려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로 듣지 못하던 우리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여러분,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리모컨에 ‘음소거’라는 버튼을 눌러놓고 앉아 있어보세요. 화면은 자꾸 바뀌고 사람들의 입은 움직이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면 신경질이 나서라도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요즘은 자막도 나오기도 하고 어떤 뉴스는 수화로 내용을 알려주기도 합니다만, 그런 것이 없이 화면만 보고 있다면 내용을 제대로 알 수가 없어 답답할 것입니다. 텔레비전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화면이라도 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예전처럼 라디오 시대라고 한다면 라디오는 켜 놓았는데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건 라디오를 켜놓으나 마나 아닙니까?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고 비극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에바다 - 열려라’ 그러시면서 병을 고쳐주신 그 병자는 아무 것도 듣을 수가 없었던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한 소문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서 내 병을 좀 고쳐달라고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듣지 못하니까 예수라는 분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에바다 - 열려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귀가 열려서 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듣지 못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귀가 막혀서 듣지 못하는 이 불쌍한 사람처럼, 현대인들 가운데서 귀가 막혀서 듣지 못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귀머거리가 아니라 양심의 귀머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 시대의 절규와 아픔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죄악이 속삭이는 소리는 그렇게도 잘 들으면서 죄를 책망하는 양심의 소리에는 무디어져 듣지 못합니다.
어디 양심의 귀머거리만 있습니까? 영적인 귀머거리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영적인 귀머거리들은 거룩한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말씀을 묵상을 해도 그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신령한 음성을 듣지 못한 채 귀머거리로 살아갑니다. 말씀을 듣겠노라고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지만, 오늘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예배당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인 귀머거리들입니다.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음성이었습니다.(왕상 19장) 바위를 부술 정도로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엄청난 지진 가운데도 하나님의 음성은 없었습니다. 강한 바람과 지진이 지나간 후에 하나님은 음성의 세미하게 엘리야에게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세미한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귀머거리에게는 세미한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육신의 소리, 생리적인 소리, 세상의 소리는 잘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이나 영을 깨우는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는 영적인 귀머거리는 아닙니까? 우리가 영적인 귀머거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살면서 하나님 이야기, 은혜 받은 이야기, 성경 이야기, 교회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귀머거리입니다. 내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으니까 영적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맨날 세상 이야기, 남들 흉보는 이야기, 쓸데없는 이야기들만 하고 살아갑니다.
영적인 귀머거리들은 진짜 들어야할 영적인 소리에는 전혀 무감각합니다. 영적인 소리에 무감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장애물을 만나도 좌절하고 절망하기 일쑤입니다. 영적인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평하고, 원망하고, 불신하게 됩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부부가 아이가 없어서 하나님께 아이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무려 16년 동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16년 만에 기도의 응답을 받아서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기도하며 기다리던 아이를 낳고 보니까 불구였습니다.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부부는 너무나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아이를 낳아 놓고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하면서도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어떻게 생각하면 서운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산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런 상황이 되면 고민하게 됩니다. 여기에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같긴 한데,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거기에 대한 응답을 듣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뜻을 감추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들을 귀가 막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인 귀머거리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알려주심에도 그것을 듣지 못하고 답답하게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이 부부도 근심하면서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16년 동안 기도해서 얻은 아이인데 왜 불구여야 합니까?”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속에 감동이 왔습니다. 감동된 마음속에 깊이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 불구아를 누구에게 맡겨야 사랑을 쏟아가며 키워줄 수 있을까 하고 16년 동안이나 찾다가 너희 부부에게 맡겼노라. 너희 부부처럼 기도하고 준비한 사람들이라면 이 아이에게 온갖 사랑과 정성을 쏟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란다.”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 부부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야 일순간에 의심과 불평이 사라지고 자신들에게 이 아이를 주신 것에 감사하며 아이를 키웠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는 민감하고 육신의 소리는 잘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는 영적인 귀머거리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치가들이 귀가 어두워서 민중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아집에 빠지거나 독재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고 영적인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귀먹은 사람을 붙잡고 탄식하시며 ‘에바다-열려라’ 하시며 치유해 주셨던 주님의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적인 귀가 열려 신령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믿음의 승리자들로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음성을 들어야 우리 삶에 둘려 싸여있는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에바다 - 열려라 하시면서 치유하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의 말 못하는 입을 열어주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언어 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혀가 굳어서 말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혀에 침을 바르시며 풀어주시자 굳었던 혀가 풀리고 정상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재자들이 자신의 정권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언론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언론을 장악해서 사람들의 입과 귀를 막아 놓고는 자신들의 입장만 대변하도록 하고서 독재정치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벙어리 아닌 벙어리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참 잘하면서 정말로 꼭 해야할 말, 꼭 필요한 말은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과 꼭 해야 할 말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고, 특히 다른 사람을 ‘흉보는 말’이나 ‘비판하는 말’ 하기를 참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하면서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말과 하라고 하신 말을 구별하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내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이 옳은 말인지, 정당하고 덕을 세우는 말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자존심을 짓밟는 언행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에는 덕을 세우는 말, 칭찬하는 말, 유익하고 은혜를 주는 말,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이 훨씬 더 많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시인과 같은 기도를 날마다 드려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더러워진 우리 옛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세상적인 말이나 악한 말을 버리고, 진리를 전하는 말, 의로운 말, 덕을 세우는 말, 평강과 축복을 비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남을 험담하는 말이 머리에 떠오르면 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법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시인과 같은 기도를 드립시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아름답고 복스러운 말을 많이 하도록 우리의 입술에 ‘에바다’의 축복을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마음을 넓고 깊게 해주는 말 - “미안해”
겸손한 인격의 탑을 쌓는 말 - “고마워”
사람을 사람답게 자리 잡아 주는 말 - “잘했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말 - “내가 잘못했어”
모든 걸 덮어 하나 되게 하는 말 -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로운 말 - “친구야”
봄비처럼 사람을 쑥쑥 키워지는 말 - “네 생각은 어때?”
날마다 새롭고 감미로운 말 - “사랑해”
몇 가지만 같이 해 보겠습니다.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 잘했어, 내가 잘못했어.”
여러분, 우리의 입술에 에바다의 축복이 열려 이런 말들을 많이 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 주님께서 에바다-열려라 외치신 것은 굳게 닫혀진 마음을 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듣지 못하는 귀, 말할 수 없는 입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마음이 닫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귀머거리가 되어 듣지 못하고 벙어리가 말하지 못하는 것도 비극이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비극은 마음을 닫고서 산다는 것입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해도 자기를 흉보는 줄로 알고 마음을 닫아버린 채 살아갔던 것이 주님 앞에 이끌려온 이 사람의 삶이었습니다.
사람이 마음의 문을 닫고 살면 그것보다 불행한 것이 없습니다. 이웃끼리 교류가 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닫고 살면 하나님과도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굳게 닫아놓고 ‘자기만의 성’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도우려고도 하지 않고 누구가의 도움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간섭하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 간섭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여러분!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의 문이 닫혀버리면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음을 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서로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에바다의 축복을 받아서, 서로를 자신의 사랑의 품에 품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해 봅니다.
같은 집에 사는 가족들이 서로 마음을 닫고서 남남처럼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오면 서로가 마음을 활짝 열고 사랑하고 교제하면서 가족 이상으로 마음이 통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행복한 신앙공동체가 됩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서 와도 또 오고 싶은 교회, 헤어지면 언제 만날까 기대가 되는 성도들, 주일이 되어 교회에 가려고 하면 마음이 설레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마음을 열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면 세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① 신앙생활하는 것이 너무너무 재미있습니다. 여러분, 기왕에 신앙생활하려면 재미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은혜는 받는 줄 아십니까? 신앙생활을 기쁘고 감사함으로 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세상 죄를 다 뒤집어 쓴 것처럼 오만상을 다 하고 예배드리면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은혜가 임하겠습니까? 서로 마음을 열어 기쁘게 신앙생활하시고, 은혜풍성한 생애가 되시기 바랍니다.
② 성도들이 서로 마음을 열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면 전도가 자연스럽게 됩니다.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해도 기를 쓰고 교회에 나옵니다. 교회에 가면 재미있고, 교회에 가면 사랑이 넘치는데 왜 안 오겠습니까? 교인들 간에 사랑이 식어지고 티격태격하고 분쟁이 있으면 전도의 문이 막혀버리고 맙니다. 어떤 교회가 부흥하고 전도가 잘되는지 아십니까? 사랑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아무리 말로 ‘교회 나와라. 예수 믿어라.’ 그래도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티격태격 하면 교회에 나오려고 하던 사람들도 ‘니네들이나 잘해라’ 그러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넘치면, 교인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저 교회에 가면 뭐가 저렇게 재미있을까?’ 궁금해서라도 교회에 나옵니다.
③ 성도들 서로가 마음을 열고 사랑하면 기도가 잘 되고, 기도에 응답이 있습니다. 서로가 마음의 문을 닫고 사랑을 하지 못하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부부싸움 하고 난 후라든지, 이웃과 어떤 일로 싸우고 나서 기도하려고 하면 기도가 잘 됩디까? 절대로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에 응답도 없습니다. 기도를 잘 하려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도 잘 할 수 있고, 기도에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이 어눌한 벙어리는 고쳐주신 것도 궁극적으로는 마음을 열어 이제부터 이웃과 형제와 더불어 새로운 인생, 즐겁고 재미있는 인생을 살라고 ‘에바다-열려라’ 그렇게 외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후로 우리의 앞길에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는 에바다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서 하는 일마다 잘 되고, 기도한 것마다 응답되고, 신앙생활하는 것에 기쁨에 있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과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입이 열리면 복음을 증거하며 덕을 세우는 말로 형제와 이웃을 위로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열리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슴 깊숙이에서 체험하는 재미있고 신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교우님들에게 에바다의 축복이 열려서 그렇게 행복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바다(열려라)
갬태복 목사
요한계시록 3:8에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가장 모범된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시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문이 닫혀있는 것과 열려져 있는 것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뜻합니다.
인체에 피를 공급하는 혈관의 한 부분이 막히게 되면 심장의 박동이 멎어지면서 생명작용이 정지됩니다. 혈관이 막히고 피의 공급이 막히게 되는 것같은 절박한 상황이 영혼의 세계에도 나타납니다.
범죄한 인간의 불행중 하나는 닫혀진 세계, 곧 밀폐된 공간에서 외부와의 교통이 끊어진채 답답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교통이 차단된 인간의 실상을 매우 심각하게 보셨습니다.
여기 「에바다」라는 말은 「열리라」라는 뜻의 아람 방언입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향하여 「에바다」하고 소리를 치실 때 그는 곧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며 듣기도하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사나이는 예수님 앞에서 닫힌 인생을 종결하고 전혀 새로운 세계인 열린 시대의 환희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닫혀진 세상을 열기 위하여 열면 닫을 자가 없는 주권자의 열쇠를 가지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계3:7).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세상은 닫혀진 세상입니다.
그것은 캄캄한 밤이고, 춥고 음산한 겨울이며 또한 그것은 복음의 빛을 받지 못한 율법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어두움과 사망의 그늘 아래서 생명의 통로가 차단된 인간들 속으로 예수님은 「에바다」의 비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1:5에 보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하고 물어오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귀먹고 어눌한 자가 되어 「에바다」의 신비를 맛볼수 있기를 바랍니다.
Ⅰ. 닫힌자의 불행
여기 "귀먹고 어눌한 자"는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자로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외모를 보아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목구비(耳目口鼻)가 갖추어져 있는데도 안으로 그 기능을 상실한 자인 것입니다.
이사야 6:7에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과 교통이 두절된 상태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그 영혼이 생명의 호흡을 하게 됩니다. 당초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코에 생기를 불어 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창2:7).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사람에게 에덴의 낙원에서 하나님 얼굴을 대하며 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는 에덴에서 추방되게 하였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그 길을 막아 버렸습니다(창3:24).
이것은 또한 창조 당시 인간에게 주신 특권인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는 불행을 가져오게 한 것으로 그 결과 느낌도 깨달음도 없는 영적 불감증 상태로 전락케 하였습니다.
로마서 1:21-23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사람과의 단절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절되면 사람과의 관계도 막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정상적인 교통을 가짐으로써 신령한 지혜를 공급받고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올바르게 사리분별을 하게 됩니다(시19:7-9).
그렇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식의 길이 막혀져 버리면 욕심이라는 밀폐된 공간속에서 격리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28-32에 보면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형제이면서 형이 동생을 죽이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가 인간세계에서는 상호반목과 테러와 전쟁으로까지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3. 자연과의 단절입니다.
인간도 자연만물도 모두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피조물입니다.
또한 그것들은 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선한 뜻에 기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시19: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찬사를 하였습니다(창1:31).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아 모든 피조물들을 질서있게 잘 다스리며 평화와 공존을 가지도록 분부하셨습니다(창1:28). 그러나 인간의 범죄는 자연과의 불화를 일으키고 이땅에 약육강식과 천재지변같은 대결과 재난을 가져 왔습니다.
급기야 피조물들이 인간의 욕심과 강포에서 해방되고자 창조주 하나님께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로마서 8:23에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벗어나고자 다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한다고 하였습니다.
Ⅱ. 열게 하시는 자 예수님
예수님은 닫힌 것을 열어 놓으시는 분입니다.
에베소서 2:14-16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또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중에도 갈릴리 호수가에서 예수님에게 안수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 중에 귀먹고 말을 못하는 장애자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게 하신 이적을 베풀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열리게 하시는 「에바다」의 사역은 오늘도 교회가 전개하는 복음운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1. 귀를 열게 하십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눈으로 보고 자기 나름대로 사물을 관찰하면서도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될 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접할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말하는 입놀림을 보면서도 막상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못하면 올바른 지식을 취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사람은 귀먹고 어눌한 자였습니다.
듣는 귀가 막혔으니 말하는 입도 열릴 수 없습니다.
신령한 귀가 닫힌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된 귀를 가지고 자연이 내뱉는 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19:2-4에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적 귀를 막고 있어서 옆에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반응이 없습니다.
귀를 가리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설교할 때 거기 있는 무리들이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달려 들었습니다(행7:57).
사도 바울은 말세의 현상을 설명하면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리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하였습니다(딤후4:3-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하였습니다(계2:7).
2. 입을 열게 하십니다.
본문 35절에 보면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열리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혀가 맺혀서 말을 못하던 벙어리가 입이 열리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영적인 벙어리가 되어 의사 표시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입으로 시인하며 고백하여야 됩니다.
로마서 10:9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하곤합니다.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가복음 9:24에 보면 간질병 걸린 아이의 아버지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같은 우리들의 입을 열어 주시고 그 이름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10:20에 보면 열두제자를 전도자로 파송하시면서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고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입을 열어 주시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며 어디서나 예수의 이름을 증거할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20에 보면 유대교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온갖 압력을 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지 못하도록 협박하였으나 그들은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노라"고 하였습니다.
3. 눈을 열어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행하시는 복음 사역의 특징을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9:39).
예수님께서 보게 하시는 눈은 신령한 눈입니다.
마태복음 5:8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눈이 열리지 못한 사람은 발람 선지처럼 죽음의 장소를 분별 못하고 빨리 가려고 재촉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눈이 열린 사람은 발람의 당나귀처럼 죽음의 현장을 피해가려고 애를 씁니다(민22:24-31).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신령한 눈을 열고 계시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였습니다(마11:25).
사도 바울도 에베소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엡1:17-19).
(4)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사도행전 16:14에 보면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
닫혀진 마음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열리게 되면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아멘」하고 수긍하며 이를 수용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20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6:13에는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빌2:5).
예수 그리스도처럼 마음을 열고 넓은 세계를 포용하여야 됩니다.
우주적인 하나님의 광활하심을 수용할수 있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부과하신 복음의 세계성에 도전하여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네 장막터를 넓히며 처소의 경계를 끝도 없이 펼치라고 하신(사54:2)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마음이 열려 있어야 됩니다.
Ⅲ. 열린자의 복
욥기 22:21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닫힌 곳이 열려서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하게 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에바다」를 명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귀가 열리고 입과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도 하늘 문을 열어서 신령한 복을 주십니다.
1, 계시의 은혜를 받습니다.
계시록 4:1에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열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가 의도하시는 신비로운 세계를 보여 주시고 체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폭도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도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며 환희에 찬 모습으로 감격해 하였습니다(행7:56).
2. 물질의 축복이 있습니다.
말라기 3:10에는 "너희가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였습니다.
만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실 때에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부어 주십니다.
양이나 질에 있어서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같이"되게 하시는 것입니다(창22:17).
다만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분량이 거기 미치지 못하거나 또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의 용량이 제한되어 있을 때 문제가 됩니다.
3 더 큰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50-51에 보면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께 나와서 신앙고백을 하는 나다나엘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하시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은 무능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무한 광대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체험하게 하는 신비의 산물입니다.
몇 년전 호주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시드니 근처 바닷가의 도시를 보니 대부분의 집들은 바다에 인접해 있고 집집마다 요트를 매어놓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집에서 바다 쪽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요트를 끌고 나가기만 하면 끝없이 펼쳐지는 남태평양의 넓은 바다를 마음껏 달리며 즐긴다는 것입니다.
사실 범죄한 인류가 앞뒤로 꽉꽉 막힌 답답한 세상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과 연결되는 길이 열려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인 무한대의 신비를 즐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바다」를 외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사고를 가지고 열린 세계를 향해서 도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무한대에 이르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